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젊은 시절
나이든 후
1. 개요
2. 연표
4. 영향
5. 에피소드
6. 주요 저서
6.1. 한국어 번역서
6.2. 기타 서적 및 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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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르투어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1788년 2월 22일 ~ 1860년 9월 21일)는 독일[1]철학자다. 쇼펜하우어는 자신이 칸트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였으며 칸트의 사상을 올바르게 계승했다고 확신했다. 당대의 인기 학자였던 헤겔, 피히테, 셸링 등에 대해서는 칸트의 사상을 왜곡하여 사이비이론을 펼친다며 강력히 비판했다. 쇼펜하우어가 박사학위 논문으로 쓴 <충족이유율의 네 겹의 뿌리에 관하여>는 철학(인식론)의 고전이 되었다. 20대의 젊은 나이 때부터 수년 간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쓰기 시작하여 1818년에 출간하였다. 대학강의에서 헤겔과 충돌한 후 대학교수들의 파벌을 경멸하여 아무런 단체에도 얽매이지 않고 대학교 밖에서 줄곧 독자적인 연구활동을 지속하였다. 이후 자신의 철학이 자연과학의 증명과도 맞닿아 있음을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라는 책에서 주장했다. 그 뒤에 윤리학에 대한 두 논문을 묶어 출판하였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가 출판된 지 26년이 지난 1844년에 개정판을 출간하였다. 이후 <여록과 보유>라는 인생 전반에 관한 수필이 담긴 책을 출간했고 이 책은 쇼펜하우어를 유명 인사로 만들었다.
쇼펜하우어는 1820년 대에 동양학자 프리드리히 마이어를 통해 힌두교와 불교에 관해 알게 되었다. 이 종교들의 핵심교리 속에 자신과 칸트가 도달한 결론과 같은 것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먼 과거의 동양 사상가들이 서양과는 전혀 다른 환경, 언어, 문화 속에서 근대적인 서양철학의 과제에 대해서 같은 결론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 발견을 쇼펜하우어는 글로 써서 남겼고 서양에서 최초로 동양철학의 세련된 점을 독자들에게 알려주었다. 쇼펜하우어는 서양철학과 동양철학 간의 유사성을 말한 철학자이자 자신이 무신론자임을 노골적으로 표명한 독창적인 철학자로 손꼽힌다. 19세기 말에 유행하여 수많은 사상가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2]

