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에의 의지
1. 니체 철학의 용어
니체 철학에 등장하는 용어. '''살아남아야만 하는 생명의 맹목적인 욕구와 욕망의 의지를 넘어서는, 자신의 삶을 제대로 살고자하는 욕구와 욕망의 의지'''를 의미한다. 니체의 말에 따르면, 노예도덕에서 벗어나 스스로가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의지'를 말한다.독일어로는 "der Wille zur Macht"(생략해서 ' WM '이라고 한다.), 영어로는 "the will to power".생명체를 발견할 때마다 나는 힘에의 의지도 함께 발견했다. 심지어 누군가를 모시고 있는 자의 의지에서조차 나는 '''주인이 되고자 하는 의지'''를 발견했다.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中
1.1. 쇼펜하우어의 생의 의지
쇼펜하우어는 인간이 살아있다는 것 자체에서 비롯된 '생의 의지'가 인간의 행위와 인식을 지배한다고 파격적인 주장한다.
이것이 당대에 파격적이었던 이유는 그때까지의 서양 철학의 흐름 때문인데, 서양철학은 플라톤 이래로 사람을 '정신(=기독교 영혼)'과 '물질(=신체)'로 나누어서 보는 입장이 지배적이었다. 그런데 쇼펜하우어는 이러한 구분이 개소리라는 것이다. 요즘식으로 말하면, 정신과 영혼은 사람의 신체 일부 기관인 뇌에서 비롯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 그리고 자연히 우리 뇌가 하는 정신적인 활동도 몸에 붙어있기 때문에 이런저런 육체적 욕망등의 영향을 항상 받을 수 밖에 없다. 이러한 몸에서 비롯되는 영향을 싸잡아서 '생의 의지'라고 이름 붙인 것이다. 다만 쇼펜하우어는 이러한 '생의 의지'를 탐탁치 않게 바라봤다. 이러한 몸으로 부터의 영향을 인간의 생각을 엉뚱하고 이상한 방향으로 이끄는 방해물 정도로 취급했다.
가령 인간의 욕망이 무한한 것은 맹목적인 생의 의지가 표출된 결과라 생각했으며, 쇼펜하우어는 신이라는 관념 또한 맹목적인 생의 의지가 객체화되어 나타난 것이라고 했다. 살아 남고자 하는 갈망 자체가 신이라는 망상을 만들어 냈다는 것.[1]
쇼펜하우어는 결국 이러한 끝이 없는 욕망이 인간을 파멸로 이끌기 때문에 금욕적인 삶을 살것을 주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이론대로라면 삶은 허무하고 고통스러운 것이 되어버린다. 쇼펜하우어가 염세주의자로 불리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점 때문이었다.
그가 이렇게 '생의 의지'를 탐탁치 않게 생각한 이유는, 그가 플라톤의 철학 전통의 정신과 신체로 나누어 보는 구닥다리 세계관에서 벗어나기는 했지만, 여전히 사람의 정신이 고귀한 것이고 육체는 더러운 것이라는 편견을 가졌기 때문이다.
1.2. 상세
니체는 쇼펜하우어의 이론을 약간 비틀어서 힘에의 의지를 주장했는데 인간이 욕망이 무한한 것은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욕망은 단지 살아남기 위해 존재하는 것만이 아니라 '''존재를 넘어서 초월을 하려는 갈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골자로 니체는 힘에의 의지가 인간 세상의 실체라 보았다.
니체는 국가라는 실체조차 힘에의 의지의 결과물로 생각했으며 국가를 만들고 국가를 숭배하고 다른 국가와의 대립과 투쟁 또한 결국 힘에의 의지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는데 이때 니체가 힘에의 의지를 비판적인 개념으로 사용한 것에 주목해야 한다.
