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라클라바 전투
[image]
1. 개요
Battle of Balaclava (영어)
Балаклавское сражение (러시아어)
La bataille de Balaklava (프랑스어)
크림 전쟁 중이던 1854년 10월 25일, 크림 반도의 발라클라바에서 영국 육군과 제정 러시아 육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
인류 군사 역사상 손에 꼽을 정도로 유명한 "경기병 여단의 돌격" 사건으로 인해 영국, 프랑스, 오스만군이 어처구니 없이 패배한 전투이다. 희대의 막장 지휘 혼선을 보여준 "경기병 여단의 돌격" 이전에 매우 성공적이었던 "중기병 여단의 돌격"이 있었기에 더욱 그 악명이 두고두고 회자된 전투로써, '''군사 전문성'''의 중요성을 확연히 보여준 사례이기도 하다.
크림 전쟁 당시에는 연합군이나 러시아 육군이나 다들 머리 텅텅 빈 귀족 출신 장군들이 지휘권을 잡은 것과 그로 인해 결국 말단 장교와 사병들만 죽어 나갔던 것도 똑같았으나, 발라클라바 전투가 특히 유명한 이유는 죽을 것을 알면서도 묵묵히 적의 포대가 방열한 사선으로 걸어들어간 영국 육군 경기병대의 왠지 병신 같지만 멋있는 행동(...), 그리고 이 황당한 돌격 바로 전에 중기병 여단의 효과적인 돌격이 있었기에 서로 너무나도 비교되는 탓이다.
이 정도로 명백히 불합리한 명령은 일선 지휘관의 재량으로라도 거부했어야 옳지만, 당시의 군법은 이런 일선 지휘관 재량을 통한 명령 수정이 완전히 금지되어 있었고, 전문 군사 교육을 받지 않은 귀족 출신 고위 장교들은 대부분 ''까라면 무조건 깐다.'' '''"정확하게 까라는 대로만"''' 식의 매우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을 고수했다.
이 황당한 경기병 여단의 돌격 바로 전에 있었던 "중기병 여단의 돌격"을 지휘한 제임스 요크 스칼렛 경은 '''같은 세습 귀족 출신'''[1] 임에도 대학에서 ''비교적 전문적인 군사 교육''을 경험한 인물이었고, 스칼렛 경이 지휘한 이 돌격은 매우 '''성공적'''이었다는 점에서, 발라클라바 전투는 유독 비전문, 비효율적 지휘로 악명이 자자하다. 그리고 이 스칼렛 경이 지휘한 중기병 여단의 돌격 또한 다른 지휘관들의 "까라는 대로'''만''' 깐다"는 사고 방식 때문에 추가적인 주변 병력 투입을 통한 전과 확대에 실패했다. 덕분에 경기병 여단의 돌격이라는 희대의 참사를 덮고 전투를 승전으로 이끌 수는 없었다. 경기병 여단의 돌격은 어쩔 수 없었다 처도, 중기병 여단의 돌격에서 제대로 적극적으로 공세에 나섰다면 어처구니 없는 패전으로 이어지지는 않을 수 있었다.
2. 배경
러시아 제국의 팽창을 경계하던 영국과 프랑스는 원래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 제국 간의 전쟁이었던 크림 전쟁에 오스만 측에 가담했다. 해군력에서 압도적 우위를 가진 연합국은 러시아의 항구도시들을 공략하는 전략을 취했고, 그중에서도 흑해 최대의 항구도시인 세바스토폴은 최중요 목표였다.
이를 위해 1854년 9월 중순, 연합군은 영국, 프랑스, 오스만(이집트) 혼성군으로 구성된 7만의 병력을 크림 반도에 상륙시켰다. 러시아의 혹독한 겨울을 생각하면 포위공격에는 좋지 않은 시점이었지만, 오히려 이로 인해 러시아는 허를 찔렸고, 연합군은 소수에 불과했던 러시아의 저항선을 뚫고 10월 중순에는 세바스토폴을 포위하는 데 성공했다.
