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 스톡홀름 올림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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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개최된 5번째 올림픽. 전 대회보다 참가국수가 늘어서 이번에는 아프리카(이집트)와 아시아(일본 제국)에서도 참가하는 등 대회사상 처음으로 5대륙 모두에서 참가. 또한 나라별로 통일된 유니폼을 입고 입장한 최초의 대회.
개최국 스웨덴은 전국에서 선수를 뽑아 사상 최초로 합동 강화 훈련을 실시하여 미국과 똑같이 금메달 24개를 차지하는 뛰어난 성적을 거둠으로써 대표팀 합숙 훈련의 역사를 열었다.그리고 참가 선수의 증가로 인해 한 종목에 한 나라가 3명의 선수만을 출전시키는 제한 규정이 채택되었으며 사진 판정과 전자 계시기의 출현으로 공정한 판정의 획기적인 진전을 가져왔다.
요컨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국가 대항전 성격의 국제 스포츠대회'로서 올림픽은 이 스톡홀름 대회가 시초인 셈이다.
2. 특징
올림픽에서 도금메달이 아닌 순금메달을 준 마지막 올림픽. 선수들이 순금으로 메달이 되어있어서 이것을 팔아넘기기 시작하자 IOC에서는 올림픽 정신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1920 안트베르펀 올림픽부터는 금도금이 된 금메달을 지급하게 된다.
육상에서는 전자시계와 사진측정기가 도입되는 등 판정 방법의 혁신이 일어났던 대회다.
수영과 다이빙에서 최초로 여자종목[2] 이 열리게 되었고, 여자 수영 최초의 금메달은 자유형 100m에 우승한 호주의 파니 듀락(기록 1분 22초 4)이 차지한다. 권투의 경우는 개최국인 스웨덴의 요구로 열리지 못하게 되었다. 그외에 근대5종경기가 최초로 정식종목화가 되었으며, 다시 야구가 시범종목이 된것을 제외하고는 종목은 많이 달라지지 않았다.
공식 종목은 아니었지만 예술 종합대회도 개최를 했다. 메달 시상까지는 했지만 이것이 공식경기로 집계되지는 않았다고...
이 대회까지 공식적인 선수단이 필요없었다고 한다. 지역의 팀단위로 참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 다음 올림픽때부터는 공식적인 선수단이라는것이 생기게된다.
이 대회 이후에 원래 1916년에 독일 베를린에서 올림픽이 개최될 예정이었으나 1차 세계대전으로 결국 올림픽이 개최가 불발되었다.
이 올림픽이후 스웨덴은 현재까지 어떠한 올림픽도 유치하지 못하고 있다. 특히 동계올림픽은 7번 도전했다 7번 모두 실패하는 불운을 맛보았다. 2022 동계 올림픽은 여론이 차라리 하지말자는 반대의견이 압도적이라 그냥 포기했다. 처음부터 포기한게 아니라 돈만 많이 들어간다고 올림픽 개최에 대하여 부정적인 여론이 늘었기 때문이다.
일본이 처음으로 참가한 하계 올림픽이기도 하며, 최초로 예술 종목 경기가 치러진 올림픽이기도 하다.[3]
올림픽 최초의 정치 분쟁이 발생하기도 한다. 당시 제정 러시아 식민지였던 핀란드는 독립출전 지위를 인정받아 '핀란드'라는 이름으로 출전할 수 있었지만, 국기는 허용되지 않았던 것. 결국 핀란드는 제정 러시아의 깃발을 거부했지만 입장식에는 국명이 쓰여진 팻말밖에는 허가되지 않았다.
3. 기타
아마추어 개념을 명확히 정의한 대회다. 그 희생양이 바로 후술 할 미국 인디언 짐도프. 그는 5종과 10종에서 금메달을 수상했지만, 생활고로 잠시 프로야구에서 뛴 것이 밝혀져 모든 영광을 반납해야 했다. 그러나 당시 선수들 대부분이 가명으로 프로에 참가하고 있었으며, 짐 도프는 아마추어 규정을 피해갈 줄 몰랐을 뿐이다. 이후 IOC는 실재하지도 않는 '아마추어리즘'을 지키기 위해 소모전을 벌여왔다. '특정 스포츠에 숙달되어 부자가 된다면 그 선수의 고결함은 훼손' 될 것이라고 경고했던 쿠베르탱 자신이 1,2회 대회때 프로 대접을 받고 있던 펜싱 선수들의 참가를 허락한바가 있다. '아마추어리즘'에 대한 IOC에 대한 규정 때문에 수많은 '사이비 아마추어'들이 등장했으며 그들은 가명을 쓰거나 이력을 날조하였다. 1925년에 열린 제23차 프라하 총회에서 IOC는 '어떠한 스포츠 종목에서도 전문적 직업선수가 되어서는 안되며, 한번 직업선수가 된 선수는 다시 아마추어로 복귀할 수 없고 올림픽에 참가한 일정 동안 손실된 봉급 역시 보상받아서는 안된다'는 규정이 발표되기는 했지만, 당시 기준에서도 실효성이 없는 내용이었다.
