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 덴노

 





'''
메이지 천황
明治天皇
'''
<colbgcolor=#AF001F><colcolor=#C0A73F> '''출생'''
1852년 11월 3일
야마시로국 교토 카미교구
교토교엔 (京都御苑)
'''사망'''
1912년 7월 29일 (59세)
도쿄부 도쿄시 간다구 고쿄 메이지 궁전
'''능묘'''
교토부 교토시 후시미구
후시미모모야마릉(伏見桃山陵)
'''재위'''
1867년 1월 30일 ~ 1912년 7월 29일
(45년 192일)
'''즉위'''
1868년 10월 12일 (교토고쇼)
'''장례'''
1912년 9월 13일 (도쿄 고쿄)
'''연호'''
(めい((메이지, 명치)
'''서명'''
[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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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AF001F><colcolor=#C0A73F> ''''''
(むつ(ひと(무쓰히토)[22]
'''어칭호'''
祐宮(さちのみや(사치노미야)
'''신체'''
162cm[23]
'''부모'''
부황 고메이 덴노, 모친 나카야마 요시코[24]
'''형제'''
2남 4녀 중 셋째
'''정실'''
쇼켄 황후
'''측실'''
야나기하라 나루코
'''자녀'''
5남 10녀
'''십이지'''
쥐띠 (임자년)

1. 개요
2. 출생과 어린 시절
3. 재위 기간
3.1. 막부 말기의 혼란과 대정봉환/왕정 복고의 대호령
3.3. 사망
3.4. 천황으로서의 역할
4. 성격과 특징
5. 가족관계
6.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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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 제국의 제122대 천황.
휘는 무쓰히토(睦仁, 목인). 메이지(明治, 명치)라는 제호는 그가 천황으로 재위했을 때 사용한 연호다. 일본 근대사에서 가장 뛰어난 명군(明君)으로 꼽힌다고 한다.[1] 같은 섬나라인 데다 치세가 겹치고, 본격적인 제국주의 군주였다는 점에서 대영제국빅토리아 여왕과 많이 비교되기도 한다. 일본 우익 계열에서는 아예 메이지 대제(大帝), 무쓰히토 대제, 메이지 성제(聖帝) 라고도 부른다.
연호에 대해서는 메이지 시대 문서 참고.

2. 출생과 어린 시절


무쓰히토의 어린 시절의 궁호는 사치노미야(祐宮). 1852년 11월 3일, 고메이 덴노나카야마 요시코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고메이 덴노의 차남이다. 외조부인 나카야마 타다야쓰의 저택에서 태어났고 탄생 후 4년 동안 외가에서 자랐다. 고메이 덴노는 2남 4녀를 두었으나 이 중 무쓰히토를 제외한 자식들은 모두 유아기 때 요절해 죽었고 덕분에 측실 소생이면서 차남이었던 무쓰히토는 후계자가 될 수 있었다. 고메이 덴노의 정실인 에이쇼 황후는 아들을 낳지 못해 무쓰히토를 양자로 입적시켰다. 1860년에 저군(황태자)에 책봉되고 친왕선하(親王宣下)를 받아 '무쓰히토'라는 이름을 얻게 되고, 1867년 아버지 고메이 덴노가 급사하자 15세의 나이로 즉위했다.