세바스토폴을 포위한 연합군은 이제 장기간의 포위전을 위한 보급항 확보에 나섰고, 영국군이 선택한 항구는 세바스토폴 요새에서 남동쪽으로 10여 킬로미터 떨어진 발라클라바였다. 그러나 이 지역은 연합군 포진의 끄트머리에 위치한 데다가 방어하기 좋은 위치가 아니었다. 이를 주목한 러시아군은 발라클라바를 공격하여 세바스토폴 포위망을 풀고자 했다.
전역 당시 만들어진 세바스토폴과 발라클라바 지역의 지도. 지도 상단 중앙의 검은 부분이 세바스토폴 요새, 지도 우하단에 위치한 작은 만이 발라클라바 항구이다. 그리고 항구 위 'Battaille de Balaclava'라 표시된 부분이 발라클라바 전투가 벌어진 지점이다. 굳이 전장과 세바스토폴 사이에 위치한 고지대와 비교하지 않아도 방어하기에는 그리 좋은 지점이 아니라는 것이 느껴진다.
3. 경과
3.1. 초기 배치
발라클라바 전투 당시, 영국-프랑스 연합군 사령관은 나폴레옹 전쟁 당시 웰링턴 공작 휘하에 있던 래글런 남작(본명은 피츠로이 제임스 헨리 서머셋, Baron Raglan, 1788~1855), 기병 부대의 지휘관은 조지 찰스 빙엄(George Charles Bingham, 1800~1888) 이른바 루컨 백작(Earl of Lucan)이었다.
한편 전투가 벌어진 발라클라바 지역은 사방이 고지대로 둘러싸인 저지대로, 그 한가운데 동서를 가로지르는 능선이 저지대를 남북으로 분단하고 있었다. 당연히 이 능선은 전술적으로 중요했으며, 연합군은 이를 코즈웨이 고지라 이름붙이고, 6개의 보루를 구축한 후 튀르크군과 다수의 포병을 배치했다. 고지에 의해 분단된 저지대는 각각 북쪽 계곡(North Valley)과 남쪽 계곡(South Valley)으로 불렸고, 그 서쪽 입구에는 영국군 기병대가 배치되었고, 남쪽 저지대에는 소수의 영국군 보병대가 배치되었다. 한편 전장의 최남단에 위치한 항구에는 영국 해병대가 배치되었고, 영국군 총사령부는 전장 서쪽 고지대에 위치했다.
반면 러시아군은 전장의 북쪽과 동쪽에 위치한 고지대를 점거했고, 북쪽 고지대와 양쪽 계곡의 동쪽 입구 부분에 다수의 포병대를 배치했다.
3.2. 개전
전투는 10월 25일 아침 6시경 러시아군이 동쪽으로부터 코즈웨이 고지에 공격을 가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공격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져, 8시경에는 코즈웨이 고지의 절반 이상이 러시아군에 넘어갔다. 전후, 영국군 지휘관들은 코즈웨이 고지에 배치된 투르크군이 너무 쉽게 달아났다며 책임을 투르크군에 돌렸지만, 애초에 코즈웨이 고지는 우측면(동쪽)으로부터의 공격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지형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우측면을 보호할 수 있는 보완책도 안세우고, 두 시간동안 투르크군에 아무 지원도 하지 않은 영국군 지휘부의 무능함이 더 큰 원인이라고 평가된다.
3.3. 영국군의 방어
코즈웨이 고지를 성공적으로 점령한 러시아군은 이제 남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들은 9시 경, 대규모(2~3천명)의 기병부대를 증원하여 남쪽 계곡을 공격하여, 항구와 영국군의 본진을 양단하고자 시도했다. 그제서야 대응을 시작한 래글런은 급하게 경기병대에 첫번째 명령서를 보냈는데...
