남한산성

 




[image]
'''남한산성'''
南漢山城
Namhansanseong

}}}

'''위치'''
[image] '''경기도 광주시, 성남시, 하남시 '''
'''높이'''
'''497m (청량산)'''
'''좌표'''
'''북위 37° 28′ 36″'''
'''동경 127° 11′ 0″ ″'''
'''면적'''
'''35.166km²'''
'''위성사진'''
[image]
'''남한산성 도립공원'''
'''지정일'''
'''1971년 3월 17일 '''
'''관리주체'''

'''홈페이지'''

[image] '''대한민국의 사적''' '''제57호'''
'''남한산성'''
南漢山城
Namhansanseong Fortress
[ 펼치기 · 접기 ]
'''소재지'''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
'''분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성 / 성곽
'''면적'''
608\,705㎡
'''지정연도'''
1963년 1월 21일
'''제작시기'''
조선
'''위치'''


'''유네스코''' '''세계유산'''
[image]
이름
한국어
남한산성
영어
Namhansanseong
프랑스어
Namhansanseong
국가·위치
대한민국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등재유형
문화유산
등재연도
2014년
등재기준
(ii)[1], (iv)[2]
지정번호
1439
1. 개요
2. 역사
3. 주요 문화 유적
3.1. 남한산성의 4성문
3.2. 남한산성 행궁
3.3. 수어장대
3.4. 숭렬전
3.5. 청량당
3.6. 현절사
3.7. 침괘정
3.8. 연무관
3.9. 봉암성 & 한봉성
4. 가는 길
4.1. 대중교통
5. 기타

[clearfix]

1. 개요


[image]

공식 홈페이지
남한산성 세계유산센터 - 성곽 및 시설물 소개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옛 중부면) 산성리에 위치한 남한산의 산성이다. 광주시에 거의 전부가 속하지만 성남시, 하남시에도 영역을 뻗으므로 3개 지자체에 걸친 성곽이다. 성남 쪽에서 들어가는 게 접근성이 좋기 때문에 남한산성의 극히 일부만 걸친 성남시에서도 남한산성을 많이 홍보하곤 한다. 사적 제57호로 지정되어 경기도에서 도립공원으로 관리한다.
삼국시대부터 있었지만 조선 인조 때에도 손을 보았는데, 해발 497 m인 청량산(淸凉山)[3]을 서쪽 끝으로, 해발 514 m 벌봉을 동쪽 끝으로 하여 긴 장방형 돌로 쌓았다. 서쪽은 경사가 가파르고 높아서 험난하며, 다른 쪽은 능선이 긴 반면, 성 안은 낮고 평평한 분지 형상이다. 북한산성과 함께 한양을 지키는 2대 산성이었다.
남한산성 행궁 바로 옆에 독립운동가 만해 한용운 기념관이 있으니, 남한산성에 방문할 사람은 같이 가보면 좋을 것이다. 만해기념관 공식 홈페이지

2. 역사


남한산성이 세워진 시기와 주체에 대해선 2가지 주장이 엇갈린다. 하나는 백제한성수도로 삼던 때 세운 성이란 것, 다른 하나는 신라가 쌓았다고 하는 주장성(晝長城)이라는 의견이다. 남한산성이 백제 때 쌓은 성이란 주장은 이미 조선 초기부터 꾸준히 나왔다. 한강 유역에 도읍을 정한 백제는 내·외적인 여건 때문에 하북위례성-하남위례성-한산-한성 등 여러번의 천도를 단행하였다. 남한산성이 전략상 요충지이기 때문에, 조선시대 사람들은 남한산성이 백제의 왕도 중 하나이리라 생각한 것이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餘地勝覽)』·『대동야승(大東野乘)』·『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여지도서(輿地圖書)』·『대동지지(大東地志)』등 대부분 조선시대 고서들은 남한산성이 백제의 고성이라고 적었다.[4]
주장성이란 주장은 《삼국사기》의 기록에 근거한 것이다. 신라고구려백제가 멸망한 직후 한창 나당전쟁이 벌어지던 문무왕 12년(672), 만에 하나 당나라 군대를 임진강선에서 막지 못할 경우 그 다음 방어선으로 활용하고자 지금의 남한산 주위에 둘레 4360보 규모로 성을 구축했는데, 그 성의 이름이 주장성(晝長城)이었다는 것. 그 후 임진왜란 중인 선조 28년(1595) 남한산성 자리에 다시 성을 축조했고, 광해군 13(1621)에 다시 증축했다. 인조 2년(1624)에는 인조가 총융사 이서에게 명하여 남한산성을 다시 개축했다.
정묘호란 이후 후금과 강화를 맺은 이후 재침에 대비하여 수축되었다. 수축 완료 후 광주목의 읍치(邑治)가 성내로 이전되었으며[5] 다시 광주부로 승격되었다. 이는 남한산성이 기본적인 수도 방어 목적 외에도 행정 중심지이자 유사시 임시수도로서 기능했다는 것을 시사한다. 조선시대 당대에는 광주성이라고도 불리었다.

