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 도쿄 올림픽

 


''' 1964 도쿄 올림픽 '''
제18회 올림픽 경기대회
1964 도쿄 올림픽 경기대회
第18回オリンピック競技大会
Games of the XVIII Olympiad Tokyo 1964

[image]
''' 대회기간 '''
1964년 10월 10일[1] ~ 1964년 10월 24일
''' 개최국 '''
일본 도쿄
''' 참가국 '''
93개국
''' 참가선수 '''
5151명
(남자: 4473명, 여자: 678명)
''' 개회선언 '''
히로히토
일본 천황
''' 선수 선서 '''
오노 다카시[2]
''' 성화 점화 '''
사카이 요시노리
''' 개·폐회식장'''
도쿄국립경기장
1. 소개
2. 진행
3. 특징 및 의의
6. 기타
7.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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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아시아 지역에서 처음으로 개최된 하계 올림픽이다. 본래 1940년 하계 올림픽을 도쿄에서 개최할 예정이었으나 중일전쟁으로 개최권을 자진 반납했고 이후 24년이 지나서야 겨우 올림픽의 개최권을 얻어서 개최할 수 있었다.[3] 현대의 서구 문화권에 자리잡은 일본의 이미지는 거의 이 당시에 생겨난 것. 도카이도 신칸센 개통을 필두로 여러 부분에서 일본의 경제 부흥을 세계에 알렸다. 또한 최초로 정지 궤도 위성을 통해 미국 전역에 실시간으로 중계되거나, 컬러 텔레비전을 대응하고, 신칸센이라는 상용운전속도 200km/h급 고속철도[4]를 세계 최초로 선보이는 등 기술적으로도 발전이 큰 올림픽이다[5].
1964년 하계올림픽 투표 결과
국가
도시
1차
'''일본'''
'''도쿄'''
'''34'''
미국
디트로이트
10
오스트리아