이해가 가는가? 제대로 명령서를 썼다면 아래와 같았어야 한다."Cavalry to take ground to the left of the second line of redoubts occupied by the Turks"
"기병대는 튀르크군이 점유하고 있는 보루의 두번째 줄 왼쪽에 위치하라"
1. 일단 그냥 '6번 보루'라고 하면 될 것을, '튀르크군이 점유하고 있는 보루의 두 번째 줄'이라고 장황하고 모호하게 설명했다. 참고로 이 시점에는 보루 6개중 4개가 넘어가서 2개밖에 남지 않았는데 이 두 개를 가지고 두 줄이라는 허세를 부린 것이다."(러시아군이 코즈웨이 고지의 아군 포대를 탈취했기 때문에) 3번 보루로부터 포격이 날아올 수 있으니, 기병대는 6번 보루 부근의 지형을 이용해 엄폐하라"
2. '보루 부근의 지형을 잘 이용하라'라고 지휘관에게 재량을 주면 될 것을 '왼쪽에 위치해라'라고 쓸데없이 자세한 지시를 내렸다. 게다가 '왼쪽'이라는 것도 지도, 래글런의 시점, 아니면 기병대의 시점 중 무엇을 기준으로 말하는 것인지 역시 모호하다.
다행히(?) 기병대 지휘관 루컨 백작은 명령서를 '제대로' 이해해서, 기병대를 6번 보루 북쪽으로 이동시켰지만, 불과 30분 후 다음 명령서가 날아왔다.
아마도 코즈웨이 고지에서 저항하고 있는 튀르크군과 협력하여 보루들을 재탈환하라는 의도였겠지만, 이 시점에는 이미 '흔들리고 있는 튀르크군' 따위는 없고, 다들 남쪽으로 도망친 상태였다. 그러나 루컨 백작은 이 역시 '충실히' 이행했다. 중기병대만 남쪽으로 이동시킨 것이다. 같이 싸워줄 튀르크군은 이미 없음에도 불구하고."Eight squadrons of heavy Dragoons to be detached towards Balaclava to support the Turks who are wavering"
"발라클라바 방면으로 8개의 중기병 중대를 차출해서, 흔들리고 있는 튀르크군을 지원하라"
결국 소수의 영국 중기병대는 몇배의 러시아 기병대를 단독으로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제임스 요크 스칼렛(James Yorke Scarlett, 1799~1871) 장군이 이끄는 영국 중기병대는 완전히 수적 열세임에도 불구하고 과감하게 맞돌격을 감행하여, 이를 격퇴했다. 이를 본 경기병대의 장교들은 그들의 지휘관인 카디건(Cardigan, 1797~1868) 백작에게 이 기회를 놓지지말고 중기병대와 협공을 하자고 건의했지만 백작은 직속 상관인 루컨 백작의 명령이 없었다는 이유로 거부했고, 해당 장교들은 제대로 열이 받아버렸다.
전반적으로 영국군 사령부는 제일 중요한 작전목표를 명확하게 지칭하지 않는 주제에, 그 세부과정에 대해서는 부하들에게 재량을 주지 않고 지나치게 자세하게 지정하고 있고, 일선 지휘관들은 문제가 있는 명령에 대해 의문이나 반대 혹은 개선을 시도하지 않고, 명령서 그대로 고지식하게 수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보면 경기병대의 비극은 세번째 명령서에서 '''운이 없어 발생한 사고가 아니라, 오히려 문제가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음에도 운이 좋아 그럭저럭 넘어가다가 결국 터질 것이 터진 인재'''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콜린 캠벨 남작(Colin Campbell, 1792~ 1863)이 이끄는 스코틀랜드 하이랜더 여단 550명이 남쪽 계곡 내 작은 언덕에 배치되어 있었고, 이들은 러시아 공격진의 좌익을 저지하게 되는데, 병력이 워낙 열세여서 방진은커녕 고작 두 줄의 병사로 방어선을 형성할 수밖에 없었다.[2] 그러나 이 붉은색 제복의 병사들은 "후퇴는 없다. (죽을거면) 거기서 죽어라."라는 명령에 대해, "예, 꼭 그래야만 한다면 합지요."라고 대답한 뒤 러시아 기병대를 갈아버리며 정말 해당 위치를 고수해냈고, 훗날 이들은 씬 레드 라인이라 불리게 된다.