주요한 전투로는 병자호란에서 인조숭덕제군대를 상대로 벌인 농성전이었다. 병자호란 때 결국 함락되었다는 점 때문에(+북한산성의 임팩트 때문에) 남한산성의 입지가 요새로서 탈락이고 심지어 평지성과 별 다를 바 없다는 선입견이 대중적으로 많이 퍼졌다. 하지만 막상 가보면 산세는 지금 봐도 험준하고,[6] 급히 도망쳐 들어간 데다가 방산비리(?)까지 겹쳐 물자도, 병력도 부족한 상황에서 막강한 청군의 서양식 화포에 얻어맞으면서도 한 달 이상을 버텨내었음 자체가 남한산성의 방어능력을 입증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공방전 40여 일 동안 청군은 수차례 대규모 공격에도 불구하고 성을 돌파하는데는 실패했지만, 농성 중인 성 내부의 물자가 고갈될 때까지 포위를 풀지 않으면서 서서히 조선군을 조였다. 결국 조선군은 남한산성이 뚫려서가 아니라 '''식량이 다 떨어진 탓에'''+'''강화도가 함락된 탓에''' 청군에 항복하고 말았다. 자세한 것은 병자호란 항목으로.
병자호란 이후 남한산성은 피비린내 나는 처형터가 되어버렸다. 특히 천주교인들이 순교한 장소[7]인데(1791년), 신해박해 때부터 천주교인들이 갇히기 시작했고(1801년) 신유박해 때 한덕운 토마스(1801년: 참수)를 시작으로 1839년 기해박해 김덕심 아우구스티노(1841년: 옥사), 김성우 안토니오(1841년: 참수)형제 등이 순교했다. 남한산성에서 제일 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건 1866년 병인박해 때이다. 정은 바오로(1866년: 백지사형[8]), 그의 종손 정양묵 베드로(1866년: 백지사형), 그리고 기해박해 때 순교한 김성우 성인의 모든 가족이 체포당해 순교했다. 현재 알 수 있는 마지막 남한산성 순교자는(1871년) 이치재(1871?)다.
이후에도 군사상 요충지로 광주군청이 산성 안에 있었으나, 항일의병으로 산성과 행궁 내의 군기고와 수호사찰을 불태우고 방화하여 대부분의 건축물이 사라졌다.
1917년에 군청이 경안(현 광주시내)으로 이전한 뒤로는 서서히 쇠락했고, 방화로 터만 남아있던 남한산성 행궁도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산성의 일부와 행궁이 완전히 매몰됨에 따라 완전히 소실되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산사태 당시 행궁이 정말 완벽하게 매몰되어 주추 등 유구의 보존상태가 굉장히 훌륭하다는 것. 이를 토대로 1975년부터 성벽을 복원하기 시작했고, 행궁 복원은 2002년부터 시작되어 2014년 마무리되었다.