3. 재위 기간



3.1. 막부 말기의 혼란과 대정봉환/왕정 복고의 대호령


무쓰히토가 즉위하기 전 일본은 대단히 혼란한 상황이었는데 쿠로후네 사건 이후 반강제로 쇄국 정책이 폐지되고 미국을 포함한 여러 서양 국가와의 불평등조약 체결, 금과 은의 해외 유출로 인한 경제적 혼란이 겹쳐 막부의 권위가 실추되고 서양에 대한 거부감이 커졌다. 이에 서양 세력을 몰아내자는 양이운동이 일어나고 존황양이(尊皇攘夷)[2]를 내세운 조슈 번과 공무합체[3]를 내새운 사쓰마 번 등이 에도 막부와 대립하면서, 도막파 운동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사쓰에이 전쟁을 겪은 사쓰마 번은 양이론이 비현실적임을 인지하고 영국과 교류하기 시작했고, 시모노세키 전쟁에서 참패한 조슈 번 역시 막부의 동의도 받지 않은 채 시모노세키 항을 개항하는 등 서양을 배워야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배경 속에 1867년 1월 30일 무쓰히토가 일본 제122대 천황으로 즉위했다. 당시 사츠마 번은 조슈 번과 힘을 합쳐 막부를 무력으로 제압할 생각(토막[4], 討幕)이었으나 토사 번의 고토 쇼지로가 사카모토 료마로부터 대정봉환론을 듣고 이를 채용할 것을 토사 번 간부들에게 제안했고 사츠마 번의 코마츠 타테와키가 동의하여 두 번 사이에 삿토맹약이 체결된다. 이후 토사 번은 대정봉환에 대한 의견을 막부 쇼군인 도쿠가와 요시노부에게 알린다. 결국 1867년 11월 9일, 막부의 쇼군도쿠가와 요시노부대정봉환(大政奉還)[5]을 통해 '대정(大政)'을 조정에 반납하고 천황이 이를 칙허함으로써 공식적으로 에도 막부가 막을 내리게 된다.
요시노부는 정권을 반납했지만 조정에서 여전히 대부분의 정무 처리(정사에 관한 모든 전권)를 요시노부에 위임했고 의회에 옛 막부 세력을 심어놓으며 정권을 장악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사쓰마 번은 오와리 번, 토사 번, 후쿠이 번, 히로시마 번을 동원해 교토 황궁을 포위하고 메이지 덴노로 하여금 왕정복고령을 내리게 하였고 신정부 수립을 선언했으며 1868년 1월 3일, 메이지 덴노로 왕정복고 대호령[6]을 발표한다. 동시에 요시노부에 대해 관직의 박탈과 함께 영지를 반납하라는 선언이 내려진다. 결국 막부 세력은 보신 전쟁을 일으켜 저항했으나 신정부 군에게 패배하고 완전히 사라진다. 이 전쟁을 배경으로 한 영화가 바로 라스트 사무라이다.

3.2. 메이지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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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2년, 20세 때의 메이지 덴노. 소쿠타이류에이노칸으로 이루어진 귀족 소복의 정장 차림이다.
1873년, 궁정 개혁 후의 사진. 이각모(Bicorne)와 서양식 제복(대원수 군복)을 착용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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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메이지 덴노가 도쿠가와 가문의 저택을 방문하여 산책할 때 '''몰래''' 찍은 사진으로 알려져 있다.
중년기의 모습
1868년 3월 14일, 메이지 덴노는 "5개 조의 서문(五箇条の御誓文)"을 발표하고 음력 9월 8일 연호를 게이오(慶応)에서 '''메이지(明治)'''로 바꾼다. 10월 13일엔 에도(江戸)에 행차했다가 칙서를 내려 명칭을 도쿄(東京)로 바꾸었다.[7] 그리고 이듬 해인 1869년에 메이지 정부도 그곳에 자리를 잡으며 도쿄가 새로운 수도가 되었고 에도 성이 황거가 되었다. 아래에 나오는 내용은 메이지 덴노가 아닌 정부가 주도한 것이 대부분으로 메이지 덴노는 '''칙서만 내린 것'''에 가깝다고 보면 된다.
또한 그해에 고셋케 중 하나인 이치죠 가문의 딸 이치죠 마사코황후로 책봉했다. 이때 마사코는 하루코(美子)로 개명했다. 또한 하루코 황후는 1849년 생으로 1852년 생인 메이지 덴노보다 3살 위였는데, 당시 일본의 풍속에서 3살 연상은 좋지 않다 하여 하루코 황후가 1850년 생인 것으로 고쳤다.
1870년 신토가 국교로 지정되고, 1871년부턴 '''폐번치현(廢藩置縣)'''이 실시되어 각 번주가 다스리던 지역이 천황 직할로 바뀐다. 1872년부터는 서구식 학제가 공표된다. 한편 이 시기에 민권 운동이 일어나면서 사쓰마, 조슈 번 출신이 정권을 휘두른다는 비판이 거세지고 헌정과 의회 개설 요구가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정부 내분으로 이어졌다. 이에 1875년 4월 메이지 천황의 조칙을 통해 입헌정치 체제를 점차 도입할 것이 발표되었다. 1881년에는 국회 개설 칙유가 내려지고 화족령 도입, 시정촌제 마련 등이 마련된다. 1885년 의원내각제가 도입되어 초대 내각총리대신으로 이토 히로부미가 취임했다. 이후 이토 히로부미는 1888년부터 추밀원의 의장으로서 헌법 초안을 마련했고 1889년 2월 11일, 공식적으로 메이지 천황이 대일본제국 헌법[8] 조칙을 발표한다. 1890년엔 교육칙어를 발표[9]하고 동시에 귀족원 의원이 개설되었다.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청국에 대한 선전조칙을 내렸다.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함으로 대만을 얻고 1902년에는 영일동맹을 체결했다. 1904년 러일전쟁[10]이 발발하고 이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했다.[11] 그 덕분에 대한제국(조선반도) 에 대한 지배(실효권)를 인정받고 남사할린(가라후토)을 얻었으나 막대한 군비와 사상자가 발생했고 배상금도 받지 못해 국내에선 불만이 폭발하였다. 어찌 됐건 러일전쟁에서의 승리로 세계열강으로 인정받기 시작했고 1911년 과거 구미와 맺었던 불평등 조약을 개정함으로써(조약개정, 条約改正) 메이지 천황 개인에 대한 숭배와 신격화가 더욱 더 공고해졌다고 한다.

