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센-프랑스 전쟁
1870년 7월 19일~1871년 5월 10일
1. 개요
프랑스 제2제국과 북독일 연방의 전쟁. 이 전쟁으로 프랑스에서는 제2제국이 무너지고 제3공화국이 세워졌으며, 프로이센은 독일 연방 내 모든 회원국을 통합해 독일 제국을 세웠다.
일명 '''보불전쟁'''.[1] 오랜 세월 분열되어 있던 독일이 통일되어 '''과거 나폴레옹에게 당했던 치욕을 그대로 박살내어 되갚아 준 전쟁'''이다.
2. 배경
2.1. 프로이센 측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승리하고 오스트리아 제국을 독일 연방에서 축출하여 독일 통일의 주도권을 쥔 프로이센 왕국이었지만, 마인(Main) 강[2] 이북의 불완전한 통일이었고[3] 가톨릭 지역인 남부 독일 바이에른, 바덴, 뷔르템베르크에 대해서는 우위를 점하지 못한 채 끝난다. 이후 룩셈부르크 분쟁 등으로 프랑스와 갈등을 빚던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결국 프랑스를 격파해야 독일이 통일될 수 있다고 판단하여 장대한 계획의 실행에 돌입했다. 보오전쟁에서 비스마르크는 프랑스에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를 떼어주며 중립을 요청한 적도 있었지만 실질적으로 해당 국가들에 대한 통제권을 넘겨준 것도 아니었고, 이때부터 이미 최종 결전은 프랑스와 내야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2.1.1. 오스트리아 제국과의 강화
보오전쟁이 프로이센의 승리로 마무리되었다고 해도 양국 간 외교가 파탄나서 오스트리아 제국이 프로이센을 압박하는 적국으로 남을 가능성도 다분했다. 그러나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에게 패전의 굴욕감을 주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오스트리아 내부는 반 프로이센 감정이 들끓었으나 재정적, 군사적 손실에 심각한데다가 헝가리, 보헤미아, 이탈리아 등 비 독일인 우세지역의 심각한 민심 이반으로 도저히 프랑스와 동맹을 맺어 전쟁에 참여할 능력이 없었다. 내부사정이 심각한 오스트리아는 대타협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형성시켜 전쟁에서 눈을 돌렸다.
2.1.2. 주변국들과의 군사적 동맹 유지
아울러 러시아 제국 및 이탈리아 왕국과는 군사적 동맹 관계를 유지했으며, 영국과도 친선 정책을 펼쳤다. 아직 프로이센이 세계 정책을 펼치기 전인 유럽의 신흥국이었고, 영국의 식민지 정책과 충돌했던 프랑스를 프로이센이 공격하는 게 영국의 국익에 부합했기 때문에 영국은 중립적이었다. 게다가 빅토리아 여왕의 남편 앨버트 공이 친프로이센파인 데다, 영국 왕가가 하노버-작센코부르크고타 왕가로 독일계고 그 정체성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4] 영국 왕실과 프로이센은 사돈지간이기도 했다.[5] 동맹의 역전 이후로 프로이센의 독일과 영국은 계속해서 돈독한 사이를 유지해왔다. 영국 입장에서는 프로이센이 아무리 날고긴다고 해도 그 범위는 어디까지나 중부유럽으로 한정되어 있었기에 러시아 제국이나 프랑스 그리고 오스만 제국처럼 비유럽 지역이나 해상에서 피터지게 싸울 일도 없었다.
2.2. 프랑스 측
프랑스는 나폴레옹 3세의 인도차이나 및 이탈리아 원정, 멕시코 내전 개입 등으로 국제적 고립을 자초하는 판국이었다. 즉, 전쟁이 나도 프랑스를 도와줄 나라는 없었다.
2.2.1. 이탈리아와의 적대
이탈리아 원정을 표면적으로만 보면 나폴레옹 3세의 프랑스가 이탈리아 통일의 주역인 사르데냐 왕국의 대(對)오스트리아전을 지원한 것이었으므로 이탈리아는 통일 과정에서 프랑스의 덕을 봤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프랑스는 그 이탈리아 원정에서도 중간에 이탈리아를 버리고 오스트리아와 독자적으로 휴전해 버렸으며, 이 때문에 샤르데냐 왕국은 프랑스와의 조약의 파기를 고려할 정도로 분노하였다. 프랑스의 이탈리아 원조는 공짜가 아니었고, 이탈리아에서 니스와 샤르데냐 왕국의 시초였던 사보이(안시 포함)를 할양받는 대가로 참전한 것이었는데, 니스와 사보이는 고스란히 집어삼킨 주제에[6][7] 전쟁에서는 중간에 마음대로 발을 뺐으니 이탈리아인들이 분노한 것도 당연했다. 게다가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와의 전쟁 때 프로이센과도 동맹을 맺은 상태였으니 어차피 프랑스를 도울 가망은 없었다. 도리어 이탈리아 국내 여론은 프랑스군이 주둔한 교황령을 완전히 확보하길 원했기 때문에 프랑스에 적대적인 편이었고, 민병대가 독자적으로 교황령을 공격하기도 했다.
2.2.2. 스페인에 대한 내정간섭
전쟁의 계기는 스페인에서 시작되었다. 스페인은 1700년 스페인 왕위계승전쟁 이후 보르본 왕조가 계속 왕위를 차지한 이래 전통적으로 프랑스와 친선을 유지했고 나폴레옹 전쟁 당시 잠시 험악한 관계였다가 이후 계속 친교를 맺었던 나라였다. 1868년 스페인 여왕 이사벨 2세가 혁명으로 쫓겨나면서 왕위가 비자, 스페인은 유럽의 왕가들을 탐색하다가 빌헬름 1세의 친척인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 가문[8] 의 '레오폴트 왕자'에게 왕위를 제의한다. 이에 비스마르크는 "그거 괜찮네"라는 반응을 보였고 레오폴트 왕자는 처음에 제안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정작 호엔촐레른 가문의 수장 빌헬름 1세가 반대했다. 국제적으로 어그로를 너무 끌어서는 안 된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그는 전형적인 왕권신수론자로서, 신의 은총으로 내려진 왕권을 폭도들이 무엄하게 갖다 바친다는 게 어처구니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빌헬름 1세는 1848년 혁명 때도 형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9] 와 달리 왕세제(王世弟)로서 강경진압을 내세워 혁명세력에 쫓겨서 잠시 망명했고, 보오전쟁 때 동맹국이 된 통일 이탈리아 왕국에도 폭도들이 혁명으로 만든 나라라며 부정적이었다. 그래서 당시 비스마르크가 이탈리아와 동맹을 맺는다는 소리에 경악했지만 결국엔 비스마르크 뜻대로 관철시킨다.