즉, 더 높은 것을 추구하기 위해 언제든지 파괴되도 좋은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니체를 어렴풋이 알고서 사악한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몇몇의 사람들은 이러한 측면을 인지하지 못한 채 니체를 신분제도 같은 것을 옹호하는 수구적인 인물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니체에게 있어서 '인간은 평등하지 않다' 라는 식의 표현은 세계에 절대적인 가치관에 얽매이지 않은 인간의 자유를 이야기한 것이다. 어떠한 가치, 관념이건 하늘 높이 추앙되거나 숭배되는 것을 지극히 거부했으며,[2] '''인간의 삶은 하늘이 아닌 대지에 있는 것'''이라고 설파했다.
니체는 저편에 무엇인가에 기대어 인간을 논하는 측면을 철저하게 부정하였으며 그 대표주자가 "신은 죽었다"로 신이 인간의 삶에 족쇄를 채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힘에의 의지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선 니체의 이러한 과격한 말들의 이면에 있는 '''극복을 위한 파괴'''라는 순환적인 의미들을 헤아릴 줄 알아야 한다. 어떠한 것도 숭배의 대상이 아니다. 니체에게 있어서 숭배라는 것은 창조자인 인간이 자신의 피조물인 무언가에 지배 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니체의 특징을 통틀어서 니체를 '''망치의 철학자'''라 표현하기도 하는데, 극복과 인간의 주체성, 자유로운 존재로서의 변혁 등을 말한 니체의 모습이, 마치 망치를 들고서 인간의 초월을 가로막는 낡은 가치들을 파괴하며 나아가는 모습 같다는 것에서 붙여진 것이다.
1.3. 긍정에의 의지
니체는 이전 시대에서 악이라 불리던 여러 행위를 긍정했다. 또한 니체는 힘에의 의지에 지배를 당하는 인간 세계에서 못가진자, 남보다 약한 자들의 원한[3] 이 세계에 악이라는 개념을 만들었고, 자신보다 앞서간자들을 증오하며 자신의 처지를 정당화 하기 위해, 외적인 힘에의 의지로서의 행위가 아닌, 내면의 복수를 행해 왔다고 했다. 밖으로 표출되며 실현되지 않는 오로지 내적인 삐뚤어진 힘에의 의지의 작용이 기존의 힘에의 의지로서 초극이라는 가치를 부정하고, 외부의 행위는 바꾸지 않는 상태로 내적으로만 작용했기에 그것의 작용은 '현실처지의 정당화'였다. 즉 다시말하자면 외부로 표출되지 않은 힘에의 의지의 작용은, 그 스스로 외적행위로서의 개혁을 부정했기에 내적으로만 초극을 행해왔는데, 그것은 고귀한 것과 비천한 것의 '''가치의 전도'''로서 심원적 본성 위에 원한의 감정이 그늘을 드리운 것이었다. 갈망 보다는 금욕을, 싫증 보다는 만족을, 투쟁보다는 굴복을, 당당함 보다는 겸손을 선이라 칭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본래의 가치가 아니기에 불안한 것이었고, 비천한 가치를 따르는 자들은 그러한 거짓말이 들통나는 것을 두려워 했기에 그 가치를 신성한 것이라 칭하며 모든 종류의 비판과 의심을 불가능하게 했다. 인간의 심원적 본성위의 지배자가된 원한의 감정은, 인간의 부정할 수 없는 본성을 악으로 규정하고 원죄화 함으로서 그것을 인간 자신으로 부터 박탈하여, 인간 자신을 스스로에게서 소외시켰다. 넘어서고자 하길 원하는 인간의 본성이 깊은 심연 속으로 유폐되고 남은 것은 본래의 모습이 아닌, 굴복하는 덕, 그것을 정당화 하는 덕, 원한의 덕에 의하여 규정되고 만들어진 거짓된 '''인간'''의 모습이었다. 결국 신성화 되어버린 거짓말은 처지를 벗어나기 위한 투쟁을 행하기 보단, 처지에 굴복하게 만들었고, 이 행위는 결국 만인을 굴종하는 노예로 만들어 버렸으며, 이러한 가치는 결국 '''노예도덕'''에 불과한 것이라는게 니체의 주장이다.