3.3.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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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11월에 육군 대연습을 참관하며 보고를 받는 중인 메이지 덴노
Isabel Weld Perkins에 의해 1914년 그려진 '''초상화'''
기록에 의하면 메이지 덴노는 나이를 먹어가면서 점차 채식보다는 육식을 즐겼고, 거기에 와인을 곁들이는 서양식 생활을 주로 했다고 한다. 하지만 매번 먹는 식사량에 비해 승마를 제외한 운동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기 때문에 말년에 가면 비만인 체형이었고, 그로 인해 성인병의 일종인 당뇨까지 앓게 되었다.
결국, 1912년 7월 29일 22시 43분 메이지 덴노는 당뇨가 악화되어 요독증으로 인해 만 59세 나이로 사망했다. 기존의 일본을 완전히 새롭게 바꾸었던 메이지 시대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12] 일본 정부는 천황의 사망일시를 7월 30일 0시 43분이라고 늦춰 발표했는데, 당시 황실전범에 따르면 황태자가 선황 사망 당일 즉위해야 했기 때문에다. 거의 자정이 다가온 무렵에 사망하여 도저히 당일 즉위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이튿날 0시를 넘겨 사망했다고 발표함으로써 즉위할 시간을 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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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덴노의 대상례(大喪礼)
9월 13일 도쿄 아오야마에서 대상례가 거행되고 시신은 교토로 운구되어 후시미 모모야마 릉(伏見桃山陵)에 매장되었다. 도쿄가 아닌 교토에 매장된 이유는 도쿄로 천도한 후에도 메이지 천황은 교토를 그리워하여 자신을 거기에 묻을 것을 유언했기 때문. 이후 다이쇼 덴노쇼와 덴노는 모두 교토가 아닌 도쿄의 하치오지에 묻혔다.