9
벨기에
브뤼셀
5

2. 진행


대회 전의 이슈는 신흥국 경기 대회를 둘러싼 논쟁이었다. 신흥국 경기 대회 참가선수에 대한 자격정지처분을 둘러싸고 논란중이었던 북한인도네시아를 참가시키기 위해 대회 위원회에서 노력을 하였지만 결국 두 나라는 대회 개최 전날에 취소통보를 내린 뒤에 올림픽을 참가하지 않았다. 특히 북한은 이른바 "가네포" 사건#으로 자국의 주요 선수들이 출전을 박탈당했다. 이 때문에 북한의 첫 출전은 (국호 문제 등으로) 1972 뮌헨 올림픽까지 미뤄진다.
또한 중화인민공화국중화민국간에도 논란이 일어났는데, 당시 중화인민공화국이 IOC를 탈퇴한 상태였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참가하지 않았고 대신 중화민국청천백일만지홍기를 당당히 앞세우고 출전한다.[6] 남아프리카 공화국인종차별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를 시행중이었고 이게 올림픽 정신에 위배된다고 판단한 IOC로부터 제명당해서 불참. 이후 남아공은 28년 뒤, 아파르트헤이트가 폐지되고 나서인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이 되어서야 올림픽에 다시 복귀할 수 있었다.
대회 개회식에는 당시 천황인 쇼와 덴노가 참석, 개회 선언을 했다. 옥음방송을 통해 2차대전의 항복을 선언한 지 19년 만의 공개 육성 연설[7]이었다. 또한 개막식의 절정을 장식하는 성화봉송 최종주자는 1945년 8월 6일[8] 히로시마에서 태어난 사카이 요시노리(坂井義則)라는 청년이었는데, 이를 두고 일본의 침략 및 전쟁범죄 책임을 희석시키고, 전쟁의 피해자라는 이미지를 강조하려는 의도를 담은 것이라는 비판을 받았다.[9] 개막식 당시 원폭 피해자에 대한 묵념을 전 관객과 선수들에게 주문한 것도 같은 맥락이라는 지적을 받았다.
공교롭게도 중국이 '''올림픽 중이던''' 1964년 10월 16일에 '''핵실험'''을 실시하여 일본측을 더욱 난처하게 만들었다. 그로부터 44년 후인 2008년 그 중국이 올림픽 중일 때 러시아조지아선제공격으로 전쟁을 하게되고, 중국인들이 징징거리자 도쿄 올림픽 당시 중국의 전례를 기억하는 일본인들은 어이없어했다.[10]
일본에서 인기가 높았던 유도배구가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었으며, 일본은 유도에서 3개의 금메달과 여자 배구에서 금메달을 따오게 되었다. 일본 입장에서는 유도에서 전종목 석권을 할 수 있었으나 백인인 네덜란드의 안톤 헤싱크가 우승하게 되자 전 일본이 경악했다고 한다[11].
1960 로마 올림픽에서 맨발로 뛰면서 마라톤 우승을 차지한 에티오피아아베베 비킬라는 이번에는 운동화를 신고 뛰어서 세계신기록을 내면서 올림픽 2연승을 달성했다. 급성 충수염 때문에 수술을 해서 훈련량이 줄었음에도 자신이 세운 기록에서 3분을 앞당기면서 금메달을 딸 수 있었다. 그런데 수술을 받고 바로 뛸 줄은 몰랐던 탓인지, 대회 조직위에서 그만 시상식에서 '''에티오피아의 국가를 준비하지 않아서'''[12] 기미가요를 틀고 대충 시상식을 마무리하는 촌극을 빚었다.[13] 이 일로 일본이 비난을 받은 건 당연지사.
그 외에 야구무도가 시범종목으로 채택된 대회이기도 하다. 소련의 체조 선수인 라리사 라티니나는 이 대회에서 금 2, 은 1, 동 2개를 획득하여 올림픽에서만 총 메달을 18개(금 9, 은 5, 동 4)를 가져갔으며 그녀는 이 대회를 끝으로 은퇴를 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2012년 마이클 펠프스에 의해 깨질 때까지 48년 동안 보유한 올림픽 메달 신기록이기도 했다.
선수촌에서 불가리아 선수들끼리 결혼식을 올렸으며, 이것은 사상 최초의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올림픽 대회에 픽토그램[14]이 최초로 도입된 대회이기도 하다.
당시 선수촌으로 쓰이던 건물들은 1965년부터 문부성 소관법인 국립올림픽기념청소년센터[15]로 넘겨졌고, 2001년에 개조를 한 덕에 개최 이후에도 놀리지 않고 나름 잘 써먹고 있는 편이다. 2012년에는 도쿄 요요기 유스호스텔까지 차려졌다.
2009년작 마작만화 사키 -Saki-에서 키요스미 고교의 숙소와 경기장으로 등장한 바 있으며 현실에서는 2011년과 2012년에 국제청소년연합(IYF)이 청소년 캠프를 개최하기도 했던 장소다.
개막식 입장때는 북로디지아로 참여했지만, 폐막식 입장때가 마침 독립한 날이라 새로운 국가의 플랜카드와 현 잠비아 국기를 들고 입장했다.

3. 특징 및 의의


세계 최초의 고속철도이자 일본 최초의 신칸센도카이도 신칸센은 이 올림픽 개막 아흐레 전인 1964년 10월 1일에 개통되었다.
이때 건축된 올림픽 경기장은 여러가지로 유명한 건축물. 일본 스포츠의 성지라 할 수 있는 도쿄국립경기장[16]이나 일본의 건축 영웅 단게 겐조의 작품인 요요기국립체육관은 일본의 현대 건축이 세계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시발점으로 평가받는다.
또한 그래픽 디자인 분야에서도 도쿄 올림픽의 홍보물을 통해 일본의 수준높은 디자인 능력을 세계에 알리게 된다. 태평양 전쟁의 패전국이자 서구의 흉내만을 낸다고 평가절하 받던 것이 기존의 일본과 그 디자인이었다면, 올림픽 이후로 독특한 일본색을 가진 독자적인 그래픽 디자인 문화를 가졌다고 평가받으며 그 위상이 재정립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올림픽 포스터[17]를 담당한 가메쿠라 유사쿠 등 세계적인 일본의 그래픽 디자이너들이 알려지게 되는데에 이 도쿄 올림픽이 계기가 되었다.
소설가 오쿠다 히데오의 작품인 올림픽의 몸값에서도 다루어진 일인데, 개최지 선정 과정에서 '날생선 먹는 국가에서 올림픽을 치르는 건 말도 안된다'는 서구 국가들의 공격을 받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일본은 이후 회와 초밥을 국제화하는데에 총력을 기울이게 되었고, 그 결과 현재 유럽과 미국에서 이들 음식의 위상은 상류층이 즐기는 별식 수준으로 높아졌다.
일본은 8년 후 1972 삿포로 동계올림픽1998 나가노 동계올림픽도 개최하는 등 동·하계 모두 2번이나 개최하는 사례를 남겼다.
그리고 56년 뒤인 2020년에 다시 도쿄로 올림픽이 돌아오게 되었다. 다만, '''코로나19 전세계 대확산 사태'''로 인해 2021년으로 연기되었다.
그리고 한국 역시 24년 후 올림픽을 개최하면서 이 당시 일본이 누린 것과 같은 이미지 약진 효과를 톡톡히 누리게 된다.

