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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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말이 쓰이는 게시물에 거의 빠지지 않고 올라오는 짤방.[1]
1. 개요
2. 상세
2.1. 실제 방송 내용
2.2. 역사왜곡 밈설
3. 실제 방송 당시 배경
3.1. 한국 전쟁 발발 당시
3.2. 피난 당시 방송국을 비롯한 현장의 상황
3.3. 이후
4. 대중 매체에서
5. 바리에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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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016년부터 인터넷에서 유행하는 유머 중의 하나. 원래는 6.25 전쟁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녹음된 서울사수방송을 틀어놓고 미리 도주했다고 주장하는 측에서 만든 짤이지만, 지금은 정치성을 가르지 않고 두루두루 쓰는 짤과 단어가 되었다.[2]
큰 문제가 생겼는데도 별 일 아니라며 정신승리하거나 기만하는 모습을 풍자할 때 쓰이기도 한다.
지금에 와서는 당사자가 정신승리를 하지 않아도 그냥 당사자의 언행이나 성적 등이 망했다 싶으면 갖다 붙인다. 망한 당사자가 자학용으로 쓰기도 한다.
다만 아래에서 구체적으로 설명하지만 실제 이승만은 이런 내용의 방송을 한 적 없다. 대전으로 피난 간 '''이후''' 밤 10시에 한 방송이 있기는 하지만 그 내용은 국군이 밀렸지만 조만간 미군이 도착해서 도와줄 거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그 날 아침까지 이승만이 아닌 국방부를 비롯한 정부 인사들이 흔히 서울사수방송이라고 알고 있는 방송을 해댄지라 사람들이 착각할만 하긴 했다. 그래도 서울사수방송은 낮에 있었고, 이승만이 대전에 도착한 건 오후 4시 반 무렵이었으니 사람들이 인식하는 것처럼 사수방송이 나올 때 이미 도망쳐 있었다는 건 잘못된 인식이다.

2. 상세


“서울 시민 여러분, 안심하고 서울을 지키십시오. 적은 패주(敗走)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여러분과 함께 서울에 머물 것입니다.”, “국군은 총반격으로 적은 퇴각 중입니다. 이 기회에 우리 국군은 적을 압록강까지 추격하여 민족의 숙원인 통일을 달성하고야 말 것입니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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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연설문은 '''실제했던 연설이 아니며, 어떠한 기록에도 찾을 수 없다.''' 다만 매우 그럴싸한 내용[4]

덕분에 런승만 및 국민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드립과 함께 밈화 되어 자주 사용된다.

특별담화 방송이 있었다는 건 당연히 1950년대부터 알려져 있던 거지만 정확히 듣고 기록한 내용은 없었다. 그러다 미국의 CIA 예하 FBIS(Foreign Broadcast Information Service, 해외방송감청부서)의 일일 보고서에서 그 내용을 기록한 보고서가 존재한다.[5] FBIS는 일본 오키나와에 소재한 감청소이며, 남북한과 중국, 소련의 방송을 모니터링하여 일일 보고서를 작성하여 매일 미국에 통보했다.
일단 27일 당시 이승만은 의정부 탈환 발언을 본인 입으로 그렇게 말한 건 아니다. 문제는 정부 차원에서 계속 거짓말을 했으며, 북한군이 쳐들어오기 직전에도 '''그 거짓말을 철회하지 않은 것이다.'''
국방부 보도과와 공보처가 27일 오후 1시에 특별방송을 통해서 '''의정부를 탈환했다는 내용'''을 공식 발표한다. '''의정부 전투에서 국군이 승리하였고, 상황이 좋아졌으므로 수원 천도 결정을 취소하였고, 정부는 여전히 수도에 있으며, 국회는 서울 사수를 결의하였다, 국민은 국방군을 믿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Daily Report, No.124, Korea, June 27 1950, ccc 1(RG 263, Box 330))[6]
그리고 27일 오후 4시에 국방부 보도과장 김현수 대령은 맥아더 사령부에서 '''전투사령부를 서울에 설치'''하고, 이튿날부터는 공군을 위시하여 미군이 참전할 것이고, '''국방군이 현 전선을 고수할 것'''이라는 특별발표를 하였다. 헌데 직후 주민들은 육군사령부가 시흥으로 남하하고, 국군이 남쪽으로 후퇴하는 것을 보고 두려움에 떨었으나 '''이 방송을 직접 혹은 알음알음 전해듣고 두려움을 잠재웠다고 한다'''. Daily Report, No.124, Korea, June 27 1950, ccc 16(RG 263, Box 330)[7]

2.1. 실제 방송 내용


그러다 갑자기 27일 밤 9시경부터 이승만은 본인 육성으로 방송을 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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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06월 27일 이승만의 실제 방송문 (축약)'''

지난 몇 달간 나는 미군의 군사 원조가 임박했다고 주장했으나 민주주의 국가가 그러한 원조를 실현하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마침내, 적군은 전차, 전투기와 전함으로 서울에 다가오고 있는데 우리 국군은 싸울 것들이 전무한 상황이다. 이 암울한 상황에 직면하여 나는 도쿄와 워싱턴에 연락하여 현 상황을 설명했고, 마침내 나는 오후에 맥아더 장군의 전보(미군참전)를 받게 되었다.

