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기 마레스케

 

'''역대 타이완(대만) 총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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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대

3대

4대
가쓰라 다로
'''노기 마레스케'''
고다마 겐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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乃木希典[1]
1849년 12월 25일 ~ 1912년 9월 13일 (62세)
1. 소개
2. 생애
3. 죽음
4. 가족관계
5. 노기 마레스케가 등장하는 작품


1. 소개


19세기 말-20세기 초에 활동한 일본의 군인.

2. 생애


1849년 조슈 번의 지번(支番)인 조후 번 출신. 하급 무사 노기 마레쓰구의 3남으로 태어났다. 그 위로 배다른 형 2명이 있었지만 모두 어린 나이에 숨을 거두어 마레스케가 장남 역할을 하였다. 아명은 나키토(無人)였지만 유소년기에 이름을 여러 회 바꾸었다.
1864년(15세) 4월, 요시다 쇼인이 사망한 후에 송하촌숙를 이어받아 운영하던 다마키 분노신의 문하생으로 입학했는데 노기는 다마키와 친척 관계였다. 이때 타카스기 신사쿠기도 다카요시, 이토 히로부미 등 메이지유신을 이룬 유신지사들이 요시다 쇼인의 제자이자 송하촌숙의 선배였으므로 인맥을 쌓았다. 그해 10월부터는 조슈 번의 번교 명륜관에 통학했다.
1865년(16세) 쵸후 번 출신이 조직한 보국대(保國隊)라는 민병대에 들어가, 타카스기 신사쿠가 창설한 기헤이타이(奇兵隊)의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지휘하는 부대와 합류해서 제1 차 조슈 정벌에 참가했다.
메이지유신을 거쳐 신정부군이 창설되자 육군에 소속, 1871년(23세)에 육군 소좌(소령)로 임관, 이후 평생 사용할 이름 '마레스케'로 개명했다. 1865년에 쿠데타로 조슈번의 정치상 실권을 잡은 타카스기 신사쿠이토 히로부미 등이 송하숙촌의 선배였으므로, 그 인맥에 많이 도움받아 빨리 출세할 수 있었다.
1877년(28세), 세이난 전쟁에 참전. 군기를 사이고 다카모리군에게 빼았겼다.
1887년(38세), 승려 나카하라 도주[2]도쿄의 도린사(道林寺)에서 처음으로 만났다. 이때 도주는 욕설하는 등 영 승려답지 않아서 노기가 만나 본 뒤 실망했다는데 나중에 다시 만나 "칼의 평정심을 알려주십시오."라고 청하자 도주가 "그렇다면 내 앞에서 칼을 써 봐라."라고 했다고 한다. 노기가 머뭇거리자 도주는 "너 같은 놈이 여단장이랍시고 군인 정신을 운운하다니 사이비 무사다!" 하면서 들고 있던 방망이(난텐보)로 때렸다고... 노기는 그 후 도주 밑에서 칼 수행을 하고 도주는 노기를 인정하여 석초거사(石樵居士)란 호를 주었다고 한다.[3] 노기는 이후 도주에게서 정신적으로 크게 영향을 받았다.