4. 대한민국 선수단


이 당시 남·북한은 공동출전을 논의하고 있었다. 한국은 '아리랑'을, 북한은 남한 애국가북한 애국가를 25초식 붙인 50초짜리 '''짬뽕 국가'''를 주장했다. 간신히 아리랑으로 결정됐는데 이번엔 북한이 남북한 국기를 양면으로 붙여서 쓰고 나가자고 해서 결렬되었고, 게다가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북한이 출전을 거부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이런 남북의 대결은 그 뒤의 올림픽에서도 계속 이어지게 되었다. 이는 1990년대 들어서서야 비로소 완화된 편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단일팀 출전은 올림픽에서는 없었고, 공동 입장만 두 차례[18] 있었다. 다만 종목별 대회에서는 두 차례 단일팀 출전이 있었다. 그러다가 2018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사상 첫 올림픽 단일팀이 성사되었다.
휴전 이후 최초의 이산가족 상봉이 있었던 대회다. 신흥국 경기대회에서 북한대표로 금메달을 수상한 육상선수 신금단[19]이 올림픽 참석을 위해 도쿄까지 갔다가 북한의 불참 결정으로 돌아갔다. 사실 신금단은 1.4 후퇴월남한 아버지 신문준과 헤어진 이산가족. 딸의 올림픽 출전 사실을 알게 된 신문준이 도쿄까지 갔지만 북한의 올림픽 불참 결정으로 북한 선수단이 귀국을 위해 니가타행 열차를 타기 직전에야 겨우 만날 수 있었다. 시간은 7분 남짓이었고, 이후 신문준이 딸을 다시 만나지 못한 채 19년 후인 1983년 12월에 사망하면서 '''이것이 신문준-신금단 부녀의 생전의 마지막 만남이 되었다. '''이 부분은 2017년 4월 23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다뤄졌다.
한국은 북한과의 경쟁, 일본에 사는 많은 동포, 그리고 일본에 사는 동포들의 한국 지지를 이끌어 내기 위해, 민단총련의 대결에서 민단의 우위를 점하려는 의도를 위해 1964년 당시의 나라 살림치고는 상당히 과할 정도인 임원 59명, 선수 165명이라는 큰 규모의 선수단을 꾸려서 일본으로 건너갔다[20]. 그러나 선수단의 규모에 비해 영 좋지 못한 은메달 2개와 동메달 1개, 종합 27위의 결과를 냈다. 복싱의 정신조와 레슬링의 장창선이 은메달을, 재일교포 출신인 유도의 김의태가 동메달을 획득했다. 그래도 당시로선 최고 성적이다. 기대를 못 따라가서 그렇지. '''무엇보다 4년 전 로마 대회의 노메달 수모를 설욕하는 효과는 있었다.''' 그리고 이 때 레슬링유도에서 최초로 메달을 획득하면서 그 이전 올림픽에서는 오로지 복싱역도에서밖에 메달을 획득하지 못했던 한국에게[21] 메달 저변 다각화의 가능성을 비친 첫 대회라고 할 수 있다. 즉 당시 레슬링의 장창선과 유도의 김의태는 각각 한국의 첫 레슬링, 유도 메달리스트인 것이다. 또한 이 때 제기된 종합 스포츠 훈련 시설의 필요성으로 인해 탄생한 것이 바로 태릉선수촌이다. 장창선은 올림픽 이후 세계 레슬링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함으로써, 한국 최초 세계선수권대회 우승자가 됐다.
하지만 축구에서는 한국은 아랍 연합 공화국(현재의 이집트)[22]에 무려 0:10이라는 대패를 당했고 브라질에 0-4,체코슬로바키아에 1-6으로 지면서 3전전패 1골 20실점으로 참가국 14개국 가운데 꼴지를 차지했다...이 10실점은 1948 런던 올림픽에서 스웨덴에게 0:12로 진 뒤로 한국 축구 역사상 국제대회 2번째 최다 실점패 기록이다..아랍공화국은 브라질을 제치고 조 2위로 8강에 진출해 가나를 5:1로 이기며 첫 4강에 올라갔지만 금메달을 받은 헝가리에 0-6으로 지고 3,4위전에서 독일(사실상 동독팀)에 1-3으로 지며 4위를 기록했다.
바로 옆 동네 일본에서 올림픽이 개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960년대 당시 빈국이었던 우리나라는 외화사정으로 인해 일반 국민들의 올림픽 구경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원래 도쿄 올림픽 조직 위원회 측에서 대한 올림픽 위원회에 9,000매에 가까운 관람권을 보냈다. 그러나 이를 구입하기 위해선 첫째로 올림픽 기간 동안 도쿄에 체류할 장소가 있어야 하고, 참관권을 암시장이 아닌 정당한 외화로 구입하여야 하며[23] 여권 수속이 필요하다는 조건이었다. 일단 여권은 그렇다 치더라도 외화를 국내에서 구할 수 있는 방법은 사실상 전무했고 해외여행도 아무나 못 가던 시기라서 일반인의 올림픽 참관은 사실상 불가능. 뉴스에 따르면 3,000여명 정도가 이런 방법을 통해 참관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체육계 사람들이나 재일교포 친지를 둔 사람들이 대부분인 것으로 알려졌다. 요즘에는 일본을 제 집 드나들듯 다녀올 수 있다는 걸 생각하면 격세지감.

