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8 런던 올림픽
※대회 기수로 기산되는 정식 대회는 아니지만 1906년에 1906 아테네 중간 올림픽이 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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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1908년 영국 런던에서 올린 4회 올림픽. 2년전에 열린 1906 아테네 중간 올림픽은 IOC주관이 아니었기 때문에 정식 올림픽 횟수에 포함되지 않으며, 이 대회가 4회 올림픽으로 인정된다.
10만명을 수용하는 경기장이 세워졌고, '올림픽의 목적은 승리가 아니라 참가'라는 규범이 미국의 주교에 의해 제기되어 이후의 올림픽에서 제2의 표어가 되었다. 후술할 400m 결승을 계기로 주최국의 심판대신 IOC 심판위원회가 경기를 주관하게 되며, 마라톤도 오늘날의 42.195km로 정해지게 되었다.
2. 대회
앞선 1900 파리 올림픽, 1904 세인트루이스 올림픽이 세계 만국박람회의 부속 대회로 전락해 무성의하게 진행되어 한때 존립의 위기에 몰렸던 올림픽을 제 궤도에 올려놓은 대회로 평가된다. 이름하여 '방황 끝에 돌아온 올림픽'. 겨울 스포츠 종목이 제정되면서 올림픽 기간이 6개월이나 소요되었다.
원래는 이탈리아에서 개최되기로 하였으나 이탈리아가 극심한 경제 불황과 사회 불안을 겪고 있었는데 1906년에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해 이탈리아가 개최를 포기하자 영국이 대뜸 인수권을 따냈다.[1]
보어전쟁의 졸전과 독일 제국의 급속한 성장으로 위기감을 느낀 영국은 1904년 프랑스와 영불협상을 맺고 1907년에는 2년 전까지만 해도 그레이트 게임을 치루던 러시아와 영러협상을 체결해 삼국 협상을 전개하는 등 화친외교를 전개하였다. 이 대회를 통해 영국은 국제무대의 신망을 재구축하고자 했던 것. 1년 남짓한 시간이었지만 대회 시설과 운영 준비를 훌륭하게 해냈고, 이 대회의 노하우를 기반으로 런던은 이 이후에도 두 번의 올림픽을 더 개최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대회부터 정식적으로 개최식 때 각국이 국기를 들고 입장하는 방식이 최초로 채택이 되었고, 국가 대표가 유니폼을 입기 시작했으며 올림픽 헌장을 기초로 하여 대회 규칙 제정,[2] 겨울 스포츠의 채택, 아마추어 규정[3] 도입 등 좀 더 시설과 규모, 조직적인 면에서 국제 대회로서의 성격을 갖춘 대회다. 이 방법은 2년 전인 1906 아테네 중간 올림픽에서 선보이긴 했지만 IOC 정식대회에서 이 방법이 채택된 것은 이 대회가 최초이다.
다만 스포츠의 국가주의도 이 대회를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불이 붙기 시작했으며 특히 미국과 영국의 신경전은 2차 세계대전 후의 미소 간의 경쟁에 못지 않았다. 영국은 국기가 없다는 옹색한 이유로 과거의 식민지였던 미국의 국기를 스타디움에 게양하지 않았다. 미국과 영국의 선수들은 글자 그대로 전투에 임하는 각오로 경기장에 나섰으며 이 과열 경쟁은 결국 아래 후술하는 육상 400m에서 사건을 낳는다.
출전 신청이 NOC로 단일화됨에 따라 이 대회부터 올림픽이 국가 대항전의 성격을 띠게 되었고, 올림픽이 급속도로 양적 성장을 이루는 원동력이 되었던 대회다.
이 대회의 하이라이트는 영국과 미국의 신경전. 특히 입장식때 유일하게 미국만이 국왕에게 국기를 숙이지 않아 영국인들은 광분한다. 그러나 미국 기수인 랄프 로스는 '성조기는 어느 나라의 국왕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고 발언, 오늘날까지 이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저물어가는 제국의 신세와 신흥강대국의 면모를 보여주는 또 다른 예로, 영국은 식민지 인도와 남아프리카[4] 의 독립대표단을 허가하였으나 미국은 하와이 식민지 독립 대표단을 끝내 불허하였다.
