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춘 사건
珲春事件
1. 개요
일본이 중국의 마적단을 매수하여 훈춘 지역에서 일본 영사관을 공격해 한인들을 공격할 명분을 만든 사건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학설이 워낙에 많고 주장이 다양해 어느 것이 진실인지는 알기 힘들다. 자세한 건 아래 문단 참조.
2. 기존의 학설
훈춘사건은 흔히 일본군이 마적을 조종해서 일본 영사관을 공격한 사건으로 알려져있다.
한국 1세대 역사학자 조동걸 선생은 이렇게 쓰고 있다.
또한 두산백과에서는 이렇게 적고 있다.『훈춘사건은 두 차례의 마적단 습격사건을 가리키는데 보통은 1920년 10월 2일 5백 명의 마적단이 훈춘을 습격하여 일본 영사관을 불태우고 일본인 시부야 일가족을 죽이고 또 중국인 상가까지 수십 채 불태우고 도망간 사건을 말한다. 이것을 일본군은 마적단과 한국독립군과 러시아 과격파(볼셰비키 혁명군)가 합작하여 저지른 사건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일본군이 계획한 조작이었다.
조작했다는 근거는 첫째, 당시에 조선총독부, 조선군 및 관동군 사령부, 시베리아 출동군 관계자가 사전에 모의를 계속하고 있었던 점, 둘째는 한국독립군이 중국 관군과 적대관계에 있는 마적단과 결탁한 행동은 전무후무했다는 점……』
조동걸, 1920년 간도참변의 실상, 역사비평 , 1998.11, 50쪽
그런데 정작 중국정부 문서와 독립운동가의 증언을 보면 실체가 전혀 다르다.『1920년 일본은 3 ·1운동을 계기로 활발해진 한만(韓滿) 국경 부근의 독립군을 토벌하려고 군대를 파견하였지만 시베리아의 출병과 봉오동전투에서 패배를 거듭하였다. 그러자 일본은 대대적인 한국 독립군 토벌 계획을 세웠고 이를 위해 창장하오[長江好]라는 중국 마적 두목과 내통, 훈춘의 일본영사관을 고의로 공격할 것을 사주하였다. 이에 따라 그해 10월 2일 400여 명의 마적단이 훈춘성을 공격하였다. 마적단은 약속대로 오전 9시부터 4시간 동안 살인과 약탈을 자행, 중국인 70여 명, 조선인 7명, 수명의 일본인을 살해하고 비어 있던 일본공사관을 불태웠다.
[네이버 지식백과] 훈춘사건 [琿春事件(혼춘사건)] (두산백과)』
학계에서도 기존 음모론만을 따르지는 않으며 훈춘사건을 독립운동가들이 저항을 위해 벌인 것이라는 '''논문이 존재한다'''. 자세한 건 아래 참고.
3. 새로운 학설
3.1. 중국 문서
그 중국군의 보고서란 바로 『중일문제의 진상』이란 문서다. 『중일문제의 진상』이란 문서가 나온 배경에는 일본의 만주침략이 있다.
일본제국과 군부는 당시 세계를 정복하겠다는 망상이 있었고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1931년 9월 18일 동북(만주)을 침략해서 점령했다. 중국은 이 문제를 국제연맹이사회에 제소했다. 그에 따라 이 문서를 제출했다.(중화민국국민정부외교부 편, 동북아역사 자료총서 17 『중일문제의 진상』, 박선영 옮김, 동북아역사재단, 2009, 6~7쪽)
동북아역사재단은 이 문서를 번역했고 2009년 11월에 무료로 공개했다. (https://www.nahf.or.kr/gnb03/snb02_01.do)
이 문서에 훈춘사건도 나오는데 이 내용이 한국 1세대 역사학자들 주장과 전혀 다르다. 그 내용은 이렇다.