맥아더 장군은 우리에게 수 많은 유능한 장교들과 군수 물자를 보내는 중이며 이는 빠른시일에 도착할 것이다. '''이 좋은 소식을 국민에게 전하고자''' 방송한다. 우리는 공산주의와 싸우기 위한 우리의 용기와 투지를 증명해 보였고, 모든 우방국들이 우릴 지지하고 있다. 나는 전선에서 싸우고 있는 모든 용감한 군경들에게 감사를 표한다.

나는 공산주의자들이 과거의 실수를 바로잡고 대한한국에 대한 충성을 맹세한다면 용서받을 수 있다는[8]

사실을 상기시키기 위해 다시 한번 말한다. 그렇지 않으면 머지않아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우리 국민 모두가 그들을 공화국의 충실한 시민이 되도록 가르쳐야 한다.

--- Daily Report, No.125, Korea, June 28 1950, ccc 5(RG 263, Records of the Central Intelligence Agency, Foreign Broadcast Information Service DailyReports, 1941-1959, Box 330)

이 방송에서 국군이 의정부 지구에서 용감하게 싸웠으나 전차의 엄호에서 진격하는 적군을 막지 못했고 적군이 서울 교외 가까이까지 진출한 상황인 건 밝혔으며 흔히 알려진 "서울 시민들은 안심하고 서울을 사수하라"등의 내용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내용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전 방송에서 행한 의정부 전투 승패 왜곡, 맥아더 사령부에서 전투사령부를 서울에 설치한다는 내용, 현 전선 고수, 서울 사수 내용을 철회하지 않았다.'''[9] 그러니 이전 방송이 왜곡됐다는 사실을 모르고 '''맥락을 연결해서 들으면 서울사수로 해석되는 내용이었다'''. 정부는 정부 전선이 무너지고 서울 함락이 임박하였음을 충분히 알았던 상태였는데도 '의정부를 탈환했다.', '서울을 사수했다', '국민들은 안심하라'는 방송을 연달아 하더니 대통령이 직접 '열심히 싸워라'고 말했다. 전후 맥락을 연결하면, 북한군에게 밀려서 피난 가야 한다는 내용으로 해석되지 않는 방송이다. 이 탓에 북한군의 침략에 공포에 빠졌던 국민들은 대통령과 정부에 배신감을 느끼고 분노하며 대통령과 정부를 불신하게 만든 것이다.[10]
즉, 이승만 본인이 직접 "국민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서울은 안전합니다"라고 발언한 적은 없더라도 이승만 정부가 맥락상 그러한 의미로 해석되는 방송을 송출해 서울과 수도권 주민들을 기만한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국민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발언은 이러한 방송 내용을 한 줄로 압축해 표한한 문장이다.
순서대로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27일 오후 4시 국방부: '''맥아더 사령부가 서울에 전투사령부 설치. 국군 전선 유지'''

오후 9시 이승만: '''국군이 적을 막을 수 없어 밀려나지만 그러나 좋은 소식이 있어 전한다. 미군이 참전하기로 했고 장교와 군수물자가 오고 있다.'''

오후 9시 방송에서 오후 4시 방송을 부정한 내용이 보이는가? 오히려, 이승만이 기만방송을 하지 않았다는 주장이 문맥을 무시한 인용이 된 것이다.

