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
1. 개요
1933년 2월 27일 베를린의 국가의회의사당(Reichstag)이 불탄 대사건. 당시 집권당인 나치당은 이 사건을 공산주의자들의 모략으로 몰아붙였고 결과적으로 수권법을 비롯한 나치당의 독재 체제를 완성하는 기폭제가 된다.
2. 전조
1933년 1월 비나치계 우파 정당들을 끌어 들여서 연립정권을 성사시키고, 총리 자리에 오른 아돌프 히틀러는 당시 대통령이었던 파울 폰힌덴부르크의 동의를 바탕으로 기존의 의회를 해산하고 새 의회를 구성하려는 선거를 준비 중이었다. 선거의 예정일은 1933년 3월 5일. 물론 히틀러의 목표는 나치당이 원내 과반수를 달성하여, 단독 정권을 성사시키고 궁극적으론 나치 일당 독재 체제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이 과정에서 독일 사회민주당과 독일 공산당의 무력화는 필수였다.
그런데 히틀러같이 대통령 비상대권으로 임명된 총리에게는 큰 약점이 있었으니 바로 대통령이 총리를 마음에 들지 않아하면 언제든지 내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히틀러의 전임 총리인 똥별 슐라이허와 파펜, 브뤼닝이 그렇게 쫓겨났다. 반대 세력 숙청과 약점 제거라는 목표를 동시에 이룰 수 있는 '''합법적(...) 수단'''으로 히틀러가 고른 것이 바로 총리에게 사실상 독일의 모든 권력을 위임하는 수권법이었다. 그러나 수권법은 원내 2/3에 해당하는 의원들이 동의해야만 효력을 발휘하는 것인데 나치의 원내 점유율은 불과 32%였고 수권법의 전제조건인 국가 비상사태도 일어나지 않은 상황이었다. 위기감을 고조시키고자 선거운동 기간 내내 나치당은 공산당이 혁명을 일으키고 말 것이라는 협박과 선동을 대중들에게 일삼았고 '''그러던 와중에...'''
3. 방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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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를 대략 일주일 정도 앞두고 있던 2월 27일 밤 9시에 국가의회가 '''불길에 휩싸였다!'''
2월 27일 저녁, 히틀러의 측근 에른스트 한프슈탱글은 히틀러와 저녁을 먹기로 약속을 한 상태였는데 심한 독감으로 내무부 장관 헤르만 괴링의 관저에서 자고 있었다. 그런데 초저녁 하녀가 비명을 질러대는 소리에 놀라 깨서 창문 밖을 보니 의사당이 불타고 있었다. 경악한 한프슈탱글은 파울 요제프 괴벨스에게 전화해서 히틀러를 바꿔달라고 소리를 질렀다. 괴벨스가 대신 말을 전해주겠다고 하자 한프슈탱글은 의사당에 불이 났다고 전하라고 했다. 괴벨스는 "지금 장난하는 거냐?" 라고 묻고는 한프슈탱글의 정신이 이상해졌다고 생각해서 히틀러에게 이 말을 전하지 않으려고 했으나 혹시나 해서 알아보니 사실이었다. 괴벨스는 당장 히틀러에게 보고했고 히틀러와 괴벨스는 즉각 10시 30분에 국회의사당으로 달려갔다. 괴링도 이미 현장에 도착한 상태였다. 조금 있다가 프란츠 폰파펜도 도착했다.
공산당원들이 독일을 뒤집기 위한 폭동을 준비하고 있다고 믿고 있던 나치들은 이 사건이 그 폭동의 전조라고 굳게 믿었다. 첫 보고에서 국회의사당의 비싼 실내 장식에 대한 걱정을 하고 있던 괴링은 현장을 보자마자 이것은 공산당의 소행이라고 소리질렀다. 이미 범인은 잡혔고 마지막에 의사당에 있던 것은 공산당 의원들이라는 것이 그 증거였다. 히틀러도 흥분해서 파펜에게 소리쳤다.