전 대회에서는 도란도의 비극이 일어났더니만, 이번대회에서도 마라톤 경기에서 포르투갈 선수인 프란시스쿠 라자루가 마라톤 경기도중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레슬링 그레코로만에서는 올림픽 역사상 좀처럼 나오기 힘들 진풍경이 나왔다. 중량급 준결승 경기에서 러시아의 마틴 클라인과 핀란드의 아시카이넨이 '''11시간동안 레슬링 경기를 진행'''해버린 해프닝이 발생했던 것. 30분에 한번씩 쉬고 했음에도 11시간동안 승부가 나지 않았으며, 겨우 승리를 거둔 클라인은 '''너무 지쳐서 결승전을 기권'''했다. .
미국의 짐 쏘프[4] 는 이 대회에서 가장 큰 비운의 주인공으로 기록되었다. 남자 육상 5종경기와 10종경기에서 우승을 하여 2관왕을 하였지만, 이듬해 그가 올림픽 이전에 프로야구 마이너리그에서 뛰었던 적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져서 '''돈 받고 스포츠를 했으니 프로선수'''라는 이유로 그가 딴 금메달이 모두 박탈당했다.[5] 그러나 당시 이 결정은 숱한 논란을 야기했고, 결국국제올림픽위원회에서는 '''그가 죽은지 30년뒤'''인 1983년에서야 자녀에게 메달을 돌려주기는 했으나, 정식 메달로는 아직도 인정하지 않는다.[6] 공교롭게도 짐 쏘프가 출전한 바로 그 종목에 나중에 IOC위원장으로 아마추어리즘을 강력히 옹호하게 되는 에버리 브런디지가 출전하여 5위에 입상한다. 스웨덴의 구스타프 국왕으로 부터 가장 위대한 선수라는 극찬을 받았던 짐 쏘프가 만년에는 모국에서 열린 32년 LA올림픽도 구경할 여력이 없는 비참한 삶을 살았던 반면, 브런지는 72년 뮌헨올림픽에서 사임할때 까지 평생 올림픽 귀족으로 존경 받는다.
(비록 금메달은 박탈되었었지만) 미국의 올림픽 사가들은 초기 올림픽의 영웅으로 거의 예외없이 짐 쏘프를 꼽지만 유럽의 사가들은 최초의 '날으는 핀란드인' 한네스 콜게마이넨을 지목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는 마라톤을 제외한 장거리 4개 종목. 즉 5000m와 10000m 그리고 8000m 크로스컨트리와 같은 종목 단체[7] 를 모두 석권한다. 그의 출현은 바로 올림픽 육상의 가장 위대한 주자인 파보 누르미, 그리고 72년 장거리 영웅 리세 비렌으로 이어지는 핀란드의 영광의 연대기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제정 러시아의 속국이었던 조국의 현실은 그가 시상대에 섰을 때 러시아 깃발을 올려야 했다. 그는 러시아 깃발이 올라가는 것을 보는니 차라리 우승을 안하는게 나을 뻔했다고 약소국의 설움을 탄식했다. 36년 베를린에서의 손기정의 아픔은 이미 24년전에 선배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마라톤 역사상 '''세계에서 가장 오래 걸린 마라톤 완주기록'''을 갖고 있는 올림픽이기도 하다. 당시 일본제국에서 참가한 2명의 선수중 한명이었던 카나쿠리 시조는 경기 도중 일사병으로 쓰러져 26.7 km 지점에서 경기를 중단하고 인근 농가에서 치료를 받았다. 이로 인해 그는 실종처리가 되었지만, 카나구리 시조는 끝까지 완주를 못했다는 생각에 너무 창피해서 이미 일본으로 귀국을 한 뒤였다고 한다.
그로부터 54년이 지난 1967년, 스톡홀름 올림픽 개최 55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식전을 개최하다가 카나구리 시조가 '경기 중 실종해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기록을 발견하고, 올림픽 위원회는 시조를 기념식전으로 골을 시키기로 하여, '''"그 떄 못 뛴거 마저 뛰셔야죠?"'''라면서 직접 초대를 하고 경기장 내에 준비된 골테이프를 잘랐다.[8] 이로서 카나구리 시조는 마라톤을 완주할 수 있었으며, '''54년 8개월 6일 8시간 32분 20.3초'''의 기록으로 파란만장한(!) 마라톤 경주를 완주하게 되었다. 그의 나이는 당시 75세가 되어있었다. 그리고 그 카나쿠리 시조는 1983년 11월 13일, 향년 91세의 나이로 영원히 영면했다.