여기에 프랑스의 압력까지 가해지며 당사자인 '레오폴트 왕자'가 왕위를 사양하였다. 사실 비스마르크는 레오폴드 왕자가 왕위를 사양하려는 걸 여러 번 협박을 통해 반대했고, 프랑스의 선전포고를 유도하려 발표하지 못하도록 압력을 넣었지만 레오폴드 왕자가 너무 빨리 포기하자 매우 실망했다고 한다. 스페인 왕위는 그저 전쟁의 구실일 뿐인 게, 사실 스페인은 혁명으로 원래 왕가인 보르본 가문 왕을 쫓아내고 내전 상태였으므로 기반도 없는 외국 출신 왕이 가서 무슨 험한 꼴을 당할지도 모르는 판이었다. 그런데 왕위를 얻었다고 타국군주와 혈연이 있다고 유럽 최대 강국 프랑스를 향한 공격 동맹(?) 전혀 불가능한 소리다. 게다가 본인은 호엔촐레른 가문의 가주였고 자식들은 후사가 없는 동생 루마니아 왕의 자리를 물려받기로 약속되어있어서 아쉬울 게 없었다. 결국 스페인에는 1874년 보르본 왕조가 복귀하고, 레오폴트의 차남 '페르디난트'가 루마니아 왕으로 즉위하였다. 여기에 보르본 왕조가 복귀하기 전 한 명의 왕이 즉위한 적이 있었는데 그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차남 아마데오 1세였는데 당시 스페인 최고권력자이던 프림 수상의 열렬한 지지 속에 왔지만 도착하기도 전 프림 수상은 암살당하고 카를리스타네 뭐네 하는 세력들이 격렬히 반발해 '''왕위를 내놓고 다시 돌아와야 했다(...)''' 왕위를 거부한 것이 차라리 잘 된 일이 된 셈.
2.3. 비스마르크의 공작
2.3.1. 1870년 7월 13일, 프로이센에게 보장요구와 프로이센의 거절: 엠스 전보 사건
하지만 프랑스의 격한 반응을 보고 비스마르크가 이를 이용할 계획을 세운다. 스페인 왕위 계승 문제는 일단락되는 듯 하였으나 문제는 다른 방향에서 터져나왔다. 나폴레옹 3세는 빌헬름 1세에게 앞으로 두 번 다시 이러한 일이 없도록 문서로서 보장할 것을 요구했다. 1870년 7월 13일, 주 프로이센 프랑스 대사가 빌헬름 1세와 만나 이를 전달했고, 애시당초 레오폴트 왕자의 스페인 국왕 즉위에 반대하였던 빌헬름 1세였지만 프랑스의 이런 과도한 요구는 받아들일 수 없다며 단호히 거절했다.
이 소식을 전보로 접한 비스마르크는 이것을 기회로 삼아 전보의 내용을 프랑스 대사와 빌헬름 1세 사건이 '''휴가 중인 국왕에게 다짜고짜 쳐들어와 무례한 요구를 늘어놓은 대사 vs 열 받아서 말도 안 듣고 쫓아낸 국왕'''이 맞긴한데 굳이 보도할 필요도 없는 걸, 프로이센이나 프랑스보다 객관적이라 여겨질 제3국 영국 신문을 통해서도 보도되게 하였다. 이것이 그 유명한 엠스 전보 사건으로, 의도적인 프랑스 측[10] 의 신경질적인 반응까지 겹쳐 양국의 여론은 들끓었다.
물론 엠스 전보 사건이 있기 전부터 나폴레옹 3세는 독일 측이 스페인 왕위를 받아들일 경우 선전포고한다고 으름장을 놓았고, 보오전쟁 당시 중립의 대가로 '''자연국경선 드립'''을 치며 '소' 라인란트(룩셈부르크 독일연방 요새, 팔츠 지역 란다우, 자를란트 등)의 할양을 요구했다가 씹힌[11] 후 한판 크게 벌일 준비를 대놓고 하고 있었기 때문에, 엠스 전보 사건은 당시에 여론을 들끓게 한 계기였을 뿐이며, 전보의 내용 자체는 크게 바뀐 것이 없다.[12] 그래서 국제 여론을 비롯한 당시 최강대국 영국에서도 비스마르크의 공작 때문이 아니라 영국의 여론도 프로이센 측 주장이 일리가 있다고 보고 우호적 중립을 지켰다고도 한다. 보오전쟁 이후 건곤일척 승부를 노린 양국의 군비 경쟁 때문에 1868년 영국 대사는 이런 군국주의적 행태를 "평화로운 이 시대의 수치"라고 양국을 싸잡아 비판했을 정도로 이미 양국은 전쟁 준비에 돌입한 지 오래되었다.