날씨 안 좋기로 악명 높은(...) 런던답게 대회 내내 일기가 좋지 않았고, 심지어 개막식 때도 장대비가 쏟아지기도 했으나 막장이었던 지지난 대회와 지난 대회에 비해 많은 관람객 수로 인해 대회 흥행은 성공했다.
그 전까지 중구난방이었던 마라톤 코스의 길이가 42.195km로 정해진 대회이기도 하다. 마라톤의 구간이 42.195km로 정해진 것은 윈저성에 있던 국왕 에드워드 7세의 손자들과 알렉산드라 왕비에게 마라톤 출발하는 모습을 구경시켜주기 위해 윈저성을 출발하여 런던 교외를 돌아 스타디움에서 마감하는 코스를 잡았는데 그 거기라 42.196km였기 때문이다.
그리스의 철천지원수(...) 오스만 제국이 처음으로 참가한 올림픽 대회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육상선수인 알레코 물로스(Aleko Mulos)가 오스만 제국을 대표하여 혼자 참가했다(...) 쿠베르탱 남작이 이스탄불을 방문했을때 통역을 맡기도 했고, 갈라타사라이 고등학교 출신으로 터키 유명 축구팀인 갈라타사라이 SK의 창업주인 알리 사미 옌과 동문이자 절친한 사이였다. 이름을 보면 알 수 있지만 그리스계 터키인이다. 이를 계기로 오스만 제국은 1911년에 IOC에 가입했으며, 오스만 제국 해체후 오스만 제국 올림픽위원회는 터키 공화국이 인수받게 된다.[5]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3개 팀(오스트리아, 헝가리, 보헤미아)으로 참가하였으며 보헤미아는 이번이 첫 출전이었다.
3. 도란도 피에트리의 마라톤 골인과 실격 사건
이 대회에서 유명한 사건은 바로 '도란도의 비극'이라는 사건. 이 비운의 주인공은 이탈리아 과자공장 직공인 도란도 피에트리(Dorando Pietri).알렉산드라 왕비의 출발 신호에 따라 꼴지에서 세번째로 출발한 도란도는 대회직전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우승한 모리세이를 위시한 쟁쟁한 선수들을 제치고 마라톤 반환점을 돌면서 선두인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헤퍼론을 바짝 추격하기 시작했다. 결승점을 3km 남겨놓은 가파른 언덕에서 스퍼트를 시작한 도란도는 헤퍼론을 제쳤고 미국의 신인 헤이즈를 압도적인 차이로 제치고 스타디움에 먼저 들어서며, 기다리고 있던 10만 관중의 환호를 받았다.
그러나 바로 이순간 올림픽 역사상 가장 비운의 장면이 펼쳐진다. 도란도는 결승점을 도달하고 있었지만 결승점을 350미터 앞두고 탈진을 해 돌연 술에 취한 사람 처럼 몸을 가누지 못하고 오른쪽으로 돌아야 할 트랙을 왼쪽으로 돌기 시작했다. 관중들이 오른쪽이라고 소리 치자 방향을 바꾸었지만 몇 발짝 가지 못해 쓰러진다. 결국 이를 애처롭게 여긴 '''관계자들이 와서 도와주는 촌극'''이 일어났다. 피에트리가 넘어질때마다 경기임원과 의사가 급히 달려가 그를 일으켜 세웠고, 그러기를 세차례 관계자들이 일으켜 세워주고 또 일으켜 세워줘 결국 완전히 지쳐버린 상태에서 간신히 1등으로 도착할 수 있었다. 당시 타임은 2시간 55분 18초였지만, '''마지막 350m는 10분이 걸렸다'''. 당연히 2등을 했던 미국의 조니 헤이즈는 이의를 제기했고, 결국 피에트리는 실격처리가 되어서 최종성적이 말소가 되었다. 병원에서 의식을 회복한 도란도는 가만히 놔 뒀으면 자력으로 결승테이프를 끊을 수 있었다고 임원들을 원망했지만 이미 모든 것은 끝난 후였다. 참고로 조니 헤이즈는 대장간에서 태어나 어릴적부터 대장장이 일을 해오던 바 있다.
