뤼순 공방전
1. 개요
뤼순 공방전은 여순항 포위전 이라고도 하며 러일전쟁에서 가장 길고 많은 희생자를 양산했던 전투였다. 초기에 계획되지 않은 요새 공략에 투입된 일본군은 러시아군의 요새 진지에 의해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며, 이는 공병대에 의해 요새화된 진지와 기관총, 철조망의 조합이 얼마나 위력적인가를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2. 배경
러일전쟁 개전 당시 일본 측은 일본 본토에서 만주에 이르는 보급로 및 진격 루트를 확보하기 위해 여러모로 노력하였다. 일본 측이 계획한 만주지역에서의 일본군 보급선은 아래의 세가지가 있었다.
1. 대한제국의 의주(義州)에서 시작해 압록강 대안의 안동(安東) ~ 봉황성(鳳凰城)으로 이어지는 선.
2. 요동반도 서안의 영구(營口)에서 시작해 해성(海城) ~ 요양을 거쳐 봉천으로 이어지는 선.
3. 요동반도 끝의 다련(大連)에서 뤼순 ~ 요양으로 이어지는 남만주 철도선.
이러한 보급선 셋 중 둘이 황해에서 요동반도를 통하였으며, 따라서, 일본군의 입장에서 보급선을 안정화시키기 위해서는 황해의 제해권을 쥐는 것이 급선무였다. 즉 다롄의 바로 옆에 있는 뤼순[2] 에 해군 기지를 건설, 주둔하고 있는 태평양함대와 러시아 육군을 무력화시키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이 때문에 전쟁 발발 전부터 일본군은 뤼순항에 대한 대응책을 대비하였었다. 1903년 12월 30일 일본 해군은 1. 뤼순 외항에서의 기습, 2. 뤼순항 봉쇄 3. 외항에서의 포격을 통해 뤼순 내항의 함정 격파라는 3단계 과정을 거처 해군 단독으로 뤼순을 공략하거나 뤼순 항 내의 러시아 해군을 완전히 격파, 전략적 가치를 제거할 것을 결의하였다. 일본 해군은 이때 육군의 개입을 바라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 육군 또한 일단은 뤼순에 대한 공략 계획을 짜 놓았으나 뤼순 공략의 우선권은 이때 해군 측에 있었다.
2월 4일, 일본 대본영은 러시아 함대가 뤼순 외항에 정박 중이라는 정보를 입수하였고, 이를 기습에 최적인 상황이라 판단한 대본영은 궁정회의에서 전쟁 시작을 결의, 군사행동에 들어갔다. 2월 6일 연합함대 사령장관 도고 헤이하치로 해군 중장은 작전 계획을 하달 후 사세보 항을 출항, 2월 8일에 뤼순 항 44해리 근처까지 접근였으며, 2개의 수뢰정 집단을 운용, 2월 9일 새벽에 공격하였다.[3] 어뢰 공격이 없을 거라 여기고 방심하여 해저 철망을 걷어놓았던 상태였던 러시아 해군은 첫 공격에 3척의 함선이 파손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해군은 일본 해군이 계획한 외해로의 유인 및 섬멸에 말려들지 않고 항구에서 저항하였으며, 해안 포대의 지원과 파손되어 내항으로 들어간 상태에서도 포를 쏘는 함선들의 지원을 받아 일본 해군의 2차 공격을 격퇴하였다. 이후 러시아측은 뤼순 항 방어를 위해 기뢰를 부설했고, 일본군은 여러 차례 반복된 기습을 수행하였다. 2월에 임명, 3월 초에 뤼순에 부임한 스테판 오시포비치 마카로프 해군 중장의 분투로 인해 일본군의 봉쇄 작전은 실패로 돌아가는 듯 하였으나 4월 13일 마카로프 제독이 탑승한 기함이 기뢰에 피격, 격침되었고 마카로프 제독 자신도 빠져나오지 못하고 전사하자 제해권은 일본 측에게로 넘어가게 되었고, 뤼순 항은 기뢰로 봉쇄되었다.
그러나 일본군이 초기에 계획했던 러시아 태평양함대 격멸에는 실패한 상태라는 점은 변하지 않았으며, 여기에 더해 러시아 측이 발트 함대를 제2태평양함대로 개편, 파견할 것을 결정하자 일본 측은 차츰 다급해지게 된다. 또한 뤼순 항에 대해 수행한 기뢰 봉쇄는 불완전하였으며 지속적으로 기뢰를 제거한 러시아 함대의 위협, 그리고 러시아측이 일본 함대의 예상 진로에 기뢰를 부설하여 피해를 입히기도 하는 등[4] 황해의 일본군 제해권은 언제나 불안정한 상태였다.
결국 일본 해군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뤼순 항에 대한 공략 또는 충분한 무력화가 불가능하다는 게 확인되기 시작하자 일본 육군은 뤼순 항 공략을 위해 노기 마레스케 대장을 지휘관으로 하는 제3군을 편성하였으며, 6월 중순에 다렌에서 편성을 마치고 뤼순 항 공략을 준비하던 제3군은 공식적인 해군의 요청(7월 12일)을 받자 즉시 뤼순 공략에 착수한다.