그리고 당연히 선전포고 당시 양국에선 전쟁 찬성이 압도적이었고 평화드립을 치는 것은 매국노 취급을 받았다. 프랑스는 건방진 프로이센을 손봐주고, 프로이센은 사사건건 독일 내 문제에 끼어들어 '상전' 노릇하는 프랑스를 꺾어놓을 필요가 있었다. 전쟁의 도화선으로 거론된 스페인 왕위는 이미 스페인은 이미 옛날옛적에 심심하면 폭동이나 터지는 허약한 2류국가로 전락했고 왕의 권위보다는 교회나 귀족들이 힘이 더 셌으며 이미 실추된 스페인 왕실의 권위가 아니더라도 유럽 왕실 어느 나라 왕이 된다고 동맹관계를 맺는다는 건 중세 때나 가능했지 19세기엔 시대착오적인 발상이었다. 유럽 왕실과의 혈연이 나라 사이에서의 외교관계를 나타내기도 했지만 어디까지나 국가간의 결속을 다지거나 하는 정도지 왕실이 주도적으로 혼인관계를 맺은 타국에 국가가 외교정책을 펴는 게 아니었다. 예를 들어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 프로이센, 러시아, 오스트리아, 벨기에, 바이에른, 불가리아 등의 왕가들은 서로 친인척 관계였다(...) 프랑스는 1830, 1848 혁명 이후 유럽 왕실과의 연결 고리가 끊어지고 나서 자기 나라에 없던 '왕실 사이의 교류가 외교정책에 미치는 영향'을 과대평가한다.
2.3.2. 비스마르크의 '프랑스의 벨기에 병합논의'를 언론에 흘림
- 뒤이어 비스마르크가 '프랑스의 벨기에 병합 논의'를 언론에 흘렸고 이에 영국은 벨기에의 중립을 보장했다. 영국은 이미 식민지에서 프랑스와 충돌한 데다가 1830년 벨기에의 독립을 보장한 조약에 의하여 국제법상으로도 개입의무를 가지고 있었다. 벨기에 왕실은 빅토리아 여왕과 여왕의 부군 앨버트 공[13] 의 외삼촌이 었기에 전쟁에 무관심한 여론도 프랑스에 매우 부정적으로 변했다.
- 오스트리아 제국도 프랑스의 바람과 달리 1867년 헝가리를 독립시키면서 동군연합이 성립되고 복잡한 내부 사정 때문에 중립을 지키고
- 러시아도 크림 전쟁 때 전 유럽이 다굴을 놨을 때 프로이센만 빠진 데다가 폴란드 반란 때 프로이센이 진압을 도와준 '은혜'를 보답하고자 역시 중립을 지켰다.
- 이탈리아는 비스마르크의 부추김에 화답하여 프랑스 군대가 지키던 로마를 털고 교황령을 합병한다.
2.4. 1870년 7월 19일, 나폴레옹 3세의 선전포고
결국 이미 선전포고한다고 으름장을 놓은 체면도 있고 지속적인 삽질로 벌어진 국내 불만도 잠재울겸 나폴레옹 3세가 1870년 7월 19일에 프로이센에 선전포고함으로써 전쟁이 시작되었다. 비스마르크는 영국을 비롯한 제3국에 나폴레옹 3세의 여러 침략적 삽질을 상기시키고 방어 전쟁을 선포했다. 이에 독일 남부 제후 국가들이 일제히 프로이센 편으로 참전하면서 프로이센을 중심의 뭉친 독일-프랑스간의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었다.
사실 연방 남부 제후국들, 그중에서도 특히 바이에른은 독일 연방을 혼자 주도해가는 프로이센을 고깝게 바라봤다. 하지만 이미 국민들 내부에 같은 독일인으로서의 민족주의 감정이 들끓어 자칫 눈치없이 중립을 선포하거나 프랑스 편을 들었다간 혁명으로 왕가가 결단날 판이라 찍소리도 못 하고 프로이센 편으로 참전했다. 비스마르크가 하노버를 합병하면서 챙긴 왕실 금고로 미리 바이에른 왕실을 구워 삶아 놓은 건 덤. 그 돈으로 지은 궁전이 노이슈반슈타인 성이다.(...)
3. 전개
3.1. 전반: 프로이센 vs. 나폴레옹 3세
먼저 전쟁을 선포했음에도 멕시코 내전 개입 등으로 정신이 없는데다 대규모 전쟁의 준비가 되어있지 않던 프랑스는 개전 1달여 동안 국경 지대의 요새도 돌파하지 못하고 쩔쩔 매고 있었다. 반면, 4년 전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으로 실전 경험까지 쌓은 프로이센의 육군 참모부는 대규모 상비군의 철도를 이용한 신속한 동원, 효율적인 참모체계로 프랑스보다 동원이 빨랐다.[14] 프랑스 육군은 병력 소집도 안 된 상태에서 독일의 국경 지역인 자르브뤼켄을 20만 병력으로 공격했지만 '''프로이센 육군은 이미 라인강 서안에 38만 5천이나 집결'''되어 있었고 3주안에 3개 군단이 증원될 예정이었다.
결국 역으로 프랑스의 국경 요새 일부가 프로이센군에게 격퇴되었고, 쫓겨난 프랑스군 13만 명이 거꾸로 메츠 요새에 포위되었다. 이에 프랑스 육군은 메츠 요새 구원을 위해 대규모 작전을 전개, 각지에서 프로이센군을 격파하여 진격했으나 이건 이미 대규모로 결집한 적군 사이로 아군을 축차 투입하는 삽질이었고 몰아내기는커녕 생각보다 많은 적군을 보자 변변한 전투도 치르지 못하고 박살이 나서 쫓기게 된다.
3.1.1. 나폴레옹 3세의 친정: 스당 전투
프랑스 해군 육전대와 해병대 등으로 증원되고, 황제 나폴레옹 3세가 직접 이끄는 12만의 대군이 메츠 요새로 진군했으나, 새로운 프로이센군이 메츠로 가는 길을 막아섰고, 몇 차례의 소규모 전투 끝에 돌파가 여의치 않자 프랑스군은 일단 가까운 스당 요새로 후퇴했다. 그리고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헬무트 폰 몰트케는 20만의 대군을 동원하여 물샐틈 없이 '''스당 요새를 포위했다'''.