그러니깐 "조선인은 각종 방법으로 독립운동을 조직"하였고 당시 간도지역과 그 부근에는 여러 차례 "사변"이 발생했는데 그런 과정에서 "제일 심한" "훈춘성 공략"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일본군이 마적을 위장하거나 마적을 시켜서 침공했다는 내용은 전혀 없다.『훈춘사건(1920)……
일본이 조선을 병탄한 후 조선인은 각종 방법으로 독립운동을 조직하여 본국이 일본의 관할에서 벗어나 독립을 쟁취하게 하려는 자가 많았다. 더욱이 세계대전의 결과 민족자결주의가 수백만 조선 애국청년의 가슴속에 깊이 뿌리내렸기 때문에 간도지역과 그 부근에는 여러 차례 시위운동이 일어나고 사변이 발생하였다. 그 중 제일 심한 것은 1920년 10월 12일 훈춘성 공략이다. 그 결과 일본 영사관을 불태워 인명피해가 심했다. 이러한 비참한 사건이 다시 발생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완강한 조선인의 활동을 금지하는 방법을 협의하였다.』
(중화민국국민정부외교부 편, 동북아역사 자료총서 17 『중일문제의 진상』, 박선영 옮김, 동북아역사재단, 2009, 146~147쪽)
그리고 여기에 교차검증되는 증언이 있다. 바로 이범석 장군의 증언이다.
3.2. 이범석 장군의 청산리전투 증언 당시 증언
이범석 장군은 청산리 전투의 증언을 담아 책을 낸 적이 있다. 그 책은 우둥불인데 1971년에 한번 나왔고, 1972년 이범석 장군은 사망한다. 그리고 이 책은 1986년에 다시 한번 나온다. 이 책에서 그 훈춘사건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여기서도 역시 일본군이 마적을 위장하거나 마적을 시켜서 침공했다는 내용은 전혀 없다. "중국 랴오닝성의 안투센의 지방 보위단과 일부 애국 청년들"이 "한인과 연합의용군을 조직"해서 "한국 지사 10여명과 더불어 훈춘 일본 영사관을 습격하여, 저항하는 일본 경찰 30여명을 살해하고 그 영사관 창고 안에서 그들의 만주 침략의 철중인 대량의 무기를 색출"했다고 증언한다. 그리고 습격의 정당성은 영사관에서 발견한 무기를 근거해서 말하고 있다. 역시나 일본군이 마적을 위장하거나 마적을 시켜서 침공했다는 내용은 전혀 없다.『 동북의 한국 독립군 무장 부대는 1920년에 이르러 3만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민중 조직은 날로 굳어가고 적을 쳐부술 힘은 날로 자라났다.
도오꼬오는 매우 놀랐다. 군벌들은 이를 갈아부치고 만주 지구의 한국 독립군 토벌을 결심하였다.
때는 바로 왜적이 시베리아에 출병할 즈음이었다. 놈들은 주력을 우라디보스토크 일대에 두고 한국 나남과 연결, 남북 협공의 기세를 보였으니 이대로 공세를 취한다면 일본이 매우 유리한 형세에 있음은 뻔한 노릇이었다.
도오꾜오의 탐욕스런 눈은 줄곧 콩, 수수, 삼림, 탄광이 가득한 만주대륙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제 그들이 들고 나선 한국 독립군 공격의 깃발뒤에는 이른바 그들의 황군을 저 기름진 만주로 들여보내서 지옥보다도 검은 그들의 침략 야욕을 채워보려는 음모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 음모에는 움직일 수 없는 철중이 있다.