3. 다롄에서 뤼순까지
뤼순 항과 대륙을 잇는 지역의 러시아군 거점들은 이미 5월 초에 일본군의 타격을 받은 바 있다. 이는 뤼순이 일본군의 주요 상륙 거점인 다롄에 매우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뤼순과 육상을 연결하는 진저우는 다롄을 보호하고 뤼순에 주둔하고 있었던 러시아군이 다롄으로 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반드시 공략해야 할 곳이였다. 따라서 다롄에 상륙한 제2군은 오쿠 야스가타(奧保鞏) 대장의 지휘 하에 진저우를 공략하였고, 해군의 지원까지 받아가면서 이를 공략하여 5월 26일 하룻동안의 격전 끝에 이를 점령하였다.[5] 이후 뤼순 항의 러시아군은 일본군이 지상에서 뤼순을 공략하려 시도할 것으로 예상하고 방어진지를 구축하였으나 일본군은 이를 공격하지 않았다. 오히려 벤저민 외그너 뇌르가르(Benjamin Wegner Nørregaard. 1861~1935) 등 이 전투를 관전한 다수의 군사평론가들은 다롄에 있었던 일본군은 당시 뤼순에 주둔 중인 러시아군에 비해 약세였으며, 러시아군이 공격하는 것을 두려워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본격적으로 뤼순 항 공략 명령이 하달되자 제3군은 7월부터 해군의 포격 지원을 받아가면서 전진해 나아갔고, 7월 말에는 뤼순 항의 방어라인까지 러시아군을 밀어넣을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러시아군의 방어진지를 돌파해야 했던 일본군은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으나, 러시아군의 방어진지들이 그리 훌륭하지 못했기에 일본군에 의해 어렵지 않게 제압되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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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양측의 전력
4.1. 일본군
- 제3군 - 군사령관: 노기 마레스케 중장
- 제1사단 (도쿄)
- 제9사단 (가나자와)
- 제11사단 (시코쿠 젠쓰지)
- 제7사단 (홋카이도 아사히카와) - 1904년 11월 증원
- 후비 보병 제1여단
- 후비 보병 제4여단
- 야전 포병 제2여단
- 공성 포병 사령부
1회의 총공세마다 일본군은 대략 5만여에 달하는 전력을 투입한 것으로 보이나, 피해를 충원하기 위한 지속적인 증원 및 공략을 해상에서 지원한 해군 전력까지 합치면 8만에서 최대 15만까지 투입된 것으로 여겨진다.
일본군은 비록 청일전쟁에서 뤼순항을 공략한 경험이 있으나, 이후 러시아군이 새로이 건설한 방어진지에 대한 정보는 전무했다. 이는 공략 명령 하달 시 제3군에 전달된 지도에 러시아군의 전방 진지에 대한 정보가 상당수 빠져 있었다는 데서도 파악할 수 있다. 이때문에 제3군은 뤼순으로 전진해 나가는 한 달여 동안 최대한 러시아군의 방어진지를 파악하고자 노력했고, 이러한 시간 소요는 러시아군으로 하여금 방어력을 강화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제공해 주었다.
제3군은 최초에 서쪽 방면에서의 공략을 계획하였다가, 이후 몇가지 이유를 들어 공격 루트를 동쪽 방면에서 하는 것으로 바꾸었다. 이는 서쪽 방면이 철도로 대포를 나르기 힘들어 포병 운용이 어렵고, 203고지와 남산 고지 등 튼튼한 전방 진지가 많으며, 엄페물이 적은 평야지대를 행군해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러시아군이 방어의 중점을 둔 곳 또한 동쪽 방면이었다. 따라서 일본군의 초기 공세는 러시아군의 가장 강력한 방어진지에 정면으로 들이받는 실책이 되어버렸고, 이것이 뤼순 공략을 위한 몇 차례의 총공세가 실패로 돌아간 주요 원인이 된다.
4.2. 러시아군
- 러시아 관동군 사령관: 아나톨리 미하일로비치 스테셀(Анатóлий Михáйлович Стéссель) 중장
- 뤼순 요새 사령관: 콘스탄틴 니콜라예비치 스미르노프(Константин Николаевич Смирнов) 중장
- 동시베리아 제4 저격사단: 사단장 알렉산드르 포크 소장
- 동시베리아 제7 저격사단: 사단장 로만 콘도라첸코 소장 (1904 / 12 ~) 나딘 소장
- 요새 포병대
당시 러시아군 내에서는 매우 심각한 지휘권 문제가 발생하고 있었던 걸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뤼순 요새의 방어 지휘권이 본디 콘스탄틴 니콜라예비치 스미르노프(Константин Николаевич Смирнов) 중장에게 있었으나 아나톨리 미하일로비치 스테셀(Анатóлий Михáйлович Стéссель) 중장이 관동군 사령관으로서 부당하게 지휘권을 행사하면서 서로 간섭하고, 상이한 명령을 전달하는 등의 행태를 보였기 때문이다.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 아나톨리 스테셀 중장은 관동군 사령관으로 1904년 3월에 임명되었다가 6월에 해임, 스미르노프에게 뤼순 요새의 지휘권을 넘기라는 극동육해군 총사령관 크로파트킨의 명령을 받았는데, '''명령서를 숨기고 자신이 부당한 명령권을 행사하였다.'''[6] 이러한 지휘권의 심각한 분열은 뤼순 요새가 보유한 병력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최악의 결과를 낳았으며, 또한 방어 및 반격 계획이 제대로 구비되어 있지 못했기에 뤼순 공방전 전 기간 내내 러시아군은 방어의 성공을 통해 일본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음에도 불구하고 군사행동의 주도권을 가져가지 못하게 된다.
뤼순 요새에는 총 646문의 대포와 62정의 기관총이 있었다. 이 중 123문의 대포와 5정의 기관총은 해안선의 고정포대들에 배치되었고 나머지는 모두 육상 방어로 돌려졌다. 화력의 규모 자체는 충분했으나 대다수가 구식이여서 사거리 부족 문제가 심각했는데, 러시아군은 이를 효율적인 포대 배치 및 운용체계를 짜서 보병과 포병이 효율적이고 긴밀하게 합동 작전을 펼 수 있도록 하는 것을 통해 커버하였으며, 그 성과는 뤼순공방전 내내 막대한 일본군의 피를 뽑아내는 것으로 입증된다.