골인하는 순간, 경기장에는 '''“일본의 카나구리 선수가 지금 골인했습니다. 기록은 55년. 이것으로 제5회 스톡홀름 대회의 전 일정이 마무리되었습니다.”'''라는 아나운서 멘트가 흘렀다. 카나구리 씨는 골인 후 인터뷰에서 '''“참으로 긴 코스였습니다. 그 사이에 손자가 다섯이나 생겼을 정도로요.”'''라며 유머러스하게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세계 마라톤 역사상 전무후무한 최장기록은 이렇게 해서 만들어지게 되었다.#
이 카나구리 시조는 일본 마라톤계의 대부라고 불리는 인물이며, 오늘날의 일본 마라톤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발전시키고 기초를 닦은 인물로도 유명하다. 또한, 1920년부터 시행한 일본의 신년 최대 스포츠행사 ‘하코네역전마라톤’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1984년 11월 13일 9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지만 오늘날에도 일본인들은 여전히 그를 기억하고 추모한다. 그의 인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오사카 중앙구 도톤보리에 위치한 글리코 광고판인데, 1935년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교체되지 않고 광고모델로 쓰이고 있다. 또한, 그는 말년에 고향 쿠마모토현에서 여생을 보냈는데 쿠마모토현민종합운동장의 애칭인 ‘KK 윙’은 그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서 마라토너 카나구리 시조의 실제 이야기가 2019년 1월부터 방송될 예정인 NHK의 58번째 대하드라마로 만들어지게 되었다. 제목은 '이다텐 ~도쿄 올림픽 이야기~'로, 1964 도쿄 올림픽을 배경으로 한다. 아야세 하루카, 나카무라 칸쿠로, 아베 사다오가 주연으로 출연한다.
1911년 오스만 제국이 IOC에 정식으로 가입하고, 최초로 참가한 올림픽으로 오스만 제국에서는 선수 두명을 보냈다.[9] 이 두 선수는 바흐람 파파지얀(Vahram Papazyan)과 므그르드츠 므르그리얀(Mıgırdıç Mıgıryan)으로 둘 다 아르메니아계 터키인이다. 3년 후에 일어날 비극적인 사건을 생각하면 의미심장하다.[10]
러시아가 '러시아 제국'이라는 이름으로 참가한 마지막 올림픽이다. 이 올림픽 이후 벌어진 1차 대전 중 러시아 제국은 혁명으로 붕괴했다. 이후 성립된 소련은 전간기 동안 올림픽에 참가하지 않았고, 1948 런던 올림픽때는 초대를 거절했다가 1952 헬싱키 올림픽에서야 소련이라는 이름으로 40년 만에 복귀하였다.
[1] 6회 올림픽(1916년)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취소됨.[2] 100자유형 , 400m 자유형 릴레이, 하이다이빙 여자 종목이 열렸다.[3] 예술 종목은 1948 런던 올림픽까지 개최되었다.[4] 게다가 인종차별로 볼 수 있었다. 그는 미국 원주민 혼혈이었다. 금메달 압수당하고 프로선수로 계속 활동했지만(여러 종목을 잘해서 야구와 미식축구도 했다), 말년에는 막노동으로 벌어먹으면서 비참하게 살다가 가난 속에 1953년에 세상을 떠났다.[5] 이후 올림픽에서 프로 선수들의 참여가 허용된건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이 되어서 부터였다.[6] 1984년 미국에서 열린 LA 올림픽을 앞두고 논의된 것이다. 현재 공식 기록상으로는 당시 2위 선수와 공동우승으로 기록되어있다..는 건 미국측 자료이고, 정식 메달은 2위를 차지한 개최국 스웨덴 선수로 인정된다.[7] 단 8000m크로스 컨트리 단체에서는 동료들의 부진으로 금메달을 받지는 못한다.[8] 실제로는 못 뛴 부분부터 뛴 것은 아니고, 그냥 운동장 한 바퀴를 돌았다.[9] 1908년 런던 올림픽때 육상선수 알레코 물로스(Aleko Mulos)가 오스만 제국을 대표해 참가하긴 했지만, 당시 오스만 제국은 IOC에 가입하지 않은 상태였다.[10] 두 선수들 중 파파지얀은 학살 중에 도망가 레바논을 거쳐 미국에 정착했고, 므르그리얀의 이후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