3. 주요 문화 유적




3.1. 남한산성의 4성문


  • 동문(좌익문)
[image]
산성의 남동쪽에 있는 문이다. 좌익문이라고도 부르는 이유는 왕이 행궁터를 중심으로 남쪽을 보고 나라를 다스리기 때문에 동쪽이 왼쪽이 되어 그렇다고 한다. 남문과 함께 사용빈도가 가장 높은 문이다. 동문은 일반 성돌에 비해 덜 가공된 약 2배 정도 크기의 성돌을 사용하여 쌓았다. 다른 문에 비해 낮은 지대에 축조했기 때문에 성문을 지나는 길에 계단을 만들었으며, 우마차의 통행이 불가능 했다. 따라서 물자의 수송은 수구문 남쪽에 있는 11암문이 이용되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현재 이 문은 보수공사로 인해 헐려있다. 남한산성 4대문중 유일하게 도로때문에 한쪽 성벽이 끊겨져 있다.
  • 서문(우익문)
[image]
산성 동쪽 모서리 부분의 450m 지점에 있다. 동문이 좌익문이므로 서문은 우익문이라고 부른다. 경사가 급하여 물자를 이송하기는 어려웠지만 광나루나 송파나루 방면에서 산성으로 진입하는 가장 빠른 길이었다. 병자호란 때 성문을 넘으려는 청군과 전투가 있었던 곳이다. 그리고 인조소현세자와 함께 서문을 통해 청나라 진영으로 가서 화의를 맺고 항복을 하기도 했다.
서문 인근에 전망대가 있는데, 위례신도시롯데월드타워, 한강, 그리고 남산서울타워를 모두 조망할 수 있다. 특히 롯데월드타워와 한강, N서울타워와 남한산성 서문이 일렬로 정렬되어 있어 옥수동 달맞이공원, 응봉산 팔각정과 함께 서울의 야경 포인트로 유명하다.
  • 남문(지화문)
[image]
성의 서남쪽 곡저부의 해발 370m 지점에 있다. 왕이 다니는 문 답게 4대문 중에서 가장 크고 웅장하다. 인조병자호란으로 남한산성으로 들어올 때 이 문을 통해서 들어왔다. 지금의 문루는 1976년 화강석 장주초석 일부만 남아 있던 것을 주초석 대부분을 새로 보충하여 복원하고 현판을 단 것이다.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동문에 비해 비교적 그 규모가 크다. 장초석을 사용하여 기둥높이는 낮지만 건물의 전체 높이는 약간 더 높다.
조선시대인 1700년대에는 더욱 웅장한 2층 누각으로 중수되었다가 이후 시간이 지나며 퇴락함에 따라 훼철후 1층 누각으로 개건하였다.
  • 북문(전승문)
[image]
성곽 북쪽의 해발 365m 지점에 있으며, 북문을 나서면 계곡으로 난 길을 따라 상사창리로 이르게 되는데 조선시대에 수운으로 옮긴 세곡을 등짐으로 이 문을 통해 산성 안으로 운반했다. 전승문이라는 명칭은 1779년(정조 3)에 성곽을 개보수할 때 개축하고 지어진 이름이다. 싸움에 패하지 않고, 모두 승리한다는 뜻인데 현재 편액은 걸려있지 않다. 무지개 모양의 홍예식 문이며, 홍예기석 위에 홍예돌 10개를 쌓아 구축하였다.
  • 여담으로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항전할때 인조김자점의 독촉으로 이시백이 조선군 300을 이끌고 남한산성 북문으로 나와 싸울려고 대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청나라군의 기습공격을 받아 군사 300이 모두 전멸한 일을 기려 패하지 말고 모두 이기자 해서 북문의 이름이 전승문이 되었다는 얘기도 있다.

3.2. 남한산성 행궁



[image]


3.3. 수어장대


[image]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호이다. 남한산성에 구축된 5장대 중 하나이다. 5장대 중 동장대를 제외한 4장대는 17세기 말엽까지는 단층 누각 건물의 형태로 남아있었지만, 18세기 중엽에는 5장대 모두 붕괴되어 터만 남아있었다. 그 후 18세기 중후반에는 서장대와 남장대를 2층 누각형태로 건립하여 19세기 후반까지 남아있었지만, 현재는 서장대인 수어장대만이 남아있다.
수어장대는 남한산성의 서쪽 주봉인 청량산 정상에 세워져 있으며 지휘 관측을 위한 군사적 목적에서 세워진 누각이다. 성내에 현존하는 건물 중 가장 화려하고 웅장하다. 왼쪽에는 청량당이 있으며, 뒤편에는 우물이 있어 장대에서 근무하는 장졸에게 물을 공급했다고 한다.
맑은 날에 수어장대 꼭대기에서 경치를 쳐다보면 서울 시내가 다 보인다. 물론 강서&강동&강남 일대 한정이고, 강북 일대는 남산으로 가로막혀있어 북한산을 제외하면 보기 힘들다.