포 1문당 평균 425발의 포탄이 준비되어 있었고, 밀가루 168일분, 수수와 옥수수가 127일분, 설탕 169일분, 건빵 27일분, 소금 200일분, 육류 20일분, 귀리와 보리, 대두가 155일분, 건조야채가 173일분의 식량이 요새 안에 비축되어 있었다. 다만 요새의 저장능력이 부족하여 식품이 금방 부패되었고, 또한 우물의 갯수도 부족하다보니 전진진지와 각 요새에 충분한 식수를 공급하는 데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뤼순항에는 당시 장갑함 6척, 순양함 5척, 포함 2척, 수뢰정 2척, 구축함 19척을 보유한 태평양함대가 있었다. 이들 해군 함정들은 해상 포대로 주로 운용되어, 일본군의 공격에 포격을 퍼부어 약화시켰다. 또한 각 함선이 보유한 포들 중 일부를 육상 포대에 배치하여 화력을 강화시켜 주기도 하였다. 이들 러시아 해군 함정들은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길을 뚫기 위해 재차 출격하였다가 8월 10일 발발한 황해 해전에서 전투력을 대거 상실하였으나, 요새 수호에 있어서는 마지막까지 공헌하였다.
4.3. 뤼순 요새
뤼순항은 러시아 조차지가 되기 전에도 기초적인 방어 시설은 구축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는 청일전쟁에서 몇 시간 만에 일본군에 의해 함락되었던 데서 알 수 있듯 그다지 튼튼한 방어 진지는 아니었다. 이에 따라 러시아 측은 1898년부터 방어시설 구축에 들어갔고, 1901년에는 본격적으로 대대적인 '''콘크리트 방어 진지 공사'''가[7] 이루어졌다. 그러나 러일전쟁 직전까지 상당수는 예산 부족으로 완성되어 있지 않았다. 애초에 이 방어 진지 공사의 계획된 완료 시점은 1909년이었다.
하지만 러일전쟁 발발 후 뤼순항이 포위되기까지 6개월 동안 다시 본격적인 방어 진지 구축이 이루어졌다. 이는 특히 제7사단 사령관이었던 로만 이시드로비치 콘트라첸코(Roman Isidorovich Kondratenko) 소장의 분투에 의해서였다. <러일전쟁사>에 따르면 로만 콘트라첸코 소장은 사실상 육상 방어의 책임자[8] 로서 창의성과 카리스마를 발휘하였으며, 특히 공병 작업에 분투하여 단 수개월 동안의 요새 보강작업이 그 이전 몇 년에 걸친 것보다도 더 많았다고 한다. 공방전 당시의 뤼순 요새나 이후의 평가에서도 콘트라첸코 소장은 사실상 뤼순 방어의 중심인물로 평가되었으며, 항전론의 중심적인 인물이었다. <러일전쟁사>를 작성한 러시아 연방 전사연구소의 연구에 따르면 콘트라첸코 소장을 필두로 하는 당시 뤼순 수비대의 장교들의 노력에 의해 '''뤼순항은 몇 개월 만에 미완성된 부실한 요새에서 장기간의 포위에도 견딜 수 있는 강력한 요새로 변모하였고 스테셀 중장에 의한 지휘권 분열만 없었다면 완벽한 요새가 되었을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특히 악명 높은 203고지 방어 진지를 포함한 다수의 전초 진지들은 일본군이 뤼순항으로 접근해오던 7월에 공사가 완료되었다. 만약 일본군이 좀 더 빨리 뤼순항을 육상에서 공격했더라면 장기간 이어지면서 막대한 희생자를 낸 뤼순 공방전은 실제보다 빨리 끝났을지도 모른다.
뤼순 요새의 방어 라인은 총 29km에 달하는 달했으며, 이 중 9km는 해안선에 위치해 있었다. 1904년 7월 30일을 기준으로 총 22개의 해안 포대가 설치되어 요새와 내항에 정박해 있는 러시아 함대, 그리고 뤼순항을 일본군에게서 방어하였다. 20km에 달하는 육상 방어 라인에는 5개에 달하는 영구 포대, 3개의 보루, 5개의 독립 포대가 구축되어 있었다. 각 영구 포대 사이에는 철조망과 함정이 있는 산병호가 구축되었고, 위험한 지역에는 지뢰가 매설되었다. 주 방어 라인 외곽에는 전진기지가 구축되어 있었다. 대고산, 소고산, 수사영, 이령산('''203고지''') 등에 구축된 이들 전방 진지들은 러시아군의 주 방어 라인을 보호하였다. 주 방어 라인 후방에는 도시를 감싸는 중앙 장벽이 건설되어 있었고, 여기에는 요새포와 독립포를 위한 수십 개의 중간 포대가 회전사격을 할 수 있게끔 구축되어 있었다. 이들 포대들은 주 방어 라인을 후방에서 엄호하는 포격이 가능하도록 설치되었다. 육상 방어 라인은 동부, 북부, 남부의 세 파트로 나뉘어 있었는데 가장 강력한 곳은 동쪽 방면이었고, 가장 취약한 곳은 남쪽 방면이었다.
뤼순항은 그러나 본질적으로 취약한 부분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문제가 된 것은 보루가 뤼순항에 너무 가까이 설치되어 있다는 것으로, 이 때문에 요새의 중심지와 참모부, 창고, 그리고 함대를 보루만으로는 완전히 지킬 수 없었다. 따라서 이러한 주요 시설들을 안전하게 지켜내기 위해서는 전방 진지들을 사수해야만 했다. 실제로 뤼순은 마지막 전방 진지였던 203고지가 함락된 후 한 달을 채 버티지 못했다.
전해지는 야사로는 일본군이 콘크리트 진지와 포대를 뚫지 못하고 고전하는 상황에서, 상술된 취약점과 콘크리트 처리가 되어 있지 않은 곳을 알려주는 대가로 거액을 [9] 요구한 사람들이 있었다고 한다. 아무튼 이들에게 정보를 얻은 일본군이 종전 후 계좌를 확인해보니 네 명 중 한 명만 찾아갔더라는 후문.