2.2. 역사왜곡 밈설



본 문서에서 다루는 밈이 역사왜곡이고 모함이라는 주장이 있다. 이승만 정부가 했지만 아무튼 이승만이 하지는 않았으니 왜곡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잘못됐다.
  • 국방부 방송은 명백히 정부의 방송이다.
  • 정부의 기만방송을 정부수반이 한 것으로 표현하는 건 왜곡이 아니다.
  • 이승만 본인 방송도 기만방송이다.
전시의 국방부의 방송은 명백히 정부의 방송이다. 그리고 그 방송내용은 인터넷에 떠도는 내용과 일치한다. 그러니 이승만 정부가 실제 밈의 내용과 일치하는 방송을 한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본 문서가 다루는 드립은 이승만 정부의 행동을 이승만 본인이 한 것으로 각색해서 '''밈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이승만의 연설 자체도 기만방송이 맞다.
(27일 오후 4시 국방부) '''맥아더 사령부가 서울에 전투사령부 설치. 국군 전선 유지''' >>(오후 9시 이승만) 국군이 적을 막을 수 없고 적이 서울근처에 왔지만 '''미군 참전, 장교와 군수물자가 오고 있음. 국군이 열심히 싸운다.'''
보다시피 이승만 방송에서는 오후 4시 방송을 부정하는 내용이 없다. 오히려 문맥을 연결하면 이전 방송을 강조하고 있다.
이승만 본인 부터가 제대로 된 정보를 국민들에게 주지도 않았다. 적이 서울로 접근하고 있다고만 했지, 정확한 전황을 전달한 것도 아닌데 이전 문맥을 연결해보라.
연설 내용을 분석해 봐도 '맥아더 장군은 우리에게 수 많은 유능한 장교들과 군수 물자를 보내는 중이며 이는 빠른시일에 도착할 것이다. 우리는 공산주의와 싸우기 위한 우리의 용기와 투지를 증명해 보였고, 모든 우방국들이 우릴 지지하고 있다.' 라는 말은 그 자체로 해석하더라도 국민에 대한 기만이다.
'나는 공산주의자들이 과거의 실수를 바로잡고 대한한국에 대한 충성을 맹세한다면 용서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기 위해 다시 한번 말한다. 그렇지 않으면 머지않아 대가를 치루게 될 것이다.' 는 식으로 말하고 있으니, 어떻게 방송을 들어도 '적이 서울로 오니 대피해야 한다'고 해석되지 않는다.
국군이 실시간으로 패퇴하고 있는 상황인데도 그와는 동떨어진 긍정적인 내용의 방송을 함으로써 전황을 국민들에게 제대로 알리지 않은 것도 기만이고, 미군 지상군이 오려면 시간이 한참 걸리는 상황인데도 (스미스 TF가 부산에 도착한 것이 30일, 미군 제24사단 이 7월 2일 도착한다. 해군 공군은 비교적 빨리 도착할 수 있었지만, 해군이랑 공군만으로 전쟁을 할 순 없다.) 미군의 참전 소식만을 강조함으로써 국민들에게 잘못된 기대를 가지게 한 것도 기만이다.
1950년 6월 27일의 흐름을 보면 이승만 정부가 충청남도지사 관저에서 특별 방송을 하기 전에 정부기관을 통해 '의정부를 탈환했다'거나 '정부는 여전히 수도에 있다'거나 '맥아더가 전투사령부를 서울에 설치했다'거나 '미군이 참전할 것이다'거나 '국군이 현 전선을 고수할 것이다'라는 왜곡방송을 했고, 그 뒤에 이승만이 충남지사 관저에서 '맥아더 장군은 우리에게 수 많은 유능한 장교들과 군수 물자를 보내는 중이며 이는 빠른 시일에 도착할 것이다.' '우리는 공산주의와 싸우기 위한 우리의 용기와 투지를 증명해 보였고, 모든 우방국들이 우릴 지지하고 있다.' '나는 공산주의자들이 과거의 실수를 바로잡고 대한한국에 대한 충성을 맹세한다면 용서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 시키기위해 다시 한번 말한다. 그렇지 않으면 머지않아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는 내용의 방송을 했으며, 현 전황에 대해서는 '적군은 전차, 전투기와 전함으로 서울에 다가오고 있는데 우리 국군은 싸울것들이 전무한 상황이다.' 라는 식으로 모호하게 설명하면서 '나는 도쿄와 워싱턴에 연락하여 현 상황을 설명했고, 마침내 나는 오후에 맥아더 장군의 전보(미군참전)를 받게되었다'말을 뒤에 덧붙임으로써 '공산군이 침공해 왔지만 곧 미군이 올 것이다'라는 내용이 되어버리니, 정확한 전황을 전한 것도 아니다.
인터넷에 널리 알려진 것과 달리 이승만은 직접 자기 입으로 '국민 여러분 안심하십시오'라는 말을 한 적은 없다. 그러나 이승만 정부에서 발표한 내용이라는 것, 이승만 본인이 기만 방송을 했다는 것 등은 사실이다.
이승만에 대한 사실을 서술할 때 '이승만 본인이 저런 연설을 했다'고 설명하는 것은 명백히 역사왜곡이지만 본 문서의 밈의 '''표현'''은 왜곡이 아니다.

3. 실제 방송 당시 배경



3.1. 한국 전쟁 발발 당시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일어나고 대한민국 국군은 제대로 준비가 되어 있지 못했기 때문에 불과 전쟁 발발 3일 후인 6월 28일, 수도 서울을 북한군에게 내주고 말았다. 이 하루 전인 6월 27일, 이미 전선은 서울 창동 근처까지 내려왔었고 이에 따라 이승만 대통령은 6월 27일 새벽에 서울을 떠나 수원을 거쳐 대전으로 내려간다.[11] 일단 피난까지는 이해할 수 있는 게, 국난 상황에서 정부의 피난 자체는 흔한 일이었다.[12] 실제로 1, 2차 세계대전에서도 참전국들 중 정부가 위기에 처한 수도를 버리고 후퇴한 사례가 많다. 프랑스나 폴란드는 물론 네덜란드나 노르웨이 등등 독일에게 점령당한 국가는 거진 다 그랬다. 이승만은 더 많은 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작전상 후퇴한 군사작전중 일환이었으며, 이승만이 지켜야 할 국민은 서울 인구는 150만뿐만이 아니라 남한국민 2,150만명도 있었다.
거기에 마침 27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한국전 참전 결의안이 통과되었고, 여기에 힘을 얻은 이승만은 국민을 안심시켜 혼란을 막겠다는 생각 + 자신의 대전행을 적군이 눈치채지 못하게 하려는 연막 효과 등을 위해 대전에서 중앙 방송국을 통해 특별 방송을 실시하게 된다. 이른바 6·27 특별방송이다. 이후 일주일 후 7월 4일 이승만 특별방송에 자신이 서울을 내려온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내 한 몸이 국군의 앞에 서서 죽음으로서 싸워야 옳을 것인데 피하여 나온 것은 구차히 목숨을 위해서 한 것이 결코 아니오 첫째는 성중에 있으면 군경(軍警)전투상에 도리어 곤란을 당하겠다는 것이 한 가지 이유요. 또는 내가 나와 앉아서 세계에 호소해서 공론이 일어나야 할 것을 각오한 것이 두번째의 이유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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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경과에 대해 대 국민 특별방송(이승만 대통령, 1950. 7. 4.) - 한국사DB