2. 연표


  • 1788년 2월 22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항구 도시인 단치히에서 상인이었던 아버지 하인리히 쇼펜하우어와 소설가인 어머니 요한나 쇼펜하우어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 1793년(5세) 2차 폴란드 분할로 단치히가 프로이센 왕국에 합병되자 가족이 함부르크로 이주했다.
  • 1797년(9세) 여동생 아델레가 출생했다. 아버지가 프랑스 르아브르에 있는 친구 집에 쇼펜하우어를 맡겼고 여기서 쇼펜하우어는 2년 간 지내며 프랑스어를 익혔다. 아버지는 쇼펜하우어가 프랑스어를 확실히 익히길 원했고 결과에 만족스러워했다.
  • 1799년(11세) 프랑스에서 돌아와 상인 양성기관인 룽게 박사의 사립학교에 입학했고 이곳에서 4년 간 공부했다. 아버지는 쇼펜하우어가 자신의 뒤를 이어 사업가가 되기를 희망했다.
  • 1800년(12세) 아버지와 함께 하노버, 칼스바트, 프라하, 드레스덴을 여행했다.
  • 1803년(15세) 상인이 되라는 아버지의 권유로 온 가족과 함께 유럽 여행을 했다. 이 여행은 상인이 되기 싫어하는 쇼펜하우어를 달래기 위한 것이었다. 런던에 도착하여 신부 랭카스터의 집에서 머물며 영어를 익혔다.
  • 1804년(16세) 프랑스를 여행했으며 다시 스위스, 빈, 드레스덴, 베를린을 거쳐 돌아왔다. 쇼펜하우어는 여행 도중에 사색하며 많은 일기를 썼는데 진지한 고민이 많았다. 단치히에서 상인 실습을 시작했으나 무관심했다. 이 시기에는 아버지의 서재에 드나들며 문학, 수학, 역사 등을 독학했다.
  • 1805년(17세) 아버지가 창고 통풍창에서 떨어져 사망했다. 자살한 걸로 추정됨.
  • 1806년(18세) 아버지 사망 후, 가족이 바이마르로 이주했다. 쇼펜하우어만 함부르크에 남아서 상인 실습을 지속했다. 쇼펜하우어는 몰래 근무지를 이탈하여 골상학으로 유명한 프란츠 요제프 갈의 공개강연을 들으러 가기도 했고 아버지의 희망대로 상인이 될 생각은 없었다.
  • 1807년(19세) 어머니의 권유로 상인 실습을 중단한 후에 고타에 있는 김나지움에 입학했다. 라틴어그리스어를 엄청난 열정으로 학습했다. 고전어를 가르친 교사들은 쇼펜하우어가 미래에 뛰어난 고전학자가 될 것이라고 칭찬했다. 쇼펜하우어는 1년도 못가 김나지움을 자퇴했다.
  • 1808년(20세) 쇼펜하우어는 에어푸르트를 방문했다. 마침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국제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머물고 있었다. 어느 극장에서 나폴레옹이 주최한 연극들이 공연되었는데 쇼펜하우어는 관람할 기회를 얻었다. 연극이 시작되기 전에는 나폴레옹에게 욕설을 해대더니 연극이 끝난 후에는 나폴레옹에게 극찬을 해대느라 호들갑떠는 여성관객들(지위 높은 귀족여성들)을 쇼펜하우어는 신랄하게 비난했다.
  • 1809년(21세) 괴팅겐대학교 의학부에 입학함. 한 학기 동안 의학을 공부했지만 철학에 더 흥미를 두었다. 대학에서 화학, 물리학, 천문학, 수학, 언어학, 법학, 역사, 비교해부학, 생리학 등 여러 강의에 적극 참여해서 공부함. 집에 돌아와서도 사색하며 꼼꼼히 공부하기도 했다. 쇼펜하우어는 학교의 몇몇 천박한 교수들의 강의보다도 이미 죽고없는 과거의 위인들이 남긴 작품들이 더 가치있을 때가 많다고 생각했다. 강의에 대한 개인적인 감상문과 논평을 많이 썼으며 몇몇 교수들의 의견을 비판하고 논리적으로 박살내려는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쇼펜하우어는 자신이 습득한 당대의 자연과학적인 지식을 토대로 철학적인 생각을 하는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 1810년(22세) 철학자인 고틀로프 에른스트 슐체(Gottlob Ernst Schulze)의 강의를 들었다. 슐체에게 특히 플라톤칸트를 깊이 연구해보라는 조언을 들었다. 스승 슐체의 진지한 조언은 쇼펜하우어에게 큰 영향을 끼침.
  • 1811년(23세) 어머니가 당시 독일 문학계의 거장인 크리스토프 빌란트에게 쇼펜하우어가 철학 전공을 못하도록 설득해줄 것을 부탁함. 78세인 빌란트는 23세의 쇼펜하우어와 만나서 설득은커녕 쇼펜하우어의 태도에 감명받아 자상한 조언과 격려를 해주었다. 결국 쇼펜하우어는 제대로 철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함. 가을에 베를린대학교 (현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로 전학했다. 베를린대학에서는 동물학, 지리학, 천문학, 생리학, 시학, 어류학, 식물학, 조류학 등 여러 강의를 들음. 피히테의 강의를 열심히 들었다. 당대의 유명 학자였던 셸링, 피히테의 사상을 공부했으나 회의를 품고 이들을 혐오하게 되었으며 후에 자신의 저서에서 이를 대놓고 드러내었고 일기에도 비판하는 글을 썼다. 특히 피히테에 대해서는 "대중 앞에서 웅변을 토해내며 진지한 표정으로 심오한 사상가인 척하는 사기꾼" 정도로 평가했다. 반면에 스승과 제자로서 서로 잘 통한 일도 있었는데 바로 고전학자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볼프의 강의였다. 볼프가 주도하는 고대 그리스 역사와 철학 강의에 쇼펜하우어는 존경심을 표했다.
  • 1812년(24세) 플라톤, 임마누엘 칸트 등 여러 사상가를 본격적으로 탐구함. 베이컨, 존 로크, 데이비드 흄 등의 영국 사상가를 깊이 탐구함. 슐라이어마허의 강의를 열심히 들었지만 매우 실망하고 말았다.
  • 1813년(25세)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 연합군과 프랑스 나폴레옹 군대 사이에 전쟁이 재발했다. 쇼펜하우어베를린을 떠나서 루돌슈타트에서 학위 논문인 <충족 이유율의 네 겹의 뿌리에 관하여>를 완성했다. 이 책은 쇼펜하우어 사상의 기초가 되는 책이다. 이 논문을 예나튀링겐 주립대학교에 제출하여 철학 박사학위를 얻었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에게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을 증정했다. 괴테는 이 논문을 보고나서부터 쇼펜하우어를 제대로 지지하였다. 수개월 동안 괴테와 교제하며 색채론에 관해서 연구하고 토론했고 괴테는 연구에 필요한 지원을 많이 해주었다. 괴테는 가끔 쇼펜하우어를 자기 집에 초대해 다양한 주제를 놓고 대화를 나누었다. 바이마르의 공공도서관에서 아시아 관련 잡지를 읽고 탐구하기 시작했다.
  • 1814년(26세) 바이마르의 공공도서관에서 <우파니샤드>의 라틴어 번역본 <우프네카트>를 읽고 탐구했다. 어머니와 쇼펜하우어는 심각한 갈등을 겪었고 이 일 이후로 다시는 만나지 않았으나 편지교류는 가끔했다.
  • 1816년(28세) 괴테와 색채론에 관해 교류하여 얻은 결실인 <시각과 색채에 관하여>가 발표되었다. 이 논문에서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실험을 토대로 뉴턴의 색채론과 괴테의 색채론을 비판하기도 했다. 괴테는 제자에게 비판받은 이 일을 베를린의 친구 슐츠에게 편지로 알렸고 약간 언짢았으나 쇼펜하우어를 대견스러워했다.
  • 1818년(30세) 일생의 역작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완성했다. 자신의 책이 역사적 의의가 있다는 것을 확신하던 쇼펜하우어는 1년 동안 100권밖에 팔리지 않자 자신의 책을 몰라보고 무시하는 태도를 취하는 동시대 교수들에 대한 증오심이 차올랐다. 쇼펜하우어는 괴테의 며느리(오틸리에)와 친분이 있던 자기 여동생의 편지를 통해 괴테가 이 책을 만족스럽게 읽었다는 것을 알았다. 괴테는 쇼펜하우어를 직접적으로 칭찬하지는 않았다. 책 출판을 기념삼아 이탈리아로 여행했다. 1819년 봄에는 나폴리를 방문했다. 나폴리에서는 영국 청년들과 교류했다. 쇼펜하우어는 영국을 평생 동안 동경했으며 영국인들조차 쇼펜하우어가 영국인인 줄 알 정도로 완벽한 영어발음을 구사했다. 어머니가 파산위기에 처하자 속히 귀국하여 도와주웠으나 어머니는 쇼펜하우어의 충고를 무시하다가 낭패를 겪고 말았다.
  • 1819년(31세) 베를린대학교 (현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에 강사직을 지원했다. 헤겔의 강의 시간과 같은 시간에 강의할 것을 희망했다.
  • 1820년(32세) 채용 여부가 결정되는 시범 강의에서 통과함. 당시 50살이었던 노련한 헤겔이 쇼펜하우어와 강의 중에 약간 논쟁했다. 강의 계획은 1820~1822, 1826~1831년까지 수립돼 있었지만 인기가 없어서 한 학기만에 끝남. 이후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저서 곳곳에서 헤겔, 피히테같은 강단학자에 대한 불만을 표출했고 몽상적인 이론을 퍼트려서 대중을 속여먹는 저열한 사기꾼, 대중들의 두뇌를 해치는 넌센스 삼류작가, '철저히 무능하고 간사한 대학교수 패거리'의 두목이라며 비난했다. 예를 들면 쇼펜하우어는 자기 책에서 독일 젊은이들과 자기 세대 사람들이 헤겔의 이론을 공부하느라 두뇌를 손상시켰고 인생을 허비했다며 매우 한탄하고 있다. 더군다나 헤겔의 이론은 당대의 지배이념으로 군림하며 정치에도 영향을 주고 있었다. 결국 쇼펜하우어는 철학이라는 것을 대학교에서 강의한다는 것 자체가 부적합하다고 여겼고 교수들의 파벌 자체를 증오했다. [3]