3.4. 천황으로서의 역할


위에서 언급된 사건으로 일본은 명목상 천황 중심의 국가로 변모했으나 오랫동안 천황에게 실권이 없던 탓에 대부분의 백성들은 천황이 주권자라는 인식이 없었다. 정부는 천황을 중심으로 한 국민 통합, 그리고 이를 통해 국민들이 체제에 순응하길 원했다. 그래서 메이지 신정부는 법적으로 천황의 절대적인 권위와 신성함을 인정하고 1870년, 신도의 국교화와 제정일치 선언과 함께 태양의 여신의 직계자손인 천황을 신격화하기 시작한다.[13] 1871년에는 각 번주가 다스리던 지방이 천황이 직할하도록 되었고 1882년부턴 일본의 모든 군대가 천황의 군대로 규정된다.
이러한 작업의 일환으로 메이지 덴노는 전국 순행을 자주 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지방 순행을 자주 하면서 국민 통합의 차원에서의 역할을 하였고 지방의 유력자들을 격려하여 그들이 민중 사이에서 권위를 갖게 하는 역할을 했다. 또 덕치 개념을 이용해 순행 중 재해를 입었거나 빈공한 사람들을 볼 경우 금전을 하사하거나 노인, 효자를 표창하며 국민들이 체제에 순응하게끔 하며, 서양식 군복에 칼을 차고 수염을 기른 천황의 사진이나 초상화가 전국에 유포되기도 했다. 아무튼 이 덕분에 일본인들 사이에서 천황이 일본의 주권자이자 신성불가침한 존재라는 인식이 자리 잡게 되고 결과적으로 천황 중심으로 국민통합을 이루는 데 성공했다.
정치에는 거의 개입하지 않았으나 '중재자'로서 역할을 하였다고 알려진다. <일본 근현대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책에 따르면, 오쿠보 도시미치 내무경 사후에 일본 지도부 사이에 벌어진 혼란을 수습하는 데 천황이 개입했다고 하며 정한론이 대두될 때 사이고 다카모리의 조선 파견을 중지시키는 개입을 하기도 했다.[14] 또 1893년 제국의회에서 예산안을 둘러싸고 불화가 생기자 이토 히로부미 총리가 메이지 덴노에게 중재를 요청했고 천황은 궁정 예산의 일부를 내놓고 관리의 봉급 일부를 납부해 예산을 보충하도록 조치시켰고 이 외에도 의회 초기에 대립이 생길 때 종종 조칙을 내려 중재시킨 적이 있다고 한다.[15]
대일본제국 헌법 제1장 제1조에 의하면 "대일본제국은 만세일계의 천황이 이를 통치한다."고 규정되어 있으나 정작 정치에 크게 개입하진 않았다. 사실 메이지 시대의 총리 중 한 명인 이토 히로부미는 천황이 정치에 개입하는 것을 최대한 막으려고 했고 천황 본인도 정치에 관심이 별로 없었는지 신하들이 알아서 개혁을 추진하도록 묵인했기 때문에, 일본의 개혁개방 과정에서 능력 있는 신하들은 메이지 덴노의 방해를 받지 않은 채 개혁을 주도할 수 있었고, 그 결과 일본은 신속한 개혁을 거쳐 근대 국가로 발전할 수 있었다. 결과만 놓고 보면 정치에 개입하지 않은 게 오히려 도움이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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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실 부인 쇼켄 황후의 독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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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덴노 부처의 그림
메이지 덴노의 정실 쇼켄 황후(하루코). 일본 황실 최초로 서양식 의복을 입은 황후이다. 복장뿐 아니라 역할 면에서도, 이전까지의 황후들과 달리 서구적&근대적 황후, 퍼스트레이디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사진 속의 책은, 쇼켄 황후의 서양식 옷차림과는 대조적으로 전통적인 여성의 부덕(婦德)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4. 성격과 특징


  • 의외로 서양 문물에 부정적이었다. 한학자 모토다 나가자네(元田永孚)나 사사키 다카유키(佐々木高行)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는데, 특히 교육에선 유학을 중심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서구식 학제를 도입하려는 모리 아리노리(森有礼, 1847~1889)가 문부성의 고문에 임명되자 병을 핑계로 2개월간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최종 승인을 하나도 하지 않았다는 의미). 하지만 이토 히로부미의 적절한 설득으로 입헌군주제 등에 반대하진 않게 되었고, 1886년부터는 궁중에서 양장 차림을 허락하였다. 대신 그의 이런 성향은 《군인칙유(軍人勅諭)》(1881), 《교육칙어(敎育勅語)》(1890) 같은 봉건적 요소가 가득한 표어들을 만드는 데 영향을 크게 끼쳤다. 물론 본질적으로는 일본 개방의 중심이던 사츠마, 조슈 무사단의 성향 자체가 보수 개혁파였기 때문이지만. 아들인 다이쇼 덴노는 정반대로 서양 문물에 매우 긍정적이었고 낮은 성적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어 학습에는 열중했는데, 메이지 덴노는 이런 아들을 질책했다고 한다.
  • 어렸을 때부터 대인기피증이 상당했다. 그래서인지 자기 자식들조차 잘 만나지 않았다. 그래서 자녀들의 혼인날 처음 만났다(...)는 농담 같은 소문도 있다. 심지어 손자들에게도 정을 주지 않았는데 이들이 문안인사를 드리러 오면 군복 차림으로 앉아 고개를 끄덕인 후 돌려보냈다고 한다.
  • 승마[16]와카를 좋아했고 10만여 수의 시가를 남겼다. 또 도검 애호가로 여러 명검을 수집했으며, 그중 일부는 현재 도쿄 국립 박물관에 안치되어 있다. 실제로 야마다 아사에몬이 바친 일본도 코류 카게미츠를 패용했다고 한다. 남북조시대의 충신 구스노키 마사시게의 검으로 전해지는 물건인데, 마사시게가 일본 제국에서 덴노에 대한 충성의 상징으로 널리 사용된 것을 생각하면 정치적 상징성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 생전에 여자와 유흥을 매우 좋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7] 또한 식욕이 대단하여 시간이 지날수록 몸이 비대해졌고 결국 당뇨병에 걸리게 된다.
  • 다이쇼 덴노가 어렸을 때, 그의 건강 상태나 수업 진도를 확인하는 등 관심을 보이기는 했으나 다이쇼 덴노의 경솔한 말버릇을 질책했고, 거의 만나지도 않았으며 종종 만날 때도 대화를 자주 나누지 않았다고 한다.
  • 메이지 천황에 관한 공식적인 기록으로는 《메이지 천황기》가 있다. 쉽게 말하면 그의 실록인 셈인데, 1914년에 처음 편찬할 때는 우리가 아는 실록대로 그 시대의 국사를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천황의 언행 등을 기록하려 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부총재였던 가네코가 이에 반대하여 1920년, 다이쇼 천황의 재가를 받아 메이지 시대의 국사를 기록하는 것으로 방침을 바꾼다. 이후 1930년에 작업을 시작하여 3년 뒤인 1933년에 본기 250권, 화권 1권으로 완성되어 쇼와 천황에게 봉헌되었다.