당시 프란체스카 여사나 경무대 비서 등의 회고록에 의하면 대통령은 갈 마음이 없었다. 신성모가 전날 밤까지 반격에 성공했다고 허풍을 쳤다. 북한군이 1시간도 안 되는 거리에 있던 걸 우려한 신성모 국방장관 겸 국무총리 대리는 적이 청량리에 왔다는 가짜 뉴스를 알려서 이승만을 떠나게 했다. 창문이 깨지고 스프링이 튀어나온, 말 그대로 긴급한 상황에서 간신히 마련한 3등열차 2칸을 이은 특별열차를 타고 대구까지 갔다가 이승만은 상황이 보고와 다름을 알고 다시 서울로 가기로 했다. 그러다가 대전역에서 신 장관과 이기붕 서울시장이 더 이상의 북상은 위험하다고 만류하고 미군 참전과 결의안 통과, 정부부처들의 후퇴(대부분 수원이나 대전으로 이동)를 보고받고 충남도지사 공관에서 임시수도를 재건하게 된다. 그래서 충남도지사 공관을 대전 경무대라 불렀다고 한다. 현재 개방되어 있어 관람이 가능하다.
그런데 당시 미국 대사가 보낸 전문에 따르면 이미 25일 밤 이승만은 정부가 공산당에게 잡히면 대한민국 체제에 심각한 타격이되어 안되기 때문에 정부를 대전으로 옮기려 한다고 말했으며, 정작 외국인인 대사는 수도에 남아 국군의 사수를 돕겠다는 전문을 보냈다.
다음은 무초 대사가 보낸 문서의 내용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25일 밤 10시에 제게 전화를 걸어 자신과 면담할 것을 요청했습니다.'''대사관에 있던 신성모 국무총리서리가 저와 동행했습니다. 제가 대통령관저에 도착했을 때 이범석국무총리는 이미 도착해 있었습니다. 다음의 내용은 우리가 나눈 대화에 대한 기록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큰 압박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는 실룩거리면서 중간에 끊어져 뜻이 통하지 않는 말을 반복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의정부의 상황에 대해 언급했는데 그에 따르면 수많은 전차가 서울을 향해 쇄도하고 있으며 한국군의 능력으로는 저항할 수 가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승만은 국무총리서리에게 한국어나 영어로 말을 걸었으며 가끔씩 이범석에게도 한국어로 말을 걸었습니다. '''이 대통령은 내각에서 오늘 밤 정부를 대전으로 옮길것을 결정했다고 말했습니다. 이대통령은 이러한 결정을 내린 것은 자신의 안전을 고려해서가 아니라 정부를 반드시 보전해야 하며 만약 대통령 자신이 공산당에게 잡힐 경우 대한민국의 체제에 심각한 타격이 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거듭 강조했습니다.''' 이대통령은 뜬금없이 국무총리서리에게 군사지식을 가진 "유능한 사람을 여러명" 모아서 현재의 상황에 대해 논의하고 필요한 조치를 결정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이대통령은 만약 신성모가 만족할수 있을 정도로 군사적인 상황에 더 잘 대처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주저없이 그 사람을 위해 국방부장관직을 사임해도 좋다고 말했습니다. 이대통령은 한국측은 미국이 큰 원조를 해 줄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우리는 1천만 달러 정도의 원조를 기대하고 있다... 우리는 갑부인 박흥식(화신 그룹의 소유주인)이 무기 구매를 위해 백만달러를 제공하겠다고 한 것을 알고 있지만 내 생각에는 이미 너무 늦은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국무총리서리는 거듭해서 이대통령이 지시하면 상선단에서 얻은 경험에 따라 최대한 공손한 자세로 "네 각하", "그렇게 하겠습니다 각하"를 연발했습니다. 하지만 신성모도 이대통령의 결정과 명령에 대해 매우 불쾌해하고 있는 것은 분명했습니다. 신성모는 결국에는 실례하겠다고 한 뒤 의정부 지구의 전투에 대한 최신 소식을 전화로 알아보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대통령에게 무기와 병력이 있다는 점과 전차를 저지하기 위해 바주카포와 대전차포, 그리고 대전차지뢰를 사용해 싸워야 한다고 지적하면서 정부가 서울을 지키도록 설득하려 노력했습니다. 신성모는 57mm 대전차포가 북한군 전차의 장갑을 관통하지 못했다고 말했고 저는 대전차지뢰의 사용을 강조했습니다.(신성모의 주장은 다소 의심스럽습니다. 한국의 도로와 교량은 중전차(extremely heavy tanks)가 다닐 수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는 만약 정부가 서울을 포기한다면 전투에 지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만약 한국의 상황이 계속 악화된다면 이것을 다시 호전시키는 것은 불가능해 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대통령은 이런 주장에 대해서는 별다른 느낌을 받지 않은 것처럼 보였고 '''그는 거듭해서 자신은 개인적인 안위에는 관심이 없으며 정부가 사로잡히는 위험을 감수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확신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대통령의 생각을 바꿀수 없다는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되자 자리를 뜨기로 했고 이대통령에게는 대전으로 피신하라고 한 뒤 저는 서울에 남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미국인 여성과 어린이들은 다음날 밝는대로 일찍 철수시킬 것이며 철수가 진행되는 동안 서울 상공에 공중 엄호가 있을 것 이라고 했습니다. 이대통령은 여성과 어린이들은 피신해야 한다는데 동의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미국 사절단의 남성들은 잔류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회의를 끝내고 나오려 하자 이범석은 어설픈 영어로 그가 생각하기에 북한의 원래 전략은 서울 방면으로 기만 공격을 건 뒤 동해안에 게릴라 부대를 상륙시키는 것이었으나 서울 방면으로의 공격이 순조롭게 진행되자 이 지구에 전력을 더 투입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범석은 한국군이 서울 방면으로의 공격에 대항해 완강하게 싸워야 한다고 했습니다. 제가 회의실을 떠나자 이범석은 대통령과 나눌 말이 더 있다고 하면서 남았습니다.