이후 프로이센군은 요새를 향해 화력을 총동원하여 대대적인 포격을 퍼부었고, 이 포격에 실질적인 프랑스군 총사령관이었던 마크 마옹이 중상을 입으면서 프랑스군의 지휘계통이 무너져 버렸다. 그래도 프랑스군은 악착같이 포위망 탈출을 위해 노력했으나 특히 4차례에 걸친 기병돌격은 프로이센군 포병의 십자포화에 실패로 돌아갔고[16] , 애당초 임시로 들어간 스당 요새에 식량이나 탄환이 충분히 비축되어 있을 리도 만무했다.
거기다가 프로이센군이 본격적으로 공세를 개시하니, 9월 1일, 나폴레옹 3세가 항복했다. 나폴레옹 3세가 겁쟁이가 아니라 애초에 스당 요새로 쫓겨들어간 순간 별 대책이 없었다. 병력도 적고 화력도 프로이센군이 강했기 때문...
나폴레옹 3세는 항복을 하면서 프로이센 국왕 빌헬름 1세에게 자비를 구하려고 했으나 비스마르크가 이를 막아섰고, 결국 아무런 관용 없이 장교를 제외한 병사는 모두 무장 해제당하고 포로로 잡힌다.
3.1.2. 바다
전투는 바다에서도 벌어졌다. 프랑스 해군은 개전 직후 곧바로 압도적으로 우세한 해군력을 이용해 해상 봉쇄를 실시하려 했고, 북독일 연방 해군은 이를 막을 전력이 없었다. 장갑함은 불과 5척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잡다한 소형 함정들 뿐이었으며, 그나마 장갑함 중 1척은 고장난 엔진을 개전 직전에야 겨우 고쳤을 정도였다. 그러나, 프랑스 해군 역시 470척에 달하는 대규모 함대 중 상당수가 해외 식민지 등에 남아 있어야 했기에 극히 일부만 투입할 수 있었으며, 함대의 대규모 석탄 저장 능력 부재와 정부의 오락가락하는 명령 등으로 빌헬름스하펜 등의 항구를 부분적으로 봉쇄하는 정도만 할 수 있었다.
해군을 이용해 독일 영토에 상륙작전을 하려던 계획 역시, 독일 해군의 해안포 진지들을 상대할 수 있는 함정들이 부족해 좌절되었다. 그리고 겨울이 오자 발트 해의 악천후로 결국 상당수의 프랑스 함대가 철수, 봉쇄에 구멍이 뚫리며 봉쇄 돌파선들이 어렵사리 프랑스 해군의 저지선을 뚫고 교역을 유지할 수 있었다.
별 주목을 받진 못했지만, 해외에서도 양국 간 소규모 해전이 있었는데, 일본의 나가사키와 쿠바의 아바나에서 양측 해군의 단함간 소규모 해전이 벌어졌다.
비록 완벽하진 못했으나 프랑스 해군의 독일 해안 봉쇄 자체는 그럭저럭 성공했기에, 육전에서 성과를 내지 못했다면 독일은 경제 위기에 직면할 뻔했으며, 이때의 경험이 빌헬름 2세가 해군력 강화에 집착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3.2. 후반: 프로이센 vs. 국민방위정부
항복 후에도 비스마르크는 나폴레옹 3세에게 대우를 극진히 했는데 나폴레옹 3세의 정부가 무너지면 항복을 받을 대상이 없어지고 전쟁이 길어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비스마르크의 바람과는 달리 파리에선 제정이 붕괴되고 공화정이 들어선다. 주력군이 모두 붕괴되고 황제가 포로로 잡혔다는 충격적인 소식에 열받은 파리 시민들은 루이 쥘 트로쉬를 대통령으로 하는 국민방위정부를 만들어서 항쟁을 지속하기로 결정하였다. 패퇴한 프랑스 육군 병력들이 파리를 중심으로 일부나마 모이기 시작하였으며, 국민방위정부는 이들과 국민위병 및 의용군, 해군 육전대 등을 긁어모아 국민방위군을 조직하였다.
전쟁이 끝난 줄 알고 좋아라 했던 프로이센은 당황해 하면서도 프랑스 영내로 깊숙히 진격, 9월 15일 파리 외곽에 당도하였다. 그리고 국민방위정부에게 알자스-로렌을 할양하는 조건으로 항복할 것을 요구했고, 국민방위정부에선 그 대신 아프리카나 동남아시아의 식민지를 할양하는 안을 고려하였으나 대통령인 루이 쥘 트로쉬가 영토를 1인치라도 할양할 수 없다고 선언하였기 때문에 전쟁의 연장이 결정되었다.
3.2.1. 9월 19일 파리봉쇄
9월 19일 봉쇄선을 구축한 프로이센군은 파리에 물자 및 인력이 반입되지 않게 하여 말라 죽도록 유도하였다. 하지만 프로이센 육군도 프랑스 해군의 해안 봉쇄와 예기치 않은 진격으로 길어진 보급선으로 인한 보급난을 겪었기 때문에 현지인에게 물자를 구매할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 내무 장관 레옹 강베타가 열기구를 타고 파리를 탈출해 군대를 규합한 뒤 오를레앙을 프로이센군에게서 탈환하였다. 하지만 10만의 프로이센군이 지방에서 봉기하는 프랑스군을 진압하기 위해 추가로 투입되었기 때문에 12월 4일 오를레앙은 재함락당하고 1월 10일 르망 전투에서 프랑스 남부군은 괴멸되었다. 프랑스의 북부군도 곧 프로이센군에게 격퇴되었고, 동부군은 일시적으로 프로이센군을 위협하였지만 역시 격퇴되면서 파리는 완전히 고립무원의 처지로 빠져버렸다.
결국 약 4개월에 걸친 포위로 식량이 바닥나고 동물원의 모든 동물들[18] , 그걸로 부족해 쥐까지 잡아먹는 지경에 이르자 국민방위정부는 평화를 제의했다.