범인을 이미 체포해서 취조한 상태였던 프로이센 주 경찰청장 루돌프 딜스가 방화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미치광이의 소행이라고 보고하자 히틀러는 그의 말을 끊고는 공산주의자들이 이미 예전부터 음모를 꾸몄으니 공산당과 사민당 의원들, 그리고 제국군기단을 모조리 교수형에 처해야 한다고 외쳤다. 그날 밤 괴링의 관저에서 열린 회의에서 괴벨스, 괴링, 내무장관 빌헬름 프리크가 참여했고 격앙된 히틀러는 공산주의자들에게 보복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너무 흥분된 상태라서 구체적인 지시를 내리진 못했고 괴링의 지시 역시 비상령을 내리고 총을 쏘아도 좋으니까 공산당원들을 잡아들이라는 두루뭉술한 소리만 질러댈 뿐이었다. 이것 때문에 딜스는 회의장이 아니라 정신병원 같다고 혀를 내둘렀다."이것은 하늘이 내린 계시입니다. 부총리 각하! 만약 이번 방화가 내 짐작대로 공산주의자들의 소행이라면 우리는 이 악랄한 병균에 철퇴를 가해야 합니다!"
오후 11시 15분, 프로이센 내무부에서 히틀러는 긴급 회의를 소집하여 치안 문제를 논의하고 <민족의 감시자> 베를린 지국으로 이동하여 공산당을 규탄하는 기사를 써서 1면에 게재할 것을 지시했다. 프로이센 내무차관 루트비히 그라우에르트 역시 공산주의자들이 폭동을 일으켰다고 단정하고 프로이센 주에 긴급령을 선포할 것을 제안했다. 2월 28일 오전에 열린 내각회의에서 프리크는 '국민과 국가를 수호하는' 포고령을 제안하며 긴급령을 전국으로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포고령에는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 우편과 통신의 비밀의 자유를 비롯한 대다수의 시민의 권리를 무기한 제한하는 조치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어젯밤 미쳐 날뛰던 히틀러는 매우 침착해진 모습으로 더 이상 기다리는 것은 무의미하고 공산주의자들과의 전쟁에서 법에 구애받아서는 안된다고 외쳤다. 이미 괴링이 공산당에 대한 체포령을 발동했고 사회민주당원, 노동조합 간부, 좌파 지식인들도 마구 잡아들이고 있었다. 예비 검속으로 인해 2만 5천명이 체포되었고 독일 국민들은 이 조치가 독일의 철천지 원수 볼셰비즘과 살인범, 방화범, 날강도들을 청소해 준다고 환호했다.
4. 용의자 체포와 수권법 통과
용의자로 체포된 네덜란드 출신의 공산주의자 마리뉘스 판데르뤼버(Marinus Van der Lubbe)는 이 방화가 자신의 단독 행위였다고 주장했지만 히틀러는 당연히 이를 무시하고 독일을 차지하기 위한 공산주의자들의 음모의 시작이 이 방화였다고 발표했다. 이후 공산주의자들이 무차별적으로 체포되었다. 사건날 밤과 그 이후 며칠 사이에 4천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체포되었는데 공산당원들 뿐 아니라 사회민주당원들과 '좌익' 지식인들도 포함되었다. 이렇게 단기간에 대규모로 체포할 수 있었던 건 명단이 미리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3월 4일,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히틀러는 라디오를 통해 국민의 표를 호소했다. 3월 5일의 선거에서 나치당은 43.9%를 득표하여 647석 중 288석을 차지했고 나치당과 연정한 당들도 각각 8%를 차지했다. 공산당은 12.3%, 사회민주당은 18.3%를 차지하며 아직까진 죽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었지만 이미 나치당을 막을 수는 없었다.
흥분한 돌격대와 깡패들이 외교관들에까지 무기를 휘두르며 지방 정부들을 장악했고 도를 넘은 이들의 폭력에 대한 비판이 들어오자 히틀러는 이를 옹호하며 돌격대가 일으킨 외교적 물의는 공산당의 소행이라고 발뺌했다.
3월 23일의 수권법의 통과를 묻는 의회 표결에서 가톨릭 중앙당이 내전을 방지하자는 명목으로 나치당에 굴복했고 사회민주당 당수 오토 벨스가 사민당은 끝까지 인도주의와 정의, 자유, 사회주의를 고수할 것이라고 연설하며 저항하자 히틀러는 "독일은 자유로워지겠지만 당신들을 통해서는 아니다." 라면서 사민당 의원들은 투표하지 말라고 위협했다. 이날 표결에서 441표의 찬성표와 94표의 반대표가 나왔고 독일의 민주주의는 종말을 고했다.