[image]
러시아군의 공격과 영국군의 방어
3.4. 경기병 여단의 돌격
기병대의 공격이 돈좌되자, 러시아군은 일단 점령한 코즈웨이 고지에서 병력을 재배치하며 재정비를 실시했다. 그러나 이를 본진에서 관측하던 총지휘관 래글런 남작은 이를 러시아군이 영국군으로부터 탈취한 대포들을 후방으로 옮기는 모습으로 오인했다. 빼앗긴 대포들은 이후 연합군의 발라클라바 요새 포위망을 노릴 수 있고, 무엇보다도 대포를 빼앗긴다는 것은 자신이 이 전투에서 패배했다고 판정되는 주요요인이 되므로 그는 이를 심각하게 우려했다.
결국 래글런 남작은 "러시아군에게 빼앗긴 고지에 영국군 포 9문이 남겨져 있다. 이 포들을 러시아군이 가져가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가능하면 고지도 회복할 것"을 기병지휘관에게 지시하려 했다.
그러나 이 때 사령부에서 급하게 갈겨 쓰느라 마지막 문장이 어긋난 세 번째 명령서는 모든 비극의 시작이 되었다.
- 래글런 남작이 원래 전하려 했던 내용
Cavalry to advance and take advantage of any opportunity to recover the Heights. They will be supported by infantry, '''which has been ordered to advance on two fronts.'''
기병대는 (코즈웨이) 고지로 진격하여 탈환하라. '''이미 두 개의 전선을 형성하라는 명령을 받은 보병대가 지원할 것이다.'''
- 잘못 전달된 내용
원문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to 부정사 하나와 점 하나 잘못 찍어 이 사태가 터졌다. 두 개의 전선을 형성한 '''보병의 지원을 받으며 진격하라'''는 것이 '''두 개의 전선을 형성해 진격하라''', 보병이 지원할 것이다로 전달된 것.[3]Cavalry to advance and take advantage of any opportunity to recover the Heights. They will be supported by infantry, '''which has been ordered. Advance on two fronts.'''
기병대는 (코즈웨이) 고지로 진격하여 탈환하라. '''보병대가 명령 받은대로 지원할 것이다. 두 개의 전선으로 진격하라.'''
하지만 명령서를 받은 기병대의 시야에는 공격 대상일 수 있는 고지가 오른쪽, 전방, 왼쪽 등 여러 곳이었다. 당최 어디를 공격하라는 것인지 알 수 없던 기병대장 루컨 백작은 공격 명령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한편 사령부에서는 공격을 재촉하기 위해 네번째 명령서를 작성했다.
이 명령서를 전달할 장교는 하필 성격이 급하기로 유명한 루이스 에드워드 놀란(Louis Edward Nolan,1818~1854) 대위[6] 이었고, 참모장은 놀란에게 구두로 "루컨 경에게 즉시 수행하라고 해."라며 강조했다."10:45. Lord Raglan wishes the cavalry to advance rapidly to the front – follow the enemy and try to prevent the enemy carrying away the guns – Troop Horse Artillery may accompany – French cavalry is on your left. R Airey. Immediate"
"10시 45분, (총사령관) 래글런 경은 기병대가 신속히 진격하기를 바라신다. (후퇴하는)[4]
적을 추격하고 (그들이) 대포를 운반하는 것을 저지하라. (되찾은 대포를 운반하기 위해) 기병포대가 뒤따를 것이다. 프랑스 기병대는 너희들 좌측에 있다. R. 에어리.[5] (추신) 즉시 (시행하라)."
