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 런던 올림픽

 


11회[1]

14회

15회
1936 베를린 올림픽
'''1948 런던 올림픽'''
1952 헬싱키 올림픽


1. 개요


[image][2]
Games of the XIV Olympiad
(1948 Summer Olympics)
제2차 세계 대전의 여파로 2번의 올림픽이 취소되었으며, 이 중 1944년에 개최가 예정되었던 런던이 4년 뒤로 미루어져[3] 결국에는 1948년에 개최됨으로써 12년만에 열린 올림픽, 역시 이전 대회와 똑같이 텔레비젼으로 생중계가 되었다. 개막식장은 웸블리 스타디움.

2. 특징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직후라 국제올림픽위원회에서 동독서독, 그리고 일본의 참여를 불허했으며, 공산주의 국가들은 초대는 받았지만 참가는 하지 않았다.[4] 또한 경제 재건은 지지부진했고 유럽 전역이 사실상 폐허인 상태에서, 영국도 전국민이 정부의 식량과 석유배급으로 간신히 생활하던 시절이라 선수촌을 지을돈이 없어서 남자 선수들은 임시로 지은 군대천막에서, 여자 선수들은 대학교 기숙사에서 머물러야 되는 사태까지 나오게 되었다.
네덜란드의 파니 블라커스코옌은 트랙 필드경기에서만 금메달 4개[5]를 가져가는 능력을 보여줌으로서 세계를 놀라게 하였으며[6], 헝가리의 펜싱 선수인 아이로나 엘렉과 체코슬로바키아의 카누 선수인 잔 브로작은 12년 뒤에 열린 이 올림픽에서도 금메달 타이틀을 지켜낼 정도로 아직 실력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한국계 미국인새미 리가 이 대회에 다이빙 선수로 출전해 금메달과 동메달을 획득했다. 참고로 새미 리는 '''아시아계 미국인 중에 최초로 금메달'''을 딴 선수이다.
런던은 64년 후에 2012 런던 올림픽을 다시 개최하게 되었다. 전쟁 직후 개최하게 되었던 이 때와는 달리 64년 후 열리는 올림픽은 영국 정부의 든든한 지원으로 성공적으로 개최를 다짐할 정도.
독일일본IOC의 훈령에 따라 전범국 조치에 의거 이 올림픽에 모두 참가하지 못하였다. 이 중 1896 아테네 올림픽 때부터 참가해 왔던 독일과는 달리 1912 스톡홀름 올림픽에 처음 참가한 일본은 3번째로 열린 2012 런던 올림픽이 런던올림픽 첫 출전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예술 종목 경기가 열린 올림픽이기도 하다. 예술 종목은 이후 1954년 로마에서 열린 IOC 총회에서 퇴출되었다.
홈팀 영국은 이 대회에서 금메달 3개로 홈 이점을 전혀 살리지 못하며 부진했다.