  • 1822년(34세) 이탈리아로 여행했다. 이탈리아의 문화, 예술, 환경을 경험하고 이에 대해서 배우고 기록했다.
  • 1823년(35세) 여행을 마치고 독일로 돌아옴. 여러 질병과 청각장애를 겪었는데 가장 울적한 시기를 보냈다. 뮌헨에서 겨울을 보냈다.
  • 1824년(36세) 가슈타인(스위스), 만하임, 드레스덴에서 체류함. 쇼펜하우어는 "멀쩡히 잘 걷는다는 사실만으로 나와 수준이 대등하다고 여기는 인간들과 가급적 사귀지 않기로 결심했다"고 일기에 쓰며 고독한 심정을 드러냈다. 겨울에 데이비드 흄의 <종교의 자연사>와 <자연종교에 관한 대화> 등을 번역할 계획이었으나 도와줄 출판사를 구하지 못하고 말았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 대한 악평이 좀 나오기도 했으나 작가 장 파울은 호평했다.
  • 1825년(37세) 베를린으로 돌아와 우울한 나날 속에서 스페인어를 열심히 학습해나갔다. 번역가로서 스페인어책을 번역하기도 함. 언어능력만큼은 나날이 좋아졌는데 예전에 익힌 그리스어, 라틴어, 프랑스어, 영어, 이탈리아어 외에 스페인어에도 매우 익숙해졌다.
  • 1831년(43세) 이 해에 콜레라가 베를린에 퍼지자, 베를린을 떠나서 프랑크푸르트로 이주하여 여생을 보냈다.
  • 1833년(45세) 프랑크푸르트에 제대로 정착함. 유행이 지난 옷을 항상 입고 다녔으며 애완견을 데리고 정해진 시간에 산책을 했고 혼잣말로 이상한 소리를 하기도 하여 프랑크푸르트 주민들의 희한한 구경거리가 됨. 쇼펜하우어의 저서가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 쇼펜하우어는 꼭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집밖에 나돌아다니지 않기로 결심했다. 이 쯤에 쇼펜하우어는 여동생과 어머니와 편지교류를 했고 작품활동으로 나날을 보내던 어머니는 아들을 걱정하는 편지를 보냈다.
  • 1835년(47세) 프랑크푸르트에서는 세상을 떠난 괴테를 위해 기념비 건립 계획을 세웠다. 쇼펜하우어는 당국에 괴테 기념비에 관한 건의서를 제출했다. 인류를 위해 온몸으로 활동한 정치인들, 군인들, 개혁자들같은 위인들을 기념하려면 전신상으로 해야하지만 머리를 써서 기여한 문학가, 철학자, 과학자들을 기념하려면 흉상을 제작하는 것이 좋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이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완성된 괴테의 전신상 기념비는 매우 볼품없었고 훗날 미술사학자 프란츠는 이 기념비에 대해 '국가적 재앙'이라는 혹평을 내렸다.
  • 1836년(48세) 자연과학이 증명해낸 것과 자신의 학설이 일치한다는 생각을 반영한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를 출판. 매우 꾸준히 학문에 매진했다.
  • 1837년(49세) 쇼펜하우어는 <순수이성비판> A판(1판)을 B(2판)판보다 중시하여 칸트전집 출판에 개입했다. 칸트전집 출판에 관여한 로젠크란츠 교수는 쇼펜하우어의 건의사항을 받아들여 1판 원고를 실어 출판했다. 노르웨이 왕립 학술원의 현상논문 모집에 응모하기로 결정함.
  • 1838년(50세) 모친 요한나 쇼펜하우어가 72살의 나이로 사망함. 덴마크 왕립 학술원의 현상논문 모집 공고를 보고 응모하기로 결정함.
  • 1839년(51세) 현상논문 <인간의지의 자유에 관하여>를 가지고 노르웨이 왕립 학술원으로부터 수상함.
  • 1840년(52세) 현상논문 <도덕의 기초에 관하여>를 가지고 덴마크 왕립 학술원에 단독으로 지원했지만, 학술원은 '이 시대의 대단한 철학자들'인 헤겔, 피히테 등을 비난했다는 등의 이유로 부당한 판정을 했고 수상하지 못함. 이후 쇼펜하우어는 '하찮은 판정'이라 취급했고 이 판정에 반론하는 글을 추가하여 책으로 출판했다. 헤겔을 심각하게 비난한 것은 인정하지만 헤겔이 '대단한' 철학자라는 것은 인정하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 1841년(53세) 두 현상논문을 묶어서 <윤리학의 두 가지 근본문제>를 출판함.
  • 1842년(54세) 여동생 아델레를 20년만에 만남.
  • 1844년(56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제2판이 완성됨. 제1판의 재판과 함께 출판함.
  • 1845년(57세) <여록과 보유(Parerga und Paralipomena)>를 쓰기 시작함.
  • 1846년(58세) 율리우스 프라우엔슈타트가 쇼펜하우어를 만나 제자로 지냈는데 이 사람은 쇼펜하우어의 열혈 추종자다. 특히 법조인들이 열혈팬이 되었는데 이들은 <관념론의 잘못된 근거>에 "세계가 후회의 눈물을 떨구며 다시 한번 쇼펜하우어의 이름을 새길 날이 올 것"라고 썼다. 쇼펜하우어는 판사 요하네스 베카라는 사람이 자신의 사상을 깊이 이해하고 있으나 그것을 글로 쓰지 않았다며 아쉬운 마음을 드러냄.
  • 1847년(59세) <충족이유율의 네 겹의 뿌리에 관하여>의 개정판을 출간. 이 책에서 번역을 비판하며 가급적 해설서도 참고하지말고 그 나라 언어를 배워서 원서를 볼 것을 강조한다.
  • 1849년(61세) 여동생을 마지막으로 만남. 여동생 아델레가 사망함.
  • 1851년(63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의 '부록'이라 할 수 있는 <여록과 보유>를 수 년간 집필한 끝에 출간함. 출판사의 암울한 예상과는 달리 이 작품은 얼마못가 쇼펜하우어의 책들 중에서 가장 인기를 끌었고 많이 팔려나갔다. 특히 쇼펜하우어는 젊은 독자들을 염두에 두고 이 책을 썼다.
  • 1853년(65세) 영국의 독일어책 번역가인 존 옥센포드쇼펜하우어의 사상을 '웨스트 민스터 리뷰'에 소개하여 최초로 영국에 쇼펜하우어를 알림. 독일의 여성 언론인 린트나가 이를 다시 독일어로 번역하여 베를린의 포스신문에 발표하였다.
  • 1854년(66세)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 개정판을 출간. 이 책에서도 쇼펜하우어는 헤겔과 헤겔의 '교수 파벌' 때문에 독일 철학계가 오염되었다고 엄청난 비판을 하며 대학교에서 철학을 배우려는 것은 인생낭비에 불과하니 자신의 사상과 칸트의 사상을 공부하라는 충고를 한다. 이 때의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지난 40여년 간 독일에서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사기극을 사람들이 눈치챘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칸트 이후에 등장한 간사한 사기꾼들이 써낸 철학서적들과 한심한 논쟁들을 통해 하나의 진리라도 밝혀졌는지가 드러날 것이다" 쇼펜하우어가 가장 하찮은 철학교수라 불렀던 셸링이 사망했다. 리하르트 바그너가 쇼펜하우어에게 '니벨룽겐의 반지'의 헌정본을 보냈다. 쇼펜하우어가 바그너를 알게 됨. 바그너는 쇼펜하우어에게 혹평을 받고 냉대받았으나 개의치않고 기뻐했다.
  • 1855년(67세) 라이프치히 대학의 철학과가 '쇼펜하우어 철학 원리에 대한 해명과 비판'이라는 현상 과제를 제시함. 여러 대학에서 쇼펜하우어의 사상 관련 강의가 개설되기 시작함.
  • 1857년(69세) 쇼펜하우어에 대한 강의가 본대학교브레슬라우대학교에 개설됨. 쇼펜하우어의 몇몇 책이 영국, 프랑스에 번역됨. 쇼펜하우어는 이 시절의 심정을 시적으로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이제 여정의 목적지에 지쳐 서 있다. 지친 머리는 월계관을 쓰고 있기도 힘들구나. 그래도 내가 했던 일을 기쁘게 돌아보는 것은 누가 뭐라 하든 흔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라" 프리드리히 니체는 1888년에 이 시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다. "그가 가르친 것은 지나갔으나 그가 살았던 것은 남으리라. 이 사람을 보라. 그는 누구에게도 굴복하지 않았노라" 프랑크푸르트의 어느 박람회를 구경했다. 유럽에는 매우 드문 오랑우탄 한 마리가 전시되었다. 자주 찾아가서 관찰했으나 관찰할 기회를 너무 늦게 만났다며 한탄했다.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친구들에게 오랑우탄을 볼 기회를 꼭 잡으라고 촉구했다.
  • 1858년(70세) 쇼펜하우어 70살 생일 파티가 열렸고 신문 기사에도 생일파티 소식이 실렸다. 유럽 각지에서 쇼펜하우어를 만나기 위해 손님들이 찾아왔다. 베를린 왕립학술원에서 쇼펜하우어를 뒤늦게 회원으로 추대하고자 했지만 쇼펜하우어는 나이가 많다는 등의 이유로 거절했다.
  • 1859년(71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제3판이 출간됨.
  • 1860년(72세) 9월 21일 금요일 아침, 폐렴 증상을 겪었고 프랑크푸르트 자택에서 조용히 눈을 감은 채 사망했다. [4]