'''대통령관저를 나서자 신성모는 저에게 다가와 이대통령은 그와 아무런 상의도 하지 않고 정부를 옮기겠다는 결정을 내렸다고 했습니다.'''

The Ambassador in Korea(Muccio) to the Secretary of State(1950. 6. 26),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1950 Vol.VII Korea(U.S.GPO, 1976), pp.141~143, 번역: 길 잃은 어린 양의 놀이터( http://panzerbear.blogspot.kr/2010/06/1950-6-27.html?m=1)

966. 서울 북쪽의 북한군은 지난 밤 사이 조금 더 진격해왔습니다. 가장 신뢰할 만한 상황 평가에 따르면 서울 근방의 적군 병력과 전차 숫자가 과대평가되긴 했어도 숫적인 우위를 보이고 있습니다. 대사관은 현재 고립될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대통령과 대부분의 각료들은 서울을 떠나 남쪽으로 피신했습니다.''' 국무총리서리 겸 국방부장관 신성모와 한국군 참모부는 아직 서울을 사수할 것을 고집하고 있습니다. '''저는 소수의 지원자와 함께 최후의 순간까지(until bitter end) 서울에 남을 것'''이며 드럼라이트 참사관 및 소수의 대사관 직원을 자동차 편으로 대통령을 따르게 하겠다고 제안했습니다. (한국을) 포기했다는 비난을 막기 위해서 주한미군사고문단의 핵심 요원은 사태의 추이에 따라 차량을 이용해 남쪽으로 보내고 그밖의 군사고문단 요원들은 항공기편으로 피신시켜야 합니다.

The Ambassador in Korea(Muccio) to the Secretary of State(1950. 6. 27),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1950 Vol.VII Korea(U.S.GPO, 1976), p.173, 번역: 길 잃은 어린 양의 놀이터 ( http://panzerbear.blogspot.kr/2011/04/blog-post_17.html?m=1)

트루먼 대통령의 회고록 2권 '시련과 희망'(1946~1952)은 1950년 6월 26일(한국 시간 6월 27일)에는 당시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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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이 되자 한국으로부터 들어오는 보고들은 어둡고 실망스러웠다. 이승만은 美 국무부의 電文 보고 형식으로 쓴 편지를 통하여 지원을 요청하였다. '6월 25일 이른 아침부터 북한공산군은 남한에 대한 무장 침공을 개시하였습니다. 각하와 미국 의회도 잘 알다시피 우리 국민들은 이런 사태를 예상, 동양에서 민주주의의 보루를 구축, 세계 평화에 기여하기 위하여 강력한 국군을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귀하께서 우리를 해방하고 공화국을 건설하는 데 필수적인 도움을 주신 데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는 국가적 위기에 직면하였지만 용감하게 저항하고 있으니 세계 평화를 파괴하려는 책동을 저지하기 위하여 더 강력한 지지와 효율적이고 시의적절한 지원을 호소합니다.' 李 대통령의 호소문을 가져온 한국 대사는 낙담하여 울먹였다. 나는 전투가 겨우 48시간 지났을 뿐이고, 다른 나라들은 더 어려운 상황에서도 싸워서 종국적 승리를 거두어 자유를 지켜냈다고 말하여 그를 격려하였다. 나는 그에게 버티어내라면서 지원이 진행중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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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루먼 대통령의 회고록 2권 '시련과 희망(Trial and Hope)'(1946~1952) 中