3. 대한민국 선수단


[image]
대한민국이 처음으로 태극기를 앞세우고 하계올림픽에 처음 참가한 대회이기도 하다. 기수는 1936 베를린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손기정이 맡았다. 최초의 참가는 1948 생모리츠 동계올림픽. 대한민국은 처음 참가한 올림픽에 축구, 농구, 육상, 역도, 복싱, 레슬링, 사이클 등 7개 종목에 선수 50명과 임원 17명, 총 67명의 선수단을 꾸려 런던 땅을 밟았다. 갓 독립한 상황에서 재정이 부족했기 때문에 올림픽 참가가 불가능할 것이라는 전망도 있었지만, 직전 해인 1947년, 한국에서 국가적으로 복권을 처음 만들었다고 한다. 올림픽 참가를 위해 기념 복권을 발행하는 각고의 노력 끝에 참가할 수 있었다.[7]
하지만 교통시설이 워낙 열악하던 시절이라, 먼저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부산까지 가서 여객선으로 갈아탄 뒤 일본 후쿠오카로 이동하였다. 그 뒤 다시 기차편으로 요코하마로 이동한 후 다시 여객선에 올랐고, 상하이를 거쳐 홍콩에서 유럽으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는데, 당시 여객기가 성능이 좋지 못해 방콕·콜카타·뭄바이·바그다드·카이로·로마·암스테르담을 거쳐가야만 했다. 이렇게 20박 21일동안 9개국 12개 도시를 거치는 고생스럽고도 지겨운 여정을 보내고서야 간신히 런던 땅을 밟을 수 있었다. 현재는 12시간 정도면 직항으로 런던까지 갈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8] 그야말로 격세지감.[9]
더구나 단복 재질이 런던의 기후와 맞지 못하였던 탓에, 당시 참가했던 선수들은 그야말로 고생을 겪으며 런던의 기후에 적응해야만 했다. 게다가 선수촌 임대료 미납을 이유로 한때 선수들 전원이 선수촌에서 강제로 퇴거당할 뻔한 슬픈 사연도 있었다. 그 당시만 해도 대한민국은 세계적으로는 듣보잡에 불과한 신생 변방인데다가 가난하기 짝이 없는 농업국가에 불과했던 탓에 올림픽 지원금도 없을 정도로 매우 가난하였던 시절이었다. 상기했다시피 이것도 대한민국 국민들이 한마음으로 자금을 모아서 어렵게 런던으로 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것.
이때 한국 선수단이 입었던 단복은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올림픽 참가 이후, 2년 뒤에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태극 문양이 달린 단복은 모두 태워서 이 당시 입었던 단복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고 한다. 2012년에 등록 문화재로 지정된 단복은 올림픽 당시 고문으로 참가한 이원순[10][11] 씨 소유라고 한다. 2012 런던 올림픽 한국 선수단 단복은 이때의 단복을 모티브로 제작되었다고 한다.
처음 참가한 하계 올림픽에서 한국은 동메달 2개(복싱 플라이급에 한수안 선수, 역도 미들급에 김성집 선수)를 획득하며 파나마와 함께 종합 32위에 오르며 아시아에서는 하키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인도에 이어 가장 좋은 성적을 거두는 쾌거를 이루게 된다.
  • 축구 국가대표팀은 감독이었던 박정휘가 개막 3일전 돌연 사퇴를 하는 바람에 조선야구협회 시찰단 자격으로 참가했던 이영민에게 지휘봉을 주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대표팀 분위기가 어수선 했으나 1라운드에서 만난 멕시코를 상대로 5:3 승리를 기록하며 최초로 메이저 대회 2라운드에 진출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때 넣은 5골은 올림픽월드컵에서 대한민국 축구대표팀이 한경기 5골 이상을 넣은 유일한 경기로 오랜기간동안 기록되었으나 2016 리우 올림픽 조별리그 1차전 피지전에서 8-0으로 승리하게 되어 기록이 경신되었다. 그러나 2라운드에서 스웨덴에게 0-12로 참패하면서 한국 역사상 최다 점수차 패배라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12][13] 최윤칠 선수의 회고에 따르면 하도 슛이 많이 들어와서 골키퍼였던 홍덕영 선수가 다음 날 움직이지도 못 했다고 한다.[14] 이 경기 후, 무려 70년이 지나고 나서 이번엔 올림픽이 아닌 월드컵에서 다시 맞붙었는데, 자세한 것은 이 문서 참조.
  • 마라톤에서도 상당히 선전했다. 38km까지 최윤칠 선수가 선두를 달리면서 금메달이 눈 앞에 보였는데, 그만 38km 지점에서 근육 경련으로 쓰러지면서 기권했다. 너무 아쉬웠는지 2km 정도는 걸었는데, 그 때까지도 선두였다고 한다. 즉, 40km까지 선두였던 셈.[15]
  • 대한민국 국적으로 최초의 메달리스트가 된 김성집을 비롯해 역도의 박동욱, 남수일, 육상 세단뛰기의 김원권 등은 해방 전 일본 국적일 때부터 각자 종목에서 세계 정상급의 기량을 선보이던 선수들이었고, 제2차 세계 대전 발발로 대회가 취소되기 전의 1940 도쿄 올림픽에서도 금메달 후보로 꼽혔었다. 비록 해방 후 태극기를 걸고 올림픽 출전의 꿈을 이루긴 했으나 전성기에 비하면 기량이 떨어져 있었고, 김성집만이 동메달을 목에 걸었으며 역도의 남수일은 위, 박동욱은 10위, 세단뛰기의 김원권은 12위를 마크한다.
  • 레슬링에서는 야인시대에 나온 것으로도 유명한 황병관도 출전했지만, 2회전에서 패해 탈락했다.
이 대회가 폐막한 다음 날인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출범하면서 대한민국은 국제 무대에 정식으로 데뷔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어렵게 올림픽에 처음으로 참가했던 아시아의 가난한 신생 농업국가2년 후 온 국토가 폐허가 되는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겪고도 40년 후 하계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하게 될 것이고, 더 나아가 54년 후에는 월드컵, 70년 후에는 동계올림픽까지 모두 성공적으로 열게 되는 상전벽해와도 같은 일이 벌어지리라고는, 그 때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4. 대한민국 하계올림픽 성적


