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과 9

 

1. 개요
2. 제1권: 집사와 아가씨
3. 제2권: 스리과 나인
4. 제3권: 암살자와 타깃
5. 제4권: 스리
6. 제5권: “관리인”과 보고
7. 제6권: 나인
8. 제7권: 눈물과 약속
9. 제8권: 중력과 고대유물
10. 제9권: 분노와 읽기
11. 제10권: 스-와 나-
12. 기타


1. 개요


영웅전설 섬의 궤적Ⅳ: -THE END OF SAGA-부터 등장한 수집 가능한 소설.
스리와, 나인. 소년, 소녀 암살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2. 제1권: 집사와 아가씨


레미페리아 공국, 동북쪽 항구 마을에 큰 여객선이 한 척 정박해 있었다. 한눈에도 자산가나 귀족 전용임을 알 수 있을 호화로운 배에 잘 차려입은 손님들이 줄지어 올랐다.
그중에 조금 눈길을 끄는 두 사람이 있었다. 아가씨와 집사―― 실로 그렇게 부를 수밖에 없을 옷차림과 언동. 이 자리에서는 흔한 조합이었으나, 문제는 연령. 둘 다 12, 3세로밖에 보이지 않는 용모로, 딱 잘라 말해 어린아이 2명이었다.
「자, 잠깐만요오~ 아가씨~」
커다란 여행가방을 끌며, 집사 소년은 녹초가 되어 앞에서 걸어가는 소녀를 뒤쫓았다. 몸에 걸친 연미복은 고급스러웠으나, 앞머리가 거의 눈을 가린 데다 움직임에도 패기가 없는, 자못 심약해 보이는 소년이었다.
「빨리 하란 말이야 이 얼간아! 계속 꾸물거렸다간 그 쓸모없는 다리를 개껌으로 줘 버릴 거야!」
신랄한 말을 내뱉으며 앞장서는 어린 소녀.
거만하고 고압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으나, 그 외견은 실로 사랑스러웠다. 인형 같은 정돈된 이목구비에 사파이어색의 투명한 눈동자. 양쪽으로 묶은 머리는 살짝 둥근 모양으로 감겨 있다.
몸을 감싸고 있는 것은 프릴이 많은 검은색 드레스. 그리고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한 손에 끌어안고 있는 50리쥬 정도의 거대한 곰인형. 그만 『그 나이니 별 수 없지』라며 응석도 눈감아 주고 싶어질 정도로 예쁜 용모였다.
「흐엑~! 용서해 주세요, 아가씨이~」
소년은 한심한 소리를 내며 걸음을 재촉하여 마침내 탑승구에 다다랐다.
「초청장과 탑승권을 보여 주십시오」
탑승구에서 승무원이 미소를 지으며 탑승 자격을 묻는다. 이 호화 여객선은 베른사 소유로, 주로 라미린만을 경유해 레미페리아 공국과 칼바드 공화국 사이를 오간다.
현재는 공화국의 대상인 할도르 바른이 대절한 상태로, 이번에 탑승하려면 그 바른 씨가 보낸 초대장과 일반적인 탑승권 양쪽이 필요했다. 애초에 발송된 초대장에는 반드시 객실이 지정된 탑승권이 포함되어 있어, 일반 탑승권은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것에 불과했다.
「그레이」
소녀는 소년의 이름을 부르고는 넌지시 초대장과 탑승권을 꺼내라고 손으로 지시했다.
「예, 아가씨. 왜 그러십니까?」
어린 집사는 눈치가 없는지 그 의도를 파악하지 못했다.
「넌 대체 왜 이렇게 우둔하니! 이 굼벵이! 좀벌레!!」
「흐엑―――!! 죄송합니다죄송합니다죄송합니다……」
마음껏 분노를 터뜨리는 소녀에게 그저 사죄하는 소년.
「빨리 초대장과 탑승권을 꺼내!」
「예, 예!!」
허둥지둥 짐을 뒤지는 소년 집사. 하지만 당황한 탓인지 모처럼 꺼낸 탑승권이 손가락을 벗어나 허공을 날았다. 운 나쁘게도 그 순간 한 줄기 바람이 불어, 탑승권은 바람을 타고 저 멀리――
「아아――――!!」
소년이 공중에 손을 뻗어 필사적으로 잡으려 했지만 그런 보람도 없이, 탑승권은 항구의 수면으로 떨어졌다.
심지어 그 불운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갑자기 주변에 그림자가 일렁이고, 여러 마리의 물고기들이 일제히 수면에서 꿈틀댔다. 물보라를 치며 물고기들은 만으로 돌아갔고, 그와 함께 탑승권도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아, 아아,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소년의 비통하게까지 들리는 외침이 주변에 울려 퍼졌다.
바들바들 몸을 떨면서, 집사 소년은 주인 쪽을 돌아보았다. 거기에, 소녀는 그저 서 있었다. 아무 표정도 없이 한마디도 하지 않고, 그저 선 채로 소년을 바라본다. 마치 폭풍 전의 고요처럼――
「할 말, 있어?」
드디어, 한마디. 그러자 소년은 망가진 라디오처럼
「죄송합니다죄송합니다죄송합니다」
라며 작은 목소리로 되뇌었다. 몸을 움츠리고 마치 처벌을 기다리는 죄인처럼.
「이―――――― 쓸모없는 거어어엇!!!!!」
온몸의 힘을 담은 소녀의 외침과 함께 날아온 날카로운 발차기. 작은 체구에 그런 힘이 있나 싶을 정도다. 소년의 몸은 힘차게 하늘을 날더니 “풍덩――” 하는 소리와 함께 물속으로 떨어졌다. 물에 빠진 소년은 수영을 못하는 듯, 격하게 팔을 파닥거리며 구조를 요청했다.
「사, 살려… 주세요… 아가씨……」
첨벙첨벙첨벙… 꼬로로록… 첨벙첨벙첨벙…
「당장 거기서 탑승권을 찾아내. 찾을 때까지 물가로 올라오는 건 허락하지 않겠어」
「하지만… 저, 수영… 못 해요…」
첨벙첨벙첨벙… 꼬로로록… 첨벙첨벙첨벙…
「알아」
「그, 그런………」
첨벙첨벙… 꼬로로록… 꼬로로로록…… 첨벙대는 소리가 멈추고, 소년은 순식간에 물 속으로 점점 가라앉는다…… 역시 위험하다 싶었는지, 보다 못한 승무원이 다른 선원을 불러 소년을 끌어올렸다. 하지만 소녀의 분노는 아직 가라앉지 않은 듯, 다시 소년을 걷어차 떨어뜨리려고 했다.
「소, 손님, 진정하십시오!」
승무원이 필사적으로 소녀를 달랬다.
「진정하게 생겼어!? 나는 급한 일이 있는 아버지를 대신해서 왔다고!」
살벌한 시선을 소년에게 보낸다.
「배에서 중요한 거래 상담도 해야 하는데, 여기 못 타면 어떻게 책임질 거야!!」
아직도 콜록거리는 소년은 그 말을 듣더니, 이미 창백해진 얼굴에서 한층 더 핏기가 가셨다. 그 모습을 불쌍히 여긴 승무원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우선 초대장을 보여주실 수 있을지요?」
움직이려던 소년을 노려보며 제지하고 소녀가 직접 다소 난폭한 동작으로 초대장을 꺼내 승무원에게 건넸다. 몇 번이나 리스트와 대조해 보던 승무원이 말했다――
「리스트에 있던 크레스 레인하츠 남작 각하 앞으로 보낸 초대장이 틀림없습니다. 남작 각하의 대리로 오신 따님과 사용인이 맞으십니까?」
「예, 제가 크레스 레인하츠 남작의 장녀인 세리아 레인하츠예요」
승무원이 가볍게 인사하고는 말을 이었다.
「그럼 레인하츠 님, 탑승권은 괜찮습니다. 이대로 들어가십시오」
「어머, 괜찮겠어요?」
「예, 들어가시지요」
사실 윗선의 판단 없이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은 아니었지만 자리를 수습하기에는 최선의 판단이라고 승무원은 생각했다.
「목숨을 건졌구나, 구더기」
다시 소년을 차갑게 노려보곤 소녀는 배 안으로 들어갔다. 소년은 짐을 끌어당기더니 허둥지둥 뒤를 따라가려 했다. 몇 번이나 승무원에게 감사를 표했고 상대는 동정과 격려의 말을 건넸다.
배에 들어온 둘은 한마디도 나누지 않고 마치 이미 길을 알고 있었다는 듯 빠른 걸음으로 자신들의 객실에 도착했다. 방 이곳저곳을 재빠르게 체크하고, 한바탕 마무리 된 시점에――
「잠~입~ 완료~~」
긴장감이라곤 없는 느긋한 목소리가 소녀에게서 나온다.
「하아~으」
그리고 하품. 졸린 듯한 그 눈에서는 순진함과 가련함뿐. 조금 전까지의 고압적인 아가씨와는 마치 다른 사람 같다.
「나- 피곤해~ 이제 잘래」
봉제인형을 침대에 내던지더니 소녀 자신도 침대로 몸을 던진다. 그 모습은 그야말로 나이에 걸맞게, 아니, 그 이상으로 순진하게 보였다. 그에 비해 소년은――
「방심하지 마. 임무는 지금부터다」
전혀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 물에 젖은 앞머리를 손으로 가볍게 넘기자 가려진 눈이 드러났다. 한없이 건조하지만 그러면서도 사냥감을 노려보고 있는 듯한 날카로운 눈. 어물거리기만 하던 집사는 어디로 사라진 걸까, 거기 있는 소년은 전신에서 냉혹한 기운을 뿜고 있었다. 소녀 이상의 변모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런데――
「아까 스-가 한 연기, 엉망이었어~」
침대 위를 굴러다니며 소녀는 태연하게 지적했다. 짚이는 게 있는지, 소년은 순간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임무에 지장을 주진 않았어」
「반응이 하나하나 과장돼서 맞추느라 나-도 고생했다구~ 게다가 쓸데없이 눈에 띄잖아」
말하는 내용은 불평 같지만 무기력한 목소리 탓일까, 잠꼬대처럼 들렸다.
그렇다. 지금 이것이 두 사람의 진실된 모습으로, 방금 전 집사와 아가씨는 이곳에 침입하기 위한 연기에 불과했다.
배가 출항하기 전에 이상한 소동을 벌이면 오히려 임무에 방해가 된다. 그래서 신분을 위장해 잠입하는 것을 택했다. "조직"의 정보망으로 사전에 올 수 없을 듯한 초대객의 정보를 파악해 그 "딸"이라고 주장한다. 초대장에 쓰인 종이는 고급품이지만 형식은 통일된 이름만 다르게 인쇄된 물건이다. 그것은 확실히 상인다운 합리성을 추구한 결과일 것이다. 덕분에 위조하기가 쉬웠다.
반면 탑승권은 베른사의 최신 위조 방지 기술이 집약되어 있어 위조하기에는 위험부담이 크다. 그래서 탑승구에서 그런 연극을 벌인 것이다.
소년이 탑승권을 떨어뜨린 것은 물론 고의로, 때마침 바람이 분 것도 물고기들이 날뛰었던 것도 봉제인형 속에 감춘 전술 오브먼트로 소녀가 몰래 마법 아츠를 발동했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계획대로 잠입에 성공했다.
소년의 이름은 《소드의 3》스리 오브 소즈.
소녀의 이름은 《소드의 9》나인 오브 소즈.
두 사람은, 암살자이다.