3.4. 숭렬전


백제의 시조 온조왕의 사당으로, 팔전 중의 하나이다.
1636년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남한산성에 피난 갔을 때, 꿈에 웬 사람이 나타나 "적이 높은 사다리를 타고 성 북쪽의 봉암(蜂巖)을 오르는데 어째서 막지 않는가?"라고 호통을 치는 것이었다. 놀란 인조가 누구냐고 물었더니, 그는 "나는 성주 온조대왕이다."라고 하였다. 곧 잠에서 깬 인조는 온조왕에게 들은 대로 즉시 성의 북쪽을 살펴보게 했다. 그랬더니 과연 청군이 봉암을 오르고 있어 그들을 물리쳤다. 이렇게 온조왕의 은혜를 입은 인조는 병자호란이 끝나 한성으로 돌아간 후 남한산성에 온조왕의 사당을 짓고 봄, 가을로 정성껏 제사를 올렸다. 이는 온조왕사(溫祚王祠)라 불렸다. 온조왕사는 온조왕묘, 백제시조묘 등으로 불리기도 했던 모양이다. 참고로 인조는 이괄의 난공산성으로 피난간 적도 있는데 공산성은 백제의 2번째 수도인 웅진성이었던 곳으로 이래저래 인조는 백제와 인연이 좀 있었던 모양이다.
1779년 8월, 정조는 남한산성에 방문한다. 정조는 봉암에 올랐다가 당시 수어사였던 서명응에게 병자호란 당시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서명응의 동생 서명선이 인조의 꿈에 온조왕이 나타났던 이야기를 하였다. 정조가 남한산성에 온조왕의 흔적이 남아있냐고 묻자 서명응은 남한산성 행궁 뒤에 위치한 청량산에 그 흔적이 남아있다고 하였다. 청량산은 온조왕이 첫 수도 하남위례성을 만든 뒤 방어를 위하여 성을 쌓았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그때부터 정조는 온조왕에 대해 더욱 관심을 갖게 되었고 온조왕사에 대해서도 더욱 격식을 갖추어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이후 1795년 9월, 광주판관 이시원이 고구려의 사당인 숭령전이나 고려의 사당인 숭의전도 모두 이름이 있는데 유독 백제의 사당만 이름이 없으니 편액을 하사해달라고 요청하였다. 이에 정조는 숭렬전(崇烈殿)이란 편액을 하사하면서 온조왕에 대한 제문을 본인이 직접 작성하여 내려 보냈다. 그리고 매년 음력 9월 5일에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이렇게 온조왕사는 정식으로 국가가 제사를 받드는 사당인 숭렬전이 되었다.
그리고 여기에도 설화가 있다. 제문의 준비 중에 있던 정조의 꿈에도 온조왕이 나타난 것이다. 꿈에 나타난 온조왕은 정조의 인품과 그의 업적들을 칭찬하면서 혼자서는 쓸쓸하니 다른 국왕들의 사당처럼 명망 있는 신하를 같이 있게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잠에서 깬 정조는 온조왕의 청을 받아들여 남한산성 축성에 공로가 컸던 총융사 이서를 숭렬전에 같이 모시게 하였다. 온조왕과 이서는 무려 1,600여 년의 시간차를 가진 인물들로 이렇게 숭렬전은 이 두 사람이 함께 모셔진 독특한 사당이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남한산성이 온조왕의 도읍지로 알려져 있었는데 실제 하남위례성의 유적으로 유력한 풍납토성/몽촌토성과 남한산성 간 거리가 멀지 않기 때문에 백제 초기 수도에 대한 대략적인 위치 개념은 조선시대에도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현대에는 과연 진짜인지는 모르겠지만(...) 박원순 서울특별시장이 꿈에서 어떤 백제 왕을 만난 것 때문에 풍납토성의 복원을 결심했다고 한 바가 있다.

3.5. 청량당


[image]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호이다. '맑고 시원하다'라는 뜻을 가진 청량이라는 산봉우리에 세워진 건물이다. 산성을 쌓을 당시 동남쪽 책임을 맡았던 이회(李晦)가 모함에 의해 억울하게 수어장대에서 참수형을 당한 후, 그의 억울함이 밝혀지자 그 혼백을 위로하기 위해 세운 건물이다.
이회 장군의 영정 뿐만 아니라 서북쪽 책임자인 벽암(碧岩) 각성대사[9]와 이회장군 부인 송씨(宋氏)[10]의 영정도 함께 모셔져 있다. 이회 장군, 벽암대사, 이회장군 부인의 초상화는 한국전쟁 때 없어진 것을 다시 봉안한 것이다.