■ 1948년 14회 런던 올림픽 (1948 Summer London Olympics)
  • 기간 : 7월 29일~8월 14일
  • 규모 : 59개국 4064(여)명 참가. (대한민국의 첫 올림픽 참가)
  • 종목 : 근대5종, 농구, 라크로스, 레슬링, 복싱, 사이클, 수영, 승마, 양궁, 역도, 예술경기, 요트, 육상, 조정, 체조, 축구, 카누, 펜싱, 하키
  • ▶대한민국 참가 현황 : 임원 17명, 선수 50명 참가.(농구, 레슬링, 복싱, 사이클, 역도, 육상, 축구)
  • ▶대한민국 참가 성적 : 동메달 2개 획득. 종합순위 32위.
  • 동메달 : 복싱(플라이급) 한수안
  • 동메달 : 역도(미들급) 김성집
대한민국은 종합 32위의 성적을 거뒀다.
'''순위'''
'''국기'''
'''국가'''
'''금'''
'''은'''
''''''
'''메달 합계'''
1
[image]
미국
45
28
34
107
2
[image]
스웨덴
16
11
17
44
3
[image]
프랑스
10
6
13
29
4
[image]
헝가리
10
5
2
17
5
[image]
이탈리아
8
11
8
27
6
[image]
핀란드
8
7
5
20
7
[image]
터키
6
4
2
12
8
[image]
체코슬로바키아
6
2
3
11
9
[image]
스위스
5
10
5
20
10
[image]
덴마크
5
7
8
20
32
[image]
대한민국
0
0
2
2

5. 기타


[1] 12회 올림픽(1940년)과 13회 올림픽(1944년)은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취소됨.[2] 빅벤이 모티브라고 한다. (IOC 설명)[3] 1940년의 경우 원래 일본 도쿄가 개최지였으나 중일전쟁으로 국제 여론이 나빠지자 개최권을 반납했고 핀란드 헬싱키로 개최지가 변경되었으나 핀란드 역시 소련과 전쟁을 하는 바람에 개최를 포기했다.[4] 1948년 시점이면 공산주의 국가들은 막 수립되는 상황이라서 내부 수습에도 정신이 없을 시절이었다.[5] 100m, 200m, 80m 허들, 4x100m 릴레이[6] 출전 당시 아이를 둘이나 둔 주부였다. 그래서 별명이 '트랙의 주부'(...). 올림픽에서 여성 선수의 위상을 드높인 선수로 평가받고 있으며 네덜란드 정부는 그녀가 금메달 4개를 걸고 개선하는 날을 임시공휴일로 선포했을 정도로 네덜란드에서 그녀가 차지하는 위상은 높다. 네덜란드에서는 코옌이 4번째 금메달을 딴 날마다 코옌 기념우표를 발행하니까 관심 있으면 네덜란드 우체국에 가서 구입하기 바란다.[7] 당시의 정식 명칭은 올림픽 후원권. 1988 서울 올림픽에서도 올림픽 복권을 팔았고.[8] 대한항공영국항공, 아시아나항공 모두 인천-런던 간 직항편이 있다.[9] 비슷한 이야기가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에 출전했던 대한민국 선수단에게 있다. 이들 역시 갖은 고생 끝에 간신히 스위스 땅에 도착했다. 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 참조.[10] 1890년생으로 1914년 하와이로 망명했고 1947년에는 IOC 가입을 위해 출국했던 전경무 조선올림픽위원회 부위원장이 비행기 사고로 목숨을 잃자 미국에 거주 중이던 그가 남은 서류를 챙겨 갖은 고생을 한 끝에 최종 승인을 받는데 크게 기여하기도 했다. 이후 그는 영구 귀국해 향년 '''104세'''의 나이로 1993년에 사망했다. 100세의 나이이던 1989년에는 자전 ‘세기를 넘어서’를 집필하기도 했다.[11] 또한 그는 이희호 여사의 어머니의 동생, 즉 외삼촌이다. 1962년 5월 10일 치뤄진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의 결혼식 역시 이원순 씨의 집 대청마루에서 치렀다.[12] 여담으로 스웨덴이 우승을 차지하며 축구 금메달을 받았다. 당시만 해도 올림픽은 국대 선수 출전 제한이 전혀 없어서 월드컵과 같은 축구 국제대회로 손색이 없었다. 유일하게 제한이 걸린 형태가 프로 리그 선수는 출전하지 못하는 형태인데, 이 시절만 해도 많은 나라에서 프로리그가 없거나 프로가 없는 대신 아마추어 축구가 준프로 수준이라서 꽤 실력좋은 선수가 올림픽에 나오던 시절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당시 스웨덴에서는 군나르 노르달, 군나르 그렌, 닐스 리드홀름을 내세워 우승하게 됐는데 후에 세 선수 전부 AC 밀란으로 이적해 전성기를 이끄는데 크게 공헌하였으며 밀란팬들에게 그래노리 삼총사라고 칭송을 받들어 레전드로 추앙을 받고있다.[13] 다만 이당시 까인 건 오히려 스웨덴이었다. 이유는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 당시 헝가리 팀이 받았던 비난을 생각하면 된다. 오히려 한국팀은 칭송 받았다.[14] 흔히 이 일이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 당시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당시 골키퍼로 참가했던 홍덕영의 증언이 나오면서 1948 런던 올림픽 때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홍덕영 인터뷰. 당시 스웨덴이 찬 슈팅수가 48개였다. 즉 방어율이 75%였던 셈.[15] 참고로 당시 한국 마라톤 대표팀의 감독은 바로 손기정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