3. 제2권: 스리과 나인


예정된 시각이 되어 배는 출항했다.
점점 멀어져 가는 기슭을 바라보며 건조한 목소리로 《소드의 3》스리 오브 소즈―― 스리는 말했다.
「타깃의 탑승을 확인했어. 적의 배치와 루트는?」
「확인 끄읕~」
스리와는 정반대로 들리는 느긋한 목소리로, 뒤에 선 파트너 소녀 《소드의 9》나인 오브 소즈―― 나인은 대답했다.
"조직"에서 파견된 두 사람의 이번 임무는 이 선박 여행의 주최자―― 거상 할도르 바른을 암살하는 것이다.
"암살"이라고는 해도 몰래 죽이든 경찰이나 유격사 협회에 들키지 않을 정도로 날뛰든,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효율이 좋은 쪽을 우선하는 것이 규칙이다. 다만 이대로 할도르가 칼바드에 도착하는 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그는 공화국의 범죄 조직 《헤이위에》와 깊은 유착 관계가 있어 만일 놈들이 보호하면 처리가 어려워질 것이다.
기관부 등을 제외하면 이 배의 구역은 주로 세 개의 플로어로 나뉜다. 가장 아래층은 객실로 가득하다. 당연히 스리 일행의 방도 이곳에 있었다. 2층은 홀로 저녁 식사와 파티 등이 이곳에서 개최된다. 그리고 3층에는 몇 개의 귀빈실이 있지만, 현재는 할도르가 전세를 낸 상태다. 그는 그 가장 안쪽에 진을 치고 있었다.
장비를 갖춘 두 사람은 행동으로 옮겼다. 우선은 2층의 홀로 이동했으나, 그 전에 선물을 남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때마침 저녁식사 시간이 되어 2층은 손님들로 가득했다. 부자나 귀족들뿐으로, 메뉴도 그에 걸맞게 호사스러웠다. 하지만 역시 경계하고 있는 것일까, 할도르의 모습은 홀에 나타나지 않았다.
「슬슬 시간이 됐군」
스리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아래층에서 작은 폭발음이 울려 퍼졌다. 손님들이 술렁댔으나 그것도 곧 수그러들었다. 경비원들이 줄줄이 모여 한 층 아래로 향했다. 그건 스리 일행이 빈 객실에 설치한 소형 폭탄이었다. 위력은 별것 아니나 주위에 설치한 착화제와 합쳐지면 작은 화재 정도는 일으킨다. 경비원들을 낚을 미끼로는 충분했다. 그리고――
「나도 갈게~」
여전히 긴장감 없는 목소리로 나인은 파트너에게 자그맣게 선언했다. 나인은 드레스의 치마 부분을 살짝 잡아올리더니 살랑살랑 좌우로 흔들었다. 그러자 몇 개의 검은 공 같은 물체가 바닥에 떨어졌다. 「펑!」하는 둔한 소리가 울리더니 홀 안에 연기가 넘쳐 흘렀다.
「이, 이게 뭐야!! 콜록 콜록!」
「눈이…… 눈물이……」
연막과 최루 가스. 살상력은 없고 효과도 가벼운 편이지만 이것으로 홀 안은 패닉 상태에 빠졌다.
이제부터는 스리와 나인이 3층에서 행동할 시간. 1층에 있는 경비원들이 3층까지 올라오려면 필연적으로 2층을 통과해야 한다. 그 2층 사람들이 패닉에 빠져 있다면 제법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이다. 현재로서는 작전은 순조롭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이것으로 할도르를 쉽게 죽일 수 있게 된 건 아니다. 3층으로 접어드는 계단참에서 스리와 나인은 몸을 숨기고 상황을 관찰했다.
「3, 4…… 복도에 5명, 인 건가?」
중얼거리는 나인에게 스리도 고개를 끄덕였다. 복장을 보니 선원은 물론이거니와 초대객은 더더욱 아니었다. 무기를 가지고 있으며 전투에 익숙해 보이는 생김새다.
「퇴직한 엽병들인가…」
배에 근무하는 경비원이 아니라 할도르 개인이 고용한 호위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할도르가 있는 안쪽 방까지는 외길 복도뿐. 전투는 피할 수 없었다.
「그럼 나-가 갈게~」
그렇게 말하고 나인은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숨을 생각도, 돌격해서 기습할 생각도 없는 듯했다. 작은 발소리를 알아차리고 호위들은 다가오는 나인을 쳐다보았다. 귀여운 외모 때문일까 아니면 적의조차 느껴지지 않는 탓일까. 애초에 적으로 인식하지도 않고 있었다.
「아가씨, 이 층은 출입 금지야」
「아, 그러고 보니 아래쪽이 어째 시끄러운 것 같은데, 하지만 여긴 피난소가 아니다, 얼른 돌아가」
말투는 다소 거칠지만 호위 중인 퇴물 엽병치고는 썩 우호적인 태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저 방에 가고 싶은데, 안 돼?」
그렇게 말하며 나인은 안쪽에 있는 할도르의 방을 가리켰다. 탑승구에서처럼 제멋대로인 아가씨 연기가 아니라 아마 본래 자신의 것일 졸립고 느긋한 목소리였다.
「할도르 어르신을 만나고 싶다고? 안됐지만 지금 어르신께서는 아무도 만날 생각이 없다고 하셨다」
「아무리 부탁해도 안 돼?」
고개를 갸웃하는 몸짓에 호위 두 사람이 미소를 지었다.
「그래, 안 되겠는데」
「그래…… 아쉽네」
딱히 아쉬워하는 기색도 없이, 나인은 오른손을 안고 있던 봉제인형에 대더니 재빠르게 앞쪽으로 휘둘렀다.
순간 작은 은빛 섬광이 번뜩이고 한 박자 늦게 두 호위가 털썩 쓰러졌다.
두 사람의 목덜미에는 각각 2개씩, 총 4개의 침이 꽂혀 있었다.
그것은 나인이 무기로 쓰는 독침이다. 평소에는 봉제인형 안에 감춰 둔 그것을 던져 경락의 특정한 위치에 명중시키면 독이 순식간에 전신에 퍼지는 효과를 발휘한다. 상황에 따라 수십 종류의 독을 구분해 사용하며 독이 아닐 때도 있었다.
지금 그 두 사람에게 박힌 것은 몸의 자유를 빼앗는 신경독으로 죽지는 않겠지만 한동안은 움직일 수 없을 것이다.
「응?」
이상을 눈치채고 상황을 확인하려던 안쪽의 호위 중 하나가 시야 구석에서 급속도로 접근하는 검은 그림자를 보았다.
그것을 정확히 포착하기도 전에 검이 하얗게 번뜩였고 세 명째 호위가 땅에 쓰러졌다.
그 재빠른 솜씨를 보인 이는 스리였다. 손에 든 것은 한 자루의 장검. 도신이 좁고 끄트머리 형태가 동방에서 전해지는 “도”와 같지만 도신은 휘지 않았다. 칼막이도 마치 일부가 이지러진 듯한 복잡한 구조였다.
역시 남은 두 호위는 이미 전투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네 이노오오옴!!」
남자는 도끼를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스리는 장검으로 받아내더니 그대로 치열하게 대치하기 시작했다. 그것을 호기로 보았는지 다른 한 남자는 검을 뽑아 스리를 향해 휘둘렀다. 스리는 오른손을 그대로 둔 채 왼손으로 허리에 찬 다른 한 자루의 검을 뽑아 상대의 공격을 받아넘겼다.
두 번째 검은 오른손의 장검과 비슷한 디자인으로 보이나 칼막이가 없는 데다 다소 짧다. 전투용이 아닌 호신용 단검이라는 말을 들어도 위화감은 없을 것이다.
체격 차이에다 오른손만으로 버티고 있던 탓에 도끼를 쥔 남자에게 밀리는 스리. 스리는 일부러 몸과 검을 틀며 힘을 풀었다. 남은 기세로 남자의 몸이 앞으로 쏠리자 그에 맞춰 왼손의 단검이 남자의 몸에 깊숙이 꽂혔다. 검을 든 남자가 다시 베려 하자 스리는 깊은 부상을 입은 도끼의 남자를 그쪽으로 떠밀었다. 거기에 정신이 팔린 그 순간, 스리의 두 자루 검이 마지막 호위를 베어 쓰러뜨렸다.
「자, 이걸로――」
"전부 쓰러뜨렸어"라고 말을 이으려고 나인 쪽을 돌아본다. 그때, 나인의 뒤에 있는 객실 문이 안쪽에서 열리려 하는 것이 보였다. 안에서 무기를 쥔 퇴물 엽병이 나오려 하고 있었고, 그의 목적은 뒤쪽에서 오는 공격에는 무방비 상태인 나인――
경고조차 시간 안에 닿지 않을 거리에 있는 스리, 한순간 달려나가려 했으나, 다음 순간 그의 움직임이 멎었다.
――그것은 객실에서 나오려던 적도 마찬가지였다.
「어머~ 감이 좋네」
마치 그렇게 될 거라는 것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는 듯, 나인은 천천히 뒤돌아보았다. 퇴물 엽병이 방에서 내민 손과 발에는 몇 군데에 붉은 가로줄이 생겼고, 거기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안 움직이는 게 좋을걸~ 섣불리 움직였다간 고깃조각이 잔뜩 생길지도 몰라」
어린 소녀의 용모와 표정과는 지독히도 어울리지 않는 말. 그것이 단순한 협박이 아님을 퇴물 엽병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이상 앞으로는 나설 수 없었다. 극세 강철실. 특수하게 가공 처리되어 팽팽하게 당겨진 상태에선 날붙이에 필적하는 예리함을 지닌다. 그런 것이 객실 문 밖에 몇 줄이나 쳐져 있었다. 육안으로 파악하기도 힘들기 때문에 눈치채지 못하고 힘차게 뛰쳐나왔다면 지금쯤 피로 물든 비가 내리는 참상이 벌어졌을 것이다. 실 끝은 특수한 형태의 침에 연결되어 있었다. 물론 이것도 나인의 무기 중 하나다. 소문으로는 다루기 힘든 이 강철실만으로도 적을 유린할 수 있는 달인도 있다고 하지만 아쉽게도 나인은 아직 그 영역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렇게 침을 같이 사용해 다양하게 활용하는 만큼 꽤나 위협적이라는 것은 틀림없었다.
이미 결정된 승부의 뒤처리를 하듯 나인은 침을 던졌고, 퇴물 엽병은 털썩 쓰러졌다.
그때서야 드디어 자신 쪽을 바라보는 스리를 눈치챘는지 나인은 작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왜 그래, 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냉담하게 대답하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두 사람은 가장 안쪽 방, 타깃―― 할도르 바른이 있는 곳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4. 제3권: 암살자와 타깃