그러나 네번째 명령서 역시 정확한 대포의 위치에 대한 설명이 없었기에, 루컨 경은 어물쩍거리고 있었고, 명령서를 전달한 놀란은 "사령부에서 즉시 시행하라고 했단 말입니다.", "(즉시) 공격하십시오."라며 루컨 경을 다그쳤다. 그리고 "도대체 뭘 공격하라고? 뭔 대포?"라는 루컨 경의 반응에 화를 참지 못한 놀란은[7] '''탈환하라는 대포가 있는 남동쪽이 아니라 무작정 동쪽을 향해 팔을 휘두르며 ''' "저기에 목표가 있습니다. 대포 말입니다."라고 말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동쪽 방향으로 유일하게 보이는 포병대는 U자 형태로 포진해 있는 러시아 포병대의 한가운데였고, 그 포켓 한가운데로 들어가라는 것은 대놓고 죽으라는 소리였으므로 루컨 백작은 놀란 대위에게 해명을 요구해야 했지만, 놀란 대위가 너무 무례하게 나오자 그는 대화를 포기하고 카디건 백작을 찾아갔다. 루컨 백작의 설명을 들은 카디건 백작 역시 이 명령에 대해 황당함을 느끼고, "한마디로 (3면에 배치된) 러시아 보병대와 포병대의 화망을 뚫고 들어가 대포를 가져오라고요?"라고 항변했다.
그러나 루컨 백작은 이 이해할 수 없는 명령에 대해 상관인 래글런 경에게 문의하거나 부하인 카디건 백작, 조지 패짓 경(George Paget, 1818~1880)[8] 과 더 이상 논의하지 않았다. 그는 "(말도 안되는 것은) 나도 알지만, 래글런 경은 명령했고, 우리는 따라야 하네."라며 그대로 진격 명령을 내렸고, 700여기의 영국 기병대는 영문도 모른채 러시아 포병대가 버티고 있는 계곡으로 진군했다.
[image]
영국군 경기병대의 돌격경로. 원래 래글런 남작이 내린 명령의 대포는 지도 중앙에 회색 육각형으로 표시된 3번 보루에 있었다.
카디건 백작과 루컨 백작은 래글런 남작의 의도를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에 이 황당한 돌격을 전속 돌진이 아니라 저속으로 접근하는 "Trot"으로 수행하도록 했다.[9] 더욱이 놀란 대위는 이때 래글런 남작의 의도를 제대로 설명하기는 커녕, '''고함을 지르며 선두로 나서서 돌격하다 순식간에 전사하고 만다. 따라서 이 시점에서 명령을 고칠 기회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대체 놀란 대위가 왜 그랬는지는 의문으로 남았는데, 이에 대해서는 후술할 두 가지 설이 있다.
[image]
경기병대의 위엄찬 돌격 과정. 5개 중대가 2줄 대형을 유지한 상태로 삼면에서 200발의 포격과 총격을 맞아가며, 7분동안 2km 남짓을 돌격했다. 그리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러시아 카자크 기병대의 칼질.
그런데, 카디건 경에게 "명령은 무조건 따라야 한다"라며 경기병대를 진격시킨, 루컨 경은 막상 자신이 중기병대를 이끌고 경기병대를 뒤따라갈 시점이 되자, 이대로 가면 전멸할 것이 뻔하니 병력을 아껴야 한다면서 중기병대와 함께 철수해 버린다.
한편 포화를 뚫고 러시아군의 중앙포대에 도착한 경기병대는 엄청난 피해를 입으면서도 대포를 확보하는데 성공하고 심지어 러시아 기병대까지 물리쳤지만, 뒤따라오기로 약속한 아군 중기병대와 기마포병대가 안보인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반면 영국 경기병대의 맹렬한 돌격에 당황해 후퇴하던 러시아군도 적군은 소수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고 반격을 시도했다.