5. 대한민국 하계올림픽 성적


■ 1964년 18회 도쿄 올림픽 (1964 Summer Tokyo Olympics)
  • 기간 : 10월 10일~10월 24일
  • 규모 : 93개국 5081(여)명 참가. 
  • 종목 : 근대5종, 레슬링, 배구, 복싱, 사이클, 수영, 승마, 양궁, 역도, 요트, 유도, 육상, 조정, 체조, 축구, 카누, 펜싱, 하키
  • ▶대한민국 참가 현황 : 임원 59명, 선수 165명 참가.(근대5종, 농구, 레슬링, 배구, 복싱, 사격, 사이클, 수영, 승마, 역도, 유도, 육상, 조정, 체조, 축구, 펜싱)
  • ▶대한민국 참가 성적 : 은메달 2개, 동메달 1개 획득. 종합순위 26위.
  • 은메달 : 레슬링(자유형 플라이급) 장창선
  • 은메달 : 복싱(밴텀급) 정신조
  • 동메달 : 유도(미들급) 김의태
대한민국은 종합 26위의 성적을 거뒀다. 그리고 4년 전의 무(無)메달을 설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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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기타



1964년 도쿄 올림픽을 주제로 한 노래도 있다. 노래 제목은 《東京五輪音頭》(도쿄 올림픽 온도). 여기서 '音頭'(おんど, 온도) 는 일본의 전통 가락 중 하나로 우리나라로 보면 강강수월래같은 둥글게 서서 추는 춤에 쓰이는 리듬이다. 당시 일본의 중장년층에게 큰 인기가 있었던 가수 미나미 하루오 (三波春夫, 1923 ~ 2001)가 부르고 작곡가 고가 마사오 (古賀 政男, 1904 ~ 1978)가 작곡하여, 당시 큰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24] 그리고 2020년 도쿄 올림픽을 앞둔 2016년 홍백가합전에서는 후쿠다 코헤이(福全こうへい)가 이 노래를 불렀다. 한국에서 1988 서울 올림픽 당시 가수 김연자가 부른 "아침의 나라에서"라는 노래와 비슷한 포지션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노래는 2017년에 2020 도쿄 올림픽 홍보를 위해 대회 조직위원회에서 리메이크했다.