귀빈실 중의 귀빈실이라 해야 할까, 그 방은 휑뎅그렁했다.
할도르 바른은 소파에 앉아 조용히 와인 글라스에 입을 대더니 씁쓸하게 얼굴을 찌푸렸다.
「무능한 것들.결국은 엽병 찌꺼기들, 비용만큼의 일도 하질 못하다니」
그는 똑바로 현상을 이해하고 있었다.
앞에 서 있는 것은 어린아이 두 명. 아무도 들여보내지 말라고 명령한 데다 애초에 밖이 소란스러운 시점에 짐작은 갔다. 외견을 보고 당장 납득하긴 어려웠으나 이 두 사람이 자신의 목숨을 노리고 있는 암살자가 틀림없었다.이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할도르의 얼굴에서는 조금도 초조한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그의 앞에 있는 “그것”이 그 원인일 것이다.
이 휑뎅그렁한 방도 “그것”의 존재 때문에 좁게 느껴진다. 높이 2에이쥬를 넘는 그 물체는 6개의 다리로 거미처럼 지면을 기고 있었다. 다만 상반신은 똑바로 서있었고 거기서 4개의 팔 같은 것이 더 뻗어 있었다. 그것은 전신에서 금속 빛을 반사하며 고요한 위압감으로 그곳을 지배하고 있었다.
「크다~」
올려다보며 탄성을 지르는 나인.
「인형병기――!!」
스리는 즉시 전투 태세를 취했다.
「흐흐흐, 이건 내가 뒷세계 옥션에서 거금으로 구입한 애장품이다. 어느 조직이 유출한 물건인지는 모르지만 제법 고성능이라서 말이야, 거기다 미라를 더 얹어 개조했지. 소대 규모의 군대라도 여유롭게 싸울 수 있다」
장난감을 자랑하듯 할도르는 유쾌하게 웃었다.
「퇴물 엽병들은 어디까지나 경계 담당 정도였고 진짜 호위는 이쪽이라는 건가」
「그렇다. 이 녀석이 곁에 있으면 이 배에서의 내 안전은 보장된다.그리고 이대로 공화국에 도착하면 그 다음은 어떻게든 될 거다!」
그렇게 말하고는 더욱 소리 높여 웃기 시작하는 할도르.
「어리석군」
「바보 같은 사람이네」
딱히 자신들의 실력을 과신하는 것은 아니다. 설령 자신들이 실패해도 《헤이위에》의 보호를 받는다 해도 “조직”이 타깃으로 인식하고 있다면 그는 결코 피할 수 없다.
「쳐라――――!!」
할도르의 명령을 받고 인형병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첫 표적은 스리인 듯 일직선으로 그를 향해 돌진한다. 그것을 기회 삼아 나인은 아츠를 구동시켰다. 백병전에 특화된 스리와는 달리 그녀는 도력 마법(오벌 아츠) 쪽 적성도 높다.하지만 즉시 인형병기의 팔 하나가 총구로 변형되어 나인을 겨냥하고 발포했다.
「!! 윽」
아슬아슬하게 회피했지만 구동하던 아츠는 중단되었다.스리가 장검으로 덤벼들자 인형병기는 스리를 겨냥한다.나인은 재빨리 이동해 스리의 반대편에서 다시 아츠를 구동했다.
“지이이잉――――”
하지만 또다시 총구가 나인에게로 향했고, 회피하기 위해 아츠를 중단시킬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이 인형병기에는 아츠 구동을 탐지하는 고성능 센서가 장착되어 있어, 반응이 있을 경우 즉시 공격하게 되어 있는 듯했다.두 번이나 행동을 방해받은 나인이 조금 언짢은 듯, 평소보다 세게 봉제인형을 끌어안았다.
「나-는 그만할래~ 너무 안 맞아~나머지는 스-한테 맡길게」
기계에 독침을 던져 봤자 소용없다. 게다가 아츠 발동까지 뜻대로 할 수 없는 이상, 확실히 나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그걸 이해하고, 스리는 어쩔 수 없다고 작게 중얼거리며 검을 고쳐 쥐었다.
「그럼 전투가 끝나거든 깨워 줘~나-는 이제 잘래……」
어느새 나인은 적당한 소파를 찾아내더니 봉제인형을 베개 삼아 자려고 했다.
「자지 마!!」
스리가 무심결에 고함을 질렀지만 나인은 반응하지 않았다. 인형병기도 위협은 없다고 판단했는지 스리만을 겨냥하고 있었다.
인형병기의 네 팔은 각각 검, 창, 도끼, 총으로 변형되어 노도와 같은 연속 공격을 스리에게 퍼부었다. 검으로 베고, 창으로 찌르고, 회피 방향을 파악해 도끼로 후려친다. 총을 그다지 쓰지 않는 것은 할도르에게 적이 접근하지 않게끔 경계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고속 이동과 참격이 스리의 기본적인 전투 스타일이었으나 여섯 개의 다리가 자아내는 밸런스 성능과 순발력은 금속제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민첩함을 인형병기에 부여했고, 팔이 많은 만큼 쓸 수 있는 수단도 많았다. 자신의 특기 영역을 전혀 발휘할 수 없는 상대. 나인만큼은 아니지만 스리에게도 결코 잘 맞는 상대라고는 할 수 없었다.
두 자루의 검으로 응전하는 스리.
체격도 수단도 자신을 뛰어넘는 상대 앞에 왼손의 단검은 방어용으로 돌렸다. 빗발치는 공격을 넘기고 피하고 궤도를 바꾼다. 틈이 생길 때마다 사정거리가 긴 오른손의 장검으로 공격한다.
격렬한 공격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몇 번인가 빈틈을 찔러 인형병기의 팔과 몸통을 공격했지만 그때마다 “카앙――” 하는 소리가 울리며 검이 튕겨 나왔다.
「흐하하하하하―― 소용없어, 애송이!장갑도 특주품이다. 네놈들이 돌파할 수 있을 리가 없어!」
사실 스리의 공격은 완전히 통하지 않는다고 해도 무방했다.아직 부상은 거의 입지 않았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언젠간 점점 지치게 될 것이다.그러던 그때, 자고 있을 터였던 나인이 갑자기 소리쳤다.
「해석 완료」
눈을 감고 소파에 누운 채로 나인은 말을 계속 했다.목소리는 평소보다 평탄하게 들렸다.
「팔, 제1관절, 아래 5리쥬. 발, 제2관절, 위 3리쥬.허리, 회전부 중심. 왼쪽 가슴, 위쪽 5분의 2, 왼쪽 5분의 1」
그 소리를 듣고 처음으로 반응한 것은 스리가 아닌 할도르였다.그는 초조한 표정을 띄우며 고함쳤다.
「이년! 어떻게 이 녀석의 구조적 약점을 아는 거냐!?」
나인은 천천히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눈을 비비며 평소와 같은 태도로 대답했다.
「소리로 알아~ 조금 집중해야 하지만」
「그런, 말도 안 되는……」
믿기 힘들다는 표정을 짓는 할도르. 반면 스리는 침착했다.당연히 나인의 목적이 해석이라는 것을 스리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그리고 해석이 완성되는 이때를, 그는 계속 기다리고 있었다.
「스-, 해치워~!!」
「그래, 알았어」
스리는 순간 몸을 숙이더니 예리하게 뛰쳐나갔다.
아까보다 빠른 속도로 장검을 휘둘러 인형병기에 참격을 퍼붓는다.
하나하나가 전부 나인이 지시한 약점에 명중했다. 시간차를 두지 않고 단검을 앞으로 내밀어, 직전과 같은 궤도로 인형병기의 모든 약점을 단검으로 다시 한 번――베었으나, 결과는 이전과 마찬가지. 날카로운 금속음이 울려퍼질 뿐 상대는 전혀 대미지를 입은 것 같지 않았다.
「큭큭큭큭흐하하하하하하――――」
배를 잡고 웃는 할도르.
「약점을 알아봤자 소용이 없나 보군,네놈들은 이 장갑을 결코 돌파할 수 없어!!」
「방금 그건 밑준비였어」
그렇게 말하고 스리는 왼손의 단검을 자루 쪽을 오른손에 든 장검의 칼막이에―― 꽂아 넣었다.
그러자 마치 처음부터 한 자루였던 것처럼 너무나도 가는 도신과 이지러진 것 같았던 칼막이가 적당히 균형을 이룬 한 자루의 검이 되었다.멍하니 그걸 보던 할도르는 한순간 침묵하더니 실소했다.
「후… 후후후후, 그 장난감 칼은 뭐냐?설마 그걸로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
할도르의 말대로 두 자루의 검을 합쳐 한 자루로 만들어도 사정거리와 베는 위력에 변함은 없다. 중량이 늘어난 만큼 조금 파괴력이 커질지도 모르지만 그것도 눈앞의 적의 장갑을 돌파할 것 같지는 않았다. 이건 장난감에 불과했다.
스리는 대답하지 않고, 그저 말없이 한 자루가 된 검을 휘둘렀다.
참격은 아까도 베려던 다리의 약점 부분에 명중했다. 그러자 “펑――!!” 하는 폭음과 함께 인형병기의 팔이 폭발해 산산조각났다. 마치 안쪽에서 폭발한 것처럼, 화속성 아츠의 효과를 연상시켰으나 스리에게도 나인에게도 아츠를 구동한 기색은 없었다. 애초에 인형병기의 센서도 반응하지 않았었다.
「뭐, 뭐야아아아아아아아!!!!!!!??」
할도르가 경악하는 표정을 지었다.
다시 한번 휘두르고. 그러자――――
“펑――!!”
또 하나의 다리가 터져 날아갔다.
「뭐냐 그건!!!!!??」
이성을 잃은 그는 절규했다.
「이 검은 조금 특수하거든」
스리는 아무런 표정도 떠올리지 않은 채 말하기 시작했다.
「검과 전술 오브먼트가 일체화되어 있어.아니, 전술 오브먼트라기보다 일반적인 도력기(오브먼트)에 가까울지도 모르지」
말하는 동안에도 손을 멈추지 않는다.
「쓸 수 있는 아츠는 하나뿐, 지정한 위치에 폭발을 일으키는 거야.다만 발동시키려면 나뉜 두 자루의 검으로 각자 목표한 곳을 베어야만 해.상대 좌표의 기록, 즉 마킹이야」
튕겨 나오는데도 두 자루의 검으로 베었던 것은 그야말로 “밑준비”.
「마지막에 한 자루로 돌아간 검으로 이중 마크한 자리를 건드려 충격을 주면 폭발해」
위치와 타이밍 지정을 다른 형태로 대행하여 전용 오브먼트의 자동 프로세스와 합쳐 아츠 구동 과정 그 자체를 생략하는 것. 절차는 번거롭지만 잘만 쓰면 영창 없이도 높은 위력의 아츠 공격을 터뜨릴 수 있다. 그것이 스리가 가진 무기의 진가였다.
「그런…… 게……」
곳곳에서 불꽃이 튀고 있는 인형병기는 이미 상당한 대미지를 입었다. 자신의 패배를 깨달은 할도르는 즉각 도망칠준비를 시작했다.
「전투를 멈춰! 어서 나를 데리고 여기서 이탈해라!!」
새로운 명령을 받은 인형병기는 돌아서서 할도르에게로 다가간다.
「그렇겐 안 될걸~」
어느새, 그 거미 같은 다리에 뒤감긴 여러 줄의 강철실이 칭칭 얽어매고 있었다.
「끝이다」
숨통을 끊듯, 스리는 남은 약점 부위를 단숨에 쳐냈다. 거듭되는 폭발에 부서진 부품들이 온 방 안에 흩날렸고, 이윽고 인형병기는 완전히 기능을 정지한 채 산산조각으로 무너져 내렸다.잔해를 밟고 넘어, 스리는 조용히 할도르에게 다가갔다.
「흐어어――」
한심한 목소리를 내며 뒷걸음질치는 할도르. 하지만 그에게 도주로가 없다는 것은 이미 명백했다. 임무 달성에 방해가 될 만한 것은 이미 없었음에도 스리의 얼굴에 승리의 기쁨은 없다.
한 걸음 다가간다.
손 안의 검이 갑자기 무거워진 것 같았다.
또 한 걸음.
발도 무거워졌다. 더 이상 나아가고 싶지 않았다.
또다시 한 걸음.
늘 하던 일이다. 이 다음은 “기계”에, “도구”에 이입하면 그만이다. 문제없다.
마지막 한 걸음.
「사실 당신에게 그런 해설을 해 봤자 의미는 없지만 적어도 어떤 상대에게 살해당하는지 정도는 알 권리가 있겠지」
연옥에서 저주할 상대에 대한 것 정도는――
「내 이름은 소드의 3(스리 오브 소즈)」
심장에 일격.
「“조직”의 암살자다」
…………2층 홀의 혼란을 수습하고 경비원들이 3층으로 진입하려 했다. 그 낌새를 느끼고, 목적을 달성한 스리와 나인은 창을 깨고 바다로 뛰어들었다.
「비행선이 아니라서 다행이야~ 만일 공중이었다면 이렇게 탈출할 수는 없었을 거야」
「그러게」
그야말로 고성능 전용 비행정보유하고 거기로 날아 옮겨 타지 않는 이상은. 이 세계 어딘가에 그런 식으로 단독 임무를 수행하는 녀석이 과연 있을까.
「스-」
가만히 스리를 부르는 나인.
「그 사람은 악당이야~ 악덕 상인」
배 쪽을 본다.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는 말할 것도 없다.
「그래, 알아」
임무 전 자료를 통해 잘 알고 있다. 미라를 위해 온갖 악행을 저질러 죽는 쪽이 세상에 도움이 될 인종이다. 하지만.
「하지만 상관없어」
그런 것이 변명이 될 수는 없다. 악당이든 선인이든 “조직”의 명령이라면 죽였다. 지금까지 그렇게 해왔듯이.
「그래」
나인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봉제인형에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거기에 숨을 불어넣었다. 잠시 후, 그 “무언가”가 1인용 크기의 고무 보트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이번에는 봉제인형을 긴 베개처럼 끌어안고, 나인은 고무 보트에 엎드려 누웠다.
「그럼 나-는 잘게. 뒷일은 부탁해~」
그건 스리에게 「기슭까지 밀고 가 줘」를 돌려 말한 표현이었다.
「직접 헤엄쳐」
불평하면서도, 그런 나인의 모습을 보고 스리는 아주 조금 마음이 가벼워진 것을 느꼈다.스리와 나인은 1년 이상 함께 행동했다.스리 쪽이 아주 조금 연상으로, 약간 멍한 구석이 있는 나인을 가끔씩 동생처럼 느꼈다. 임무 때는 든든한 파트너다.
하지만 스리는 안다.
동생 같기도 하고 파트너이기도 한 그녀는
――――결코 신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5. 제4권: 스리