5. 뤼순 공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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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전초전 - 대고산, 소고산 공략
동쪽 방면을 주공격 대상으로 삼은 일본군에게 우선적으로 공략 대상이 된 것은 대고산(大孤山)과 소고산에 위치한 러시아군 전방 진지였다. 동쪽 해안선에 가깝게 튀어나와 있는 이 두 전방 진지는 일본군의 포위망 구축을 방해해는 주요한 지형적 장애물이었으며, 또한 이곳에 포병을 배치하면 뤼순 시와 함대, 그리고 동쪽 방면 방어선에 포격을 가할 수 있었기 때문에 우선적인 공략 대상이 되었다.
8월 7일, 일본군은 뤼순 수비대의 주의를 다른곳으로 유도하기 위해 포병으로 뤼순 시와 함대 쪽에 포격을 한 후, 오후 3시부터 대고산과 소고산에 사전 포격을 가하면서 보병들을 돌격시켰다. 7시에 시작된 일본군 보병의 돌격은 그러나 이내 러시아군의 반격에 저지당했고, 직후 많은 비가 내리면서 3일의 공격은 간단히 무위로 돌아갔다. 8일에는 다시 한 번 러시아군 측을 속이기 위해 다른곳에 위장공격을 가한 후 11시에 재차 대고산, 소고산을 동시에 공격하였다. 이 공격은 러시아 포함 2척, 수뢰정 7척, 순양함 노비크 호가 기습적으로 따허 만에 진입, 일본군에 포격을 가해 저지되었으나 오후 1시에 일본군 해군이 따허만으로 진입해 러시아 해군을 몰아냈고, 이후 집중적인 공격에 의해 오후 7시에는 대고산이, 8월 9일 새벽 3시에는 소고산이 함락되었다.
이후 일본군과 러시아군은 방어선 외곽의 전방 진지들을 두고 지속적인 전투를 벌였다. 이는 뤼순의 주방어라인에 대한 총공세를 펼치기 위한 일본군의 사전 준비작업이었다. 또한 8월 11일에는 러시아에 속하지 않은 인원에 대해서 안전하게 철수할 수 있게끔 임시 휴전을 제안하기도 하였고, 외국의 관전무관들은 이에 따라 8월 14일에 뤼순항을 떠났다.
대고산, 소고산 공략 후 지속된 전방 진지에서의 교전의 결과 일본군은 봉황산까지 전진하여 그곳에 군 사령부를 꾸리고, 단산지 동북고지에 전투 지휘소를 차렸다. 이곳은 뤼순의 방어진지를 내려다볼 수 있는 곳으로, 일본군의 전투 지휘는 이후 이곳에서 이루어지게 된다.
5.2. 1차 총공세(1904.8.19 ~ 24)
일본군은 총공세 직전인 8월 16일, 뤼순 요새의 무혈 인도와 주민들의 철수를 제안하는 최후 통첩을 보낸 바 있다. 이는 다음 날 러시아군에 의해 반려되었으며, 직후 일본군은 총공격명령을 하달하였다. 총공격 개시일은 8월 18일로 예정되었으나 비로 인해 땅이 질퍽해지자 하루 연기되었다. 노기 마레스케 제3군 사령관은 19일 새벽 외국의 종군기자들과 접견한 자리에서 자신만만하게 뤼순항을 조기에 함락시킬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일본군 지휘부가 마련한 전반적인 공격 계획은 8월 19일부터 전 전선에 대해 포격, 이후 포격 지원 하에서 서부전선의 전진기지에 대한 양동공격을 가하여 시선을 끌고 8월 21일 새벽에 주력부대를 동원하여 동부전선을 공격한다는 것이였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이 공격의 성공을 위해 예비대인 제4예비여단을 제외한 전 병력(이당시 약 5만 1천여)를 공격에 투입할 예정이었다.
일본군의 포격과 전 전선에 걸친 양동공격은 19일에 이루어졌다. 대정자산(大頂子山)을 비롯한 서북면의 주요 러시아군 전진 진지들은 일부는 함락되었고 일부는 버텨냈다. 또한 동부전선에는 집중적인 포격을 가해 주요 방어시설을 파괴하여 추후 주력부대의 공격을 준비하였다.
일본군 주력군의 공세는 21일 새벽에 실시되었다. 특히 중점을 둔 곳은 양동공격의 결과 어느정도 성과를 올렸던 판룽산(盤竜山) 다면보루였다. 일본군은 동부의 방어라인을 돌파하여 한 번에 전투를 끝낼 생각을 했고, 실제로 22일까지는 어느정도 성과를 올리는 데에도 성공했으나 러시아 측 역시 예비대를 집중시켜 이를 막아냈으며, 23일에 일본군 4개 여단을 투입한 공격이 격퇴당하자 노기 장군은 24일 공격을 취소하고 확보한 진지들의 방어선을 굳히는 쪽으로 선회하였다. 8월 30일에는 역으로 러시아군의 판룽산 탈환 시도가 있었으나 이는 격퇴되었다.
1차 총공세에서 일본군은 전사 5,017명, 부상 10,843명에 가까운 손실을 입었는데, 이는 사실상 한 개 사단이 괴멸당한 거나 다름없는 큰 피해였다. 그리고 그런 피해를 올리면서 겨둔 성과는 대정자산과 판룽산 고지의 장악 정도에 불과했다. 이는 좁은 곳에 과도하게 병력을 집중시켰다가 큰 타격을 받은 것 등 여러 실책이 원인이라고 할 수 있으나, 본질적으로 잘 무장된 요새를 단기간의 총공세로 함락시킨다는 것 자체가 무모한 계획이었다는 게 가장 큰 이유라 할 수 있다. 러시아군은 사상자, 부상자 도합 6천에서 7천 정도의 사상자를 냈다.
이후 러시아군은 1차 총공세를 방어한 후 방어력을 회복하는 데 전력을 다했으며, 또한 다롄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 함대가 있는 한 함대단위로 뤼순을 탈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러시아 태평양함대는 함선을 얕은 여울쪽으로 붙여 포격으로 연안의 방어를 지원하고 함선의 포와 상당수 해군 병사들을 육군에 지원하며 뤼순의 방어를 지원하도록 하였다.