3.6. 현절사


[image]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호이다. 병자호란심양에 끌려가 충절을 지키다가 그곳에서 비운을 맞은 삼학사(三學士)[11]인 오달제, 윤집, 홍익한의 영혼을 모신 사당이다. 이들은 소현세자, 봉림대군과 함께 청에 인질로 끌려가 충정을 지키다가 결국 1638년(인조 15)에 심양의 서문에서 처형되었다. 후에 좌의정 김상헌, 이조참판 정온의 위패도 함께 배향되었다.
1688년(숙종 14)에 광주유수 이세백의 주도로 세워졌으며, 1693년 봄에 현절사라 사액하였다. 사당은 본당과 좌우에 있는 부속 건물을 합하여 3동으로 구성되었는데, 산등성이에 축조되었기 때문에 본당과 부속건물이 단을 이루고 있고, 단 위에는 담을 둘러 그 중앙에 솟을대문을 내었다. 지붕양식은 홑처마를 두른 맞배지붕이며 이출목이익공의 주심포 형식이다. 본당 좌우의 방풍막은 아래를 직선으로 자르고 있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크기이며 정면 각 칸에는 4쪽의 여닫이 격자문을 달았다. 솟을대문이 2개 있는데 밖의 것은 사당을 출입할 때, 또 하나는 본당과 부속 건물을 구분하는 담의 중앙에 위치하여 본당을 출입할 때 사용했다. 대문은 여닫이 2쪽문으로 2개의 대문 모두 태극무늬가 그려져 있다.
부속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규모인데 본당과 같이 맞배지붕과 홑처마 양식의 건물이다. 2동의 건물이 모두 중앙의 1칸에는 우물마루가 배치되고 좌우에는 2쪽 여닫이 격자문을 한 방이있고, 자연석을 주춧돌로 한 단아하고 소박한 인상을 주는 건물이다.

3.7. 침괘정


[image]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호이다. 건립시기는 알 수 없지만 무기 제작을 관장했던 사무소로 추정된다. 정확한 명칭은 "창을 베개 삼는다"는 뜻인 침과정이지만, 현재는 침괘정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3.8. 연무관


[image]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6호이다. 연무란 무예를 펼쳐 보인다라는 뜻으로 군사들의 무술을 연마하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이곳에서 군사훈련과 무술 시합을 열어 뛰어난 인재를 뽑아 중앙으로 보냈으며, 맞은 편에 과녁이 있어 활쏘기 연습도 이루어졌다. 정조 재위 3년인 1779년 8월에 문무과 과거시험을 이곳에서 거행하고 장사들에게 술과 음식을 베풀었다고 한다. 인근의 활터가 조선 후기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한 곳이다. 남한산성 순교성지도 있으며, 천주교 수원교구에서 관리하고 있다.

3.9. 봉암성 & 한봉성


[image]
외성 역할을 한다. 정비가 거의 안되어 있어 옛 성벽의 정취를 느끼러 오는 사람들이 찾는다. 군데군데 여장이 그대로 남아 있는 부분이 인상적이다.

4. 가는 길


남한산성 오시는길(공식)

4.1. 대중교통


지하철로 가기에는 성남시 소재의 역인 8호선 남한산성입구역보다는 산성역이 가깝다.[12] 여기서 9번, 9-1번(주말), 52번을 타고 올라가면 된다. 남한산성입구역에 하차할 경우 연계버스로 462, 4419(서울), 30, 30-1(하남), 51, 55, 70(성남)등의 시내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두 역 모두 2번출구로 나온 뒤에 버스로 환승한다. 단 순수하게 전철역에서 내려서 걷는다고 가정하면 산성역을 추천한다. 남한산성입구역이라고 해도 진짜 남한산성 입구까지 도달하기까지 버스로 너다섯 정거장 거리다.
기타 등산로로는 서울특별시 송파구 마천동[13], 경기도 하남시 춘궁동에서 올라가는 등산로가 있다. 광주시(경기광주역)에서 이동할 경우 15-1번을 이용하면 된다.