5. 가족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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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운데 남자가 메이지 덴노, 의자에 앉아 있는 여자가 정실 쇼켄 황후(하루코), 오른쪽 남자는 아들 요시히토 황태자, 왼쪽의 서 있는 여자는 며느리 사다코 황태자비, 나머지 4명의 작은 여자아이들은 공주들.
정실 쇼켄 황후는 자녀를 낳지 못했지만, 여러 측실들을 거느려 자녀를 많이 낳았다. 그러나 대부분은 1~2살 안팎으로 죽었고, 1남 4녀만이 살아남았는데, 측실 야나기하라 나루코소노 사치코가 낳은 메이지 덴노의 자녀만이 살아남았다.
  • 6녀 츠네노미야 마사코(常宮昌子) 내친왕(1888-1940) - 측실 소노 사치코 소생. 다케다노미야 츠네히사(竹田宮恒久)[18] 왕에게 시집가 1남[19] 1녀를 낳았다.
  • 7녀 카네노미야 후사코(周宮房子) 내친왕(1890-1974) - 측실 소노 사치코 소생. 기타시라카와노미야 나루히사(北白川宮成久) 왕에게 시집가 1남 3녀를 낳았다. 1947년의 신적강하 때 황족의 지위를 잃고 평민으로 전락했다. 후사코의 차녀인 사와코(佐和子) 여왕은 이우 왕자의 신붓감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박영효의 손녀인 박찬주에 밀려 탈락했고, 후사코의 손녀인 기타시라카와 하츠코는 태어난 직후부터 장래의 황태자비 후보로 물망에 올랐으나, 평민 출신 쇼다 미치코에게 밀려 탈락[20]한 후 시마즈 가문으로 시집갔다.
  • 8녀 후미노미야 노부코(富美宮允子) 내친왕(1891-1933) - 측실 소노 사치코 소생.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21] 에게 시집가 2남 2녀를 낳았다.