3. 사상





4. 영향


아르투르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는 철학분야 보다도 그 외의 과학분야, 예술분야에 더욱 큰 영향을 끼쳤다. 1852년에 영국의 존 옥센포드라는 사람이 <웨스트민스터 리뷰> 4월호에 쇼펜하우어 사상에 대한 글을 기고했다. 존 옥센포드는 에커만이 쓴 괴테와의 대화 등을 영어로 번역한 번역가이기도 했다. 이후 영국에 쇼펜하우어가 알려졌고, 영국의 토마스 칼라일, 찰스 다윈같은 영어권 지식인들이 쇼펜하우어를 탐구했다. 쇼펜하우어가 노년기에 읽은 글 중에는 <타임스>에 실린 <종의 기원>에 관한 서평이 있다. 독일의 철학자 다비트 아셔는 쇼펜하우어에 대한 글을 써서 쇼펜하우어를 감동시켰다. 아셔는 쇼펜하우어와 편지교환을 자주 했는데 쇼펜하우어로부터 30여통의 편지를 받았다. 아셔는 <쇼펜하우어와 다윈주의>라는 논고도 발표했었다. 찰스 다윈은 이 논고를 읽다가 아셔가 인용한 쇼펜하우어의 글들을 자신의 저서 <인간의 유래와 성선택>에 인용하기도 했다. 다비트 아셔는 쇼펜하우어가 주장한 '의지'이론과 유사한 다윈의 '자연선택' 등의 개념이 결국엔 세상 사람들에게 널리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르투어'는 영어로는 '아서'(Arthur)가 되는데 이것은 사업가였던 쇼펜하우어의 아버지가 아들을 사업가로 키우고자 영국친화적인 이름을 아들에게 지어준 것이었다. 이 때문에 영국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미국에까지 전파되어 고독한 생활을 추구한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랄프 왈도 에머슨은 자신의 저서에 쇼펜하우어의 글을 인용했고 인간에게는 무엇보다 틀에 박힌 것을 혐오하는 개성이 중요하다고 강변했고 에머슨은 불교와 우파니샤드에 관심이 많아졌다.
음악가 리하르트 바그너는 자신의 트리스탄과 이졸데쇼펜하우어의 사상에 대한 답변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런 말은 1859년에 나왔는데, 쇼펜하우어는 바그너에게 무관심했으므로 바그너가 그런 말을 했는지도 몰랐을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1854년에 친구이자 시인인 게오르그 헤르베크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들고 바그너를 찾아갔다. 헤르베크는 바그너에게 쇼펜하우어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추천해주었다. 바그너는 이것을 한 번 읽었고 감동받았다. 바그너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1년 동안 4번이나 통독한 것으로 잘 알려져있다. 바그너는 자신의 작품 니벨룽겐의 반지와 '존경하는 마음과 함께'라는 자필 헌사를 보냈으나 쇼펜하우어는 어떤 답장도 바그너에게 보내지 않았다. 쇼펜하우어는 바그너의 작품인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을 바그너와 함께 관람한 적도 있는데 쇼펜하우어는 흥미를 잃고 말았다. 쇼펜하우어는 바그너에 대해서 '바그너는 음악이 뭔지 잘 모르는 인간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이후로도 평생 동안 쇼펜하우어를 존경했다. [5]
첼리스트이며 지휘자인 장한나는 음악가임에도 하버드대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했는데 네이버 '지식인의 서재' 인터뷰에서 특히 쇼펜하우어를 굉장히 좋아한다고 말했다.
쇼펜하우어 찬미자였던 19세기 독일의 철학자 에두아르트 하르트만은 자신의 저서 <무의식의 철학>에서는 쇼펜하우어의 심리학적인 주장을 획기적으로 발전시켰다. 프로이트정신분석학의 기초에 해당하는 '억압'에 대해서 자신보다 먼저 쇼펜하우어가 잘 설명했다는 것을 인정했다. [6]근대 심리학자들에게 큰 영감을 선사했으며 심리학이 정식 학문으로서 자리잡기 전에 심리학적인 주장을 철학서적에서 펼쳤던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말했다. "물을 산소수소로 분해한 라부아지에의 작업이 화학의 발전에 기여했다면 매우 오랜 세월 동안 분석되기 어려웠던 "자아 혹은 영혼"이라 불리는 것을 이질적인 두 가지 성분[의지와 지성]으로 분해하는 작업은 철학의 발전에 기여한다." 분석심리학의 창시자 카를 융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헤겔의 거만한 문체보다는 쇼펜하우어의 사상을 탐구한 것이 가장 큰 도움이 되었다고 밝혔다.

헤겔은 난해하고 거만한 문체로 나를 겁먹게 해서 나는 노골적인 불신감으로 헤겔을 대했다. 헤겔은 마치 자신의 언어구조 속에 갇혀 그 감옥에서 거드름을 피우는 몸짓으로 돌아다니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나의 탐구가 가져다 준 가장 큰 결실은 쇼펜하우어였다. 쇼펜하우어는 눈에 보이도록 여실히 우리를 둘러 싸고 있는 고통과 고난에 대해서 처음으로 이야기한 사람이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은 이것을 주목하지 않는 것 같았다." [7]

아마도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은 분야는 문학계일 것이다. 러시아의 소설가인 톨스토이, 이반 투르게네프, 도스토옙스키, 프랑스의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 에밀 졸라, 그리고 독일 작가 토마스 만, 헤르만 헤세, 프란츠 카프카, 영미권 작가인 토마스 하디, 조지프 콘래드같은 사람들은 모두 자신들의 창작에 쇼펜하우어의 사상이 큰 도움이 되었다고 인정했다. 헤르만 헤세의 작품을 보면 불교적 색채가 강한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를 두고 쇼펜하우어의 사상이 반영된 것이라고 평가받기도 한다. 쇼펜하우어의 이름이 톨스토이의 작품 안나 카레니나와 토마스 하디의 '테스' 등의 소설에서 나타나기도 했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프랑스의 앙드레 지드는 자서전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쇼펜하우어로부터 위로를 받았다. 표현할 수 없는 기분으로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자세히 읽어나갔고 자주 읽었다. 다른 모든 것들이 나의 주의를 뺏지 못할 정도로 집중해서 읽었다. 스피노자니체같은 철학자들의 책도 읽었다. 내가 철학에 빠진 계기는 쇼펜하우어 덕분이며 오로지 쇼펜하우어 덕분이었다. 쇼펜하우어보다 헤겔을 더 좋아하는 인간이 있다는 것은 황당한 일이다." [8]

톨스토이는 유일하게 쇼펜하우어의 초상화만을 집에 걸어두었다고 한다. 톨스토이는 장편소설 <전쟁과 평화>를 탈고하기 직전인 1869년 여름에 자신의 친구이자 쇼펜하우어 책을 번역한 아파나시 페트(본명:페트 센신)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이번 여름에 내가 뭘 했는지 알고계십니까? 나는 쇼펜하우어를 읽으며 강력한 기쁨을, 여태껏 한 번도 몰랐던 감동을 만끽했습니다. 나는 쇼펜하우어의 모든 책을 모조리 구해서 읽었고 자주 읽고 있습니다. 쇼펜하우어의 강의를 수강한 여느 학생도 내가 이번 여름에 발견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생각하고 배우지 못했으리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앞으로 나의 이런 의견이 언제 변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나는 쇼펜하우어야말로 모든 인간들 중에 위대한 천재에 속한다고 생각합니다. 언젠가 당신은 쇼펜하우어가 철학적 주제들을 다룬 무언가를 썼다고 말해주셨습니다. 그게 무엇인가요? 그것은 경이롭고도 생생하게 성찰되는 온전한 세계입니다. 나는 벌써부터 쇼펜하우어의 글을 번역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와 함께 번역에 참여하시겠습니까? 쇼펜하우어의 책을 많이 읽는 나는 어째서 아직도 쇼펜하우어가 그토록 세상 사람들에게 덜 알려졌는지 이해가 안됩니다. 그 이유란 아마도, 쇼펜하우어가 토로했듯이 세계에는 하찮은 인간들로 가득하기 때문이겠지요. [9]

단편 작가로 유명한 프랑스의 모파상, 러시아의 안톤 체호프, 영국의 윌리엄 서머싯 몸, 아르헨티나의 보르헤스 등도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받았다. 문학가들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영향은 20세기에도 지속되었다. 쇼펜하우어의 이름은 안톤 체호프의 희곡에 많이 나타났는데, 체호프 이후에도 쇼펜하우어의 영향은 조지 버나드 쇼, 루이지 피란델로, 사무엘 베케트 등의 희곡 작품에서 나타나기도 했다. 예술 분야에서 이 정도로 이야기될 수 있는 철학자는 별로 없다. 예술, 예술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는 칼 마르크스조차도 쇼펜하우어에 견줄 수는 없다. 당연히 쇼펜하우어는 철학자들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자신이 철학자가 된 계기는 쇼펜하우어 때문이라고 말했다. 젊은 시절에 니체는 책방에서 우연히 쇼펜하우어의 책을 발견하여 읽고 철학자가 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니체는 <비극의 탄생>에서 다음과 같이 쇼펜하우어를 평가한다.