하지만 원한의 덕이 유폐한 본성은 본래 나의 것이 아닌가? 나 자신의 모습, 나의 미래, 나의 삶의 의지를 나에게서 박탈하여, 그 위에 '''인간적인''' 형상을 올려 놓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을 지워 버리고 '''군중'''으로 대체되어 버리는 것은 아닌가? 나는 나의 의지를 언제나 행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증오해야만 할까?
니체는 전도된 가치가 되돌려 지길 원했다. 굴복하기 보다는 세상을 개혁하며 처지를 개선하기 위해 투쟁하는 힘에의 의지를 실현하는 세상의 주인으로서의 '''주인도덕'''을 부르 짖었고, 그것을 실현하며 극복의 극복을 더해 나아가는 인간을 위버멘쉬(극복인,Übermensch) 이라고 표현했으며 이것을 인간이 지향해야할 궁극의 의지로 보았다.우리는[4]
둘 다 선한 일도 악한 일도 하지 않는 자들이다. 우리는 선악의 저편에서 우리의 섬과 우리의 초원을 발견했다. ...... 우리가 죽도록 서로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우리가 죽도록 사랑하지 않는다 해서 서로를 싫어해야 하는가?-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3.1. '권력에의 의지'가 맞다?
사족으로, 본 문서의 항목명인 '힘에의 의지'는 일본어식 표현(力への意志)을 직역(중역)한 표현이 아니다. 영어로는 Will to Power 이라쓰고, 이 Power는 앞서 설명한것과 같이 자신이 원하는것을, 숭배의 대상에 압제되지 않으면서 자신이 원하는걸 추구할수 있는 힘을 가리킨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어판 위키백과에서는 '권력 의지'로 해석한것은 그다지 명확한 표현이 아니다. 국내에서의 권력은 자신이 마음대로 하는 것과 동시에 남에게 어떤 것을 강제시킬 수 있는 영향력을 의미하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니체가 추구한 힘중에 하나일 뿐이다. 경우에 따라선 성급한 일반화/ 오역이라는 의견이 한국 철학계에서 널리 퍼졌으며, 특히 책세상판 니체 전집의 편찬과 이에 기여한 한국의 니체 연구자들의 공이 크다고 할 수 있다. [5] 자신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힘을 굳이 "힘"이 아닌 다른 단어로 번역하자면 권력보다는 자주권에서 파생하여 자주력 정도가 적당하다.
그러나, 일부 소수 의견에 따르면 Wille Zur Macht를 '힘에의 의지'로 번역하는 것이 오히려 부적절하며, '권력에의 의지'라는 예전에 널리 쓰이던 표현이 맞다는 주장이 있다. 이 의견을 요약하자면, 니체의 원문에서도 Macht(권력)와 Kraft(힘)가 명백히 구분되어 쓰이고 있으며, 니체의 'Kraft'는 강자/약자, 지배자/노예를 구분하는 질적 차이를 부여하는 가치판단적 개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Macht'에는 이러한 가치판단이 들어가 있지 않으며, 약자나 강자건 간에 자기 나름대로의 '권력'을 추구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6]
한편, 바로 윗 문장에 달린 각주의 레퍼런스, 특히 그 제목을 보면 이러한 주장이 제기되는 맥락을 어느정도 유추할 수 있다. 이러한 해석은 '정치적인 인물 니체'에 초점을 맞추고[7] , '힘에의 의지' 등의 번역어를 내세우는 한국의 주류 니체 연구가들이 니체를 '''지나치게 탈정치적'''으로 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8] 2008년에 영남대 법학과 박홍규 교수가 <반민주적인, 너무나 반민주적인> 이라는 니체 비판서를 출판하였고, 그에 대한 응답쯤 해서 나온 책이 바로 위에 언급된 김진석의 것이다. 두 책의 논지가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으나, 대체적으로 '정치철학적 관점에서 바라본 니체'는 '''반민주주의적이고, 차별을 옹호하며, 이에 수반하는 폭력과 희생을 긍정하는 면모가 있는''' 철학자라는 것인데, 한국의 니체 연구자들이 이러한 점을 별로 주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9]