국회의사당이 방화 사건으로 홀랑 타 버린 동안에는 임시로 베를린 오페라 하우스를 개조하여 사용했는데 수권법 가결 당시 찍힌 사진은 당연히 본래 국회의사당은 아니다.
5. 라이프치히 재판
1933년 9월 21일 방화 사건에 대한 재판이 열렸다. 위에 나온 것처럼 재판이 열리기도 전에 이미 독일 공산당이 금지되고 1933년 3월 24일 수권법이 통과되었으며 동년 7월14일 이래로는 독일에 오직 하나의 정당만이 존재하는 상태였다.
재판에 기소된 인물은 벽돌공 마리뉘스 판데르뤼버(네덜란드인), 독일 제국 전 의원 에른스트 토르글러(Ernst Torgler, 독일인), 작가 게오르기 디미트로프(Георги Димитров, 불가리아인), 법학도 블라고이 포포프(Благой Попов, 불가리아인), 제화공 바실 타네프(Васил Танев, 불가리아인)으로 총 5명이었다. 그 중 재판에서 현장 체포된 판데르뤼버는 방화를 인정하고 자신의 단독 범행임을 주장했지만 검사 측은 배후가 있으며 그것은 공산당이고 다른 피고인들이 방화를 방조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판데르뤼버는 1929년 네덜란드 공산당 청년조직의 일원이었지만 2년 후 쫒겨났고 '공산당 당원'인 적도 없었다. 다른 피고들은 화재 사건 이틀 후 공범에 대한 제보로 1만 마르크의 현상금을 걸었다. 며칠 후 한 식당 종업원이 판데르뤼버가 외국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모습을 보았다고 증언하면서 체포되었는데 이들은 판데르뤼버와 일면식도 없다며 자신들의 혐의를 부인하였다. 이 재판은 세계에서 관심을 받아 재판에는 각국의 외신 기자들도 참석하였다.
재판 도중 괴링이 증인 자격으로 출석하였는데 이 때 괴링과 피고인 게오르기 디미트로프가 설전을 벌였고 여기서 괴링은 궁지에 몰리자 분에 못 이겨 고함을 지르기도 했다.
괴링: 나가시오. 나쁜 놈, 나가!
디미트로프: 제 질문이 두려우십니까, 괴링 각하?
괴링: 나가라, 나가. 이 사기꾼아! 나가! 나가!
<쿠르트 리스 저. 'Prozesse, die unsere Welt bewegten(세계를 뒤흔든 재판)', p561>[1]
이런 달변으로 디미트로프는 유럽에서 일약 유명인사가 된다.(괴링이 독일 공산당과 공산주의자들을 맹비난하자)
디미트로프: 당신에게는 독일 공산당을 공격할 권리가 있습니다. 또 독일 공산당에게는 독일에서 계속 불법적으로 활동하며 당신들의 지배에 대항하여 싸울 권리가 있습니다.
재판장: 디미트로프, 본 법정에서 공산주의자들에 대해 선전하는 것을 금합니다.
디미트로프: 그(괴링)는 나치를 선전하고 있습니다.
재판장: 선전을 엄중히 금합니다.
<'Prozesse, die unsere Welt bewegten', p565.>
결국, 기소된 5명 중 마리뉘스 판데르뤼버만이 내란죄로 사형 선고를 받고 나머지 4명은 무죄 판결을 받았다. 히틀러는 재판 결과에 매우 격분했다고 한다. 무죄 판결로 풀려난 게오르기 디미트로프는 훗날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불가리아 인민 공화국의 1인자인 공산당 서기장에 오르면서 집권했다. 재판 당시 그는 불가리아에서 반란 참여로 사형을 언도받은 정치적 망명자였다.
마리뉘스 판데르뤼버는 재판 동안 정신이 온전치 못한 모습을 보였고 결국 1934년 1월 10일 단두대에서 처형당한다.[2] 이후 1967년에 유족인 형에 의해 이 사건에 대한 재심이 열려 판데르뤼버는 8년 형으로 형량이 감형되었다.