'''1920년 7월. 중국 랴오닝성의 안투센의 지방 보위단과 일부 애국 청년들은 한국 독립 운동에 자극을 받고 적의 기만과 치욕을 감수할 수 없다는 뜻에서 한인과 연합의용군을 조직하여 만주를 짓밟는 포악한 일본군에게 항거할 것을 선서하였다. 그리고 그달 상순 한국 지사 10여명과 더불어 훈춘 일본 영사관을 습격하여, 저항하는 일본 경찰 30여명을 살해하고 그 영사관 창고 안에서 그들의 만주 침략의 철중인 대량의 무기를 색출하였다.''' 일본은 저희들의 음흉한 죄상을 덮어주고 오히려 중국을 향하여 엄중한 항의를 제출하였다. 일본 경찰이 흘린 피의 대가를 갚으라는 수작이었다.』
이범석, 『우둥불』, 三育出版社, 1986, 18쪽
3.2.1. 훗날 추가된 증언
훗날 이범석 장군은 일본군이 마적을 시켜서 훈춘을 공격했다는 회고기록을 남긴다. (이범석, (鐵驥)李範奭自傳 : 우둥불 後編, 외길사, 1991, 196~200) 그런데 이건 나중에 갑자기 추가된 내용이다. 우둥불 때만 해도 그런 내용이 없다.
아래는 그 내용이다.
분명 그전 회고기록에선 "중국 랴오닝성의 안투센의 지방 보위단과 일부 애국 청년들"이 "한인과 연합의용군을 조직"해서 "한국 지사 10여명과 더불어 훈춘 일본 영사관을 습격하여, 저항하는 일본 경찰 30여명을 살해하고 그 영사관 창고 안에서 그들의 만주 침략의 철중인 대량의 무기를 색출"이라고 증언해놓고 갑자기 "친일 마적에게 돈을 주어 선동·유혹하며 그들로 하여금 훈춘성을 습격", "마적 일부를 독립군으로 위장시켜 훈춘을 들이치게 한다"라는 이전 회고기록에는 존재하지도 않던 증언이 추가됐다.『당시 이 문제 이외에 객관적인 우리 독립운동과 직결되는 중대한 사건이 만주에서 발생했다. 곧 훈춘사건이다.
훈춘 사건은 본래 일인이 조작하여 일인이 제작기 노는 연극에, 맹랑한, 뜻하지 않은 타격을 받고 토벌군을 토벌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결심을 한 데서 일어난 것이다.
3·1운동이 동기가 되어 요원의 불길처럼 퍼지던 국내 독립운동은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그 중심이 북으로 이동, 간도에서의 독립운동으로 중량이 옮겨졌다. 서쪽의 독립운동은 무형한 정신 문제이었고, 동북쪽의 즉 북간도의 독립운동은 육속 무기를 입수하여 본격적인 무장활동을 벌이는 적극활동이었으므로 일제가 특히 위험시했다.
이제는 국내의 나남·청진 에다가 경비를 강화하는 동시에 두만강 남안에 철통같은 경비를 해놓고서도 북간도에서는 커가는 독립군 세력을 어쩔 수 없으니 박멸하겠다는 생각에 몰두했다.
그래서 한 방법으로 외교적 분쟁의 구실을 만들기로 했다. 즉 친일 마적에게 돈을 주어 선동·유혹하며 그들로 하여금 훈춘성을 습격시켰다. 이를 구실 삼아 대규모 출병의 길을 트려는 간계에서였다.
한 마디로 훈춘사건은 일제가 만주침략과 독립군 토벌에 대한 구실을 마련하기 위해 조작한 속임 사건이다. 일제는 그전부터 장작림정권에게 독립군 토벌을 강요했으나 장작림은 이 핑계 저 핑계로 불응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장작림은 독립운동을 동정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간도에는 워낙 한국인이 많아 마음대로 할수도 없었다.
이에 초조한 일제는 만주의 일부 마적을 사주하여 독립군을 사살하면 돈을 주겠다고 하며 무기까지 대주었다. 그럼에도 독립군이 팽창해 가니까 출병을 위한 구실이 필요했던 것이다.
사건의 오리지날 스토리는 마적 일부를 독립군으로 위장시켜 훈춘을 들이치게 한다는 소재인지 프로트인지이다.