5.3. 2차 총공세(1904.9.19 ~ 22)
1차 총공세 후 일본군은 뤼순이 단기간의 돌격으로는 함락시킬 수 없는 요새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일본군은 공병을 활용, 다수의 공격용 참호를 파들어 접근하는 정석적인 장기 공성전으로 돌입하였고, 제3군과 다롄 사이를 철도로 잇고 후방에 다수의 군수품 창고를 건설하였다. 이러한 사전작업을 진행하면서 일본군은 예비병력과 보급을 기다렸고, 9월 초에 예비병력을 받아 1차 총공세에서 입었던 손실을 복구하였다. 또한 강력한 콘크리트 진지를 파괴하기 위한 280mm 포를 비롯해 다수의 포병세력 또한 지원받아 화력을 증강시켰다.
그러나 제3군은 대본영의 공격 독촉을 받고 있었다. 제2태평양함대가 출항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대본영은 단기간의 맹공으로 조속히 뤼순을 공략할 것을 촉구하였고, 결국 노기 마레스케는 8월 31일에 재차 공세를 결정한다. 이를 통해 뤼순의 방어라인을 약화시켜 10월쯤에 계획된 3차 공세에 좀 더 쉽게 무너지게끔 하는 사전 준비작업의 일환이었다.
러시아군 또한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1차 총공세에서 파괴된 방어 시설들을 복구하였고 추가적인 철조망, 참호, 개인용 엄폐호를 구축하였다. 전투 과정에서 나타난 각 보루의 사각지대에는 지뢰를 매설하였고 일본군의 공격용 참호에 대응한 참호 건설이 진행되었다. 또한 해군 병기들을 육상 방어에 돌리면서 이를 적절히 활용하기 위한 개량과 발명이 이루어졌고, 특히 일본군의 야전보루와 엄폐물을 파괴하기 위해 후대의 박격포와 비슷한 병기를 제작, 사용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포격을 좀 더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모든 전선에 포병 지휘관을 임명하고 각 지휘관의 참모부를 신설하였다. 러시아군은 효과적인 포병의 운용을 통해 뤼순의 방어를 수행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이며, 2차 총공세가 있기 전 뤼순의 요새의 방어진지는 이러한 파괴된 시설의 복구, 해군 병사 및 해군 장비의 지원 등을 통해 1차 총공세 이전 수준까지 방어력을 회복하는 데 성공하였다.
2차 공세는 강력한 방어력을 보인 동부 전선을 피해 북, 서부지역을 주공격 지점으로 삼았다. 이는 1차 공격 때 동부방면의 러시아군 방어라인이 매우 견고하였다는 점을 인지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2차 공격의 목표는 해서산(海鼠山)과 이령산이었다. 이 두 지역을 공격목표로 삼은 이유는 그곳의 방어력이 다른 곳에 비해 현저히 약했기 때문으로, 이때 해발 203m인 이령산은 이후의 악명에 걸맞지 않게 고작 기관총 4정과 대포 7문, 육군 3개 중대와 해군 1개 중대만이 주둔해 있는 작은 진지였다. 해서산 역시 이령산과 비슷한 수준의 병력이 주둔해 있었다. 19일 밤 시작된 2차 공세의 결과 20일 새벽, 해서산의 러시아군은 철수하였다. 그러나 이령산에 대한 공세는 신속하게 예비대를 투입한 러시아군에 의해 저지되었다. 또한 해서산의 러시아군이 철수하면서 일부 보루와 고지에서 러시아군이 같이 철수하였는데 일본군은 이 또한 접수하였다. 이후 이령산은 서북 지역의 최중요 방어거점으로 간주되어 집중적인 강화를 받았고, 그 결과 203고지로 이름이 알려지게 된다.
해서산의 함락은 러시아군 입장에서는 상당히 난감한 것이였다. 이 고지에서 일본군은 뤼순 내항의 대부분을 관찰할 수 있었으며, 그만큼 내항에 정박중인 러시아 전함에 대한 포격이 정확해졌다.
일본군은 이 교전에서 전사 924 명, 부상 3,925 명의 피해를 입었고, 러시아 군은 전사 600 명, 부상 2,200 명의 피해를 입었다. 이는 이 공세가 제한된 목표를 노린 결과로 보인다.
5.4. 3차 총공세(1904.10.26 ~ 30)
2차 총공세 이후에도 일본군의 공격용 참호와 포위망 강화는 지속되었다. 또한 10월 15일에 발트함대, 즉 제2태평양함대가 출항했다는 소식을 들은 일본군 대본영은 제3군에 대한 독촉을 한층 더 강화하였다. 이는 '''제2태평양함대가 황해에 도착했을때 뤼순과 뤼순에 정박해 있는 제1태평양함대가 러시아의 손에 남아있다면, 그순간 황해의 제해권은 러시아에게 넘어가고 전쟁에서 패배할 것이다'''는 강한 위기의식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노기와 제3군 지휘부는 군사력을 집중하여 방어선의 한곳을 확실히 뚫어내기를 원했다. 그리고 그 목표는 다시 동부지역의 러시아군 방어선이었다. 이는 1차 총공세의 결과로 확보한 판룽산 일대의 일본군 돌출지역 주변을 장악하여 방어선에 구멍을 내고자 함이었다. 공격에 앞서 일본군은 지속적인 공병대의 운용을 통해 여러 보루들의 방어력을 약화시키려 하였다. 특히 판룽산 주변의 러시아군 보루로 진격하는 진격로를 개척하려고 노력하였는데, 이는 러시아군의 방해로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노기와 제3군은 계획을 포기하지 않았다. 대본영의 지속적인 독촉에 더해 메이지 덴노의 생일(11월 3일)까지 다가오자 노기는 그 전까지 뤼순 항 전체를 함락시키진 못하더라도 동부전선의 주요 보루들은 공략하는 성과를 올려야 한다는 심리적 압박을 받고 있었다. 결국 이러한 독촉과 압박이 성급한 공격을 유발하였다고 볼 수 있다.