마침내 경기병대는 그토록 큰 희생을 치루며 점령한 러시아 포대를 포기하고 후퇴한다. 그러나 후퇴도 쉽지 않았다. 러시아 기병들이 퇴로를 차단하고, 포병과 보병들에 의해 화망이 다시 펼쳐진 것이다. 이를 보다 못한 프랑스 육군이 러시아 육군 포대의 우측을 습격한 덕분에 그나마 살아남을 수 있었다.[10] 생존자들은 조지 캐스카트 (George Cathcart,1794~1854) 장군이 이끄는 육군 제11드라군대대와 모리스 대위가 이끄는 육군 제17경기병연대, 그리고 스칼렛 장군이 이끄는 중기병연대의 부대원들이었는데, 이들은 이제 완전히 대열이 무너진 상태에서도 어떻게든 한덩어리로 뭉쳐 죽기살기 식으로 맞은 편에서 달려오는 러시아 육군 기병대를 박살내고 간신히 살아 돌아올 수 있었다. 이 희대의 돌격은 불과 20분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리고 지원을 약속한 루컨 경에게 통수를 맞은 카디건 경, 래글런 경으로부터 말도 안되는 명령을 받았다고 생각한 루컨 경과, 카디건 경의 정신나간 돌격을 지켜본 래글런 경은 서로 신나게 싸워대기 시작했고, 이 싸움은 결국 이들이 죽을 때까지 끝나지 않았다.
4. 전투 결과
이 전투에서 살아남은 영국 육군 기병들은 700여 명 중 194명이었고, 그 중 상처가 악화되어 죽은 사람들도 많았다. 제11드라군대대에서는 14명, 제17경기병대대에서는 17명이 살아남았을 정도로 커다란 팀킬이었으나, 이 지휘관들은 그 뒤로도 군직을 유지했다고 한다. 재판이 열렸지만 어디까지나 형식상이었고,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다.
총지휘관 래글런 남작은 '''"전쟁에선 이런 일도 일어날 수 있다."'''라는 뻔뻔한 말을 남겼다. 그에게는 다행히도, 발라클라바에서 고무된 러시아군 지휘관들이 열흘 후 인커먼 전투에서 반대로 영국군 포병과 보병진에 무모한 돌격을 감행하며 그에 못지않게 무능함을 입증하는 덕분에[11] 대승을 거두고 체면치레를 했다. 하지만 1년도 안가 1855년 전선에서 이질과 우울증(...)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66세로 사망했다.
기병대 총지휘관 루컨 백작은, 이후 육군 원수와 정치직까지 골고루 오르며 잘 먹고 잘 살다가 1888년까지 88세 장수를 누렸다. 이 전투에 관련한 인물 가운데 가장 장수한 셈이다. 발라클라바의 수치라고 정적들이 비웃는 것에 대하여 되려 어쩔 수 없었다며 자기합리화만 외쳤다.
경기병대 지휘관 카디건 백작은, 그와 친분이 있었던 러시아 지휘관이 그를 죽이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는 통에 무사히 귀환했다. 그해 말 건강이 나빠져 영국으로 돌아온 카디건은 의외의 환영을 받았다. 경기병대의 돌격은 지휘관으로써는 분명 어리석은 일이었으나, 동시에 기병으로써는 정말 용감한 행위이기도 했고, 어쨌든 그는 명령을 받는 입장이었는데다가 관련자 중 가장 먼저 귀국했기 때문에 남들보다 먼저 회고록을 쓰면서 여론 조성(...)에 있어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했다. 당시 그가 전장에서 기병대에 입혔던 복장은 '카디건'이라 불리며 본국에서 유행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사건 관계자들의 귀국이 이어지고 조사와 연구가 진행되면서 명성에 큰 흠집이 생겼다. 1868년에 뇌졸중으로 말에서 떨어져 사망했다.
중기병대 지휘관 스칼렛 장군은 경기병대의 돌격에 대해서는 책임이 없기에 비난받지 않았고, 적군 기병대를 무찌른 공로로 기사 작위를 받으며 찬사를 받았다. 1871년에 72세로 사망.
4 경기병중대 지휘관 패짓 경은 '기왕 죽게 된 것, 멋있게 죽겠어'라며, 시가를 피면서 돌격하는 기행을 펼쳤으나 다행히도 살아남았고, 이로 인해(...) 명성을 누렸다. 패짓 역시 기사작위를 받았고, 1880년 62세로 사망했다.