위장한 독립군, 즉 미리 짜놓은 마적이 들이쳐오면 일본경찰은 성문을 열어주고 다른 성문으로 도망가고 들어 온 마적은 영사관을 습격, 기물을 파괴하면 국제적 문제가 될 것이고 일본측이 곧 중국측에 엄중항의 하고는 출병의 구실을 만들 수 있다는 계산의 각본이다. 일본이 사주한 마적단의 두목을 장강호라고 하는데 일설에는 그가 일본인이라고도 한다. 그리소 사건의 발생이 10월 하순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 같은데 내 기억으로는 9월 하순이 아닌가 생각된다. (날짜는 아마 기록이 내 기록보다 정확할는지 모른다.)
훈춘은 일본인 원세개 정권과 체결한 소위 21개 조약-만주의 장작림 정권에 강요하여 체결한 24개 조약에 의거, 만주에의 일인 상주 치외법권을 누린다는 것-에 다라 일인의 큰 거주지가 있고 일인 교민을 보호한다는 구실아래 총영사관과 경찰로 불리는 무장인원이 일개중대 약 5,60명 주둔하고 있었다. 또한 중국군은 약 1개 대대병력이 있었다.』
그런데도 여기서도 일본 영사관을 공격한 건 한인이라고 증언한다.
이 부분은 이전 회고기록이 "우둥불"과 일치한다. 더욱 지방 민병대와 같이 했다는 부분이 일치한다.『이 음모에는 일본 총영사관과 일본 경찰을 파괴, 살해하며 아주 쑥밭으로 만들라고는 아니했다고 상식으로 이해가 될 것이다. 아마 극히 소수의 피해는 다짐 안했겠지만.
그런데 역시 마적은 마적끼리 통했다.비록 친일마적에게 비밀히 지시한 음모였지만 우리 독립군과 관계가 긴밀한 정의파 마적의 일부에서 그 소식을 들었고 우리가 캣취했다.
저쪽에서 준비한 행동의 날짜가 닥쳤을 때 친일마적이 훈춘성을 습격하는 줄 알고 약속대로 일인이 성문을 열고 먼저 맞이한 것은 반일 마적이었다.
정의의 마적들은 다짜고짜 일본 영사관을 습격하고 일본 경찰을 몰살시키고 동시에 일본 영사관 관원의 가족을 송두리째 죽여버렸다. 영사관 지하실에 모아두었던 1개 전투대대분의 6,7백정의 무기도 모두 약탈하고 영사관에 갇혀있던 우리 애국지사 수명을 모두 석방했다.
이 마적의 지휘자는 대암괴라는 중국 사람으로 안도현, '''민병대-지방자위대-대장'''이었다.
그 때 중국의 각 지방자위대는 자위를 위해 마적들과 연락하는 모순된 자세를 가진 수가 많았다. 대암괴도 역시 백두산 밑 산악지대의 한 현이고 마적 출몰이 가장 많은 지역을 근거지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평소 마적들과 긴밀한 연락을 갖고 있는 자위대 지도자였다.
마적들과 「안도현만 침입하지 않으면 우리도 너희들을 적극 토벌하지 않는다.」는 호불침조약 비슷한 약속을 맺고 평온을 유지하던 중 그런 정보를 얻고, 좋다구나 나도 행동을 같이하자고 제의, '''자위대원 일부를''' 이끌고 마적과 같이 행동했던 것이다.
그 후에도 대암괴라는 사람은 독립군과 긴밀한 협력을 계속했는데 그 배후에는 그의 부인인 한 한국여인이 있다. 이 여인의 지극히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이 대암괴가 독립군에 협력해 준 원천이었다. 자위대장인 남편을 설득해서 자위대를 이용하여 그와 같은 일을 하게 했다.
그 후에도 그 변방에 있는 우리 교포들을 힘 자라는 데 까지 대암괴 내외가 도와주고 보살펴 주었다. 한국 여자의 위대한 애국심의 발로이다.
그 후 청산리전역 때도 대암괴가 일군의 행동을 감시, 정찰해서 늘 우리에게 끊임없이 연락해 주어 우리는 적지 않은 작전상의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훈춘사건은 일인의 본래 뜻대로 되지 않고 오히려 수 많은 일인이 죽고 총영사관이 결단이 나고 내부에 비법적으로 남의 나라 영토 안에서 음모를 꾸미려고 암장해 놓았던 많은 무기가 약탈 당함으로써 일본의 죄악이 백천백일하에 드러났다.』
이범석, (鐵驥)李範奭自傳 : 우둥불 後編, 외길사, 1991, 196~200
정작 한국독립군이나 중국 측 문서에서 한국독립군 측의 사건이라고 기록되어있다.