오늘날 문화가 이토록 천박하지고 황폐해지는 시대 속에서 우리는 기운찬 줄기와 가지를 내뻗을 수 있는 생명력을 지닌 뿌리 하나라도, 비옥하고 건강한 토양 한 줌이라도 찾으려고 헛되이 애쓴다. 그러나 도처에는 먼지와 모래뿐이니 모든 것은 마비되고 탈진해서 죽어간다. 이런 상태에서 마음 한 자락 둘데 없이 고독한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자기상징은 뒤러가 그려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죽음과 악마와 동행하는 무장 기사'이다. 무쇠처럼 굳센 눈빛과 철갑옷으로 무장한 이 기사는 자신의 끔찍한 동행자들도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희망도 품지 않으면서 자신의 말을 타고, 자신을 따르는 개와 함께 험난한 길을 혼자서 고독하게 걸을 줄 안다. 뒤러(미술가)가 묘사한 이 기사가 바로 우리의 쇼펜하우어와 같다. 그는 모든 희망을 잃고도 진리를 추구했다.

독일 철학자 파울 도이센(Paul Deussen)은 프리드리히 니체의 친구로 유명한 사람인데 이 사람은 쇼펜하우어 전집 출판에 힘을 썼고, 쇼펜하우어학회를 만들어 활동했다. 인도철학과 우파니샤드에 대한 연구자로서 큰 평가를 받고 있다. 도이젠은 직접 인도로 여행을 갔고 이에 대한 여행기를 남기기도 했다. 도이젠은 플라톤, 칸트, 인도철학, 쇼펜하우어에 대한 저서를 남겼고 학자로서 부지런히 활동했다. [10]

쇼펜하우어가 살았던 시대에 속하는 19세기 후반에는 가장 유명하고도 영향력 있는 철학자가 되었다. 19세기 초반의 일부 철학 교사들은 쇼펜하우어의 저서를 탐구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 쇼펜하우어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쇼펜하우어는 20세기 초의 모든 철학자 중에서 가장 중요한 한 사람인 비트겐슈타인에게 명백한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11]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다음과 같이 평했다.

쇼펜하우어는 이례적으로 국가주의[12]

에 얽매이지 않았고 독일의 작가들을 훤히 잘 알았던 만큼이나 영국과 프랑스의 작가들에 대해서도 능통했다. 여타 철학자들보다도 믿음직한 철학을 추구한 예술가와 문학가들에게 쇼펜하우어가 끼친 영향은 막대했다. 쇼펜하우어는 '의지'라는 개념을 강조하면서 철학을 전개했다. 그런데 쇼펜하우어는 비록 의지를 메타자연학의 토대로 삼았어도 윤리적으로는 악으로 간주했다. 그렇게 악한 의지는 염세주의자에게는 적대적인 것일 수밖에 없었다. (중략) 쇼펜하우어의 의지 이론은 많은 철학자들에게 수용되었는데 특히 독일의 니체나 프랑스의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 미국의 철학자 존 듀이, 미국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 등에게 적극적으로 수용되었다. 루소칸트가 그와 유사한 의지이론을 준비했지만 그토록 순수한 의지이론을 가장 먼저 설파한 철학자는 쇼펜하우어였다.[13]

20세기 초기에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쇼펜하우어의 사상을 바탕으로 자신의 철학을 시작했다. [14]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1차세계대전에 참전한 시절 동료들과 잘 어울리지 않았는데 동료들의 성향, 생각, 농담, 여자 얘기 등에 동조하지 않았고 이런 쓰레기같은 동료들의 행태보다 더 싫은 것이 없다고 회고했다. 오히려 방공호에서 쇼펜하우어의 책이나[15] 열심히 읽고 인생의 중요한 문제들을 고민했다고 한다.[16]
영국의 철학자 칼 포퍼는 자신의 아버지 서재에 쇼펜하우어찰스 다윈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고 회고했다.[17]칼 포퍼는 에르빈 슈뢰딩거를 언급하기도 하는데 잘 알려져 있듯이 슈뢰딩거는 인도철학에 몰두했으며 쇼펜하우어의 사상을 수용했다고 말한다. 칼 포퍼는 자신의 책 이름을 짓는 일에 쇼펜하우어가 지은 이름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말한다. 칼 포퍼는 자신의 아버지 서재에는 웬만한 철학서적은 대부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여러 책을 읽다가 칸트순수이성비판을 만났는데 칸트의 글이 무슨 뜻인지 몰라서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쇼펜하우어의 여러 저서들을 읽었고 그 덕분에 칸트의 책도 제대로 읽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라는 책은 자신이 태어나서 최초로 진지하게 읽고 공부한 두꺼운 철학서적이라고 말했다. [18]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의 사위이자 아인슈타인의 전기 작가인 루돌프 케이저는 1920년대 후반 아인슈타인의 연구실에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 마이클 패러데이, 쇼펜하우어의 초상화가 나란히 걸려 있었다고 한다. 아인슈타인은 젊은시절부터 칸트쇼펜하우어같은 철학자의 책을 즐겨 읽었다고 한다. [19]

