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오트 자동소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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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원
2. 개요
3. 개발 배경
4. 설계와 개발
5. 채용
6. 대중매체
7. 둘러보기
8. 관련 문서


1. 제원


'''Huot Automatic Rifle'''
'''Le fusil automatique Huot'''
''휴오트 자동 소총''

'''국가'''
캐나다
'''종류'''
자동소총
경기관총
'''역사'''
'''개발'''
조셉 알폰스 휴오트
'''개발 년도'''
1916년
'''생산 년도'''
1917년~1918년
'''생산 수'''
최소 5정
'''사용 국가'''
캐나다
'''제원'''
'''구경'''
7.7 mm
'''탄약'''
.303 브리티쉬
'''급탄'''
25발짜리 드럼탄창
'''작동 방식'''
가스작동식
'''중량'''
5.9 kg (비장전 시)
8.6 kg (장전 시)
'''전장'''
1,190mm
'''총열 길이'''
635mm
'''발사 속도'''
475RPM

2. 개요



Forgotten Weapons의 리뷰 영상
캐나다에서 생산한 제1차 세계 대전경기관총.

3. 개발 배경


1차 세계 대전 당시 해외 원정군을 60만명이나 보낸 캐나다는 영연방 소속으로 빅커스 기관총같은 영국제 기관총들을 대거 도입하는 것이 원래 계획이었다. 그러나 일단 생산된 기관총들이 포화 속에서 무적인 것도 아니고, 인명만큼이나 기관총도 많은 손실을 겪고 있었기에 영국군의 요구 수량을 채우기도 부족한 상황 속에서 캐나다 원정군에게 돌아가는 기관총의 양은 턱없이 부족할 수 밖에 없었다. "스트레이트 풀 볼트액션은 신뢰성이 떨어진다"는 미신에 시달렸던 로스 소총은 1915년 즈음에 이미 영국제 리-엔필드 소총들로 대체되었고, 엔필드 소총들과 동일한 .303 브리티쉬 탄을 사용하는 기관총의 종류는 그닥 다양하지 않았기에 루이스의 대체재도 구하기 어려웠다.

4. 설계와 개발


조셉 알폰스 휴오트(Joseph Alphonse Huot)는 퀘벡 출신의 기술자로 총기에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취미로 반자동 소총을 만드는 그런 독특한 인물이었는데, 그는 기관총 수량 부족 문제가 불거진 시점에서 더 이상 쓸모가 없어져 헐값에 팔려나오는 로스 소총들을 사들여 기관총으로 개조한다.[1] 첫번재 프로토타입을 본 캐나다군은 그를 소화기 개발부서에 정식으로 고용했고, 휴오트는 군의 지원을 받으며 개발을 이어나갔다.
로스 소총은 그 당시로 따지고 보면 그리 흔하지 않았던 스트레이트 풀 볼트액션 방식[2]을 사용했는데 이는 로스 소총이 타 소총들보다 훨씬 분당 발사속도가 빨라지게 할 수 있지만 동시에 로스 소총에 대한 미신과 작동불량을 일으키는 주범으로 지적되었다. 휴오트는 로스 소총용 총열 좌측 부분에 피스톤을 설치하고 총열에 가스구멍을 뚫어 격발시 나오는 가스가 노리쇠를 자동으로 뒤로 후퇴시킨다는 발상을 사용했는데 이것만으로 단순히 자동화기를 만들 수 있는것은 아니였기 때문에 노리쇠가 왕복하면서 망가지는것을 방지하기 위해 완충기가 설치되고 탄창에서 원활한 급탄을 위해 스프링 말고도 전용 급탄기구를 설치했으며 노리쇠가 후퇴하면서 사수의 얼굴을 다치는것을 방지하기 위해 철판을 덧대 이를 보호하게 하는등 굉장히 많은 개량이 이루어졌다. 이로 인해 탄창은 지나치게 무거웠고, 상부를 완전히 가리는 덮개 때문에 조준이 어려웠으며, 파지가 불편해 손이 큰 사람은 손잡이를 엄지로 감싸쥐지도 못할 정도로 비좁은 공간만 남아 있었다.
자동사격시 총열이 과열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루이스 경기관총의 냉각 총열 시스템을 사용하고 장탄수를 25발로 늘린 휴옷의 프로토타입 무기는 1916년 9월 즈음 작동이 가능한 시제품이 나왔고, 이는 1916년 말부터 1918년까지 캐나다는 물론 영국에서도 여러차례 혹독한 테스트를 받았다. 이 당시 휴오트의 프로토타입은 동시대 나왔던 제품들(특히 루이스 경기관총)과 비교 테스트를 받았는데, 군용 화기에 대한 개발 경력이 없는 사람이 개발한 컨버전 키트인데도 불구하고 휴오트 자동소총/경기관총은 영국군과 캐나다군으로부터 생각보다 좋은 평가를 받았다. 캐나다군과 영국군의 테스트에 의하면 휴오트 자동소총은 루이스 경기관총보다 대응사격도 빨랐고, 신뢰성도 우월했으며 설사 작동불량이 생겨도 이를 해결하는데 시간이 덜 들어갔으며 결정적으로 루이스 경기관총 가격의 1/20 수준밖에 안되는 저렴한 가격(루이스 경기관총 생산에는 $1,000 캐나다 달러가 필요하지만 휴오트 자동소총은 생산에 $50 캐나다 달러만 소요)을 제시했다. 휴오트의 프로토타입 화기는 캐나다군의 제식 화기로 채용될 가능성이 급격하게 높아졌다.