하지만 피에트리는 관계자들의 도움을 받았다곤 하나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으며 마지막에 쓰러졌지만 골을 향한 염원덕분에 그것이 관객들을 감동시켰으며, 이 장면을 지켜본 알렉산드라 왕비는 도란도의 감투 정신에 감명하여 애석상으로 은트로피를 하사하였으며, 영국 왕 에드워드 7세는 황금컵을 특별히 만들어 선물해줬다. 이후 피에트리는 전세계적인 유명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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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 역사상 가장 유명한 그림이다. 위 장면에서 피에트리를 부축해주는 사람은 다름아닌 코난 도일이다. [6]
도란도의 실격 사건은 그후로도 많은 논란을 낳았다. 게다가 우승한 헤이즈도 블루밍데일 백화점 수송부 직원으로 근무하는 아마추어라고 알려져 있었으나, 사실은 아리리쉬 아메리칸 클럽에 소속된 육상 프로였다. 이 대회 이후로 꽤 많은 사람들이 마라톤이 상금 따먹기 경주나 투우보다도 휠씬 나쁘다는 의견을 개진하여 폐지를 촉구했지만 결승점을 눈앞에 두고 쓰러진 도란도의 실루엣에서 많은 사람들이 마라톤 벌판에서 달려와 승리를 전하고 죽은 ,페이디피데스[7] 를 상기했는지 마라톤의 인기는 이대회를 기점으로 더욱 공고해지는 아이러니를 낳았다.
이후에도 도란도 본인은 "그때 누가 부축해주지 않았어도 내 힘으로 결승선을 통과했을 거다"고 말했으며 나중에 다른 마라톤 대회에서 헤이즈를 꺾고 우승했다. 그러나 역사는 그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고 금메달 획득자만을 기억하는데[8] , 그 나비효과인지 황당무계하게도 96년 후인 2004년에 이탈리아인 스테파노 발디니가 어처구니없이 마라톤에서 비슷한 이유로 금메달을 획득하는 사건이 생긴다.링크
하지만 이후 이탈리아에서는 피에트리만큼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장거리 마라토너가 나오지 않았으며, 결국 80년이 지난 1988 서울 올림픽때서야 젤린도 보르딘이 이탈리아계로는 최초로 우승을 하게 된다.
미국은 당시 유럽에서 제대로 된 나라로 인정받지 못했다. 헤이즈의 당돌한 행동은 결국 미국이 그 다음 올림픽인 1912년에서 10종경기 우승자인 짐 쏘프의 금메달을 빼앗기는 것으로 제대로 보답을 받았다.
도란도 사건 이외에도 마라톤에서는 황당한 사건이 또 하나 있었다. 남아프리카의 찰스 헤퍼론이라는 선수는 선두로 달리다가 1.5마일 남은 지점에서 어떤 관객이 승리의 샴페인을 헤퍼론에게 따라줬고, 그걸 받아마신 헤퍼론은 장거리 경주 중에 갑자기 몸에 수분이 들어가자 위경련 증세가 일어났고 결국 기절했다(...)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린 것이 문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결승선을 세 번째로 통과했고 피에트리의 실격으로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또다른 사건은 육상 400m에서 발생한다. 400m 결승에는 나선 미국의 세 선수는 준결승에서 세계신기록을 세운 영국의 할스웰을 잘 견제하여 우승을 차지하지만 석연찮은 영국심판의 재경기 명령에 불응하고 결승전을 보이콧 한다. 단독으로 결승에 나선 할스헬은 50초 F의 기록으로 우승하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주최국의 경기심판이나 감독 대신 IOC 심판 위원회가 모든 경기를 주관하게 된다.