다만 니체의 경우에는 포스트모더니즘부터 페미니즘, 심지어는 기독교까지 수많은 계열에서 자신들의 논거를 지지하기 위해 그의 사상을 다양한 방법으로 해석하고 응용하기 때문에, '''박홍규나 김진석 등이 말하는 '정치적인 인물 니체'가 반드시 옳고, 한국의 니체 연구자 주류가 말하는 '탈정치적인 니체'가 엉터리 학설이라고 단정하기에는 힘들다. '''
2. 여담
동생인 엘리자베트가 니체 사후 남긴 미발표 저작들을 모았다는 권력에의 의지(Der Wille zur Macht)(1901)라는 책을 펴내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 책은 히틀러의 광적인 지지자였던 엘리자베트에 의해 짜깁기 및 왜곡이 되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일단 출간한 계기 자체가 히틀러나 나치에서 니체의 사상에 관심을 보였고 니체 사상이 시중에 유행하게 되자 돈도 벌고 나치의 관심도 받아볼까 해서 했던 것. 결국 히틀러의 관심보다는 그녀의 광적인 히틀러 추종 때문에 니체 사상이 나치와 관련되었다는 소문이 퍼지게 되었고 "힘에의 의지"라는 개념에 대해서도 일반인들에게 편견을 가지게 하였다.
[1] 이것은 또한 쇼펜하우어의 무신론적 입장인데 쇼펜하우어는 만약 인간이 죽지 않는다면 신을 찾지 않을 것이라고 표현했다.[2] 그런 신성한 말보다 더 고약한 강도나 살인자가 세상에 존재한 적이 있었던가? 모든 삶 자체에 강탈과 살인이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런 말이 신성하다고 불림으로써 진리 자체가 살해되지 않았던가? 또는 모든 삶에 모순되고, 그 삶을 거역하는 것을 신성하다고 부른 것이 죽음의 설교 였던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3부 12장 中-[3] 르상티망이라고도 많이 불리며, 좌절감은 좌절감의 원인, 즉 자신의 좌절에 대한 책임 부여로 확인되는 것에 대한 적대감이다.출처-위키백과[4] 삶과 자신을 의미한다.[5] 적어도 이들이 펴낸 니체 전집에서는 Wille Zur Macht를 '힘에의 의지'로 번역하기 때문이다.[6] 김진석의 '니체는 왜 민주주의에 반대했는가' 252~253p에 근거함[7] 그러나, '정치적인 인물 니체' 라고 해서 니체가 정치인이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사실, 니체의 생애 중에 가장 '정치적'이었다고 볼 만한 것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포병 장교로 참전한 것 정도가 다이며, 그가 독일이나 다른 나라의 정계에 투신한 적은 없다.[8] 니체가 나치즘에 영향을 주었다는 일각의 인식이 있기 때문이다.[9] 물론 이 견해에 대해서도 비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니체에게 어떤 정치적인 아이덴티티를 씌우는 것 자체가 상당히 위험한 작업일 수 있다. 또한 니체의 언어가 위에서 언급되다시피 폭력성을 띠는 것은 맞긴 하나, 이것은 니체의 사상과 언어를 글자 그대로 편협하게 독해한 결과에 불과하다. '도덕의 계보'에서도 기생충에 관련된 비유가 나타나는 부분을 보면 니체가 격렬한 언어 자체로만 평가되어서는 안 되는 인물임을 알 수 있다. 니체가 '정신적 귀족주의'를 통해 차별을 옹호한다는 것은 맞긴 한데, 영원회귀나 디오니소스적 긍정과 같은 내용들을 조금만 더 깊게 이해하면 니체를 원색적으로 차별주의자로 비난하는 것은 삼가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