“놈들”이 나를 쫓아오고 있다.
지금까지 내가 죽인 사람들이다.
목을 베이고, 심장을 후벼 파이고, 몸통이 쪼개지고, 그런데도 나를 쫓아오는 무수한 시체들.
어딘가의 정치가도, 어딘가의 귀족도, 어딘가의 상인도, 어딘가의 부호까지.
오지 마 오지 마 오지 마 오지 마아――――!!!!!
필사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베고 베고 양단하고 터뜨리고――
그런데도 “놈들”은 멈추지 않았다.
고깃조각이 되어도, 뼈가 되어도, 위도 폐도 내장도 뇌수도, 전부 꿈틀거리며 나를 향해 다가온다.
파도가 되어 나를 삼키려 한다.
뛰어 도망가 도망가 도망가 도망가――
그리고 앞쪽에 “그 녀석”이 있었다. 내가 죽인 바로 “그 녀석”이.
『감히 우리를 죽였겠다아!!!』
나를 밀쳐 쓰러뜨리더니 내 목을 조른다.
이거 놔, 놔, 날 놔!!
필사적으로 발버둥치지만 풀리지 않는다.
썩은 체액이 내 몸에 떨어져 피부를 녹인다.
그리고, “파도”에 휩쓸린다……
나는 그저, “인간”이 되고 싶을 뿐이야――
악몽에서 깨어난다.
거칠게 숨을 몰아쉰다. 온몸에서 불쾌한 땀이 솟아올랐다. 치밀어 오르는 구역질을 억지로 누른다.
임무가 끝난 날 밤에는 늘 그랬다.몇 번을 해도 흐려지지 않는, 살인에 대한 혐오.
아무리 지나도 닦이지 않는 손바닥의 감촉.하지만 해야만 한다.
우리는 도구다.의사는 필요 없었다.
필요한 것은 사람을 죽일 힘과 명령에 대한 복종.
그저 “조직”이 명하는 대로 사람을 죽인다. 그 하나에 모든 존재 의의가 부여되었다.명령 거부도, “조직”에서의 도주도 “죽음”을 뜻한다.
――――“조직”.
그 진짜 이름을 입에 담는 것조차 꺼려지는, 「뒷세계」의 암살자 집단.
주된 업무가 암살이기에 그렇게 인식되었으나 진정한 목적은 따로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그게 무엇인지 하위 구성원―― 도구인 나는 알 방법조차 없었다.
구성원은 거의가 어린 시절부터 “조직”에 예속된다.뒷사정이 있는 아이를 “긁어모아” “양성소”라는 곳에서 전투 훈련을 받게 한다.그 중 상당수는 혹독한 훈련을 견뎌내지 못하고 “탈락”하지만 운 좋게 살아남으면 “이름”을 받고 정식으로 하위 조직원으로서 인정받는다.
나도 그랬다. 7살에 강제로 “조직”에 들어가게 되어 10살에 “양성소”를 나왔다.
원래 이름은 “양성소”에 들어가자마자 버려야 했다.부르는 것은 물론 입에 담기만 해도 엄벌의 대상이 된다. “자신”이라는 것이 없는, 단지 “잔뜩 있는 도구 후보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 나날이었다.
구성원이 되어서야 비로소 이름을 얻게 된다. 하지만 그것 역시 “도구”라는 증거에 불과하다. 「타로 카드」의 「소 아르카나」, 그 56장 중 1장이 하위 구성원에게 주어지는 이름이다.
내 경우는 소드의 3스리 오브 소즈.인간미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 이름이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참고로 간부와 극히 일부 특수한 힘을 지닌 자에게는 「대 아르카나」의 이름이 주어진다.그 전투력은 하위 구성원들과는 차원이 다르며 고위 유격사 이상이라는 소문도.
숙소의 방을 나와 나는 옆방의 기색을 살폈다. 나인은 아직 자고 있는 듯했다. 마침 보고 시간이었기에 그대로 혼자 숙소를 나왔다.
“조직”의 하위 구성원들은 기본적으로 2인 1조로 행동한다.내 파트너인 소드의 9나인 오브 소즈은 한 살 아래 소녀다.통상 3년~5년, 혹은 도중 “탈락”하는 “양성소”를 1년 만에 졸업한 “천재”.정보 수집, 전황 분석, 연기, 잠입…… 모든 면에서 우수한 재능을 지녔고 침과 실을 무기로 삼는 그 전투 스타일은 대인전에서 유리했다.특히 암살에 관한 그 적성은 나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한 팀이 막 됐을 무렵에는 어색했지만, 지금은 임무 중에 가장 의지하고 있는 파트너다.
――동시에 내가 가장 경계해야 할 대상이기도 하다.
2인 1조라는 제도는 임무의 성공률을 높이기 위한 것이지만, 그보다도 서로를 “감시”시키는 것이 더 큰 목적이었다.
배신이 “죽음“을 뜻하는 “조직”.
자유는 없고, 있는 것은 “도구”로서의 일생뿐.하지만 “조직” 내에는 어떤 특수한 규칙이 존재한다.
첫째, 파트너의 배신을 알아냈을 경우, 윗선에 보고하고 증거를 제시한다.
둘째, 그 당사자를 죽인다.
이 두 가지를 달성해내면 그 포상으로 “조직”에서 자유로워질 권리를 얻을 수 있다.
섣불리 도주해도 언제 “조직”의 추격자에게 살해당할지 모른다. 확실하게 자유로워지고 싶다면 도주하는 것보다도 늘 파트너의 행동을 주시하는 편이 낫다. 최악의 경우 파트너가 “조직”을 배신할 생각이 없었다 해도 들키지 않고 증거 날조에 성공하면 자유를 손에 넣을 수 있다.
가장 경계해야 할 자는 적이 아니라 곁에 있는 파트너.
“조직”을 배반하려 하지 않고, 파트너의 배신을 항상 경계한다.그것이 살아남기 위한 절대 조건이었다.
나는 그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3년 전, 나는 한차례 “조직”에서 도망을 시도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였다.
나와 당시 내 파트너였던 소년 《소드의 1에이스 오브 소즈》.
에이스는 나보다 한 살 많은 소탈한 녀석이었다.붙임성 있고 나와는 특히 마음이 잘 맞았으며, 파트너가 된 뒤로는 내게 있어 형님 같은 존재였다.자기 키만한 거대한 검을 가볍게 휘둘러 때로는 적을 물리치고 때로는 그 검신을 방패 삼아 나를 적의 공격에서 지켜주었다.「에이스」라는 이름에 걸맞은 실력자였다.
에이스는 나처럼 살인을 혐오했다.그런 우리가 “조직”에서 도망치기로 결심한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파트너에게 밀고당할 우려 때문에 “조직”을 배신할 수 없다.
그렇다면 파트너와 함께 “조직”을 배신한다.
그러면 둘 다 살 수 있다.
그렇게 둘이 함께 도망 계획을 세웠다.
다른 팀의 눈이 닿지 않을 먼 지역에서의 임무가 떨어졌을 때 그것을 결행하기로 했다.
처음에는 잘 될 줄 알았다.평소 활동 지역에서 떨어진 에레보니아 제국에 들어갔고 그걸로 안전하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그곳에도 “조직”의 “눈”은 있었다.금세 다른 팀이 우리를 쫓아왔고 전투가 벌어졌다.그래도 에이스와 잘 연계해서 두 번이나 추격자들을 격퇴했다.
하지만 세 번째로 나타난 추격자는 우리 같은 하위 전투원이 아닌, “관리인”이었다.압도적인 힘 앞에서 나와 에이스는 속수무책이었다.중상을 입고 목숨만 간신히 건진 상태로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이제 갈 곳이 없었다. 다음에 적을 만나면 끝이었다.동굴에서 서로 기댄 나와 에이스는, 말은 나누지 않았으나 피차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저기, 에이스」
「왜, 파트너」
마지막 대화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나는 말을 계속했다.
「난 이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뭐야 그게」
「미련도 후회도 많지만, 그래도」
에이스는 가만히 내 말을 기다렸다.
「그래도 나는, 너랑 마지막까지 같이 싸우다 죽을 수 있다면, 그거면 나쁘지 않아. “도구”로서 사람을 계속 죽이는 것보다는 몇만 배는 나아」
화톳불이 흔들렸다. 잠시 침묵한 뒤 에이스는 중얼거렸다.
「그래…… 지금까지 고마웠다, 파트너」
「나야말로, 지금까지 고마웠어」
이것으로 할 말은 다 했다. 이제 언제 적이 오더라도 나는 마지막까지 싸울 수 있었다.그리고――
「그렇다면」
공기가 갑자기 달라진 듯한 착각이 몰아치고, 에이스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날 위해 죽어 줘――」
순간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곧바로 그 말이 「같이 싸우다 죽자」라는 뜻이라고 마음대로 해석했고 확인하기 위해 에이스 쪽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시야에 비친 것은,
――――내리찍어오는 대검이었다.
순간 몸을 피하고 바로 전까지 서있던 지면이 부서졌다.
「왜 이래!? 에이스!!」
「왜 이러냐고? “조직”의 규칙, 파트너에 대한 마지막 항목을 잊었어?」
마지막 항목.
나와는 연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계속 의식하지 않았던 그 내용을 생각해 냈다.
――파트너 두 사람이 함께 “조직”을 배신했을 때, 한쪽이 직접 파트너를 죽이고 그 시체를 헌상했을 경우에 한해 “조직”의 용서를 얻을 수 있다.즉 배신자 두 사람이 도주에 실패하더라도 서로 죽고 죽이면 한 사람만 살아남을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바로 지금 에이스가 실천하려 하고 있었다.
거기까지 이해하고, 그럼에도 나는 같은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왜 이래…… 에이스――!」
「파트너, 너랑 파트너가 될 수 있었던 건 연옥에 갇힌 듯한 나날 속에서 유일한 행운이었어. 너랑 같이 인간이 되고 싶었어, 자유로워지고 싶었어」
「그럼――」
「하지만 나는 죽으면 안 돼! 살아가야만 한다고오!!!」
그렇게 외치며, 에이스는 대검을 내게 휘둘렀다. 몇 번이나 나를 사지에서 지켜왔던 그 검이, 이번에는 내 목숨을 빼앗으려고 다가오고 있었다.
「죽어! 스리――!!!!」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나도 검을 휘둘렀다.
슬픔과 절망에 휩쓸려, 그저 본능을 좇아 눈앞의 “적”에게 응전했다……
………
……
그 뒤로 어떻게 싸웠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분노와 슬픔에 몸을 맡기고 필사적으로, 볼품없이, 짐승처럼 베고 소리지르고 잡아당기고 있었다. 그리고 정신이 들었을 때,
거기에는 에이스의 시체가 뒹굴고 있었다……
이렇게 나는 다시 “조직”의 “도구”가 되었고, 오늘까지 오랫동안 살아있을 수 있었다.
“인간”이 되고 싶다는 소원을 포기하고, 동시에 인간을 믿을 수 없게 된, 반편이로서.