6. 여담




이 사람을 모시는 신사가 유명하다면 유명한 메이지 신궁이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메이지 덴노 관련한 음모론도 존재한다. 메이지 덴노 대역설 참조.
러일전쟁 때문에 유명한 노기 마레스케 육군 대장은 전쟁의 책임을 지고 종전 직후 할복하려다 메이지 덴노가 "나 죽기 전에는 절대로 못 해" 라고 말하자 메이지 덴노 사망 때까지 기다려 장례절차가 다 끝난 날 밤에 부부가 동반자살했다.
위의 문단에서도 여러 번 이웃나라인 대한제국의 황제였던 고종이 언급되는데, 우연히도 고종과 메이지 덴노는 1852년으로 동갑이고 똑같이 어린 나이에 즉위했다. 고종이 양력 9월 8일(음력 7월 25일), 메이지가 11월 3일로 메이지 덴노가 2개월 가량 늦다. 현재 11월 3일은 문화의 날로 지정되어 있다.
메이지 덴노는 조선 왕조 시대 말기 때의 군주인 고종(1863~1907)과 순종(1907~1910)의 치세 때 재위하였는데, 이 당시 일본은 이후의 한국 역사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1] 실제로 메이지 덴노가 개혁을 주도한 건 아니고, 개혁에 앞장선 건 이토 히로부미 등 하급 무사 출신의 신정부 정치인들이었다. 그래도 입헌군주제 국가의 군주임을 감안하면 그럭저럭 역할 수행은 한 편.[2] 천황을 높이고 오랑캐를 물리친다.[3] 조정과 막부로 대표되는 무가의 이원화된 정치구조를 하나로 합체하자[4] 도막은 반막부를 뜻하는 포괄적인 뜻이고, 토막은 무력으로 막부를 전복시키는 용어이다.[5] 사츠마 번은 막부에서 이를 거절할 것으로 예상하고 막부를 무력으로 무너뜨리려 했고 요시노부는 이를 받아들여 명분을 없애려 한 것이다.[6] 주요 내용은 막부, 섭정, 관백을 폐지하고 천황하에 총재, 의정, 참여의 삼직을 설치하는 것이다.[7] 동시에 에도 성도 도쿄성(東京城)으로 개칭되었다.[8] 공식 명칭은 대일본제국 헌법(大日本帝国憲法)[9]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 골수 덴노주의 군인과 신료들의 영향을 받아 '교육에 대한 훈시'를 한 '교육칙어'(敎育勅御)라는 글을 썼다. 군국주의 시대를 산 일본인들은 대부분 이것을 암송하고 글자까지 모두 적을 수 있을 정도로 사무치게(지독하게) 배웠다고 한다. 원문과 해석은 #여기서 볼 수 있다.[10] 일본어로는 일러전쟁 또는 일본해 해전[11] 러시아와 대립 관계에 있던 국가들이 일본을 지지했다.[12] 이는 천황가(家) 4대의 사인 및 지병을 살펴보면 가족력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아들인 다이쇼 덴노도 요독증을 앓다가 심장마비로 사망하였으며, 손자 쇼와 덴노도 사망 전 신장 질환을 앓다가 십이지장 염증으로 하혈하였고 끝내 장폐색 및 간 질환 등의 합병증으로 사망하였고, 증손자 아키히토는 심장마비로 죽은 조부 다이쇼 덴노의 영향인지 협심증으로 두 차례의 수술을 받은 적이 있다.[13] 천황의 신격화는 이후 대일본제국 헌법 제1장 제3조에 '천황은 신성하여 침해해서는 아니된다'는 조항을 통해, 천황은 신성하며 법 위에 있다는 것을 공식화한 것으로 완성되었다. 이것을 '''천황대권(天皇大權)'''이라고도 한다.[14] 결국 사이고는 서남전쟁을 일으켰고, 그걸 진압한 건 메이지 덴노가 아니라 오쿠보 중심의 주류 개혁파였다.[15] 이후 다이쇼 덴노 또한 이런 중재자로의 역할을 요청받았으나 정치에 염증을 느낀 다이쇼 덴노는 깡그리채 무시해버렸다.[16] 처음 말을 탔을 때는 벌벌 떨면서 무서워했다고 한다.[17] 반면에 그의 아들인 다이쇼 덴노와 장손인 쇼와 덴노는 아내 외의 다른 여자들에게는 관심이 없어 후궁조차 두지 않았다. 다이쇼 덴노의 아내 데이메이 황후(사다코)는 아들을 4명이나 낳아 후사 문제가 없었으나, 쇼와 덴노의 아내 고준 황후(나가코)는 결혼 후 줄줄이 딸만 4명을 낳았다. 그래서 데이메이 황후는 며느리가 딸만 낳는 못난 여자라고 매서운 시집살이를 시켰으며 주위에서도 후궁을 들여 아들을 낳으라고 권유하며 후궁 후보로 몇몇 규수들을 추천하기까지 했으나, 쇼와 덴노는 끝내 거절했다고. 이후 고준 황후가 어렵게 두 을 낳고서야 후궁 이야기는 수그러들었다. 이후 고준 황후는 본인이 시집살이당했던 것 이상으로 며느리 미치코 황후를 들들 볶았으나 불행 중 다행으로 미치코 황후는 아들 을 먼저 낳은 덕에 아들 문제로 혼날 일은 없었다.[18] 츠네히사 왕의 여동생 호시나 다케코(保科武子)는 기타시라카와 하츠코의 고모할머니이며, 쇼다 미치코가 하츠코를 제치고 황태자비가 된 후로는 나가코 황후시녀장(侍女長)을 지내며 미치코 황태자비 시집살이 시키기에 한 몫을 했다.[19] 이 아들인 다케다 츠네요시는 731 부대에서 생체 실험을 한 전범이다.[20] 이 무렵 후사코는 이세신궁의 제관장(祭官長)이었다. 아키히토 황태자와 쇼다 미치코가 결혼식을 올리기 전 이세신궁에 참배하러 왔을 때, 후사코는 미치코를 홀대했다고 한다. 자신의 손녀를 제치고 황태자비로 정해진 미치코가 미웠던 것이다.[21] 난징 대학살의 총 지휘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