이 해는 조선 통신사 조엄[25]이 일본을 방문한 지 2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일본의 시계 메이커인 세이코가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공식 타임키퍼로 선정된 세이코가 시간 측정용으로 쿼츠로 동작하는 정밀시계를 내놓았던 것. # 이 시계는 3kg이나 나가는 물건이었으나 5년 뒤 세이코는 이 시계의 손목시계 버전을 출시하는 기염을 토함으로써 스위스 시계 업계를 충격과 공포로 몰아넣었다. 흔히 이야기하는 쿼츠 파동이 이 사건.
세이코 역시 쿼츠 시계 가격이 급속도로 낮아지는 바람에 크게 재미는 못 봤지만, 이 일로 스위스 시계 업계는 아주 초토화됐다. 인력이 4분의 1 토막으로 감원되고 유수의 시계 회사들이 망하거나 다른 그룹의 산하로 들어가게 된 것이 이 시기. 고급화 전략으로 어찌어찌 살아남기는 했지만 아직도 스위스 시계 회사들 중 독립 회사는 그리 많지 않다.
그리고 덕질하는 사람들에게도 의미가 있는 올림픽이기도 한데, 수영 경기 당시 미국팀에서 가슴 사이로 고인 물이 빠져나가게끔 설계한 수영복을 처음으로 선수용 수영복으로 도입했다. 이것에 영향을 받아 일본에서 만들어진 것이 지금의 '''구형 스쿨미즈'''이다.
올림픽 개막을 열흘 앞둔 1964년 9월 30일에는 히로히토 당시 덴노의 작은아들인 마사히토 친왕[26]츠가루 하나코와 결혼식을 올렸고, 결혼과 함께 히타치노미야(常陸宮) 궁가를 창설했다. 당시 일본에서는 전후에 처음 창설된 궁가였던데다가 올림픽, 신칸센 개통 등의 사회적 분위기와 맞물려 일본의 전후 부흥을 확실하게 체감하는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마사히토 친왕과 하나코 비는 자녀를 두지 못해, 히타치노미야 궁가는 마사히토 친왕 1대만으로 단절될 처지에 놓였다.
2019년 1월부터 방송될 예정인 NHK 대하드라마 시리즈로 '이다텐 ~도쿄 올림픽 이야기~'가 1964 도쿄 올림픽을 배경으로 일본의 마라토너 카나구리 시조의 실제 이야기가 방영된다고 한다.[27] 주연으로는 아야세 하루카, 나카무라 칸쿠로, 아베 사다오가 출연한다.
이누가미 일족 같은 영화로 유명한 이치카와 콘이 공식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는데, 당시 절정기에 이르렀던 일본 영화의 퀄리티에 힘입어 올림픽 다큐멘터리 중에서 가장 유명하다.
도쿄 올림픽 때 스타디움을 짓기 위해 건물을 헐었을 때 3년 동안 꼬리가 못에 박힌 채로 살아간 도마뱀이 발견되었으며 생존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다른 도마뱀이 먹이를 물어주어서 살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올림픽이 끝난 지 '''55년이 지나서''' 공식 라이선스 게임이 제작되었다. 마리오와 소닉 AT 2020 도쿄 올림픽 참고.