4. 결과
4.1. 독일 제2제국
결국 해가 바뀐 1871년 1월,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고 빌헬름 1세는 비스마르크의 설득으로 1월 18일,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 제국(제2제국)의 탄생을 선포하고 초대 황제로 즉위했다. 1월 18일은 1701년 프로이센 공국의 대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가 프로이센 왕국을 개창하며 프리드리히 1세로 즉위하고 대관식을 거행한 날이다. 개전 초부터 의도한 건 아니었겠지만, 어쩌다보니 1월에 종전이 되니 비스마르크가 역사적인 날짜를 활용하여 독일 제2제국을 출범시킨 것이다.
독일 제국 황제는 군대와 제후국 군주들의 추대로 이어진 것이지 시민 계급에 빚진 게 없었기 때문에 독일 제국 시대 내내 군과 황제는 입헌에도 불구하고 초법적인 지위를 이어 나갔다. 막상 빌헬름 1세는 프로이센 왕국이 사라지는 것이나 다름없고 황제 자리를 외교상 타국 군주가 오면 수여하는 '명예 대령'에 비유하며 탐탁해하지 않았다고 한다. 비스마르크는 '아랫것들'이 좋아하는(?) 민족주의 때문에 통일 국가는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설득했다. 전쟁 승리의 삼인방 프로이센 재상 비스마르크, 육군 참모총장 몰트케, 국방장관 폰론(Von Roon)은 독일에서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국민방위정부는 항복 조건으로 파리에서 1871년 3월 1일 독일군의 개선식을 하루 동안 하는 것을 허용하여[20] 시민들은 이를 한심하게 봤고[21] 이를 허용한 티에르 정부도 이후 의회와의 대립과 징병제 도입 문제 등으로 반발을 사 2년만에 물러나게 된다.
4.2. 프랑크푸르트 조약
이후 독일과 프랑스는 종전 조약인 프랑크푸르트 조약을 체결하였다. 오스트리아엔 관대하였던 비스마르크였지만 프랑스는 앞으로 재기불능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필요성 때문에
그러나 먼저 선전포고하고도 안방에서 처참하게 발렸다는 사실에 프랑스는 이미 큰 충격을 받은 상황이었다. 몇십 년 전만 해도 프랑스는 전 유럽을 석권할 정도로 유럽 최강급의 육군력을 지니고 있었고, 그 위력은 그때까지 의심받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프로이센이 18세기 프리드리히 대왕 이래 유럽 최정예 육군 이미지는 있었지만 나폴레옹 시대 이후 유럽 최고의 육군 ''La Grande Armée''(위대한 군대)에게 안방에서 제대로 참패한 적도 있었기에 프랑스에 비하면 평가가 좋지 못했다.[22] 물론 나폴레옹이 몰락한 1814년, 1815년 두 번에 걸쳐 외국 군대에 파리가 털렸지만 여러 나라가 쳐들어 온 것이었고 이번엔 사실상 프로이센 1개국에 당했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당시 프랑스에 가해진 충격은 막대했다. 병력 손실은 프랑스가 35만 프로이센 연합군이 11만.
나폴레옹 전쟁 이후 극악의 출산율로 루이 14세 때 유럽의 중국이라 불리던 물량이 정체된 반면, 영국과 독일은 산업 혁명과 영아 사망율 감소로 100여 년 동안 3~4배씩 인구가 증가한 상태였다. 더구나 프랑스는 2차 산업 혁명이 일어난 중공업(제철, 화학, 전기) 중 철광석과 석탄 생산이 빈약해 영국과 독일에 크게 뒤떨어졌다. 이것은 알자스-로렌의 상실이 영향을 미쳤다. 알자스-로렌은 자원이 풍부하고 중공업이 매우 발달한 곳으로 프랑스 유수의 중공업 기업들도 알자스-로렌에 있었다. 그야말로 '꿀땅'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런 중요한 곳을 독일에게 빼앗겼으니 프랑스의 중공업 성장은 더뎌질 수밖에 없었다.
4.3. 프랑스의 내분: 파리 코뮌(몰락), 대통령파(승)
그러는 와중에 프랑스인들은 내분을 벌였고,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정부인 파리 코뮌을 만들었다. 하지만 파리에서 탈출한 대통령 루이 아돌프 티에르는 지방군을 모아서 반격을 했고, 그 와중에 도움을 받은 상대가 방금 전까지 싸우던 상대인 독일이었다(...). 티에르는 파리 코뮌을 진압하기 위해 프랑스군 포로를 석방해 줄 것을 독일에 요청하였고, 독일의 총리 비스마르크는 이를 수락하였다[23] (...). 파리 코뮌은 결국 진압되었고 1만 명이 넘는 파리코뮌 가담자가 총살당했다.
4.4. 50억 프랑 배상금 완납
여하간 프랑스는 빠른 시간 내에 50억 프랑을 모금해서 배상금을 완납, 비스마르크를 놀라게 했다. 비스마르크는 50억 프랑을 배상하려면 최소 5년 이상 걸릴 것으로 예상했다. 실제론 1년 8개월 정도 만에 다 갚았다고 한다. 이것이 대단한 것이, 당시 50억 프랑은 프랑스 GNP의 25%에 해당되는 금액이었다고 한다[출처] . 몇년 동안 배상금을 무기로 프랑스 요충지의 요새를 점령하려고 했는데 실패한 셈.
4.5. 1873년, 대불황
그러나 이렇게 무리해서 배상금을 지불한 것이 경제사적으로 중요한 1873년의 대불황의 중요한 원인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당시 프랑스는 포도 농장을 초토화시킨 필록세라병과, 누에 미립자병 유행으로 주요 산업인 와인과 비단 생산이 위기에 빠졌는데, 여기에 50억 프랑에 달하는 배상금까지 지불하니 경제 공황을 야기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독일의 탈러 은화 생산 중단, 미국의 남북전쟁으로 인한 인플레이션, 시카고 대화재, 산업 혁명 당시의 과잉투자들도 원인으로 추측된다.