5. 에피소드


어마어마한 량의 책을 읽었다고 한다. 그가 꼽은 최고의 소설로는 로렌스 스턴의 '트리스트럼 섄디', 장 자크 루소의 '신엘루이즈',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가 있다.
25세의 쇼펜하우어는 어머니의 살롱에서 만난 인물 중 괴테에게 가장 매혹되었다. 이들의 만남은 예나의 어느 연회장에서 이루어졌다. 연회에 참석한 여성 몇몇이 쇼펜하우어를 놀려대며 궁시렁대는데도 쇼펜하우어는 고민하는 표정을 지은 채로 사색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때 고상하게 보이는 괴테가 킥킥대는 여성들에게 다가가서 왜 그러냐고 물었다. 여성들의 대답을 들은 괴테는 이렇게 타일렀다. "쇼펜하우어를 그냥 놔둬. 쇼펜하우어는 우리가 도무지 범접할 수 없을 만큼 위대해질 테니까." 괴테는 쇼펜하우어만 자신의 집으로 조용히 불러서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쇼펜하우어는 괴테를 매우 존경했고 괴테는 쇼펜하우어에 대해 "속을 알 수 없는 인물"로 생각하기도 했다.
쇼펜하우어는 오랜 세월 동안 과민한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쇼펜하우어가 6살이던 시절에 "닭똥같은 눈물을 흘리며 서럽게 우는 아들"을 산책에서 돌아온 부모님이 발견했다. 왜냐하면 부모가 자신을 집에 버리고 떠났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프랑크푸르트에 살 때는 잠자다 미미한 잡음만 들려도 벌떡 일어나서 권총을 집어들었다. 그 이유는 1848년 3월 혁명 당시 '폭도'[20]들이나 도둑들을 경계했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수염을 면도해주는 이발사도 전혀 신뢰하지 않았었다. 전염병에 민감하여 결벽증도 있었던 것 같다. 외식하러 갈 때도 다른 사람들이 사용한 잔을 사용하지 않으려고 자신이 준비한 잔을 가져가서 사용했다. 자신의 재산 관련 계산서나 수표에도 결코 독일어를 쓰지 않았다. 자신의 지출 내역 관련 기록은 영어로 기록했고 자신의 사업 서류들을 그리스어라틴어로 쓰기도 했다. 자신의 귀중품들을 비밀 장소에 숨겨뒀고 강도를 피하려고 가짜 이름표를 만들어 붙이기도 했다. 자신의 채권들을 엉뚱한 문서에 숨기기도 했다.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이런 성향을 인정하고 절망하기도 했고 졸렬한 인간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이것은 고치기 어려운 고질적인 성향으로 추정된다.
쇼펜하우어는 평생 동안 고전 철학과 고전 문학을 집중해서 읽었다. 또 철학ㆍ과학ㆍ문학을 가리지 않고 다양하게 읽었다. 이탈리아 작가들 중에는 단테, 아리오스토, 마키아벨리 등도 좋아했지만 특히 페트라르카를 가장 좋아하며 그의 시는 무척 감명 깊게 읽었다고 한다. 쇼펜하우어는 어떤 책에 대한 피상적인 해설서나 엉터리 번역서들을 경멸했다.그러면서 쇼펜하우어 본인은 번역활동을 해서 독자들에게 해외 서적을 소개하기도 했는데 괴테의 파우스트 구절을 영어로 번역하여 호평을 받기도 했다. 세르반테스돈키호테스페인어로 읽었고 스페인 작가 발타자르 그라시안의 책을 독일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그치만 헤겔 같은 교수들이 영국 사상가들의 책을 제대로 연구도 안하며 엉터리 번역서나 참고하는 사기꾼들이라고 비난할 정도로 번역을 주로 혐오했던 것은 사실이다.
쇼펜하우어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교류하던 로베르트 호른슈타인이라는 음악가가 1855년에 쇼펜하우어 자택을 방문했다. 이 사람은 리하르트 바그너의 제자인 젊은 작곡가였다. 나중에 이 사람은 《쇼펜하우어에 대한 회상》이라는 책을 남겼다. 호른슈타인은 이 책에서 스승 바그너가 쇼펜하우어에게 얼마나 빠져 살았는지를 생생하게 그렸다. 호른슈타인은 이렇게 말했다. "바그너가 쇼펜하우어에 대해 말할 때와 같은 열정으로 다른 예술가나 예술 분야의 권위자들을 칭찬하는 것을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
쇼펜하우어가 프랑크푸르트에서 살 때였다. 소설가 '요한나 쇼펜하우어'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동네 주민들에게 알려져 화제가 되기도 했다. 쇼펜하우어는 청년 시절부터 입어 온 유행이 지난 외투를 입고 다녔다. 이런 쇼펜하우어의 독특한 모습과 쇼펜하우어의 애완견인 푸들 '아트만'은 프랑크푸르트의 명물이 되었다. 쇼펜하우어는 항상 이런 식의 차림으로 애완견을 데리고 다니며 산책을 했다. 칸트의 성실한 산책 이야기가 쾨니히스베르크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었듯 애완견과 같이 산책하는 쇼펜하우어의 모습이 마치 인격이 좋은 주인과 충직한 애완견처럼 보여서 유명해졌다. 쇼펜하우어는 아무리 날씨가 나빠도 웬만하면 평안한 기분으로 일정한 시간 동안 산책을 꼬박꼬박 했다. 쇼펜하우어는 큰소리로 혼잣말을 하면서 걸어다닐 때가 자주 있었기 때문에 길을 걷던 동네 주민들은 가끔 의아한 표정으로 뒤돌아보기도 했다고 한다.
쇼펜하우어는 거의 매일 점심밥을 먹고 나서 플루트를 불었다고도 한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자신의 저서 《선악의 피안》에서 쇼펜하우어와 플루트에 대해서 언급했다. 쇼펜하우어는 음악에 조예가 깊었다. 이 사실은 쇼펜하우어가 청년 시절부터 악보를 술술 읽고 모차르트 음악 연구에 몰두한 일에서도 알 수 있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음악의 형이상학'이라는 형식으로 자신의 음악 철학을 논하고 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인 것이다. 바그너는 베토벤 기념 논문인 '베토벤'에서 이렇게 말한다. "쇼펜하우어는 음악이 문학이나 조형 예술 등과는 전혀 다른 특징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처음으로 철학적으로 명쾌하게 음악이 다른 예술 분야들 사이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확인하고 이렇게 썼다.…"
덴마크의 사상가 키에르케고르의 '절망'이라는 말과 쇼펜하우어의 '고뇌'라는 말은 서로 통하는 부분이 있다. 키에르케고르는 말년에 쇼펜하우어의 사상을 알게 되었다. 키에르케고르가 남긴 많은 일기 속에는 쇼펜하우어의 사상에 대한 감격적인 글들이 남아있다. 키에르케고르의 《순간》이라는 책에는 쇼펜하우어의 이름이 직접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곳곳에 드러나 있다. 헤겔에 대한 비판, 맹목적인 낙천주의, 근대과학의 오만함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던 것은 키에르케고르와 쇼펜하우어의 공통점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죽기 2년 전에, 그러니까 1853년 정도에 쇼펜하우어의 책을 읽었다고 한다.
1850년대 중반의 일이다. 독일 브레슬라우대학교의 켈바 선생은 '쇼펜하우어의 사상과 자연과학의 관계'라는 주제로 강의를 하기도 했다. 이탈리아에서도 쇼펜하우어에 대한 비평과 책들이 출판되었다. 영국에서는 쇼펜하우어 책의 일부가 편역되어 떠돌았고 프랑스에서도 번역본이 나왔다. 특히 쇼펜하우어의 철학서적 보다는 통속적이고 명쾌한 문학적 재치가 돋보이는 '여록과 보유'라는 책이 더 인기를 끌었다. 쇼펜하우어의 자택에는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독일의 극작가 프리드리히 헤벨도 이 시기에 쇼펜하우어를 방문했다. 이름을 밝히지 않고 존경과 칭찬의 편지를 쇼펜하우어에게 보낸 사람도 꽤 있었다. 1858년에는 쇼펜하우어의 70살 생일 잔치가 열렸고 이 때에 쇼펜하우어의 명성은 절정에 달했다. 독일 작가 테오도어 폰타네의 절친 빈케라는 사람은 쇼펜하우어에게 은으로 만든 잔을 생일 선물로 주었다. 괴테의 며느리였던 오틸리에 괴테는 쇼펜하우어에게 책 출판에 대한 축하 편지를 썼다. 오틸리에 괴테는 쇼펜하우어의 여동생과도 친했고 쇼펜하우어가 젊었을 때부터 괴테와 더불어 쇼펜하우어를 응원해준 몇 안되는 사람중 하나였다. 쇼펜하우어는 그 편지를 받고 오틸리에 괴테에게 감격에 찬 답장을 보내기도 했다.
마그데부르크의 법률고문관으로 재직한 프리드리히 드루그트는 쇼펜하우어의 논문과 저서들에 감격하여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지인들에게 널리 알리고 다녔다. 쇼펜하우어를 찾아와 수제자가 된 율리우스 프라우엔슈타트는 쇼펜하우어 사후에 유고를 정리하여 《토론의 법칙》이라는 책을 출판했고 쇼펜하우어 전집을 출판했다. 사법관이었던 아담 도스라는 사람은 어린 나이인데도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공부했는데 쇼펜하우어는 이것에 만족스러웠다고 한다.
쇼펜하우어와 의형제처럼 친하게 지냈던 변호사 빌헬름 그비너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쇼펜하우어의 책을 읽고 감격하여, 먼저 찾아와 진지한 이야기를 해서 쇼펜하우어와 친해진 사람이었다. 그비너는 쇼펜하우어의 유언을 집행했고 쇼펜하우어 집안의 유산을 유언에 따라 잘 처리하기도 했다. 쇼펜하우어는 평평한 화강암을 이용해 묘비를 만들어 줄 것을 생전에 희망했고 묘비에다가 자신의 이름 빼고는 아무것도 새기지마라고 말했다. 이 묘비는 현재 프랑크푸르트 시립 중앙묘지에 묘비는 잘 안장되어있다.이후에 그비너는 쇼펜하우어에 대한 전기를 최초로 쓰기도 했다. 이 시기에 조각가 엘리자베스 네이가 찾아왔는데 쇼펜하우어는 대리석으로 만들 흉상의 모델이 되어 달라고 부탁을 받았다. 이 흉상을 보고 쇼펜하우어는 만족스러워 했다. 이 흉상의 진품은 현재 미국 텍사스 주 오스틴 시의 네이미술관에 있다. [21]
어느날 쇼펜하우어는 폐렴 증세가 있었으나 평소대로 일찍 기상하여 쾌활하게 아침식사를 했다. 가정부는 항상 그랬듯이 집안을 환기시키느라 창문을 열어놓고 집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몇 분쯤 지나서 거실로 들어온 주치의는 소파에 등을 기대앉아 차분한 표정으로 죽어있는 쇼펜하우어를 발견했다. 1860년 9월 26일 쇼펜하우어의 시신이 안장된 무덤 앞에서 거행된 장례식의 참가인원은 별로 없었으나 그의 추종자들이 모였다. 어느 개신교 목사가 장례식을 주관하며 추도문을 낭독했고 이어서 쇼펜하우어의 절친인 빌헬름 그비너가 준비한 추도문을 낭독했다.