1894년(45세), 청일전쟁에서 메이지 덴노에게 신임받았다. 청일전쟁 이후 소장에서 중장으로 승진하고 1896년부터 98년까지 대만 총독을 지냈으나, 대만인들이 강력히 반대하여 사임했다.
1904년(55세), 육군 대장으로 승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참전하여 203고지, 뤼순 공방전을 지휘했다. 러일전쟁의 승리에 공헌했지만 반자이 돌격 같은 무모히 공격해서 아군의 희생이 너무 컸기에 경질론이 대두되기도 했을 정도였다.[4][5] 봉천 전투에서, 러시아군 지휘부도 무능하긴 했지만, 뤼순을 점령한 후 엄청나게 소모된 3군 소속 병력 3만 8천을 이끌고 거의 단독으로 3배가 넘는 러시아군과 4일간 격전을 치르며 전진하여 결국 봉천에 다다르기도 했으므로 아예 무능하다고 하기에는 어폐가 있다. 그리고 두 아들이 전사하는 개인으로서 슬픔을 겪었다. 당시 전사자들의 유족들이 노기를 죽일 기세로 몰려 들었으나 노기도 아들 2명이 전사했기에 넘어간 일도 있다. 당시 항구에 몰려있던 유가족들이 배에서 내리는 노기에게 달려들었으나, 노기의 양 손에는 두 아들의 뼛가루가 담긴 병이 들려있었다 한다.
노기는 자기 지휘 아래에서 젊은이 수만 명이 목숨을 잃었음에 관해 평생 죄책을 느꼈다. 유가족들에게 눈물을 흘리며 사과하거나 전사자들을 배려해 많이 기부하고 많이 문병하기도 했고 팔다리를 잃은 군인들을 배려해 의수를 만드는 데 참가하기도 했다. 뤼순 공방전에서 다수의 불필요한 전사자가 발생했음에 책임지고 자결하려 했으나 메이지 덴노가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허락할 수 없다."라고 하면서 만류했다.
1907년(58세)에는 황족과 화족을 배려한 관립학교 가쿠슈인[6]의 원장이 되었다. 이것은 메이지 덴노의 뜻이기도 했다. 메이지는 미래의 덴노가 될 황태손 히로히토가 노기에게 교육받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1912년에 죽을 때까지 원장직을 맡았다. 노기 원장 시절에 히로히토 황태자, 훗날 히로히토 황태자의 비가 된 구니노미야 나가코, 나가코의 사촌언니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이방자) 등이 가쿠슈인에 다녔다.
이방자 여사는 1984년 경향신문에 연재한 회고록 <세월이여 왕조여>에서 "가쿠슈인은 교칙이 까다로워 화려한 옷이나 리본 등을 허용하지 않았다.", "노기 장군은 매우 엄격하고 완고해서 여학생도 남학생처럼 취급했다." 하고 학창시절을 회고했다. 히로히토 황태손(미래의 쇼와)에게도 매우 엄격히 교육했다. 아프거나 비가 오지 않는 이상 걸어서 등교하게 하고 히로히토에게 자신을 보면 언제나 경례하라고 지시했다. 이때 활력 없는 히로히토에게 체육을 많이 교육할 것도 지시하였다.