4.6. 이후, 양국 간의 관계
4.6.1. 2차 대전까지
이후 양국의 국민 감정은 크게 악화되어(물론 독일은 나폴레옹 때부터 증오하였다.) 서로를 제1주적으로 인식하게 되었고, 이러한 상호 적대감은 비스마르크의 '프랑스 고립 정책'으로 몇 배 더 강해졌다.
- 결국 프랑스는 이때의 분노를 50년 뒤 몇 배 이상으로 갚고야 만다.
- 독일 또한 이 때의 프랑스의 복수에 분노하여 20년 후 또 다시 갚는다. [24]
- 그리고 5년 뒤 프랑스는 독일을 4조각으로 쪼개버렸다.
4.6.2. 2차 대전 이후
2차 대전 후에는 전후 피해 복구와 냉전이라는 새로운 국제질서에 대처해야한다는 두 나라의 이해관계가 맞물리면서 프랑스와 서독은 서로 화해하고 유럽 통합 기구의 발단이 되었다고 하는 '유럽 석탄 철강 공동체(ECSC)', '유럽 경제 공동체(EEC)' 등을 세우고 이것이 유럽연합으로 발전하게 되면서 마침내 길고 긴 앙금을 털어냈다.
5. 뜻밖의 수혜자
보불전쟁에서 진정한 수혜자는 미국의 J. P. 모건이었는데 당시 대부분의 런던 금융가들은 프랑스의 경제상황을 비관적으로 보고 프랑스 국채를 15~20% 수준으로 마구 팔아버렸던 것을[25] 미국의 모건이 모두 사들였다. 프랑스가 국채에 대해 모라토리움을 선언할 것이라는 소문이 떠돌았고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당시의 프랑스 경제상황에서는 그게 맞았지만 모건은 프랑스는 자존심 때문에라도 모라토리움을 선언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유럽을 먹여 살리고 있는 프랑스의 거대한 농축업 생산력을 알고 있었고 모라토리움은커녕 보불전쟁 배상금 50억 프랑 정도는 1년도 안 돼서 다 갚을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당시 프로이센은 프랑스에서 식량을 수입하는 처지였고 프랑스 식량물가가 1% 올라가면 프로이센 식량물가는 3~5% 이상 뛰는 구조를 갖고 있었다. 즉, 19세기는 비스마르크가 원했던 경제적 프랑스 압박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20세기 중반에는 전세계 단위에서 식량이 거래되지만 19세기까지는 아직 대륙 단위에 그쳤다. 현재까지도 치즈나 와인 같은 고가 가공품뿐만 아니라 돼지고기 같은 저가 육류까지 한국, 일본이나 중국은 물론이고 미국, 호주 등 낙농업이 발달한 국가조차 경제적 여유가 조금이라도 있는 나라는 모두 프랑스로부터 식품을 수입하고 있다. 이쯤 되면 정말 미친 듯한 품질과 생산력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다.
이와 관련된 일화로 모건이 일찍이 유럽 체류 당시 영국, 그리스 왕국, 러시아 제국에 이어 심지어 아프리카 모로코에 있을 때도 호텔 웨이터가 계속 "식재료는 프랑스산입니다."라고 얘기하는 것을 듣고 "유럽에서 프랑스 말고는 농사를 짓는 나라가 없느냐?"라고 물었다. 이에 웨이터가 "스페인이나 이탈리아에서 조금 하긴 하지요."라고 답해주자 프랑스의 농축산 생산력에 감탄했다고 한다.[26]
보불전쟁 덕분에 J. P. 모건은 조지 피바디[27] 명성 아래에 있던 평범한 은행가에서 미국은 물론이고 세계 금융시장의 유대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국제적 금융가로 성장하게 된다.
그래서 J. P. 모건의 별칭은 '''마지막 양키 금융가'''이다. J. P. 모건 이후로 미국에서 제대로 된 비유대인 금융가가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J. P. 모건은 미국 국회 청문회에서 "하느님이 발행한 채권도 내가 신용하지 않는다면 가치가 없다"[28] 며 일갈한 진정한 양키 금융가였다.
6. 대중문화에 끼친 영향
프랑스의 작가 알퐁스 도데는 패전에 충격을 입고 국가적, 민족적 관점에서 소설 마지막 수업을[29] 쓰게 된다. 기 드 모파상의 단편들인 두 친구와 비곗덩어리역시 이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직접적인 영향은 아니지만 근대 올림픽의 창시자인 쿠베르탱은 보불전쟁 이후 프랑스의 침체기에서 올림픽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었다. 교육학을 전공한 쿠베르탱은 프랑스의 몰락 원인을 청년의 신체가 허약했다는 점에서 찾았고, 나라의 근간인 청소년들의 신체를 운동경기로써 단련하는 것으로써 프랑스를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었다고 믿었다. 이렇게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체육 발전을 주장하던 쿠베르탱은 19세기 말엽부터 유행한 국제주의에 영향을 받았고, 이를 바탕으로 근대 올림픽을 부활시키게 된다.
대체역사 호사가들에겐 이 전쟁을 사라예보 사건을 넘어서 '''진정한 제1, 2차 세계 대전의 시발점'''으로 본다고. 애초에 이 전쟁만 아니었으면[30] 독일 제국 대신 북독일 연방만 남고, 프랑스도 독일에 그렇게 척지지 않고, 훗날 빌헬름 2세가 영국에 경쟁심 붙을 이유도 없어 경사났네 경사났어로 유럽의 백년 평화가 지속되었을 것이라는 이야기.. 뭐 1차대전 까지만 해도 충분히 백년 평화기지만[31] ... 만약에 참고.