한 세대가 지나도록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서 함께 살았으면서도 여전히 낯선 이방인으로만 여겨지던 이토록 희귀한 고인의 관은 실로 비상한 감회들을 불러일으킵니다. 이 자리에 서 있는 누구도 고인의 혈육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고인은 혼자 있기를 좋아하며 살았고 고독하게 세상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지금 고인의 앞에 있는 무엇이든지 그렇듯 일평생 고독을 감내한 고인을 이토록 뒤늦게나마 위로해줄 수 있기를 삼가 기원합니다. 죽음의 캄캄한 어둠에 파묻혀 외롭게 방치되는 친구나 적을 바라볼 때조차 우리의 눈은 즐길 수 있는 향락거리를 찾기도 하지만, 이윽고 우리의 다른 모든 감정은 '생명의 원천들을 알고자 하는 욕망' 속에서 소진됩니다. 지식은 고인과 언제나 함께하면서 고인을 장수하도록 도와준 친구였습니다. 인생을 진지하게 대하고 진지하게 진리를 추구한 고인은 어렸을 때부터 세상의 껍데기 같은 외면들을 무시했을뿐더러 그러한 자신의 태도가 자신을 사회적으로 고립시킬 가능성마저 개의치 않았습니다. 열정적인 심장을 지닌 이 심오한 사상가는 흥겹게 놀다가 돌연히 성난 아이처럼 일평생 쉬지 않고 내달리면서 고독했고 오해받았으되 스스로에겐 진실하기만 했습니다. 타고난 재능과 더불어 그것을 발휘하는 데 필요한 교육마저 충분히 받은 고인의 모험을 방해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고인은 자신이 누리던 그런 (특히 아버지로부터 받은) 특혜에 언제나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고인의 유일한 소망은 그런 특혜에 보답하는 것이었고 그런 소망을 실현하기 위한 사명을 추구하느라 평생 애썼습니다. 고인은 세상에서 설정했던 목표를 오랫동안 달성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고인의 이마에 씌워진 월계관은 고인의 인생이 황혼에 접어들고 나서야 비로소 고인에게 수여된 것입니다. 고인의 확고한 신념은 애초부터 고인의 영혼에 뿌리박힌 것이었습니다. 고인은 오랜 세월 동안 남들에게 무시당하면서도 꿋꿋하게 고결한 길을 걸었고 거기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고인은 에스드라스(Esdras)에 기록된 "진리는 다른 모든 것보다도 위대하고 우월하다"는 명제를 명심하여 고생하다가 어느덧 백발노인이 된 것입니다.'''


6. 주요 저서


  • 충족이유율의 네 겹의 뿌리에 관하여》(Über die vierfache Wurzel des Satzes vom zureichenden Grunde) - 철학 박사 논문. 인식론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이 책에서 쇼펜하우어가 의도하는 것은 칸트의 이성비판이 이룬 결과가 헤겔같은 철학교수들에 의해 왜곡되고 있음을 비판한다. 그리고 당대의 유행하던 철학사조를 강력히 비판한다. 쇼펜하우어는 칸트가 오류를 범한 점을 지적하며 칸트의 오류를 보완하는 자신의 이론을 제시한다. 이런 점에서 자신의 철학적 의도를 이 책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 I, II. - 쇼펜하우어의 철학 주저. 인식론, 형이상학, 미학, 윤리학 네 가지 주제를 다룬다. 고전으로 자리잡은 이 책은 쇼펜하우어가 청춘을 바쳐서 만들어낸 작품이고 쇼펜하우어는 이 책을 "일시적이고 헛된 이념을 좇아 사라져가는 자기 세대의 사람들이 아니라 후손들과 인류를 위해" 썼다며 대담한 선언을 했다. 서양 근대철학의 진수를 보여주는 이 책은 뛰어난 작품성에도 불구하고 사실 번역으로는 제대로 읽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의지'라는 개념이 오해받거나 외면받았다.
  • 《윤리학의 두 가지의 근본 문제》(Die beiden Grundproblemeder Ethik) - '인간 의지의 자유에 관하여' '도덕의 기초에 관하여' 이 두 논문을 묶어 출판된 것임.
  • 《여록과 보유》(Parerga und Paralipomena) - 한국에서 '인생론' 등의 이름을 달고 일부가 번역되어 출판되는 책이다. '소품과 부록' 이라고 불리기도 함. 외국에서도 "삶의 지혜" 라는 식의 제목으로 소개되기도 하며 소책자나 편역본으로 주로 출판되고 있다. 온갖 유머와 문학적 재치가 돋보이고 인생에 대한 격언이 쇼펜하우어 특유의 명쾌한 문체로 서술되어 있다. 이러한 이유로 독일어권에서 쇼펜하우어의 문장은 최고급 산문이자 탁월한 문학적 글쓰기로 평가받는다. 아인슈타인도 쇼펜하우어의 책을 읽고 독일어 글쓰기의 진수라고 극찬했다고 한다.
  • 《시각과 색채에 관하여》 (Über das Sehen und die Farben)
  •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Ueber den Willen in der Natur) 당대 자연과학의 연구 성과를 빠짐없이 기술했고 그 성과를 철학과 연결시킨 최초의 책으로 평가받는다. 독일 철학자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칸트의 인간학이나 프리드리히 프리스의 인간학도 이루지 못한 사유의 인간학적 전회가 이 책에서 일어났다고 평가한다. [22]
  • 토론의 법칙》(Der handschriftliche Nachlass 라는 쇼펜하우어가 남긴 방대한 유고 중 일부이며 미발표작이었다. 쇼펜하우어 사후에 제자인 율리우스 프라우엔슈타트가 편집하여 출판했다. 한국어 제목은 출판사 임의로 지었음) - 이 책에서도 쇼펜하우어는 헤겔을 비난하며 인격이 저열한 사이비철학자 등의 간사한 주장 방식을 간파하는 법을 독자들에게 소개하고자 했다. "실제 토론에서 상대의 터무니없는 주장 방식을 간파하고 그것을 물리칠 수 있다" 라고 쇼펜하우어는 말한다. 국내에는 '논쟁에서 이기는 38가지 방법' '토론의 법칙' 등의 제목을 달고 출판되었다. 쇼펜하우어의 유고집은 분량이 꽤 상당하며 아르투르 휩셔가 편집하여 총 5권으로 출판한 바가 있다. [23]