그러나 조지 캐스카트 장군은 이 전투가 끝난지 보름도 안돼 인커먼 전투에 참전했다가 전사했다.
사건의 장본인 중 한 명인 놀란 대위는 진격을 개시한 직후 갑자기 전열의 맨 앞으로 달려가다 포탄을 맞고 36세로 전사했다. 자살성 돌격이었거나, 뒤늦게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고 진격을 말리려다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모리스 대위는 이후 소령으로 진급해 인도 주둔군으로 전출했으나 거기서 열병에 걸려 38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발라클라바 전투의 영향으로, 크림 전쟁 종전 후 영국 육군은 매관매직(purchase system) 제도를 폐지했다. 그 때까지 육군 장교들은 기본적인 기간만 근무하면 그 후에는 상위 계급을 돈을 주고 사서 진급해야 했는데, 장교 임관이나 승진이 군사 훈련을 받고 리더쉽 자질을 갖춘 전문가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냥 돈 많은 집 아들에게 주어졌던 것이다.[12] 이런 매관매직이 서구에서 영국에만 있었던 것도 아니고, 또 당시 엄연히 사회 계층이 나누어진 사회에서는 어느 정도 합리적인 점도 있는 제도인 것은 맞았으나[13] , 확실히 이런 매관매직 제도하에서는 평균적인 지휘관의 능력이 확 떨어진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프로이센 같은 전통적인 군사 강국에서는 한 번도 매관매직에 의해 장교를 임명한 적이 없었고, 프랑스 대혁명 직후 프랑스가 개전 초기 연전연승할 수 있었던 것도 출생 신분이나 소유 재산의 대소 여부에 상관없이 그저 실력 있는 사람을 육군 장교로 임관시키고 승진시킨 것에 힘입은 바가 컸다.[14] 그에 비해 영국 육군은 구시대의 잔재인 매관매직이라는 악습을 태연하게 이어갔고, 게다가 나폴레옹 시대 이후에는 변변한 전투를 치를 기회조차도 별로 없었으니, 그 지휘관들이 아무런 전문 지식이나 경험도 없이 그저 신사인 척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재주를 갖추지 못한 것이 당연했다. 이는 동 시기의 영국 해군이 밑바닥인 사관후보생에서 몇 년간의 의무적인 함정 실습 기간을 거친 뒤, 시험을 통과해 위관급 장교로 임관, 이후 상부의 근무평가와 추천[15] 등 심사를 거쳐야 함장이 될 수 있었던, 상대적으로 실력 위주의 인사정책을 도입한 것에 비해서도 뒤떨어져 있었다. [16][17] 하지만 그로부터 수십년 후에 벌어진 보어 전쟁에서도 영국군 지휘관들의 무능은 여전히 도마에 올랐으니, 개선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린 셈이다.
5. 기타
- 크림 전쟁의 가혹한 환경 때문에 발라클라바 지역에서 의류가 2가지나 나왔다. 하나는 영국 병사들의 얼굴 방한 도구인 발라클라바, 그리고 상단에서 언급된 카디건 백작 제임스 토머스 브루데넬에서 이름을 따온 카디건. 래글런은 래글런 남작이 나폴레옹 전쟁 중 워털루 전투에서 안타깝게도 팔을 잃으며 개발되었다.
- 카디건의 발명가라는 이야기도 있는 카디건 백작은 매관매직과 인맥으로 해당 지위에 오른 인물로 멀쩡하게 살아돌아가서 영웅 취급을 받았다. 그리 유능하지 않아도 적어도 카디건 백작은 이 전투가 미친 짓이라는 것을 느끼고 막고자 노력했기 때문이다. 카디건 백작의 취미중 하나가 부하들에게 자기 돈으로 제복을 지급해 입히는 것이었다. 그중 대표적인 옷이 카디건으로, 대부분의 장병들은 전투복 아래에 이 옷을 받쳐 입었다. 이후 경기병대의 돌격이 유명해지면서, 이 옷도 같이 유명해졌다. 어차피 당시 영국 육해군은 지휘관이 부대 운영에 자비를 들여 피복을 회려하게 꾸미거나 하는 등의 일이 흔했다. 카디건 백작은 무사히 은퇴하여 자사전도 쓰고 잘 살았지만 1868년 말을 타고 산책하다가 낙마하여 머리를 부딪쳐 죽었다.