트루먼 회고록은 이승만이 보낸 편지가 나올뿐 이승만의 피난 관련 움직임에 대해 특별히 설명하진 않는다.
일각에선 프란체스카의 회고록이 신빙성이 없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프란체스카의 회고록은 다른 인물들의 얘기와도 대부분 일치하는데다가, 이승만이 실제로 26일 저녁에 있었던 피난제의도 거부했다가 27일 새벽에서야 피난을 떠났고, 대구까지 갔다가 다시 서울로 돌아가려고 상행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무초의 보고에 나오는대로 원래부터 피난갈 궁리를 하고 있었다고 보긴 힘들다. 정말 그럴 생각이었다면 25일이나 26일에 일찌감치 떠났을 것이다. 이승만이 무초를 상대로 당시 저런 발언을 한건 협상기술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무초의 말만 보면 이승만은 25일 밤이나 26일 새벽에는 서울을 떠났어야 하는데 실제로는 피난을 가지 않았다. 이승만은 26일에도 계속 상황 지시와 연락을 하고 피난 직전인 27일 새벽 1시까지도 장면 주미대사에게 전화하여 필요한 조치를 취하는 등 대응을 계속했고 그러다가 27일 새벽 3시경 피난을 떠났다.

3.2. 피난 당시 방송국을 비롯한 현장의 상황


지금부터 이야기하는 방송 당시 상황은 지난 50년간 한국 방송 역사의 산 증인인 이장춘 한국방송인동우회 이사가 직접 관리하는 블로그 글에 수록된 당시 대전 방송국에서 6·27 특별방송을 내보낸 담당책임자 유병은의 회고를 옮긴 것이다. 그는 청원방송박물관을 설립했으며 2009년 8월 24일 작고했다. 다만 해당 블로그에서는 27일 9시 이승만 대통령이 의정부를 탈환했으며, 서울 시민들은 안심하라는 방송을 했다고 증언하나 2. 기만방송에서 말한 다른 자료들은 27일 9시 담화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의정부 방어가 실패했음을 인정했다고 언급하고 있다. 더 자세하게 보고 싶다면 관련 링크 참조.[13]
1950년 6월 27일 이승만이 막 대전에 도착할 무렵, 당시 갓 부임한 이범구 대전 방송국장은 서울 집에 가고 없어서 당시 대전 방송국 방송과장 유병은이 사실상 방송국장 직무대리를 하고 있었다.
이 날 오후 7시 반 경 갑자기 초대형 고급승용차가 대전 방송국 정문으로 들어와서 유병은 방송국장 대리가 나가보니 이승만의 지시를 받고 온 헌병사령관 장흥 대령이 유병은을 급히 차에 태우고 어디론가 갔다. 유병은은 무슨 일로 어디로 가느냐 물었지만 아무 대답이 없었고 장흥을 따라 어디선가 내리니 그곳은 충청남도 도지사 사택이었고 당시 충남지사였던 이영진이 현관에서 마중나와 있었다.
그 뒤 응접실로 안내되어 들어가니 이승만이 프란체스카와 선 채로 귓속말을 하고 있었고 잠시 뒤 이승만은 장흥에게 출입문을 잠그도록 지시했으며 장흥은 문을 잠근 뒤 권총을 손에 쥐고 유병은을 협박하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이승만은 유병은이 방송국 책임자인 지 확인한 뒤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렸다.

'''1. 이 방에서 절대로 나가서는 안 된다.'''

'''2. 방송국에 전화를 걸어 중계 방송기를 이 방으로 가져오라.'''

'''3. 오늘 저녁 9시[14]

에 내가 이 방에서 하는 방송을 서울로 올려 보내어 전국에 중계해 온 국민이 듣게 하라.'''[15]

'''4. 내가 방송하는 것을 서울에서 녹음했다가 밤에 여러 번 재방송하라.'''

'''5. 누가 묻든 지 대전에서 방송한다는 말을 해선 안 된다.'''

'''6. 이 대통령이 방송한다고 미리 누설해서도 안 된다.'''