3. 죽음


1912년 7월 30일 메이지 덴노가 죽었다. 노기는 9월 10일 히로히토를 알현하여 자신은 히로히토를 교육하고자 새로 조직한 어학문소에 동참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히고 면학하시라고 전하며 야마가 소코미야케 간란의 역사책을 각각 1권을 선물했다. 이때 히로히토는 노기의 태도에서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각하께서는 어디로 가시려 합니까?"라고 물었다고 한다.
9월 13일 메이지 덴노의 장례식이 진행되는 중에 노기는 자택에서 군복을 벗고 소복으로, 아내 노기 시즈코는 검은 상복으로 갈아입었다. 노기 부부는 2층 거실에 들어가 메이지 천황의 어진과 러일전쟁에서 전사한 두 아들의 초상 앞에 절을 올린 다음, 장례식 종이 울리는 때를 맞춰 자결했다. 시즈코가 먼저 노기에게 도움받아 목을 단도로 찔렀고 노기는 유서 10통과 <사세의 노래>라는 와카 1수를 남기고 할복했다. (이때의 행적은 노기 사후에 도쿄 경시청이 조사하여 알려졌다.) 노기가 쓴 유서에 '내가 유서에서 언급하지 않은 것은 아내 시즈코의 판단에 맡긴다.'는 구절이 있으므로, 노기가 처음 유서를 쓸 때만 해도 시즈코가 함께 순사할 계획은 없었던 듯하다.
노기는 유서에서 다음과 같은 뜻을 밝혔다. '1877년 사이고 다카모리에게 연대기를 빼앗긴 후부터 자결을 고려해 왔다. 나는 늙었고 자식들도 잃었다.[7] 내 시신을 의학 연구용으로 기증한다.' 노기는 오가사와라 나가나리 해군 대령과 다나카 기이치 육군 소장에게도 각각 유서를 남겼다. 사세의 노래에는 자신의 죽음이 군주의 죽음을 따르는 순사#s-2라고 알리는 내용이 있었는데 순사는 이미 에도 막부에서 1663년에 금지한 것이었다.
노기의 순사가 알려지자 니토베 이나조, 미야케 세스레이 같은 인물들은 "무사가 지킬 충성의 모범으로 국민과 군대에게 큰 교훈을 주는 행동"이라고 극찬했고 노기에게 큰 영향을 준 승려 나카하라 도주(난텐보)는 노기의 장례식에 "만세! 만세! 만세!" 세 마디를 조전으로 보냈다.
하지만 언론은 야만스러운 행동이라고 비판했다. 아사히 신문은 "아무런 교훈을 주지 못하는 해로운 행위"라고 비판했으며 마이니치 신문은 "어리석고 무의미하며 죽는 것만을 충의인 줄 아는 행동이고 국제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일대 죄악을 장려한다." 평했다. 스승의 죽음을 전해 들은 히로히토는 눈물을 쏟아 내면서 아무것도 말하지 못했고 이방자 여사도 이때 크게 충격받았다고 한다.
노기의 집은 시모노세키시 조후라는 곳에 아직 남아서 현재까지도 매년 9월 13일에 제사를 지낸다. 명장으로 우상화하는 것을 계기로 노기의 이름을 따 일본 내 각 지역에 여러 노기 신사가 생겼다. 일제강점기에 (현재의 서울 남산 자락 남산원 자리에) 경성신사의 부속 시설로서 노기신사가 있었다.[8]
도쿄도 미나토구에 그의 이름을 딴 언덕인 노기자카가 있다. 도쿄메트로 치요다선 노기자카역과 인접지이고, 노기신사도 근처에 있다. 결과적으로 보면 노기자카46의 이름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할수 있다.

4. 가족관계


아버지 : 노기 마레쓰구
어머니 : 하세가와
부인 : 노기 시즈코
장남 : 노기 가쓰스케
차남 :노기 야스스케
딸 : 노기 쓰네코(乃木恒子, 1885 ~ 1886)
3남 : 노기 나오스케(乃木直典, 1889)

5. 노기 마레스케가 등장하는 작품



[1] 우리말 발음으로는 '내목희전'[2] 임제종 승려로 도주(鄧州)는 법명이다. 난텐보(南天棒)라는 별호로 저작을 집필했기에 '난텐보'란 이름으로도 유명하다. 실은 난텐보는 도주가 들고 다니던 방망이의 이름인데 이것이 도주의 필명 겸 존칭이 된 것.[3] 석초(石樵)란 말은 '돌 장작'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돌이 장작이 될 리가 없으니 선승다운 역설적인 호칭이다.[4] 1차 공세에서만 제3군의 당시 전체 병력 5만 9백 명 중 사상자가 1만 5천 명, 3차 공세 때에는 5만 9천여 명이었다. (전사 15,390명, 부상 43,814명.)[5] 일본 해군은 원래 203고지만 점령하고 그곳에서 함대에 포격을 가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만주군 총사령관 오야마 이와오와 참모장 고다마 겐타로, 제3군 사령관 노기 마레스케 모두 뤼순항 전체를 점령해야 한다고 했고 상부에서도 빨리 점령하라고 계속 닥달하는 등 피해를 키웠으니 굳이 노기만 무능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6] 패전 후 사립학교로 전환되었고 평민에게도 개방되었다. 단 말이 평민이지 여전히 상류층, 부유층들이 많이 다닌다.[7] 노기는 3남 1녀를 두었으나 장남과 차남은 전사했고 3남과 딸은 요절했다.[8] 당시 경성신사는 식민지 조선 전역에서 8곳밖에 없는 국폐소사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