6. 제5권: “관리인”과 보고


아직 어둑어둑한 새벽. 거리를 걷는 사람은 거의 없다.
숙소에서 나온 스리는 차가운 공기를 폐로 들이마셔 가라앉은 기분을 어떻게든 씻어내려 했다.
이곳은 레미페리아 공국의 국경에 있는 마을 루젠트.
공국과 공화국 양쪽에서 활동하는 스리와 나인에게는 반은 거점이나 마찬가지인 곳이다.
동쪽에는 공화국과의 국경문이 있고, 서쪽에는 극히 일부 사람들밖에 모르는 위험한 산길이긴 하지만 문을 통과하지 않고 공화국에 들어갈 수 있는 길도 있다.
보고를 위해 스리는 혼자서 지정된 곳으로 향했다.
그곳은 풍화된 바위가 즐비한 작은 언덕이었다. 깊은 산속이라 인기척은 전혀 없었다.
거기서 하나의 검은 그림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검은 옷차림의 남자였다.
온몸을 낡은 로브로 가리고 있어 얼굴은커녕 체형도 잘 보이지 않았다. 기묘한 차림새이기도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위압감을 주위 공간에 퍼뜨리고 있었다.
「보고하러 왔습니다, “관리인”」
「들어 보지」
“관리인”이라 불린 이 남자는 스리 일행을 관할하는 “조직”의 간부 중 하나다.
대 아르카나의 《황제》디 엠퍼러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조직”에서는 “관리인”이라고 불리는 일이 많았다.
“관리인”이라는 호칭대로 그는 스리를 비롯한 하급 전투원들을 관리하고 있다. 임무를 지시하고 보고를 받으며 “도구”를 직접 운용하는 존재였다.
스리는 전날 여객선에서의 임무에 대한 세부 내역을 “관리인”에게 보고했다.
보고를 마치고――
「다음은」
「예, 소드의 9나인 오브 소즈의 행동에 관해서」
파트너의 행동 보고에 들어간다.
이것도 정기 보고의 일환으로, 파트너를 감시하게 해서 개별적으로 보고하게 한다. 자신의 행동 보고와 파트너의 감시 보고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점이 있다면 “조직”의 의심을 받게 된다.
이렇게 각자 보고하게 함으로써,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배신 행위가 “조직”에 새어 나갈 거라는 공포를 주는 것도 그 목적 중 하나였다.
「이상입니다」
「음, 좋다. 다음 임무는 추후 지시하지」
「예, 그럼 이만」
스리가 그 자리에서 떠나려 한 그때, 갑자기 등 뒤에서 들려온 낮은 목소리가 그를 불러 세웠다.
「스리」
뒤돌아보지만 여전히 “관리인”의 표정은 파악할 수 없다.
「그 일로부터 3년, 또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순간 등줄기에 차가운 것이 달렸다. 질식할 정도로 농밀한 살기가 스리를 덮쳤다.
“그 일”이란 말할 것도 없이 3년 전 스리가 저질렀던 도주 미수이다.
“관리인” 엠퍼러는 종종 직접 “숙청”을 했다. 그 압도적인 힘 앞에서 배신자는 그저 무참하게 살해당할 수밖에 없다. 그러한 이유로 그는 “조직” 안에서도 공포의 대상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3년 전에 스리와 에이스를 몰아붙였던 것도 바로 그였다.
그런 그가 그때와 같은 살기로 스리를 추궁하고 있었다. 설마 내 계획을 눈치챈 건가?
아니야, 신중하게 해왔어. 만일 뭔가 증거를 잡아냈다면 이미 나는 살해당했을 거야.
이건…… 시험하는 거다. 조금이라도 동요하면, 끝이야!
「농담이 과하시군요…… 그런 어리석은 짓은 이제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겁니다. 어차피 저는 사람을 죽이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흉기”에 불과하니까요」
자연스러운 호흡으로, 계산해가며 몇 번이나 훈련했던 입가의 형태와 시선의 각도…… 모든 것을 완벽하게 연기했다.
잠시 동안의 침묵이 있은 뒤, “관리인”이 입을 열었다.
「그럼 됐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답답한 살기가 안개처럼 흩어졌고, 전신을 짓누르던 중압감도 사라졌다.
「네게는 기대하고 있다」
「예,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정진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스리는 그 자리를 떠났다.
「어떻게든, 넘긴 건가…… 하아…」
숙소로 돌아온 스리는 숨을 토해내며 침대에 쓰러졌다.
딱히 뭔가 한 것은 아니지만 극도의 피로감을 느꼈다. 그만큼 “관리인”과의 대화에 정신을 소모한 것이리라.
그럴 만도 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진의를 숨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스리는 다시 도주를 계획하고 있었다.
3년의 세월은 그에게서 자유의 뜻을 빼앗을 수 없었다. 오히려 날이 갈수록 “인간”에 대한 동경이 계속해서 부풀어 오를 뿐이었다. 피에 젖은 양손은 갈수록 무겁고 추해져 간다. 나는 인간의 형태를 한 “도구”. 하지만 이대로는 그 형태조차 유지하지 못하고 그저 사람을 죽이기 위한 “장치”, 단순한 “괴물”이 될 것이다. 그것은 너무나도 두려운 미래였다.
――이번에야말로 도주에 성공해 주마!
성공을 위한 절대 조건은 “관리인”과의 정면충돌을 피하는 것과 파트너인 나인에게 도주 계획을 끝까지 숨기는 것.
물론 그것은 나인을 홀로 놓아둔다는 것을 뜻한다.
몇 번이고 생사를 함께 한 파트너.
자신보다 어리고, 재능이 넘치면서도 어딘가 나사가 빠진 듯한 소녀.
신기하게도 내버려둘 수 없다는 감정이 스리 안에 소용돌이친다.
몇 번인가 나인에게 털어놓으려 했지만, 그때마다 대검을 치켜들어 자신을 내리치려던 에이스의 모습이 뇌리를 스쳤다. 그런 일은 이제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이거면 돼.
잡념을 떨쳐내고, 스리는 도주 준비를 재개했다.
「믿을 수 있는 건 나뿐이야」
………………저녁이 되어 해가 제법 기울었을 무렵. 예전부터 준비한 덕분에 스리의 마지막 채비는 순조롭게 끝났다.
결행은 오늘 밤.
나인이 잠든 뒤 마을을 빠져나가 산길 쪽으로 국경을 넘는다.
공화국에 들어간 뒤에는 도력차로 이동하게 되는데, 사전에 준비한 렌터카로 북부의 대도시로 간다. 거기서 국제 정기 비행선을 타고 리벨로 향한다. 그 뒤는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한동안 리벨에 머물지, 아니면 레만 근처로 갈지, 어쨌든 지금 있는 곳에서 멀리 떨어지는 것이 좋다. 말단인 자신은 “조직”의 전모 같은 건 모른다. 하지만 반드시 도주에 성공하고야 말겠다!
까악―― 까악――
그렇게 스리가 벼르고 있는데, 까마귀 한 마리가 창문을 통해 들어와 방 안을 빙빙 돌았다.
「이건……」
그 다리에 채워진 독특한 장식을 보고 스리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관리인”의 소집.
「이런 시간에?」
아직 보고를 마친지 몇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다.
「새 임무 지시인가?」
제대로 표현하기 힘든 불안감에 사로잡히는 스리. 하지만 무시할 수도 없었다.
계획대로라면 추격자가 움직이기 시작할 때까지 상당한 거리를 벌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당장 도망친다 해도 소집을 거부한 시점에서 배반한 것으로 간주되어 곧장 추격자가 쫓아와 맥없이 끝이 나게 될 것이다.