5. 채용


휴오트 경기관총/자동소총은 저렴한 개조비용과 우수한 성능으로 캐나다군의 전력 증가에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물건이었다만, 아쉽게도 제식으로 채택이 되지는 못했다. 캐나다군이야 자국내에서 개발된 우수한 총으로 대호평을 받았으나, 전쟁에 들고 나가기 위해서는 영국군의 심사도 거쳐야 했다. 이 때는 이미 전쟁이 끝나가던 시기였고, 영국군의 입장에서는 기관총의 수량도 안정화되어 가고 있었던데다 휴오트가 이미 병사들이 익숙하게 조작할 수 있는 루이스를 대체할 정도로 압도적인 성능을 자랑하지는 않았기에 최종적으로 채용을 거부했다.
4-5년을 거의 독자적으로 이 자동소총의 개발에 전념한 휴오트는 군에서 더 이상 줄 일거리가 없다 하여 해고되기에 이르러 진퇴양난의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민간에 팔아보려고 해도 1919년 캐나다의 민간 시장에 기관총을 살 사람은 없었고, C$36,000 상당의 빚을 지게 되어 오랫동안 힘든 시기를 보냈다. 캐나다 정부를 상대로 한 소송은 승소하고도 1936년이 되어서야 C$25,000 가량을 휴오트에게 지급했고, 겨우 재기에 성공한 휴오트는 1942년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캐나다군의 소화기 개발에 참여했으나 큰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고, 1947년 사망했다.
총 5정이 테스트를 위해 제작되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오늘날에는 4정만이 남아 있다. 2정은 캐나다 오타와의 캐나다 전쟁박물관 (Canadian War Museum)에서 소장하고 있으며, 밴쿠버의 시포스 하이랜더 박물관 (The Seaforth Highlanders of Canada Museum)에 1정, 그리고 핼리팩스의 육군박물관 (Army Museum)에 1정이 보존되어 있다.

6. 대중매체



7. 둘러보기





8. 관련 문서



[1] 이러한 시도는 휴오트가 처음은 아니었다. 총기 만든 경험이 있다 하는 나라는 각자 볼트액션 소총을 가져다 반자동이나 자동으로 개조를 시도했고, 각자 그 접근방식도 달랐다. 극히 일부만이 제식 채용되었다.[2] 일반 볼트액션 소총들이 노리쇠를 60도에서 90도 사이의 각도로 꺾은 다음 뒤로 당겨야 탄피를 배출할 수 있는 것과 달리 단순히 장전 손잡이를 뒤로 당기면 노리쇠가 홈을 따라 자동으로 회전을 하며 탄피를 배출하는 방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