6.1. 한국어 번역서


  • 쇼펜하우어. 《충족이유율의 네 겹의 뿌리에 관하여》. 김미영 옮김. 나남출판, 2010. - 김미영의 역서는 모두 완역본이다.
  •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2015. - 2015년에 부록이 추가되어 개정판으로 나왔다.
  • 쇼펜하우어.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 김미영 옮김. 아카넷, 2012.
  • 쇼펜하우어. 《도덕의 기초에 관하여》. 김미영 옮김. 책세상, 2004.
  • 쇼펜하우어. 《토론의 법칙》. 최성욱 옮김. 원앤원북스. 2016.
  •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2009. - 일부만 번역된 편역본이다.
  •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의 철학적 인생론》. 권기철 옮김. 동서문화사, 2016. - 편역본이며 내용에 오류가 약간있으나 무시하고 읽어도 지장없으며 책값이 매우 저렴하고 읽을거리가 많아 쇼펜하우어를 공부하는 초심자에게 추천할 만하다. 쇼펜하우어가 독일어 편역한 스페인의 발타자르 그라시안의 격언집이 첨부되어 있다.
  •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의 문장론》. 김욱 옮김. 지훈, 2005. - 쇼펜하우어의 <여록과 보유>에서 글쓰기 및 비평에 관한 부분만 솎아낸 책이며 일본어 중역서이지만 추천할 만하다.
  • 헬런 짐먼. 《쇼펜하우어 평전》. 김성균 옮김. 우물이있는집, 2016(원서는 1876년 출판).
  • 뤼디거 자프란스키 《쇼펜하우어》(부제:쇼펜하우어와 철학의 격동시대). 정상원 옮김. 이화북스. 2020(원서는 1987년 출판. 2018년에 나온 꿈결 출판사의 "쇼펜하우어 전기" 판본은 절판되었다.). 쇼펜하우어 평전으로서 걸작으로 꼽힌다.

6.2. 기타 서적 및 평전


한국에 쇼펜하우어의 평전류들이 별로 소개된 바는 없으나 해외 서적 중에는 꽤 많으며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 Cartwright, David. Schopenhauer: A Biography,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0. {{ISBN|978-0-521-82598-6}}
  • Frederick Copleston, Arthur Schopenhauer, philosopher of pessimism (Burns, Oates & Washbourne, 1946)
  • O.F.Damm, Arthur Schopenhauer – eine Biographie, (Reclam, 1912)
  • Kuno Fischer, Arthur Schopenhauer (Heidelberg: Winter, 1893); revised as Schopenhauers Leben, Werke und Lehre (Heidelberg: Winter, 1898).
  • Eduard Grisebach, Schopenhauer – Geschichte seines Lebens (Berlin: Hofmann, 1876).
  • D.W. Hamlyn, Schopenhauer, London: Routledge & Kegan Paul (1980, 1985)
  • Heinrich Hasse, Schopenhauer. (Reinhardt, 1926)
  • Arthur Hübscher, Arthur Schopenhauer – Ein Lebensbild (Leipzig: Brockhaus, 1938).
  • Thomas Mann, Schopenhauer (Bermann-Fischer, 1938)
  • Matthews, Jack, Schopenhauer's Will: Das Testament, Nine Point Publishing, 2015. {{ISBN|978-0-9858278-8-5}}. A recent creative biography by philosophical novelist Jack Matthews.
  • Rüdiger Safranski, Schopenhauer und die wilden Jahre der Philosophie – Eine Biographie, hard cover Carl Hanser Verlag, München 1987, {{ISBN|978-3-446-14490-3}}, pocket edition Fischer: {{ISBN|978-3-596-14299-6}}.
  • Rüdiger Safranski, Schopenhauer and the Wild Years of Philosophy, trans. Ewald Osers (London: Weidenfeld and Nicolson, 1989)
  • Walther Schneider, Schopenhauer – Eine Biographie (Vienna: Bermann-Fischer, 1937).
  • William Wallace, Life of Arthur Schopenhauer (London: Scott, 1890; repr., St. Clair Shores, Mich.: Scholarly Press, 1970)
  • Helen Zimmern, [https://archive.org/stream/arthurschopenha00zimmuoft#page/n7/mode/2up Arthur Schopenhauer: His Life and His Philosophy] (London: Longmans, Green & Co, 1876)
[1] 엄밀히 말하면, 쇼펜하우어가 살았던 당시의 독일 지역은 함부르크, 프로이센 등의 여러 나라들로 나뉘어 있었고, 독일 제국으로 통합되어 '독일' 이라는 나라가 등장했을 때는 쇼펜하우어가 사망하고 11년 뒤의 일이다. 그러나 여러 소왕국들을 옮겨 다녔기 때문에 편의상 독일로 표기되었다.[2] 브라이언 매기, 철학의 역사, 박은미 역, 2016, 쇼펜하우어 파트.[3] 토론의 법칙, 최성욱 역 참조. 해설:쇼펜하우어는 "대중을 현혹하는 협잡꾼 헤겔과 그 일당"이라는 식으로 매번 비난했다.[4]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홍성광 역, 2015, 연보 참조 .[5] 브라이언 매기, 트리스탄 코드, 김병화 역, 2005, '8장 바그너, 쇼펜하우어를 발견하다' 부분 참조..[6] 브라이언 매기, 철학의 역사, 145쪽..[7] 카를 구스타프 융, 기억 꿈 사상(자서전), 조성기 역, 김영사, 133쪽~134쪽..[8] Si le grain ne meurt. Collection Folio. Paris : Gallimard, 1972..[9] Aylmer Maude, The Life of Tolstoy:First Fifty Years, 1917..[10] 랄프 비너, 유쾌하고 독한 쇼펜하우어의 철학 읽기, 최흥주 역..[11] 쇼펜하우어, 도덕의 기초에 관하여, 284쪽, 브라이언 매기의 말. The Philosophy of Schopenhaur,Oxford, 1983.[12] 쇼펜하우어는 국수주의를 상당히 비난했는데 독일 민족주의와 국수주의를 선동한 피히테가 대표적이다. 독일 문학가 토마스 만은 저서 '쇼펜하우어 니체 프로이트' 에서 쇼펜하우어와 헤겔을 비교하며 아예 나치와 파시즘의 발흥에 헤겔의 국가주의가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했다. 러셀은 이런 맥락에서 당대 철학자들 중 국수주의에서 벗어난 쇼펜하우어를 언급했다.[13] 버트런드 러셀, 서양철학사, 쇼펜하우어 파트, 1946.[14] 브라이언 매기, 철학의 역사, 145쪽, 영향에 대한 설명 참조..[15] 안타깝게도 프랑크푸르트의 쇼펜하우어가 살았던 집은 2차 대전 당시 전쟁통에 폭격으로 파괴되었다.[16] 요아힘 페스트, 히틀러 평전, 137p, 1997 푸른숲[17] 칼 포퍼, 끝없는 탐구, 박중서 역, 20쪽..[18] 칼 포퍼, 삶은 문제 해결의 연속이다, 147쪽..[19] Rudolf Kayser, Albert Einstein: A Biographical Portrait, 2011[20] 쇼펜하우어는 에드먼드 버크와 유사한 정치적 입장을 지녔고 3월 혁명 당시 시위대를 진압하던 군인들을 걱정할 정도였다.[21]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2007, 권기철 역, 생애 해설 에피소드 참조..[22] 쇼펜하우어,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 2012, 김미영 역. .[23] 쇼펜하우어, 토론의 법칙, 최성욱 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