마음을 정하고, 스리는 지정된 장소로 갔다.
그곳은 아침과 같은 산속 언덕이었다.
아침의 고요한 스산함은 온데간데없고, 석양에 비친 바위는 멀리서 보니 마치 불타고 있는 것 같았다.
거기서 두 사람의 모습이 스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나는 “관리인”.
변함없이 낡은 로브를 두른 그 모습은 《황제》디 엠퍼러보다는 차라리 《은자》더 허미트라 하는 편이 적절할 듯했다.
다른 하나는 커다란 봉제인형을 안고 있는 어린 소녀―― 나인이었다.
입은 옷은 저번의 드레스와 비슷한 디자인으로 보였으나, 장식이 적어 어느 정도 움직이기 편해 보였다.
새로 임무를 지시하는 거라면 나인이 여기 있어도 부자연스러울 것은 없다.
다만 미세하게 평소와 다른 그 분위기가 스리의 불안감을 더욱 가속시켰다.
「――왔나」
「예, 용건은 무엇입니까?」
평소와 같은 대화. 그러나 그것이 금세 다른 내용으로 변한다.
「변명을 들어 볼까」
「변…명?」
「네 배반은 이미 고발되었다. 거기 있는 소드의 9나인 오브 소즈에 의해」
「뭐!?」
말을 잃는다.
예상 가능한 모든 사태 중 최악의 전개가 눈앞에서 형체를 갖추었다.
절망이 파도처럼 스리를 덮쳤다. 또? 또 그때와 마찬가지인가?
또 나는 배신당했…… 아니. 나인과는 딱히 약속한 것이 없었다.
이게 나인의 일이고, 나는 그것을 알고 나인을 신용하지 않았다.
파트너란 그런 것이다.
그냥 그뿐인 것이다. 그뿐이다.
「이건 분명 뭔가 착각한 겁니다!」
소용없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스리는 어떻게든 변명하려 했다.
「발뺌해 봤자 소용없어, 스-, 아니, 스리」
드디어 입을 연 나인. 평소의 졸음 어린 그것과는 전혀 다른 차가운 음성이 스리의 귀에 들린다.
나인은 봉제인형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스리 쪽으로 내밀었다.
「이건 네가 예약한 리벨 왕국행, 내일 정오의 국제 정기 비행선 티켓이야」
「!!?윽」
충격과 함께 「티켓은 내가 가지고 있는데!」라고 외치고 싶어졌으나, 그런 짓을 했다간 당연하지만 자폭하게 된다.
스리의 의문에 대답하듯 나인은 말을 이었다.
「너한테 있는 티켓은 위조한 가짜. 내가 바꿔치기했어」
이전 임무에서 썼던 수법에 설마 자신이 당하게 될 줄이야.
「덧붙여 그 티켓을 구하기 위해 사용한 명의는 1년 전 임무에서 위조에 사용했던 제니스 왕립학교 학생, 라인스 포겔트, 맞지? 그때 그 서류를 아직 가지고 있는 걸 보면 꽤 오래 전부터 도주 계획을 세운 모양이야?」
역시 나인은 천재라는,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감상이 스리의 뇌리를 스쳤다.
여기까지 간파당한 이상 이미 어떤 변명을 해도 소용없을 것이다.
하지만 스리에게는 아직 납득하기 힘든 점이 있었다.
아무리 이것이 일이라 해도, 아무리 나인이 천재라 해도 자신 역시 무척이나 신중하게 행동해 왔을 터였다.
그럼에도 이렇게 간단히 발각당했다. 대체 어째서?
「어떻게 들킨 거냐는 표정이네?」
작게 웃는 나인. 그 말 속에 비웃음이 섞여 있다는 것을 스리는 느꼈다.
「계속 널 보고 있었기 때문이거든? 너만을, 계속 바라보고 있었어」
물론 그것은 달콤한 말은 아니다.
「보고, 바라보고, 관찰하고, 감시하고…… 언제 네가 마각을 드러낼지, 이제나저제나 하고 기다리고 있었어. 그야말로 너와 파트너가 된 그 순간부터, 계속」
나인이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건지, 스리는 점점 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네가 이렇게 실제로 “조직”을 배신했지만, 만일 정말 그럴 생각이 없었어도 조만간 내가 날조했을 거야」
“관리인”이 이 자리에 있음에도 나인은 그렇게 내뱉었다.
스리는 점점 더 혼란스러워졌다. 일로서 자신을 감시했다면 그건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래서야 마치 처음부터 자신에게 악의를 품고 있었던 것 같은…… 거기서, 한동안 침묵하던 “관리인”이 낮게 웃었다.
「그렇군, 너는 아직 모르는군, 그녀에 대해서」
“그녀”가 나인을 뜻한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모른다”니, 무슨 뜻이지?
나인을 본다. 스리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녀에게서 느껴본 적 없는, 증오를 머금은 시선에 자기도 모르게 전율했다.
「네가 죽인 옛 파트너, 소드의 1에이스 오브 소즈은 내 친오빠야」
순간 스리는 심해에 가라앉은 듯한 착각에 사로잡혔다.
몽롱한 의식은 정상적인 사고를 용납하지 않았고, 찌부러질 듯한 중압감 속에서 숨조차 쉴 수가 없었다.
「이것으로 드디어 오빠의 복수를 할 수 있게 됐어」
나인이, 에이스의 동생?
나인은 처음부터 3년 전의 일을 알고 있었고, 날 감시했고, 내 곁에서 기회를 노려왔다.
내게―― 복수하기 위해.
마치 입에 말을 구사하는 기능이 있다는 것을 잊은 것처럼 스리는 그저 망연자실했다.
「이제 확인은 충분하겠지. 다음은 숙청의 시간이다. 자, 나인. 규칙에 따라 파트너이자 고발자인 네가 죽이도록」
“관리인”의 말을 듣고 나인은 한 발짝 앞으로 나왔다.
「내 손을 빌려도 좋다, 포상도 그대로다. 그저 숨통만 직접 끊으면 된다. 그러면 너는 정식으로 자유를 얻게 된다. 놓아주기에는 실로 아까운 재능이다만」
“포상”.
그것은 배신자인 파트너를 고발해 죽이면 주어지는 “자유”로워질 권리.
지금의 나인은 그야말로 스리가 바라 마지않던 그 “자유”에 도달하려 하고 있었다.
「아뇨, 저 혼자 하게 해 주세요. 오빠의 원수는 이 손으로 갚겠어요」
「좋다」
다시 한 발짝, 나인은 앞으로 나왔다.
곰인형에서 독침을 꺼내더니 재빠르게 스리에게 던진다.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독침을 떨쳐내는 스리. 거기서 단숨에 거리를 좁혔어야 했으나 그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애초에 방어한 것도 몸에 밴 싸움의 감각이 불러온 반사적인 동작일 뿐, 의식하지 못했다. 싸울 의사는 없었다.
상대가 나인이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그 이상으로 싸워봤자 의미가 없기 때문이었다.
설령 나인을 쓰러뜨린다 해도 그 뒤에 있는 “관리인”―― 《황제》디 엠퍼러에게는 결코 이길 수 없다.
여기서 죽을 운명이라는 건 이미 뒤집을 수 없었다……나인은 다시 독침을 꺼내더니 아까의 두 배를 스리에게 던졌다.
스리는 두 자루째의 검을 뽑아 그것을 전부 쳐냈다.
――그런가, 그렇군, 이게 인과응보라는 거구나.
그러자 나인이 스리에게 접근해 다시 공격을 가했다.
――경위야 어찌 됐든, 친구를 죽이고 살아남은 내게 “자유”로워질 자격이, “인간”이 될 자격이 있을 리 없지.
바늘과 실을 병용한 나인의 공격.
평소에는 스리가 접근전에서 나인에게 뒤지는 일은 없었으나, 거의 무의식으로 응전하는 상태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어느새 스리의 목에 강철실의 고리가 걸렸다.
――그럼 그 복수로 살해당하는 것도 당연한가. 나인의 손가락이 움직이고, 고리가 죄어들었다.
「이걸로 끝이야」
이제 여기까지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스리는 조용히 죽음의 순간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것은 찾아오지 않았다.