이후 이것도 인정할 수 없던 유족들에 의해 항소심이 진행되어 1980년에는 방화 혐의는 그대로 인정된 채로 무죄가 선고되었으나, 연방검찰이 다시 항소하면서 1983년 서독 연방 법원에서 무죄 판결이 철회되어 파기 환송되었다.
그 뒤 가족들이 재심 청구를 거듭한 끝에 최종적으로 2007년 앙겔라 메르켈 내각이 피고인이 정신질환자이며 나치 치하 정치범 재판이 공정하지 못했던 점을 감안해 판결을 무효화시키고 방화 혐의에 대해서는 따로 논하지 않고 사면복권하였다. 현재는 그의 고향인 레이던과 처형당한 라이프치히에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6. 나치 방화론
워낙 절묘한(?) 타이밍이라서 공산권에서는 히틀러와 나치당이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방화를 일으키거나 조장했다는 의견도 나왔었다. 방화범으론 괴링이 지목되었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나치가 훗날 폴란드 침공 때 한 짓을 가지고 이것도 나치의 자작극 아니냐는 생각으로 자료 검증을 했다. 하지만 근거없는 증언만 있을뿐 학계는 아직도 정확한 방화 범인이 누구인지에 대해 결론을 내리지 못 하고 있으며, 현재까지 논쟁 중인 사안이다.[3][4] 이러한 이유로 판데르뤼버는 여전히 방화범으로 분류되어 있으며, 메르켈도 그를 사면하기는 하였으나 범죄 자체를 부정하지 않고 판결만 불공정했다고 무효화시키는 선에서 그쳤다.[5] 2021년 1월 현재도 이 사건은 정신이상자가 저지른 국회의사당 방화를 나치가 정치권력 장악에 악용했다는 게 독일 정부의 공식 입장이다.
우선 괴벨스의 일기를 바탕으로한 랄프 게오르크 로이트의 《괴벨스》[6] 을 보면 나치의 히틀러는 물론이고 괴링과 괴벨스는 집권을 통해 공산당의 세가 강하던 수도 베를린을 '빨갱이들'로부터 탈환했다고 생각했고 '''국회의사당은 전리품으로 여겼다.''' 괴벨스와 히틀러는 실제 방화 사실 소식을 듣자 재차 사실인지를 확인하고 할 말을 잃고 현장에 부리나케 달려갈 정도로 매우 아까워 했다. 로버트 팩스턴의 <파시즘>에서는 나치 지도부가 이 방화 사건에 대해서 독일에서 볼셰비키들이 혁명을 일으키려는 증거로 파악하여 '''공포에 질렸다'''고 쓰고 있다. 괴벨스와 히틀러가 이 사건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살해버렸기 때문에 서술이 사실인지는 영원히 알 수 없게 되었다.
[1] 국내 정발명은 <악법도 법이다>(...)[2] 단두대는 프랑스 혁명 이후로도 살아남아서 작센 주에서는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까지 일반적으로 사형 방법으로 단두대를 썼고 나치는 사형수들의 공포심을 극대화 시키고자 엎드리는 게 아니라 누워서 칼날을 보게 하는 형태로 단두대 사형을 집행시키기도 했다(...)[3] "The Reichstag Fire". ''Holocaust Encyclopedia''. United States Holocaust Memorial Museum. Retrieved 12 August 2013.[4] DW Staff (27 February 2008). "75 Years Ago, Reichstag Fire Sped Hitler's Power Grab". ''Deutsche Welle''. Retrieved 12 August 2013.[5] 실제로 나치 통치 당시 재판 중에 정치적으로 악용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증거나 피고의 책임능력을 엄격하게 따지지 않고 대충 판결한 사건이 꽤 있는데, 독일 정부는 이들 사건을 재조사하여 문제가 있으면 판결을 무효화시키거나 재심을 통해 감형하는 조치를 취하고 있다. 단 범행 자체가 명백한 사실이라면 사면복권을 하더라도 언제까지나 용서받은 범죄자로 취급한다.[6] 국내명 '괴벨스, 대중선동의 심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