4. 각종 에피소드들
런던올림픽은 많은 신기록을 토해내었지만, 진정한 영웅은 아마도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미국 펜실베이니아 출신의 주교일 것이다. 영미간의 과열 경쟁으로 인해 육상 400m의 파문이 발생하자 이 사건의 희생자인 미국의 세 선수들에게 승리보다도 참가가 더 중요한 것이라고 설교함으로써 올림픽의 영원한 구호를 탄생시킨다. 그 내용을 전해 들은 쿠베르탱은 IOC 위원장은 그 말을 인용하여 '올림픽 경기에서 중요한 것은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참가하는 것이다. 인생의 본질은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훌륭하게 투쟁하는 것이다.'라는 경구를 널리 퍼뜨린다. 이후의 올림픽에 면면히 이어내려온 이 정신은 스테이트 아마추어리즘과 프로페셔널리즘 앞에서 날로 무력해지는 면도 있지만, 여전히 올림픽에 있어서 어떤 것 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명제로 남아 있다.
종교적인 이유로 주일의 경기를 포기하는 사례도 이 대회에서 심상지 않게 일어났다. 주일 경기를 차마 포기 할 수 없었던 미국의 포레스트 스미손은 일요일 경기에 성경을 손에 든채 경기에 임해 110m 허들에서 세계신기록(...)으로 우승한다.
특이한 점이라면 당시 신규종목중에 '''피겨 스케이팅'''이 존재했다. 겨울스포츠가 추가되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지난 대회때 나왔지만 당시는 동계 올림픽이 없었기 때문에 피겨스케이팅도 하나의 종목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것. 물론 1924 샤모니 동계올림픽이 생기자마자 바로 동계올림픽으로 옮겨졌긴 하지만...
신규종목도 꽤 추가가 되었으며, 요트라든가 하키, 워터 모터스포츠까지 종목으로 채택되었을정도.
영국은 이 대회에서 홈 버프를 받아 금메달 56개로 1위 차지. 지금까지 영국이 기록한 최고 기록이다. 2위 미국과 무려 33개 차이..
[1] 다만 이탈리아에서의 올림픽은 1960년의 일이다.[2] 종전까지 올림픽에 참가하고 싶으면 개인 혹은 동호회에서 직접 올림픽 개최국에 가서 신청을 해야 했는데, 이 대회 때부터 선수 개개인이 국가올림픽위원회(NOC)를 통하여 참가 신청을 하도록 한 후 NOC에서는 참가 인원을 정리하여 IOC에 보고하는 방식으로 참가 통로를 단일화했다.[3] 올림픽에 출전하는 경기인은 스포츠에 참여함에 있어서 생활비나 어떠한 금전적 이득을 취득하지 않는다는 조항. 초기에는 메달리스트가 대학에서 돈받고 강의를 했다고 티칭프로라고 박탈당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당연하지만 스포츠 마케팅이 급속도로 발전한 요즘에는 이 규정은 지켜지지 않고 있다.[4] 당시에는 케이프 식민지, 트란스발, 나탈, 오렌지자유주(州)의 통합 팀이었다. 남아공의 전신인 남아프리카 연방이 출범한 것은 1910년.[5] 사실 근대 올림픽의 전신 격인 그리스의 자파스 올림픽에서 오스만 제국 출신의 몇몇 그리스계 선수들이 개인 자격으로 참가한 적이 있긴 하다.[6] 2019년 10월 6일자 서프라이즈에 따르면 코난 도일과 비슷한 외모를 가진 사람이 부축을 도왔고, 이 사진을 찍은 신문을 본 사람들이 그를 코난 도일로 오해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코난 도일은 심판의 한 사람으로서 도란도에게 죄책감을 느껴 사과했다고 한다.[7] 사실 페이디피데스는 마라톤에서 아테네로 달려간 것이 아닌 스파르타로 달려가 원병을 청했고, 다시 마라톤으로 멀쩡히 복귀했다. 페이디피데스가 아테네에 승리를 알리고 죽었다는 이야기는 아테네 올림픽을 앞두고 마라톤의 흥행을 위해 허구로 지어낸 이야기며 실제론 보병이 아닌 연락병이었다. 연락병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했기는 하나 중무장을 한 채로 240km를 2일 만에 주파할 정도로 이 사람도 보통은 아니었다(...)[8] 도란도는 이후 그 동안 받은 상금으로 호텔을 차렸으나 도산하였고, 2차대전 중인 1942년 사망했다. 헤이즈는 이후 트레이너로 살다가 1953년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