10월 26일, 280mm포를 집중적으로 배치하고, 동부전선의 주요 보루들과 뤼순 시, 항구에 대한 포격으로 일본군은 3차 총공세를 시작하였다. 4일간 이루어진 이 포격은 러시아군의 방어진지들 상당수를 파괴하였으며, 또한 동부전선에 배치되어 있던 26개 중대의 러시아군에도 적지 않은 타격을 가했다.
9사단, 11사단 전체와 1사단 일부 부대가 참여한 일본군의 총돌격은 30일에 이루어졌다. 총 5개 종대에 달하는 돌격이었으며, 2개 종대가 별도의 예비대로 대기하였다. 그러나 낮 12시에 실시된 이 대규모 돌격은 딱 3시간만에 처참한 실패로 돌아간다. 4일간의 포격으로 심각한 타격을 입은 러시아군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력으로 일본군을 방어하였고, 공격로 쪽으로 화력이 집중된 결과 단 하나의 종대도 러시아 수비대를 밀어내지 못했다.
제3군 지휘부는 장기간 준비한 총공세가 3시간 만에 실패로 돌아가는 것을 확인하고는 병력을 철수시켰다. 예비대를 추가 투입하지 않고 단지 포격만 유지해 가면서 러시아군에 타격을 가하려 한 것이다. 빠르게 실패를 인정하고 군을 물렸기 때문에 일본군의 사상자 역시 러시아군과 엇비슷한 수준으로 억제하는 데 성공하였다.
3차 총공세의 실패 후 양측은 서로 공병대를 집중적으로 운용하였다. 일본군의 공격용 갱도 작업에 대응하는 러시아의 수비용 갱도작업이 곳곳에서 이루어졌으며, 러시아군은 일본군의 참호를 지속적으로 파괴하고 공격을 방어하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11월 초중엽에 일본군의 몇 개의 보루의 방어시설들을 파괴하는 등의 성과를 올렸다.
5.5. 4차 총공세(1904.11.26 ~ 12.6) - 203고지
일본군 대본영은 11월 초에 제2태평양함대가 인도양에 도착했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이 소식은 육군을 지휘하는 오야마 이와오(大山 巌) 육군 원수와 연합함대 사령장관인 도고 헤이하치로 해군 중장에게 큰 위기감을 가져다 주었으며, 최대한 빨리 뤼순항을 함락하여 제1태평양함대 주력을 제거하고, 이후 연합함대의 함선을 수리하여 제2태평양함대와 일전을 벌여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하였다.
이는 곧 제3군으로 하여금 재차 총공세를 벌여 뤼순을 함락하라는 독촉이 심해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오야마 이와오 원수는 참모장인 고다마 겐타로 대장을 제3군으로 파견하였고, 또한 일본 본토에서 대기하고 있었던 마지막 현역 사단이었던 제7사단을 제3군에 합류시켰다. 이로써 제3군은 총원만 따지면 10만에 육박하는 거대한 부대가 되었다. 다만 이 증원군은 4차 총공세 중반에 합류하였기에 총공세 초기에 참여한 전력은 5만여 정도였다고 한다. 노기 마레스케 대장은 비록 계획했던 것만큼 공성용 참호가 구축되지 않았지만 지속적인 대본영의 독촉과 증원된 병력을 고려하여 재차 총공세를 펼칠 것을 결정하였다.
당초의 공격 목표는 요새 전면이었다. 문제는 러시아군 역시 일본군의 부대 재배치와 사전 포격을 통해 공격시기와 공격 목표를 거의 정확하게 읽어냈다는 점이다. 짧고 집중적인 포격 후 일본군은 동지관산과 니관산이라는, 이전에도 동부전선의 주요 공격지점이 되었던 목표를 향해 집중적으로 공세를 가했으나, 이미 공격을 읽어낸 러시아군의 맹렬한 방어로 인해 막대한 손실을 입었고, 26일 하루종일 이어진 맹공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의 피해만 늘어났기에 결국 4차 총공세 역시 초기의 주요 목표를 달성하는 데에는 실패하였다. 일본군은 단 하룻동안에만 4,500여 명의 사상자라는 큰 피해를 내고 말았다. 러시아군 역시 전사자만 1,500명에 육박하는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으나 일본군의 피해에 비하면 적은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군은 이번에는 공세를 멈추지 않았다. 일본군 제3군 사령부는 서쪽 방면에 위치한 이령산으로 주공격 목표를 변경하였으며, 해발 203m의 이령산은 이 4차 총공세의 주목표물이 되면서 이후 203고지로 알려지게 된다.
9월의 2차 총공세 당시 이령산의 방어 능력은 상당히 빈약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2차 공세의 결과로 이관산이 서부지역의 거의 유일한 주요 러시아군 전방 방어거점이 된 후 러시아 측은 2개월에 걸친 대대적이고 지속적인 보강공사를 실시하여 강력한 방어거점을 만들었다. 깊은 환장참호와 교통로, 대규모 포대가 설치되었고 다수의 철조망 등의 인공장애물 역시 설치되었다. 러시아군은 이령산에 증기급수탑을 설치하였는데, 이는 그만큼 이 이령산이 중요한 고지로 인식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11월 27일부터 일본군과 러시아군은 이령산 쟁탈전을 벌이게 된다. 초기 공세에 투입된 1사단은 하루 만에 1,500여 명의 사상자를 내며 공세에 실패했다. 29일에 7사단이 투입되어 30일에는 일시적으로 이령산 정상을 점령하는 상황까지 갔으나, 직후 이어진 러시아군의 반격에 다시 이를 내어주고 퇴각해야만 했다. 다렌에서 도착한 고다마 참모장은 이 소식을 듣고 오야마 원수에게 전보를 처서 북방으로 이동중이던 제8사단 17연대를 추가로 요청하였고, 이 전력을 합류시킬때까지는 집중적인 강력한 포격을 가하기로 결정하였다. 12월 2일부터 4일까지 포격을 집중한 후 일본군은 재차 공격에 나선다. 1사단, 7사단 잔존 전력을 통합하여 편성한 공격대로 실시된 12월 5일 공격은 그 다음 날까지 이어졌으며, 4차례에 걸처 양쪽은 203고지를 뺏고 빼앗기는 일을 반복하였다. 그리고 최종적인 승자는 일본군이였다.