7. 제6권: 나인


내가 태어나자마자 어머니가 죽었다.
아버지와 오빠와 셋이서 살고 있었다.
철이 들 무렵부터 아버지가 지독한 놈이라는 것을 알았다.
어머니가 남긴 미라로 제대로 일하지도 않고 매일 술에 빠져 살았다.
기분이 언짢은 날엔 자주 집안에서 폭력을 휘둘렀다.
내 뒷바라지는 전부 오빠가 해 주었다.
집안에서도 밖에서도 오빠가 늘 나를 지켜주었다.
이런 집이라도 오빠와 함께라면 살아갈 수 있다고 어린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생활은 언제까지나 계속되지 않았다.
미라가 모두 떨어졌고, 아버지는 오빠와 내게 일을 시키려 했다. 하지만 어린아이가 벌 수 있는 액수는 너무나 뻔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무정하게도 오빠를 “팔아 치웠다”. 그때부터 나는 아버지를 가족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달리 의지할 곳이 없었고 오빠가 언젠가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헛된 기대를 품고 나는 그 집에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약 3년이 지났을까. 어느 날, 오빠에게서 편지가 도착했다.
굉장히 어려운 환경이긴 하지만 어떻게든 살아가고 있다는, 그런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거기 적혀 있는 방법대로 나도 오빠에게 편지를 쓸 수 있었다. 드디어 오빠와 다시 이어지게 되어 너무나도 기뻤다.
오빠가 “조직”이라 불리는 곳의 관리하에서 강제로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글자를 통해 그 괴로움이 아플 정도로 내게 전해져 왔다.
“조직”의 관리는 엄격해서 이렇게 편지를 주고받는 것도 오빠의 파트너가 협력해 준 덕분이라고 했다.
그 “파트너”에 대해 오빠는 자주 편지에 쓰곤 했다.
동료이자 친구로, 나이가 비슷한 동생 같은 사람이라고 했다. 그 사람에 대해 적을 때만 오빠의 문장이 조금 따뜻하게 느껴졌다.
어느샌가 나도 그 사람을 만나 보고 싶어졌다.
하지만 오빠조차 만날 수 없는 이 상황에 그것이 무리한 일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렇게 편지를 주고받는 나날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길지는 않았다.
집의 미라가 또 바닥을 보였다. 이번에는 내 차례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그 사실을 오빠에게 전하자, 그 이야기에 결심이 섰는지, 오빠는 파트너와 함께 “조직”에서 도망치기로 결정했다.
「꼭 돌아갈게」라거나, 나를 「이 집에서 구해내겠다」거나, 그런 이야기만으로 엮인 편지의 말미에는 딱 두 줄의 불길한 문장이 있었다.
「만일 도주에 실패하더라도 파트너만큼은 살려낼 거야. 무슨 일이 있거든 그 녀석한테 부탁해.」
그게 오빠에게서 받은 마지막 편지였다.
결국 오빠는 돌아오지 않았고 예상대로 나도 아버지의 손에 의해 “팔렸다”.
아버지는 뭔가 위험한 약에 손을 댄 것 같았다.
조만간 또 미라는 바닥을 보일 테고 그땐 그도 파멸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브로커를 거쳐 나 역시 “조직”으로 끌려갔다.
오빠의 죽음을 알게 된 것은 “양성소”에 들어간 바로 그 시기였다.
아마 나는 그때부터 망가졌을 것이다.
현실에서 도망치려고 필사적으로 훈련에 몸을 던졌다. 주변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자신조차 보이지 않았다. “마음” 따위 가지지 않는, 지시만을 수행하는 “인형”.
그리고 밤이 되면 죽은 오빠와, 자신이 혼자가 되었다는 사실, 앞으로 자신의 두 손이 피로 물들게 되리라는 생각에, 공포에 떨며 아침까지 기나긴 시간을 보냈다.
그래도 몸은 휴식을 요구했기에 하루에 1시간은 잘 수 있었다. 컨디션이 좋을 땐 2시간.
하지만 그 짧은 수면조차 악몽에 방해받기 일쑤였다.
그런 상태로 1년이 흐르고, 나는 이례적인 속도로 “양성소”를 졸업했다.
그리고――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오빠의 파트너였던 그 사람.
한차례 “조직”을 배신했던 그는 마침 “재교육”을 끝내고 나와 팀을 짜게 되었다.
오빠를 죽인 장본인인 그를 처음엔 미워하기로 했다. 눈을 번뜩이며, 모든 신경을 곤두세워 그를 감시했다.
여러 날이 지났고, 마침내 팽팽해진 신경이 한계를 넘어 끊어진 것일까, 아니면 본능이 “괜찮다”고 판단한 것일까. 어느 날 임무 뒤에 나는 그의 바로 곁에서 잠들어 버렸다. 1년 만의 깊은 수면이었다.
그의 곁은 오빠처럼 포근한 느낌이 있었다. 깨어난 나는 많은 것들을 떠올리고는 나도 모르게 울고 말았다.
흘린 눈물과 함께 마음에 걸어 두었던 족쇄가 풀리고 “인간의 마음”을 이제야 되찾은 기분이었다.
흐느껴 우는 나를 그는 당황하며 달래려고 했지만, 결국 울음소리만 커질 뿐이었다.
그는 오빠의 편지에 적힌 그대로의 인물이었다.
무뚝뚝하고 조금 서투르고, 하지만 파트너를 깊이 배려하는 상냥한 사람.
“조직”에 속박당해 살인을 강요당하지만 그래도 “인간”이 되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강한 사람.
다만 편지 속의 그보다 커다란 슬픔을 짊어지고 있었다. 그런 그가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오빠를 배신했을 거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편지에 남겨진 마지막 말에서 진실은 쉽게 추측되었다.
도주 후 절망적인 위기에 빠진 오빠와 스리.
두 사람이 살해당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라도 살아남는 편이 낫다.
한쪽이 다른 한쪽을 죽이면 그것이 가능했다.
하지만 그런 제안을 해봤자 분명 그는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인정한다 해도 자신이 죽겠다고 했을 것이 뻔했다.
그래서 오빠는 그를 기습해서 그를 배신하는 시늉을 했다.
그로 하여금 자신을 죽이게 하고 그를 살렸다.
제일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했다는, 커다란 마음의 상처를 주고……지독한 사람이야, 오빠는.
그리고, 그의 곁이 내게는 가장 안심할 수 있는 장소가 되었다.
마치 1년분의 수면을 되찾는 것처럼, 낮이든 임무 중이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나는 그의 곁에서 잠이 들었다.
그가 종종 황당해할 만도 했다. 하지만 정작 그가 항상 악몽에 시달린다는 것을 나는 안다. 그 원인의 하나가 오빠와의 일일 것이다.
그의 괴로운 모습을 보고 나는 몇 번이나 그에게 진실을 말하려 했다.
하지만 안 돼! 아직 때가 아니야!
그는…… 연기가 서투르다. “양성소”에서 그런 훈련도 받았기 때문에 딱히 동작이나 표정이 서투른 것은 아니다.
다만 이상하게 성실한 구석이 있기 때문일까, 도가 지나치거나 역으로 모자라거나 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
예리한 사람에게는 쉽게 들킨다. 분명 천성적으로 사람을 속이는 것을 꺼리는 성품인 것이리라. 그러니 아직 그에게 나에 대해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그는 오래 전부터 도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다고는 하지만 내게 이야기하지 않았던 것은 조금 섭섭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다. “조직”이 그를 의심하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물론 나는 그가 불리해질 만한 보고는 하지 않지만, 그 불안한 연기가 “조직”에 간파당했다간 그땐 속수무책이다.
아직 결정적인 증거는 없을 테지만 그것도 시간 문제일 것이다.
할도르 바른 암살 보고를 끝내고 난 후. 내 눈앞에 있는 남자는 평소와 명확히 다른 분위기였다.
그자가 바로 “관리인”―― 황제디 엠퍼러. 우리를 관리하고 살인을 강요하는 이른바 “악의 우두머리”다.
언제나 로브로 얼굴을 가리고 있지만 그 불길한 기운만큼은 가려지지 않았다.
지금의 엠퍼러는 마치 사냥감을 발견한 매처럼 조용히 흥분하고 있었다.
확실해! 엠퍼러는 그의 배신을 확신하고 있어!
아마 금방이라도 그를 죽일 작정인 거야……그렇다면 내 작전을 실행할 뿐. 내게 오빠에 대해 알려준 뒤 그와 짝을 지어 준 엠퍼러의 의도는 명백했다.
내가 복수심을 느끼는 것, 그를 함정에 빠뜨려 고발하는 것, 그에게 다시 절망을 맛보여주는 것, 그리고―― 자신이 그것을 보고 즐기는 것.
우리는 “조직”의 도구인 동시에 엠퍼러의 장난감이기도 하니까.
그렇다면 바라는 대로 해주겠어――
보고를 마치고 파트너가 배반하려 한다는 것을 엠퍼러에게 전했다.
나는 거기다 장소와 시간을 지정해 그를 불러내 죽이는 절차까지 엠퍼러에게 이야기하고 승낙을 받았다.
로브 아래에 숨긴 얼굴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지만 그 말끝에 새어 나오는 유열의 울림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해 질 녘, 그는 지정 장소인 산속의 언덕으로 왔다.
갑작스러운 배신 고발에 그는 심하게 동요했고, 거기에 오빠와 나의 관계를 이야기하자 그 얼굴에 경악과 절망과 체념이 뒤섞였다.
그의 그런 표정을 보고 나도 슬퍼졌다.
하지만 비웃음과 증오와 살의를 담은 시선을 그에게 보냈고 악의로 충만한 말들로 그의 마음에 상처를 입혔다.
옆에 있는 엠퍼러를 속이려면 아주 조금의 망설임도 허용되지 않는다.
그를 공격하기 위해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강철실로 공격하기 위해 접근했다.
하지만 진짜 의도는 엠퍼러에게서 거리를 두는 것이었다.
맥없는 반격을 받아내고 싱겁게 우위를 점했다.
강철실의 고리가 그의 목에 걸리고, 결판이 났다. 이제 아주 조금만 힘을 주면 그의 목숨은 끝이 난다.
손가락을 움직이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걸로 끝이야」
연기가 아닌, 온전한 진심의 목소리.
강철실에 섞여있는 투명실이 내 움직임에 따라 죄어들었다.
나무들을 타고 멀리서 복잡한 기하학 문양을 이룬 실들이 순식간에 고리를 만들어 그 중심에 있는 사냥감을 잡아 올렸다.
――장난감이 살해당하는 순간에 집중한 나머지 주위에 대한 경계심이 풀어진 상태였던 엠퍼러를.
「끄으윽――――」
최선의 타이밍으로 가한 불의의 습격이 멋들어지게 엠퍼러를 속박했다.
이 투명실은 절단력이 거의 없지만, 이 실이 아니었다면 나무를 매개로 한 트릭도 완성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강도는 강철실의 몇 배나 됐지만, 엠퍼러를 상대로 언제까지 버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즉시 준비했던 다른 실을 힘껏 당겼다.
그러자 쾅쾅……하는 낮은 소리가 울려 퍼지고 언덕의 바위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전부터 이 근처에서 암반이 약한 곳을 찾아 준비해둔 것이다.
낙석이 무더기로 굴러 떨어졌다. 그 중엔 10에이쥬 이상의 거대한 바위가 있었다.
그것이 정확히 엠퍼러의 머리 위쪽으로 “쿠우웅” 하는 굉음과 함께 땅을 울리며 떨어졌다.
낙석이 끝난 현장은 마치 지진이 일어난 뒤처럼 참혹했다.
저만한 질량에 직격을 당했다. 아무리 엠퍼러라 해도 살아있지는 않을 것이다. 죽지 않았다 해도 생매장이다.
옆에 있던 그는 아직 사태를 이해하지 못하는지 멍한 표정으로 서있었다.
「스-」
겨우 그의 이름을 부르고는 힘껏 그의 가슴에 뛰어들었다.
내가 가장 안심할 수 있는 곳. 그의 품 속에 파고들어 절대 떨어지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어리광을 부리는 건 역시 처음…… 하지만 정말로 무서웠단 말이야.
「이것저것 심한 소리를 해서 미안해……말 안 해서 미안해……」
설명해야 할 것은 많았지만, 어쨌든 이 말을 하고 싶었다.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그는, 그럼에도 부드럽게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나인, 대체 무슨――」
그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이변이 일어났다.
낙석의 산이 희미하게 진동하더니 작은 돌들이 느리긴 하지만―― 공중으로 떠올랐다.
「뭐야!?」
놀라 눈을 부릅뜨는 우리들.
「공속성 아츠? 아니……」
그것과는 다른 것 같다…… 아니면 비행선과 같은 비상 기관인 걸까?
모르겠어……머릿속을 뒤지고 있는데 그는 긴박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건 “관리인”의…… 엠퍼러의 능력이야!」
「뭐?」
나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그것이 뜻하는 바는, 엠퍼러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
그러는 동안 더욱 많은 돌들이 떠올랐다.
「도망가자! 나인!」
그가 멍해진 내 손을 끌어당기며 달리기 시작했다.
상당한 거리를 달린 뒤, 커다란 폭발음에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서는 마치 화산이 폭발한 듯, 거대한 바위가 하늘 높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8. 제7권: 눈물과 약속