5. 기타


육군학생군사학교괴산군으로 이전하기 전 성남시에 위치해 있을 때는 지리적인 가까움으로 입단전 기초군사훈련 때에는 수어장대 앞에서 조국수호 결의대회를 했고, 4학년 후보생들은 40km 산악행군을 이 남한산성에서 했다.[14] 매년 미묘하게 코스가 바뀌긴 하지만 거의 이 산성 성곽을 안이나 밖을 따라 돌았으며, 중간중간 7사단 GOP를 연상케하는 미친 경사가 있어서 장교 후보생들뿐만 아니라 훈육장교들도 매우 싫어했다. 또한 중간에 수어장대에서 교육대별 단체사진을 찍는 이벤트도 있었다. 학군교가 괴산군으로 통합 이전된 지금은 옛날 이야기. 이외에 육군종합행정학교도 이 근방에 있어서 '남성대'라는 별칭으로 불렀으나, 이 역시 지금은 영동군으로 이전하였다. 현재는 이 일대가 전부 위례신도시로 개발 중이다.
육군교도소가 옛날엔 남한산성 근방(단대오거리역 인근)에 있었기 때문에, 군 내부에서 육군교도소를 은어로 '남한산성'이라고 돌려 말하곤 했다. 경기도 이천시 쪽으로 육군교도소를 옮긴 후에는 없어진 말이지만, 나이드신 분들은 남한산성이라고 하면 군 내부의 법적 처벌을 상기하기 때문에 매우 싫어한다. 오인용연예인 지옥을 보면 사람 하나 때려 잡으려고 하면 남한산성가고 싶냐며 말리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전근대에 지어진 요새들이 대부분 그렇 듯 현대에 와서는 군사적 요충지로서의 기능은 많이 퇴색되었다.[15][16] 대신 현재는 각종 먹거리, 볼거리들이 밀집된 관광지와 등산로로서 애용되고 있다. 서울 거주자로 어딘가로 가고 싶은데 멀리 갈 여유는 없고 하면 남한산성도 고려해볼만 하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지하철역에서 버스만 타고 가면 둘러볼 수 있다. 특히 산성의 중앙에 해당되는 곳에 유료주차장이 있어 주차 후 어떤 방향으로 올라가도 산성을 둘러볼 수 있다. 힘들면 물론 다시 성벽에서 중앙방향으로 가면 주차장이 있다보니 소위 하이힐신고도 둘러보는 코스가 된다. 등산뿐 아니라 로드자전거 업힐 [17] 코스로도 유명하여 주말이되면 수많은 인파와 자전거로 마찰이 일어나기 일쑤.
가서 둘러보다 보면 볼거리나 먹거리가 생각 외로 많다. 조선시대 때는 해장국으로도 유명한 곳이었고, 9번 버스를 타고 간다면 남한산성 남쪽 민속마을에 닭죽촌도 있다.
2014년 6월 22일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제38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세계유산 등재가 최종 결정되었다. 7세기 신라시대 유적부터 17~19세기 조선시대의 축성기술이 모두 보이며, 비상시 산성도시라는 독특한 점이 큰 점수를 얻었다고 한다. 자연스러운 산세와 지형지물을 그대로 살린 한국 특유의 건축양식 그리고 서양식 무기에 대항하기 위한 다양한 군사기술이 접해지고, 당시 중국일본의 축성양식도 들여와 더해진 것이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었다.
이로써 2014년 현재 대한민국은 11개의 유네스코 세계유산을 가지게 되었다. 남한산성의 안전등급이 D E급으로 안전대책이 부실하다는 지적이 나왔다. 해당 기사
남한산성 도립공원 내에도 대인지뢰 매설지역이 있다. 2001년부터 3회에 걸쳐 지뢰 제거 작전이 실시되었다고는 하나 지금도 미확인 또는 유실지뢰가 존재할 가능성이 있으며, 이에 '''과거 지뢰지대''' 등 표시판이 곳곳에 있다. 지뢰 표시판이 있는 곳에는 들어가지 말자.
2007년 1월 1일부로 남한산성 입장요금이 폐지되었다. 행궁은 어른 2천 원(경기도민은 무료), 주차요금은 승용차 기준 평일 3천 원, 주말 5천 원이다. 운영시간은 17시 30분까지이니 아침 일찍 가도록 하자. 점심 때 가면 되지 않느냐고 반문하는 위키러들이 있는데, 오전 시간만 넘어가도 자동차가 무지 막지하게 막혀서 짜증이 솟구친다. 남한산성 가는 길이 '''왕복 2차로밖에 안 되어 자동차가 남한산성 입구에서부터 계속 밀린다. 남한산성 입구에서 남한산성까지 가는데만 무려 2시간이 넘게 걸린다!'''
남한산성 남문 밖의 경우 광주시 관할이 아닌 '''성남시''' 관할이라 치안 및 소방출동에 차이가 있을 수 있다. 남한산성 남문 밖을 제외한 동서북문 및 남문안은 광주시 관할이기 때문에 광주소방서 및 광주경찰서에서 소방 및 치안을 맡지만 남한산성 남문 밖은 '''성남시 관할'''이기 때문에 성남 중원경찰서에서 치안을 맡고 성남소방서가 소방을 맡는다. 다만 두 지역이 모두 '''경기도 관할'''이라 광역상으로는 경기 남부지방경찰과 경기소방이 두 지역을 모두 맡고있다.
2019년에 들어서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남한산성을 세계적 관광지로 만들겠단 의욕을 가지고 있으며, 이를 위해 주차료를 500% 인상하는 정책을 펼치고 있다.#