BiBi 아이리스의 시대적 배경은 이 전쟁 종료 후 12년이 지난 1883년이지만, 이 전쟁 때문에 주인공의 운명이 바뀌어 버렸다. 여주인공 아이리스가 태어나기 전, 아버지인 미르벨 자작이 이 전쟁에서 전사했다는 언급이 나온다. 덕택에 아이리스의 엄마 미르벨 자작부인은 임신 중에 이 사실을 들은데다가 뱃속의 아이가 딸일 경우 한 푼의 유산상속도 못 받는다는 시아버지의 통보까지 듣고 심각한 산후 우울증으로 고생하여 갓 태어난 아이를 돌보지도 못하게 되었다. 덕택에 아이리스는 태어나자마자 엄마에게 버림받았다는 오해로 한동안 갈등을 빚기도 한다.
엠파이어 어스 2 독일 캠페인의 마지막 미션이다.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에서는 전쟁이 의외의 방향으로 비틀어지면서 대전쟁의 서막을 올렸다.
7. 여담
- 패전으로 프랑스의 여론은 극도로 국가주의-애국주의 성향이 강해졌다. 이 과정에서 인종 차별도 더욱 득세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로 인해 발생한 사건 중 하나가 드레퓌스 사건이다.
- 드레퓌스 사건은 전 유럽의 유대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이때 나타난 인물이 테오도르 헤르츨이다. 보불전쟁이 이스라엘 건국에 영향을 끼친 나비효과이다.
- 또 이 시기에 불어 역사상 특이한 언어 운동도 일어났는데 '구개수 전동음'으로 발음되던 r을, 라틴어처럼 '치경 전동음'으로 발음하자는 복고 운동이 일어났다. 특히 적대국인 프로이센/독일을 위시한 주변국에서 유럽의 중심이라면서 정작 대부분 유럽인들이 구사할 수 있는 전동음을 구사할 수 없다고 깐 적이 있기 때문이다. 패전한 뒤에 얼마 안 있어 1888년 국제음성기호가 막 발표되던 참이라 음성학에 대한 관심이 크게 태동되고 있던 시기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시기 이후로 독일어 역시 바이에른을 제외한 대다수 지역에서 구개수 전동음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오늘날 표준독일어의 r발음이 가글하는 듯한 발음인 이유.
- 특히 오를레앙이 함락당하고 알자스-로렌을 빼앗긴 탓인지 백년전쟁 당시 로렌 지방 출신이면서 오를레앙을 지켜냈었던 잔 다르크가 국민적인 영웅으로 더욱 부각되었다. 그런데 당시 독일에서도 잔 다르크가 독일령이 된 로렌 출신이니 자기네 사람이라는 드립이 나오기도 했다(...).[32]
- 비스마르크에 낚인 나폴레옹 3세는 프랑스 공화 정부가 들어서면서 강제 퇴위당하자 갈 곳을 잃고 영국에 망명해서 쓸쓸한 최후를 맞이했다.
- 한편 전쟁의 양상을 보고 유럽 각국에서 참모 체계의 유용함을 목격하고 프로이센과 비슷한 참모 체계를 배우고 각국에 적용하는 계기가 된다. 19세기 초반까지 지휘관의 전술적인 능력에 의존하던 전쟁의 양상이 보오전쟁과 보불전쟁을 통해 효율적인 참모 체계로 병력 동원, 이동, 지형 연구, 장비 및 병력 보급에 이전까지 주먹구구식으로 행해졌던 것을, 군에도 기술화된 '관료'인 참모들이 좌우하는 현대적인 양상의 전쟁이 시작이 된 셈.
- 한편 프랑스군 또한 참모 제도를 도입해 이번 전쟁에서 계획이 철저하지 못했던 점을 반복하지 않게 했고, 장비를 현대화했으며 철도를 이용한 보급과 증원 체제를 정비했다. 그 결과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독일의 슐리펜 계획이 먹히기 시작하고 프랑스의 제17계획이 먹히지 않는 상황에 도달했음에도 보불전쟁의 교훈을 이용해 꾸역꾸역 방어에 성공했으며, 결국 제1차 세계 대전의 승자는 프랑스가 되었다.
- 이 전쟁의 영향으로 이탈리아 왕국이 교황령[33] 을 무력으로 수복하게 되면서(1870년) 이탈리아가 통일을 완수하게 된다. 사실 미수복 지역도 있어서 1차 대전 당시 이탈리아 왕국이 연합국 측에 서게 된 원인이 되기도 한다.