이 지시를 듣고 유병은은 그 자리에서 대전방송국에 전화를 걸어 중계방송에 필요한 방송 기기를 보내도록 지시했다. 또 대전우체국에 전화를 걸어 신분을 밝힌 뒤 충남도지사 관사와 대전방송국과 서울 중앙방송국에 각각 방송 선로를 즉시 개설해 줄 것을 요청하고 다시 시외 전화를 서울 중앙방송국 조정실에 걸어 당시 담당자 왕종현에게 오늘 저녁 9시 대전에서 방송을 올려 보낼 테니 아무 소리 말고 무조건 전국에 중계 방송하라고 말했다. 당연히 무조건 방송하라는 말을 들은 서울 방송국 측에선 이유를 여러 번 물었고 이에 한 동안 실랑이가 벌어졌다.
방송 예정 시간을 얼마 안 남기고 유병은은 중계방송 기기를 조심스럽게 설치하고 마이크를 대통령 전용 탁상에 설치한 뒤 마이크 시험을 끝내고 8시 40분에는 서울 중앙방송국 조정실까지 중계선로를 개통시켰지만, 선로 상태가 그리 좋지 못해 필사적으로 상태를 개선시키는 등 중계방송을 위한 준비를 철저하게 했다. 9시 정각, 이승만은 특별 담화를 방송하게 된다.
서울중앙방송국이 북한군에 점령당할 때까지 이승만 특별 담화가 방송되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대부분의 직원들이 녹음 방송 틀고 도주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방송인으로서 사명을 가진 일부 직원들이 남아서 예정되어있던 임시 방송을 진행하여 이승만의 담화 방송은 자연스럽게 끝났다. 공산군 점령 직전 마지막 방송은 기사 이성실이 오전 7시 45분까지 송출한 군가 행진곡 모음이다. 이성실은 정부가 부산으로 피난 가 있을 때 송신기 조정작업 중 불의의 감전사고로 현장에서 순직하였다.

3.3. 이후


당연히 이 방송들(국방부의 27일 1시, 4시 방송분, 이승만의 27일 9시~11시 방송분)의 녹음본은 현존하지 않는다. 사실 서울 함락 직전이라는 급박한 상황에서 어느 누구도 이 테이프들에 신경쓰지 못했고 더군다나 인프라가 열악한 시대라서 따로 녹음해 놓은 곳도 없다. 애초에 전쟁 중 담화 방송이라는 것 자체가 심각한 국가 위기 상황에서 방송했단 뜻이다. 너도 나도 불안하고 살기 바쁜 때에 설령 인프라가 잘 되어있다 한들 과연 태평하게 이걸 녹음할 사람이(…).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여 미군과 국군이 서울을 탈환하자, 이승만은 정부 인사들과 함께 서울로 돌아왔는데 분위기가 좋지 않은 것을 보고 국회의원들이 이승만더러 서울 시민들한테 사과하라고 권유하자 이승만은 버럭 화를 내며 "내가 당나라 덕종마냥 덕이 없어 이런 고초를 겪게 했다고 말하란 말이냐? 나는 사과 못한다, 하고 싶으면 당신들이나 해라."고 거부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이승만은 부역자 색출을 한다며 서울시민들 중 무려 55만 명을 체포하고 그들 중 800명을 사형시켰다. 그러나 너무 지나친 처사라는 비판 여론이 일자, 이승만은 사형시키지 않은 시민들을 모두 풀어주었다.
이런 이승만의 처사를 두고 검사 정희택은 "1개 사단 규모의 전향자들을 책임지고 있는 정보 검사에게까지도, 그것도 최후의 순간에 전화 문의까지 했는데도 거짓말을 하고 저희들만 도망치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배신과 기만으로 애국시민들을 내버리고 도망친 자들인데 무슨 염치로 잔류파를 재판한다고 하는 겁니까?"라고 울분을 토로하기도 했다.
오늘날 이승만을 추앙하는 우익 진영에서는 이 기만 방송을 두고 "만약 대피하라고 방송했으면 혼란과 약탈 같은 행위가 발생할까봐 어쩔 수 없었다."라고 옹호하지만, 정작 1년 후 중공군이 쳐들어오자 이승만이 피난을 가라고 명령을 내린 일을 보면[16] 전혀 설득력이 없다. 다만 이 경우에는 반론의 여지가 있는게, 중공군이 쳐들어올 시점에는 이미 국군이 밀릴 수 있다는 것이 다 알려졌고 전시 상황도 공고해졌으니 순응이 빨라서 비교적 혼란이 없이 진행된 것이고, 이 상태에서는 전쟁이라 한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별안간 국군이 밀리고 있어 도망가야 한다고 해야 하는 것이므로 패닉이 발생할 여지는 충분했다.

4. 대중 매체에서


6.25 전쟁 초기 과정을 다룬 드라마에서는 한 번씩은 꼭 다룬다. 이환경 작가가 쓴 야인시대영웅시대에선 '''실제 사실과는 다르게''' 개전 하루 뒤인 6월 26일에 시민들의 동요를 막기 위해 이승만이 서울에서 방송을 하고 이후 도주한 것으로 묘사되었다. 특히 야인시대에서 최동열이 다들 전쟁통에 피난하느라 바쁜 와중에 막상 피난은 않고 방송국에 찾아가는데, 녹음된 것이 방송되고 있다는 사실에 분노한 그는 방송용 테이프를 뜯어내 방송을 중단 시킨다. 이 장면은 야인시대 합성물에서 나레이션을 무력화시키는 용도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서울 1945에서는 실제 사실과 맞게 6월 27일 밤에 대전에서 방송한 것으로 그렸지만 이승만이 충남지사 관사가 아닌 대전 방송국에서 방송했으며 준비된 원고를 읽는다는 소소한 고증 오류가 있다. 실제로는 '''원고 없이''' 방송했다.