이령산이 함락된 후 다른 전방 거점들에 주둔하던 러시아군 역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령산에서의 러시아군의 손실은 사망자, 부상자까지 합치면 거의 6천여에 달했다. 물론 공자측이었던 일본군의 사상자는 그 배에 달했다. 일본군 사망자만 8천에 육박했으며 부상자를 합치면 1만 6천에 육박한다. 특히 공격의 핵심이었던 7사단은 거의 전원이 사상자가 될 정도로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이령산은 뤼순 요새 근방의 거점 중에서 가장 해발이 높은 곳이였으며, 따라서 이곳의 함락은 곧 뤼순 함락의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고 말할 수 있다. 러시아군은 이령산이 일본군에 완전히 함락되자 북부, 서부지역의 전방 진지들을 방치하고 후퇴했으며 결과적으로 이는 뤼순의 주방어선을 사실상 붕괴시켰다.
5.6. 뤼순 항복
이령산이 함락된 후 일본군은 이곳에 포병을 배치하여 뤼순을 포격했고, 다수의 포탄이 병원과 입원실이 있는 건물에 명중하였다. 장기간의 포위전으로 인해 식량이 부족해지자 이로인해 티푸스, 괴혈병, 야맹증 환자가 다수 발생하였다.'''"위대하신 황제 폐하, 용서하십시오. 우리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습니다. 우리를 심판하시되 자비를 베푸소서."'''
스테셀이 니콜라이 2세에게 패전을 알리기 위해 보낸 전문의 첫 구절. 출처: 이윤섭. <일본 100년사>. 아이필드. 2016년. p.129.
12월 15일, 일본군은 외곽에 남아있는 보루에 대해 지하에 파 놓은 참호에서 가죽벨트를 태워 유독가스를 발생, 러시아군 갱도로 스며들게 하는 방식으로 러시아군을 밀어냈다. 이에 방어전의 실질적인 지휘관이었던 로만 콘트라첸코 소장이 해당 보루로 직접 가서 정황을 확인하고 귀환하던 와중에 실시된 일본군의 포격에 의해 전사하였다. 이는 요새수비대의 가장 뛰어난 지휘관의 사망을 의미하였으며, 러시아군의 방어 의지를 크게 꺾는 계기가 되었다. 콘트라첸코 소장의 육지방어 총사령관 지위를 대체한 것은 알렉산드르 포크 소장이었다. 그는 진저우에서 뤼순까지 퇴각하는 과정에서 무능력함을 보였기에 병사들의 신임을 잃었던 인물이었고, 이후 러시아군은 일본군의 전방 보루 공략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밀려나게 되었다.
1월 1일, 러시아군 지휘부는 뤼순의 주방어선 중 가장 강력했고, 가장 오랫동안 버텼던 동쪽 방면의 주방어선까지 포기하고 일본군과 항복협상을 하기 시작했다. 이에 아직 전의를 잃지 않았던 잔존 수비대원들은 반발하였으나 이내 사그러들었고, 1월 2일 오후 7시, 러, 일 양측은 뤼순항의 항복문서에 서명하였고, 공식적인 항복은 1월 4일에 이루어졌다.
뤼순항에 남아있었던 제1태평양함대 함선들 대다수는 뤼순항에 대한 포격 과정에서 파손되거나 격침되었으며, 일부 함선들은 탈출에 성공하였으나 사실상 전략적 의미는 사라졌다. 일본측은 전후 뤼순항에 가라앉은 함선들을 다시 건져서 개량, 사용할 수 있는 것은 다시 사용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5.7. 양측의 피해
일본군은 최소 8만에서 최대 15만까지 뤼순 공략을 위해 투입하였다. 공식적으로는 57,780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그중 14,000여 명은 전사자였다. 또한 33,769명의 질병환자를 배출했는데 그중 21,023명은 각기병 환자였다. 거기다가 이는 어디까지나 최소치로, 기록에 따라서는 9만에서 11만의 사상자를 배출했다는 주장도 있다.
러시아군은 방위전력 5만여 중 1만 6천 정도가 전사하였으며, 일부는 함선들이 탈출할 때 탑승하여 탈출하였다. 항복 시 남아있는 수비병력은 32,400여 명인데 이 중 5,809명은 부상자 또는 환자였다.
항복시 러시아군은 약 3,000필의 말, 대포 610문, 기관총 9정, 다양한 구경의 포탄 207,855발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밀가루 27일분, 곡물 23일분, 차 196일분, 설탕 40일분, 건빵 21일분, 건야채 88일분, 소금 175일분, 귀리, 보리 대두 34일분이 남아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전후 아직 전투가 가능한데도 뤼순의 러시아군 사령부가 전투를 포기하였다는 비판이 제기되었고, 이를 받아들여 <러일전쟁사>에서도 병사들에게는 전투의지가 남아있는데 지휘부가 이를 배신한 것이라고 서술하였다. 다만 실제로 당시 뤼순 항의 러시아군이 어느 정도의 전투력을 유지했는지는 의문이다.