3.3. 중국신문 <신보>
중국신문 신보에선 훈춘사건이 중국 동북 지역의 한국독립당인들의 반일투쟁이 진일보 발전한 결과였으며, 일본의 폭압에 한국인들이 들어 일어나 저항한 데 있었다고 설명한다.
'''1920년 10월 2일 훈춘에서 발생한 사건은 중국 동북 지역의 한국 독립당인들의 반일투쟁이 진일보 발전한 결과였다. 그날 한국당인들은 훈춘에서 거사하여 일본영사관과 일본인들의 상점 등을 불살랐다'''. 일본군은 근 만 여명의 병력을 풀어 훈춘과 영안, 왕청, 연길, 화룡 등 5개 현을 점령하고 한국인들의 가옥을 닥치는 대로 불살랐으며 한국인 2100여명과 중국인 2백여 명을 살해했다. 이로서 중일 간에 심각한 마찰이 발생했다. <신보>는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이 사건을 보도했다. <훈춘 비적사건으로 한국인당인과 과격파를 조사> (10월 11), <훈춘 사건은 일본에 분개한 한국인들이 저지른 사건>(10월 18일), <훈춘 사건에 한국당인은 없었다.>(10월 29일), <한국당인과 화적떼> (11월 5일) 등 보도는 '''훈춘 사건이 발생한 근본원인이 일본의 폭압에 한국인들이 들고 일어나 저항한 데 있었다고 밝혔다.'''
무소리, 일제강점하의 한국에 관한 중국<신보>의 보도실태 연구 : 1919-45년간 기사의 내용분석을 중심으로 = (A) study on the attitudes in which Chinese newspaper <Sin-bo> reported Korea during the period of Japanese Imperialism : Focusing on the method of content analysis of the reports from 1919 to 1945, 학위논문(석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언론정보학과 2004. 2, 47쪽
3.4. 박은식의 저술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도 일본군이 일본 민간인을 죽였다는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당시 마적들이 일본군 밑에서 일한 것 사실이나 일본이 일한 대가를 주지않으니 일본 영사관을 습격해서 일본인을 죽인 것으로 기술한다. 즉, 박은식도 일본군이 본인들끼리 내분이 일어나 테러가 일어났다고 주장했지 '일본군이 마적을 시켜서 일본 민간인들을 살해했다'는 건 박은식의 저술에도 없던 내용이다. 임시정부 대통령인 박은식의 저술에도 없던 내용이 어쩌다 퍼졌는지 알 수 없다.
3.5. 여담
훈춘 사건 음모론이 퍼진 건 어느정도 정황이 음모론과 일치해서 설득력이 있어보이기 때문일텐데 사실 역사를 보면 이것보다 비교도 안 되게 절묘한 사건이 한 두개가 아니다.[1]
4. 참고문헌
4.1. 1차 사료
- 중화민국국민정부외교부 편, 동북아역사 자료총서 17 『중일문제의 진상』, 박선영 옮김, 동북아역사재단, 2009
- 이범석, 『우둥불』, 三育出版社, 1986
- 이범석, (鐵驥)李範奭自傳 : 우둥불 後編, 외길사, 1991
4.2. 2차 자료
- 조동걸, 1920년 간도참변의 실상, 역사비평 , 1998.11
- 무소리, 일제강점하의 한국에 관한 중국<신보>의 보도실태 연구 : 1919-45년간 기사의 내용분석을 중심으로 = (A) study on the attitudes in which Chinese newspaper
reported Korea during the period of Japanese Imperialism : Focusing on the method of content analysis of the reports from 1919 to 1945, 학위논문(석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언론정보학과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