5. 바리에이션


채색판도 존재한다.
발전형으로 이미 도망치고 없는 버전도 있다. 그런데 마이크 옆 잎사귀 쪽 손이 (편집자가 까먹었는지, 흑백이라 분간되지 않았는지) 지워지지 않았다. 수정 버전
녹음방송만 틀고 도망간 것을 고증한 버전 짤방이다. 축음기만 마이크 앞에 두고 도망친 뭔가 병맛 같은 장면이 포인트다. 이 버전도 위에 도망간 버전을 사용했는지 손이 남아있다.
  • 어떤 회사나 게임, 애니메이션 등 작품이 큰 논란에 휩싸이는 사건이 터졌을 때 책임자가 "OO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OOO는 안전합니다!"라는 제목과 이 짤방이 쓰이기도 한다. 망했는데 괜찮다고 거짓말 친다는 의미.
2019학년도 수능특강 한국사에서 문제 내의 삽화로 나왔다. 말풍선 안의 내용들은 읽어볼 필요가 없을 정도. 참고로 체크한 대로 4번이 정답이다. 1번은 조소앙, 2번은 김구, 3번은 박정희, 5번은 김규식. 전술했듯 삽화는 1945년 반탁운동 당시의 모습이고, 말풍선의 내용은 1946년 정읍발언의 내용이다. 즉, 이승만이 말풍선의 내용을 발언하며 저 포즈를 취한 것은 아니다.

[1] 원래는 1950년 10월에 평양 탈환 당시에 평양에서 연설하던 장면이라고 한다. 실제로 이 때 했던 발언이 그 유명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였다.# 따라서 실제 연설 내용과는 상관없지만(6.25 직후 이승만은 일주일 동안, 임시 수도를 3번이나 바꾸며 부산까지 파천하는 상황이라 연설이고 뭐고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어쨌든 이승만이 연설하는 모습이 담긴 사진이기에 그 자체로 바로 연상케 되어 함께 쓰이고 있다. 이 짤만 붙으면 어떤 주장이라도, 심지어 그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인이나 증거 등이 있어도 신빙성이 증발하는 마법의 짤방.[2] 이러한 점은 드립과 유사하다.[3] 이 연설은 영화 부산행의 행정안전부 장관의 연설의 모티브가 되었다.[4] 북진 통일을 원했으며 국민들에게도 그것을 약속으로 내걸었던 이승만의 역사적 행보와 매우 어울린다는 점에서, 역사를 어느 정도만 알고 자세히 실증 자료를 찾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진짜 연설이라고 보일 정도이다.[5] FBIS Daily Report, No.125, Korea, June 28 1950, ccc 5[6] 장영민, 한국전쟁 발발 직후 이승만 대통령의 라디오 특별방송 관련 자료, 한국근현대사연구 67, 2013.12, 985쪽[7] 장영민, 한국전쟁 발발 직후 이승만 대통령의 라디오 특별방송 관련 자료, 한국근현대사연구 67, 2013.12, 985쪽[8] 이런 조건으로 만들어진 조직이 전향한 공산주의자들을 모은 보도연맹. 실제로 보도연맹이 창설되었을 당시, 법무부장관과 경찰청장 같은 고위직들이 보도연맹에 가입한다면 모든 죄를 사면하고 앞으로 결코 처벌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정작 이승만 본인은 한국전쟁이 일어나자마자 국군과 경찰에 보도연맹 회원들을 모두 죽이도록 명령하였다. 그리하여 무려 20만 명에 달하는 보도연맹 회원들은 국군과 경찰에 의해 끔찍한 대량학살을 당했다.[9] 장영민, 한국전쟁 발발 직후 이승만 대통령의 라디오 특별방송 관련 자료, 한국근현대사연구 67, 2013.12, 982;985-986쪽[10] 장영민, 한국전쟁 발발 직후 이승만 대통령의 라디오 특별방송 관련 자료, 한국근현대사연구 67, 2013.12, 985-986쪽[11] 처음엔 대구까지 내려갔으나 이승만이 서울로 올라가야한다고 고집을 부려 다시 상행하던 중 대전역에서 다른 각료들의 만류로 내려서 대전에 임시수도를 세웠다.[12] 정부요인들이 피난하지 않고 서울에서 포로로 잡혔다면 이후 국정은 미증유의 혼란에 빠져들 가능성이 높다. 누가 직위를 승계하느냐부터 시작해서 그 혼란을 틈타 북한만 웃었을 것이다.[13] 이 블로그에는 이 밖에도 수많은 방송 역사의 자료들이 남아있다. 관심있는 위키러는 천천히 둘러보는 것도 좋을 듯.[14] '''북한군이 서울에 들어오기 불과 5시간 반 전이다!'''[15] 즉, 서울 시민들'''만'''이 방송을 들은 것이 아니다.[16] 이 기만 방송으로 인해 이승만이 하도 욕을 먹어서, 어쩔 수 없이 피난가라고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