[1]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2]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3] 여기서 청량산은 인천시의 청량산, 경상북도청량산이 아니라, 경기도 하남시 학암동, 성남시 수정구 양지동, 서울시 송파구 마천동에 걸쳐 있는 산이다.[4] 그러나 『중정남한지(重訂南漢志)』의 저자 홍경모는 유형원의 『반계수록(磻溪隧錄)』의 내용을 인용하면서 '백제사는 기록이 소략하므로 문헌에 근거할 것이 없기 때문에 알 수 없다,'고 밝혔다. [5] 이전까지는 현 하남시 교산동 일대에 있었다.[6] 아닌 게 아니라 이 성 서남편이 바로 '''현대에도 툭하면 차 시동 꺼먹는''' 성남시 구시가지다. 기슭까지 도달하는 데만 해도 에너지를 무진장 잡아먹는 곳이 남한산성이다.[7] 수원교구 신자들은 남한산성 순교성지에 많이들 갔을 것이다. 순교자 헌양비도 있고 한옥 양식을 사용한 성당 건물이 예술이다.[8] 백지에 물을 덮어쓰면 물이 스며드는데 이 방법으로 사람들의 '''숨을 못쉬게 만드는데 코나 입으로 숨을 쉬면 백지가 달라붙어 숨을 못 쉬게 하여 조용히 죽이는 교수형과 같은 사형법이다.'''[9] 승려들을 동원해서 예정보다 빨리 완성하고 자금도 남겨 반납했다고 한다.[10] 지방을 다니며 부족한 건설자금을 모아 오다 삼전도 근처에서 처형소식을 듣고는, 모아온 쌀섬을 모두 버리고 본인도 투신하였다고 한다. 이곳을 쌀섬여울이라 하는데 부인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강변에 부군당(府君堂)을 지었다고 한다.[11] 남한산성이 숭덕제의 12만 대군에 완전 포위당한 상황에서도 최후의 1인까지 끝까지 싸울 것을 강력히 주장한 인물들[12] 지하철로 손쉽게 접속 가능한 이점 때문에 남한산성의 접근성은 (땅 대부분이 광주시 관할임에도) 성남시가 더 유리한 입장이다.[13] 5호선 마천역에서 하차하거나 3416, 3314, 3318, 3313, 3315(이상 서울), 5(성남)등의 시내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등산 좋아하면 마천역에서 내려서 그대로 산길을 따라 걸어 올라가도 되지만 상술된 서문 쪽으로 올라가는 코스라서 계단이 많고 제법 가파른 코스다.[14] 이는 각각 51기, 50기가 마지막이었다.[15] 그러나 남한산은 송파, 강동, 하남, 팔당, 광주, 성남 등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요충지 중에 요충지며, 그런 지리적 요건이 여전하기에 지금도 군 부대는 주둔하고 있다.[16] 한국전쟁 시기에 북한군 일부가 가산산성에 의지해서 전투를 치른 적이 있었으나 당연히 포격과 폭격을 듬뿍 맞고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으며 패퇴했다. *[17] 2018년 7월 1일부로 산악자전거, 산악오토바이, 전동킥보드 등 바퀴달린 모든 것이 출입금지되었다. 이에 대해서 자전거 동호인들은 매우 불만적인 의견을 내비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