- 근대화를 진행중이던 동북아 국가들에게도 이 보불전쟁의 결과가 영향을 끼쳤는데 일본은 근대군의 모티브를 프랑스가 아닌 프로이센으로 잡게되고 훗날 조선 또한 그 이유 때문에 프로이센의 교관단을 초청하려 하였으나 미적지근한 반응 때문에 타국 교관단을 초청하였다
[1] 보로서普魯西(프로이센)-불란서佛蘭西(프랑스). 가끔 프로이센-프랑스라 하여 프프전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한국에서 프프전은 보통 링크된 의미로 쓰이는지라 많지는 않다. 보불전쟁은 일본식 표기로 일본에서도 이렇게 부르고, 중국에서는 보법전쟁(普法战争)이라고 한다.[2] 라인 강은 남북으로 흐르고 마인 강은 라인 강의 지류로 현재에도 남북독일의 지리적 경계점이다. 당시에는 마인 강 이북 독일 제후국들만 북독일 연방에 가입했다.[3] 하노버, 헤센나사우, 프랑크푸르트는 프로이센에 합병되고 작센은 프랑스의 견제로 연방에는 가입하지만 합병은 면한다.[4] 이것을 완전히 버리는 것은 세계대전 들어 왕조명을 '윈저'로 갈아버리면서였다.[5] 프로이센 '프리드리히 왕세자'와 빅토리아 여왕의 장녀인 '빅토리아 공주'가 결혼.[6] 이들 지역은 현재까지도 프랑스령이다. 이탈리아가 비시 프랑스 때 집적거리긴 했지만.[7] 니스와 사보이 할양은 전쟁 전의 약속이었지만 프랑스가 멋대로 전쟁에서 이탈하여 약속을 파기했기 때문에 굳이 지킬 필요는 없었다. 허나 전쟁 종결 후 1년 뒤, 교황령을 제외한 중부 이탈리아를 합병하는 대신 니스와 사보이를 할양했다.[8] 프로이센 왕실 호엔촐레른 가문의 방계이다.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 가문은 가톨릭이고, 프로이센 왕가는 개신교 칼뱅파였다.[9] 자식이 없어서 동생이 왕위계승자임.[10] 프랑스 여론은 전쟁에 소극적인 나폴레옹 3세를 보오전쟁 이후부터 들들 볶았다.[11] 라인란트 전부를 요구했다는 건 일부 서적의 오류이다. 어디까지나 중립의 대가로 '소'라인란트를 요구했으나 거절도 아닌 응답도 하지 않았다.[12] <케임브리지 독일사> -마틴 키친- 참조.[13] 둘은 사촌이다.[14] 그리고 당시 독일군 병사들은 나폴레옹, 그 이전 30년 전쟁부터 독일을 유린해온 프랑스에 대한 복수심으로 인해 사기가 하늘을 찔렀다고 한다.[15] The Line of Fire by Pierre-Georges Jeanniot, (1886).[16] 스당 요새에서 포위를 뚫으려고 프랑스 기병대의 자살에 가까운 돌격이 몇 번 이어지자 빌헬름 1세는 "진정 용감한 사람들" 이라며 경의를 표하기도 한다.[17] The Capitulation of Sedan.[18] 가장 먼저 희생된 것은 덩치 큰 코끼리였다. 그 코끼리는 파리 시민들의 귀여움을 받던 동물이라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워 했지만 딱히 막지는 않았다.[19] 당시 비스마르크는 남들처럼 군청색 제복을 입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황제 빌헬름 1세의 특별 지시로 눈에 띄는 흰색 제복을 입은 것처럼 묘사됐다. 그런데 이로부터 반세기도 못 되어 저 '''같은 장소, 거울의 방'''에서 기막힌 반전이...[20] 이것은 중세적 로망이 남아있던 빌헬름 1세의 강력한 건의 때문이었고 비스마르크는 주저하지만 프랑스 신정부에서 의외로 이의없이 받아들인다.[21] 모두 검은 기를 내걸고 안 나왔다는 말은 국뽕 섞인 뻥이고 많은 파리 시민들이 신기해서 구경 나왔다.[22] 메이지유신 당시 일본도 1880년대 이전까지는 육군 모델로 프랑스를 채택했다.[23] 프랑스 군인 포로가 독일에 가서 공산주의를 퍼뜨릴까봐 두려워서 더불어서 포로에게 줄 식량을 줄일 겸해서[출처] Devereux, Michael B., and Gregor W. Smith. "Transfer problem dynamics: Macroeconomics of the Franco-Prussian war indemnity." Journal of Monetary Economics 54.8 (2007): 2375-2398.[24]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제국의 항복을 진행했던 '그 기차'를 그대로 다시 가져와 프랑스의 항복을 진행하여 통쾌한 복수를 치른다. 그러나 몇 년 뒤...[25] 보불전쟁 당시 객관적 관찰자였던 영국은 프랑스가 그 정도로 비참하게 패배 할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충격이 더욱 컸다. 전통적인 육군강국으로 유럽 대륙에서 전쟁만 나면 안 끼는 데 없이 참전하고 성과도 좋은 편이었기 때문인데 정작 나폴레옹 3세는 프랑스의 전근대적 군사력에 회의감을 품고 끝까지 프로이센과의 전쟁을 피하려고 했다.[26] 현재에도 유럽의 농축산은 프랑스 평야와 폴란드 평야, 우크라이나 평야가 지탱하고 있고 그 중에서도 단연 프랑스 평야의 생산력이 압도적이다.[27] 현재는 미국에서도 거의 잊혀졌지만 미국 기부문화의 창시자로 막대한 돈을 문화, 의료, 교육 발전을 위한 각종 재단에 기부해서 명성이 높았다. 문제는 그가 처음 돈을 벌었던 방식이 미연방 국채를 위조해서 팔았던 경제범죄였기 때문에 J.P. 모건처럼 미국의 얼굴은 되지 못했다. 범죄를 저질러서 벌었던 돈으로 자신은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사회를 위해 전 재산을 기부한 굉장히 다채로운 인물이다.[28] 라디오로 이 청문회를 듣고 있던 월가의 모든 금융인들은 환호성을 질렀다고 한다. 대공황의 전조였던 1907년 미국 재정위기 당시 월가에 모든 비난이 쏠렸던 때 유일하게 당당한 모습을 보인 월가의 영웅이었다. 이때의 사회상을 모르면 '위대한 개츠비'를 읽고 이해하는 게 어렵다[29] 동시기 당구 게임이라는 소설도 썼는데, 무기력하게 패했던 프랑스군을 까는 내용이다.[30] 그중 한 가지 예를 들어서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는 엠스 전보 사건을 접하고 나서 '''나폴레옹 3세는 전혀 선전포고할 생각이 없었다.''' 수십 년간 유럽 정치판에서 굴러먹은 감각으로 볼때 프로이센과의 전면전은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 특히 1860년대 후반부터 혹시 모를 실전에 대비해 보고 받은, 장부상 머릿수만 많고 실력이 떨어지는 프랑스군의 실상을 알고 현실은 시궁창이란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현실은 이렇게 알고 있다 한들 격렬하게 들끓는 국민 감정을 막을 수 없었지만...[31] 보통 팍스 브리타니카 시기와 벨 에포크 시기를 합쳐 백년 평화라고 지칭한다.[32]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별 볼 일 없던 잔 다르크를 영웅으로 조작했다는 수정주의 이론이 교양 지식처럼 퍼져 있지만, 단순히 그렇게 보는 시각도 경계할 필요가 있다. 자세한 내용은 잔 다르크 문서 참고.[33] 당시 프랑스의 영향하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