6. 결과와 평가, 기타
뤼순의 함락은 제2태평양함대의 운명도 어둡게 하였다. 뤼순항이 함락되지 않았다면 제2태평양함대는 뤼순을 거점으로 재정비, 황해의 제해권을 노려볼 수 있었으나 뤼순이 함락되었기 때문에 장기간의 항해 후의 재정비를 위해서는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야만 했고, 이는 곧 대한 해협 및 쓰시마 해협, 혼슈와 홋카이도 사이의 쓰가루 해협, 홋카이도와 사할린 사이에 있는 소오야 해협 3곳 중 1곳을 통과해야만 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자연스럽게도, 이러한 항해 루트는 뤼순항 함락 후 재정비가 끝난 연합해군에게 포착될 가능성이 높았고 결국 쓰시마 해전이라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뤼순항을 함락한 후 재정비를 끝마친 제3군은 북상하여 만주의 일본군과 합류하였고, 봉천 전투의 핵심적인 역할을 맡게 된다.
뤼순 항 공략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은 것은 당시 이 전투를 관전하던 관전무관 및 종군기자들에게는 너무 당연하게 다가왔다. 강력하게 무장된 요새에 닥돌했기 때문에 그런 피해를 입는건 당연하며, 일본군이 이상하게도 요새의 방어력을 지나치게 경시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막대한 피해를 입은 일본군 당사자들 입장에서는 너무 피해가 컸다는 책임론이 불거졌으며, 오랫동안 제3군 지휘부에 그 책임론이 뒤집어씌워졌다. 특히 노기 마레스케 육군 대장은 무능하다는 비난을 받았고, 또한 그 자신의 두 아들도 이 전투에서 전사했기에 심적인 고통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메이지 덴노에게 자결하겠다는 청원을 했으나 절대 안 된다며 반려되었고, 훗날 메이지 덴노가 붕어하자 그때서야 부부가 함께 순사하게 된다.
한편 러시아-소련은 40여년 뒤인 1945년, 만주 공세 작전 때 관동군이 주둔하던 뤼순을 점령하고서야 이를 설욕할 수 있었다.
7. 미디어믹스에서의 뤼순 공방전
시바 료타로의 언덕 위의 구름은 노기 마레스케와 참모장 이지치 고스케를 매우 부정적으로 그렸다. 그저 반자이 돌격 어택땅 꼬라박만 반복하다가 만주 사령부의 참모장 고다마 겐타로가 파견되자 280mm 포를 끌어와 단 4일 만에 뤼순을 평정했다고...이 설은 일본에서도 상당기간 통설로 통했으나 현재는 각종 반박이 제시되면서 소수설에 머물고 있다, 원래는 '기밀일러전사'라는 책에서 주장한 것인데, 대본영 쪽의 증언만으로 이루어져 객관성은 부족하다고 한다.
만화 골든 카무이의 주인공 스기모토 사이치는 러일전쟁 귀환병 출신인데, 이때 203고지에서 치명상을 입고도 러시아군을 도륙하는 모습에 모두들 그를 '''불사신 스기모토'''라고 부르게 되었다. 다만 일본의 극우물들과 달리 러일전쟁에 대해서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데, 작중의 주요 적대세력인 하나인 일본 육군 제7사단은 상부의 압박으로 뤼순 공방전에서 궤멸적인 피해를 입고 사단장인 하나자와 코지로 중장[10] 이 할복 자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것이 사단병들의 압박(...)이였다는 정부의 안일한 시각과 차별로 제7사단은 배상금도 못 받고 형편없는 토지만 받는 등 멸시 받게 되며, 견디다 못한 일부 세력이 들고 일어서서 아이누의 사금을 찾아낸 뒤 주둔지인 홋카이도를 분리독립시키려고 한다.
NHK가 2004년 다큐멘터리로 다루었다. # 러시아 측의 자료에서 흥미로운 사실이 공개되었다. 10월 26일 시점에서 이미 러시아 뤼순 주둔함대는 280mm포의 타격으로 괴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은 상태였다. 함포는 모두 요새포로 전용, 수병도 전부 육전대로 돌려졌다. 이 사실을 노기의 3군이 포로에게 확인했다고 한다.원래 계획은 공성전을 치러나가며 뤼순을 점령하고, 방비가 엄중한 203고지를 우회하려 했다. 그러나 수뇌는 함대가 괴멸상태라는 정보를 믿지 않았다. 해군 연합함대, 대본영, 메이지 덴노, 육군 참모총장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합심해 노기의 3군을 갈궈댄 결과가 203고지의 참극이었다고.
[1] 러일전쟁 때 뤼순과 다롄은 별개의 도시였다. 그러나 오늘날 다롄이 팽창하면서 뤼순은 다롄에 합처졌다.[2] 오늘날에는 다롄에 포함됨.[3] 2월 8일, 일본 해군은 제물포에서 러시아 함대를 기습 공격하여 격파하였으나 그 소식은 이때까지 뤼순 항에 도달하지 않은 상태였다.[4] 특히 5월 15일에는 2척의 구축함, 1척의 순양함을 잃는 큰 피해를 입기도 했다.[5] 러시아 전사연구소에서 제작되고 건국대학교 출판부에서 번역된 <러일전쟁사>에서는 진저우에 제대로 보루를 건설하고 준비했더라면 소수의 병력으로도 한 달은 버틸 수 있는 위치였는데 하루 만에 내주었다고 러시아군 지휘부를 비판하고 있다.[6] 이 때문에 러일전쟁 후 스테셀은 스미르노프의 고발을 받아 군사재판에서 10년형을 선고받게 된다.[7] 이때까지만 해도 일본군은 콘크리트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다고 한다.[8] 동격이었던 제4사단 사령관인 알렉산드르 포크 소장은 자신의 군을 요새 안에 배치하였기에 외곽 방어는 사실상 제7사단과 기타 방어시설 배치 병사들로 이루어졌다.[9] 당시 일본 돈으로 200만 엔. 영국의 은행 계좌 4곳에 입금하라는 요구였다고 한다.[10] 실제론 가상인물. 실제 사단장이던 오사코 나오하루는 할복하지도 않았고 천수를 누리다 죽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