7. 같이 보기



[1] 이후 일본에서 체육의 날로 지정되었으며 2000년부터 해피 먼데이 제도가 적용되어 10월 둘째 주 월요일로 변경되었다.[2] 체조 선수[3] 참고로 같은 해에 예정되어 있던 동계 올림픽도 원래는 일본 삿포로에서 개최할 예정이었다.[4] 사회간접자본의 올림픽 연계는 전통적 현상이다. 특히 상용운전속도 200km/h를 최초로 돌파한 철도라는 점에서 철도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계기가 된다.[5] 다만 당시 일본 내에서도 컬러 TV로 도쿄 올림픽을 본 사람은 그리 많지는 않다. 하나다 소년사를 보면 알 수 있듯 아시아에서 가장 잘 산다는 일본에서도 컬러 TV는 수십년치 봉급에 해당될 정도로 비싼 가전제품이었고 컬러 송출 자체도 대도시와 그 근교지역에서나 이뤄지고 있었던 상황이기 때문이다. 물론 주요 거리나 주요 기차역, 백화점 등에 설치된 컬러 TV를 통해 올림픽 경기를 컬러로 본 사람은 꽤 있지만, 그나마도 대도시나 그 근교지역에서나 볼 수 있었고 지방도시나 시골의 경우에는 흑백으로 봐야했다.[6] 일본어로는 중화민국(中華民国)으로 표기되었으나 영어로는 '''대만(TAIWAN)'''으로 표기.[7] 히로히토는 2차대전 패전 이후에는 공개 육성 연설을 매우 자제했다. 전후에 딱 3번 공개 육성연설을 했다. 아키히토나루히토는 히로히토보다 재위 기간이 짧음에도 공개 육성 연설 기록은 더 많다.[8]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이날은 태평양 전쟁 말기 광기로 치닫던 일본 제국의 전쟁의지를 완전히 꺾어버린 원자폭탄이 투하된 날이다.[9] 사카이는 도쿄 올림픽 당시 19세로 3단뛰기 종목의 육상 선수이기도 했는데, 아쉽게도 올림픽 출전은 하지 못했다. 이후 계주(이어달리기)로 종목을 바꾸어 2년 후인 1966년 방콕 아시안게임에서 400m 금메달을 수상했고, 은퇴한 후에는 후지TV의 스포츠 전문 기자로 활동하다가 2014년에 향년 69세를 일기로 타계했다.[10]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중국은 1964년 도쿄올림픽에 불참했고, 러시아와 조지아는 베이징 올림픽에 모두 참가했다는 점이다.[11] 당시 유도는 지금보다 체급이 적어서 3개였다. 남자부 체급별 경기와 체중에 관계없이 출전할 수 있는 무제한급이 열렸다. 3개 체급을 모두 일본이 싹쓸이했는데, 무제한급 경기에서는 헤싱크가 결승에서 일본 선수를 누르고 우승한 것.[12] 지금은 미리 연주해둔 국가를 녹음해서 틀어주지만, 1980년대 말까지만 해도 시상식에서 국가를 직접 연주했다.[13] 당시 수상영상을 보면 완전히 굳어버린 표정의 아베베의 선수모습과 앞에 있는 영국선수가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젓는 모습을 볼 수 있다.[14] 간이 아이콘. 예를 들면 신호등에 있는 사람 모양의 그래픽 같은 것[15] 해당 기관은 1980년부터 문부성 직속기구로 개편됐다가 2001년에 문부과학성으로부터 독립행정법인으로 분리하여 2006년에 '소년 자연의 집'을 합쳐 '국립청소년교육진흥기구'가 되었다.[16] 정확히 말하면 당시 명칭은 (메이지)진구외원경기장으로서 1940년 올림픽을 대비하여 이미 지어진 상태였다.[17] 이 포스터는 애니메이션 코쿠리코 언덕에서에도 등장한다.[18] 2000 시드니 올림픽2004 아테네 올림픽.[19] 금메달 수상이 유력했지만, 신흥국 경기대회에 나갔기 때문에 올림픽 경기 출전이 금지됐다.[20] 전 대회인 1960 로마 올림픽은 임원 31명, 선수 36명이고, 다음 대회인 1968 멕시코시티 올림픽은 임원 21명, 선수 55명이다.[21] 다만 레슬링의 경우는 이전 대회들에서 4위 입상자를 배출할 만큼 한국이 가능성을 보이던 종목이기는 했다.[22] 아랍 연합 공화국은 1958년 이집트와 시리아가 일시적으로 합병하고 북예멘과도 느슨한 연방 비슷한 일종의 아랍 연합 국가였다가 시리아의 반발로 1961년 다시 찢어졌다. 그러나 이집트는 시리아가 다시 돌아올 수도 있다고 하여 1971년까지 이 국호를 유지했다. 즉 1964년 당시는 사실상 이집트 대표팀이었다.[23] 이를 만족시키는 방법은 외국에 거주하는 친지나 지인이 외화를 보내주는 수밖에 없다.[24] 참고로 미나미 하루오는 1970 오사카 엑스포의 테마송인 세계의 나라에서 안녕하세요도 불렀다. 오사카 엑스포가 이 도쿄 올림픽과 더불어 당시 일본의 고도 성장과 국력 신장을 상징하는 양대 행사 중 하나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일본 가요계에서 그가 가지는 위상을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25] 일본에서 고구마를 들여온 것으로 유명하다.[26] 아키히토 덴노의 남동생, 즉 현 나루히토 덴노에게는 숙부가 된다.[27] 일본의 마라토너 카나구리 시조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 걸린 마라톤 완주 기록을 세운 선수로 유명하다. 자세한 것은 마라톤, 1912 스톡홀름 올림픽 문서를 참고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