- 1968년 영화인 경기병대의 돌격에서 이 돌격의 과정이 잘 묘사되어있다.
연락 담당을 맡았던 놀란 대위가 장교들의 태도에 열받은 나머지 잘못된 돌격 목표를 가리켜버리는 만행과 같이 가다 실수했음을 깨닫고 앞으로 나아가 말릴려고 했으나 결국 유탄에 사망하는 장면이 나온다.
결국 경기병대는 그대로 돌격해버리고 참혹한 광경이 펼쳐지는 가운데 설상가상으로 러시아 기병대까지 맞돌격에 들어가면서 대혈투가 벌어지고 소수의 생존자들만이 생환한다.
- 루컨과 카디건은 처남-매제 관계였다. 루컨의 매제가 카디건. 하지만 두 사람은 같은 장소에서 대화도 나누지 않을 정도로 사이가 나빴다고 한다.
- 윗대가리들을 잘못 만난 군인들에게 닥친 비극이지만, 영국 시인 알프레드 테니슨(Alfred Tennyson, 1809~1892)은 <경기병대의 돌격>이라는 시를 써 용기를 기리고 그들을 추모했다. 이 시는 90년 후 레이테 만 해전에서 윌리엄 홀시의 뚜껑이 열리게 만든, 세계 해전사에 길이 남은 시이기도 하다.
- 디스커버리 채널에서 발라클라바 전투 당시 경기병대의 사상자 수가 실제보다 과장되었다는 내용[20] 을 담은 다큐멘터리가 나온 적이 있다. 러시아에까지 가서 유물 발굴까지 한 뒤, 이 다큐멘터리에서 중점적으로 다룬 것은 첫째 오스만 육군은 당대의 인식처럼 무능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앞서 대포가 탈취된 사건만 해도 영국 육군의 시각으로는 러시아 육군이 공격하자마자 무너진 것으로 보도되었지만 당시의 실제 기록들이나 유물 측정 등으로 봐서 적어도 3시간 이상 오스만 육군은 외부의 도움 없이 버텼고 영국 육군은 방심과 무지로 인해서 근처에 있음에도 늦게 출동하였다는 것. 하필이면 무너질 때 도착한 영국 육군은 오스만 육군이 고전하는 것을 보고 적반하장으로 비겁성을 개탄해서 이후 세바스토폴 점령을 제외하면 오스만 육군을 전력에 투입하지 않고 노동부대로만 이용했다. 이것이 영국군에게 더 큰 피해를 줬는데 크림 지역을 다스리며 지리를 잘 알던 오스만 측이 이런 영국에게 이를 갈며 '그래 우린 후방에서 일이나 할 테니 잘난 네놈들끼리 알아서 싸워봐라' 라며 지리 정보에 협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후대 영국 역사학자들은 영국군의 많은 피가 흐른 삽질이 동맹군을 우습게 보던 자업자득이라고 평가했다.
- 아이언 메이든의 곡 The Trooper가 발라클라바 전투를 다루고 있다.
- 다나카 요시키 소설인 월식도의 마물 주인공인 에드워드 니담이 발라클라바 전투에 참전하여 살아남았다. 한번 찌르면 10군대에서 반격하는 총검이 날아와 꽂혔다고 회고하는데 여하튼 여기서 살아남은 것처럼 전투력이 쎄다. 그러나 극중 3년이 지나서도 후유증에 시달려 <경기병대의 돌격> 낭독회 도중 발작을 일으키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