루젠트의 산모퉁이에 위치한 동굴에서 스리와 나인은 몸을 숨기고 있었다.
“관리인”―― 황제 디 엠퍼러에게서 도망친 뒤 스리는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며 나인의 이야기를 들었다.
에이스의 이야기, 나인 자신의 이야기, 이번 작전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3년 전의 진실에 대한 이야기.
처음에는 가끔씩 질문을 던지던 스리가 중간부터는 침묵하더니, 마지막에는 고개를 숙여서 얼굴도 보이지 않는다.
자신을 배신했다고 생각한 벗이 실은 배신하기는커녕, 목숨과 바꾸어 자신을 구해주었다.
그런데도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 채 그의 목숨을 빼앗고 그를 쭉 원망했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의 동생이, 오빠의 원수인 자신을, 목숨을 걸고 지켜주었다……온갖 생각들이 교차했다.
믿어야 할 사람이 곁에 있었다는 것, 그리고 지금도 있다는 것에 대한 안도와 기쁨.
동시에 한심하고 형편없이 어리석은 자신에 대한 끝없는 분노.
따스한 감정과 칙칙한 감정이 오가면서 숨이 막힐 지경이 되었다.
「스-, 울어?」
계속 침묵하는 스리를 보며 나인이 물었다.
「안 울어」
늘 그랬듯 냉담하게 대답하는 스리.
「나-가 달래줄까?」
「안 운다니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여전히 얼굴을 들지 않는다.
「스-는 연기가 서투른데, 거짓말은 더 서투르네~」
나인은 바닥에 주저앉은 스리에게 다가가 살며시 그의 머리를 끌어당겨 가슴에 댔다.
그리고 어머니가 아이를 달래듯 상냥하게 그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제 괜찮아~ 괜찮아~」
「그러니까, 나…는……」
반론하려 했지만 나인의 상냥한 손놀림에 막히고 말았다.
외모도 실제 나이도 어린 나인에게서는 마치 어머니와도 같은 포용과 자애가 넘쳐 흘렀다.
어머니의 온기라는 것을 모르고 자란 스리는 이때 처음으로 그것을 느낀 것일지도 모른다.
「스-는 열심히 했어~ 나-는 잘 알아. 그러니까 괜찮아~ 괜찮아~」
스리는 결국 오열을 멈출 수 없게 되었다.
「나-는… 윽… 왜 이렇게, 한심하게……」
울먹이는 목소리. 뜨거운 액체가 눈에서 흘러 넘쳤다.
「아니야」
나인은 상냥하게 스리의 머리를 계속해서 쓰다듬었다.
「왜 나 같은 게 살아있고, 에이스가 죽은 거냐고」
「그런 말 하지 마. 스-의 존재가 나-를 구했어」
「하지만 나 때문에, 에이스가……」
「그러니까 오빠 몫까지 열심히 살자, 응?」
「나는, 나, 는, 으윽……」
그것은 스리가 태어나서 처음 하는 통곡이었다.
마치 몇 년이나 모아 두었던 것들을 단숨에 풀어놓은 듯한, 마음 속 깊숙한 곳까지 씻어낸 듯한 감각을 스리는 느꼈다.
한참 뒤에야 스리는 간신히 조금 진정할 수 있었다.
「괜찮아, 나-가 옆에 있잖아. 그러니까 울지 마~ 그래도 많이 울어도 돼~」
「대체 어느 쪽이야」
조금은 냉정을 되찾은 스리는 자신이 아직도 나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당황해서 몸을 떼었다.
부끄러움을 얼버무릴 겸, 정보 교환으로 화제를 되돌렸다.
그렇다고는 해도 정보 교환은 나인의 설명으로 어느 정도 끝났기에 대화의 방향은 현재 상황 정리로 접어들었다.
「즉 내가 배반하려는 걸 “관리인”이 눈치챘고.그래서 나인이 선수를 쳐서 놈의 의표를 찌르려 했다고」
「응. 계속 그 녀석을 쓰러뜨릴 기회를 찾고 있었어」
「나한테도 이야기해 줬으면 좋았을 텐데」
「그치만 스-는 연기를 못하잖아」
씁쓸한 표정을 짓는 스리.실제로 엠퍼러에게도 나인에게도 계획이 들키고 말았으니 반론의 여지가 없었다.
「타이밍은 완벽했을 테고 준비도 충분했고, 그 녀석이 가장 방심한 순간에 가장 확실하게 죽일 수 있는 방법을 썼어. 그런데……」
그런데도 죽지 않았다.그 낙석 속에서 대체 어떻게 살아남은 걸까, 그리고 마지막의 그건……
「아마 놈의 능력일 거야」
도망치기 전에도 스리는 이런 이야기를 했었다.
「능력이라니?」
「아마도 중력을 조작할 수 있는 능력……3년 전에 나랑 에이스도 그 능력 때문에 궁지에 몰렸었어」
스리는 쓰라린 기억을 억지로 꺼내 이야기했다.
두 번이나 “조직”의 추격자를 격퇴했으나, 세 번째로 온 자가 엠퍼러였다.
허점을 찌르려 해도, 협동해서 공격하려 해도 놈의 앞에서는 어째서인지 몸이 무거워져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반대로 녀석은 몸이 가벼워진 것처럼 민첩한 동작으로 스리와 에이스를 압도했다.
「어떻게 생각해?」
이야기를 마치고 스리가 나인에게 물었다.
「구동하는 기미가 없었으니 아마 아츠는 아닐 거고,휴대 가능한 크기의 중력 제어 장치도 현재 기술 레벨로는 고려하기 어렵고……아마도 어떤 특이체질, 혹은 고대유물아티팩트……낙석으로 죽지 않았던 건 중력으로 바위를 제어했기 때문…일까? 이것만으론 정보가 부족해……」
일단 말을 끊고, 나인은 계속했다.
「어느 쪽이든 그런 능력을 지닌 상대랑 정면으로 싸워 봤자… 죽음밖에 없어」
침묵이 둘 사이를 흘렀다.그리고 그것을 깨뜨린 것은, 무겁게 입을 연 스리였다.
「여차할 때는, 이번에는 네가 날 죽이면――」
「싫어――――!!!」
나인으로서는 아주 드물게도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절규로 스리를 막았다.
「스-가 죽으면 나-도 뒤를 쫓아 죽을 거야! 자살할 거야!!」
조금 전의 자애 넘치는 어머니 같던 나인은 온데간데없고, 이번에는 투정을 부리는 어린아이가 된 나인. 다만 내용은 진지함 그 자체였다.
「이제 잠들 수 없는 밤으로 돌아가는 건 싫어……외톨이가 되는 건… 싫어……」
작아지는 목소리에는 무거운 감정과 결의가 담겨있다.그것을 감지한 스리는 짧게 한숨을 쉬고는 심호흡을 한 번 한다.
「알았어. 약속할게. 무슨 일이 있어도 꼭 나인을 지킬게」
「그러니까 그것만으로는 안 된다니까!」
「그래, 알았어. 그러니까 이것도 약속할게.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나도 함께 살아남을게」
나인은 그 말을 듣고 절실한 눈빛으로 스리를 바라보았다.
「정말?」
「정말이야. 그러기 위해 지금 해야 할 최선의 행동은――」
그만한 낙석의 직격탄을 받았다. 설령 살아있다 해도 엠퍼러가 상처 하나 없을 거라고는 생각하기 힘들다.
지금은 여기서 도망쳐 봤자 결국 “조직”에 잡히고 말 것이다.
그때 완전히 회복한 엠퍼러와 싸운다면 결코 승산은 없을 것이다.
하려면 지금밖에 없다.
「우리가 먼저 공격해서 황제디 엠퍼러를 쓰러뜨리자!」

9. 제8권: 중력과 고대유물


스리와 나인은 언덕, 아니, 언덕이었던 곳으로 돌아갔다.
여기저기에 전보다 암석이 훨씬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중앙에 황제디 엠퍼러가 태연하게 서 있었다.
예상이 적중했다고 해야 할까, 역시 엠퍼러는 완전히 무사하진 않았다. 최소한 늘 두르고 있던 낡은 로브는 약간의 천조각을 제외한 대부분이 사라져 있었다. 그렇게 그 아래에 감추고 있던 것이 드러났다.
윗부분에 왕관 부조가 새겨진 황금 투구, 끝이 구형으로 되어 있는 황금 지팡이, 그리고 전신을 덮은 황금 갑옷.
결코 “화려하다”는 단어만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그야말로 가죽 아래 숨겨진 거만함과 오만의 현현과도 같은 복장이었다.
「너희는 영리하지. 돌아올 것을 믿고 있었다」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스리와 나인은 그에게 다가갔다.
「자, 누가 누구를 죽일지 정했나?」
두 사람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마주보았다.
스리는 눈을 감고 손을 검에서 떼어 저항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했다.
나인은 독침을 꺼내 스리에게로 투척――한 것은 시늉일 뿐,독침이 손끝에서 떨어지기 전 방향을 틀어 엠퍼러에게 던졌다.
그러나 침은 일정 거리를 날아가다가 갑자기 방향을 바꾼 것처럼 포물선을 그리며 허무하게 지면을 향해 떨어졌다.
「그런가, 대답은 『둘 다 죽는다』인가」
「아니」
나인이 다시 침을 던졌다. 이번에는 위로 비스듬히. 동시에 스리가 달리기 시작했다.
「대답은, 『둘이서 당신을 죽인다!!』」
소리치며 스리는 빠르게 이동해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 동작은 엠퍼러에게 다가간 순간 둔해졌고, 엠퍼러는 어렵지 않게 지팡이로 막아냈다.
그때 공중으로 던져진 침이 중력장의 영향으로 방향을 틀어 정확히 엠퍼러 쪽으로 떨어져 내렸다.
나인은 처음 단 한 번의 순간에 중력장의 범위와 영향력을 파악하고 포물선을 이용한 궤도로 수정한 것이었다. 심지어 중력장에 의한 가속도를 이용한 만큼 평소보다 관통력이 강했다.
하지만 그것 역시 엠퍼러가 왼팔을 한 번 휘두르자 막히고 말았다.강력해진 침으로도 그 황금 갑옷을 뚫을 수 없었다.
「날 거역한단 말인가, 나를!」
지팡이를 내려친다. 즉시 스리가 검으로 막아냈지만 충격으로 몇 에이쥬나 뒤로 날려갔다.
「커헉……」
간신히 버티긴 했지만, 마치 거대한 망치에 맞아 날아간 듯한 그 충격은 결코 근력과 지팡이의 무게로만 가능한 것이 아니다. 이 역시 「중력」을 조작하는 능력의 일부일 것이다.
「“숙청”의 시간이다」
그것은 바로 몇 시간 전, 그리고 3년 전 그때도 들었던 말.
사형 판결처럼 들리는 그 말에 스리는 그때의 공포를 떠올리고 휘청거릴 것 같아졌지만, 뒤에 있는 나인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꾹 참았다.
지체 없이 태세를 정비한 스리가 다시 덤볐다. 스리의 공격에 맞춰 나인도 침을 던져 원호했다. 그러나 양쪽 모두 결과는 마찬가지.
하지만 즉시 세 번째, 네 번째 차례를 거듭할수록 고중력 속에서도 공격이 익숙해지면서 스리의 검은 빠르고 날카로워졌다.
근육을 움직이는 법, 검을 휘두르는 법, 궤도, 각도…… 낭비가 점점 줄어들었고 엠퍼러도 점점 대처할 여유가 줄어들었다.
스리의 통찰력은 나인에게 미치지 못했으나, 근접전에 대한 자질만큼은 확실했다.
동시에 나인의 원호도 멈추지 않았다. 침을 이용한 공격은 확실히 갑옷을 뚫을 수는 없었지만 나인은 중력장의 영향에도 정확하게 갑옷의 틈새를 노렸다. 아츠 공격도 간간히 섞으니 더욱 강력해졌다.
엠퍼러로서는 대처가 어렵지는 않았으나, 이번엔 스리를 향한 주의력이 흐트러졌다.
그쪽은 그쪽대로 갈수록 성가셔지고 있었다.
몇 차례의 접전 뒤, 전황은 스리와 나인이 압도하는 듯했다.
하지만 투구 속에 숨겨진 엠퍼러의 표정에 초조해하는 기색은 느껴지지 않는다.
가끔 스리의 검이 엠퍼러의 갑옷에 명중했지만 별다른 효과는 보이지 않았다.
스리가 도약한 순간 마치 등에 날개가 달린 것처럼 스리의 몸이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의도치 않은 것이었다.
위험하다고 느낀 순간 이미 칼끝은 빗나갔고 자세도 무너져 있었다.
「중력을 줄였어!?」
동시에 도약한 엠퍼러는 공중에서 지팡이를 상단으로 치켜들어 단숨에 내리쳤다.
스리가 지면에 처박혔다.
「커헉!」
폐에서 밀려나온 공기가 핏방울과 함께 흩날린다.
「아직 안 끝났어! 피해!!」
나인의 외침을 듣고 스리는 간신히 몸을 옆으로 굴렸다.
거의 동시에 중력이 다시 커지며 스리가 떨어진 곳을 노려 엠퍼러가 지팡이를 아래로 내리찍었다.
충격파와 함께 지팡이를 중심으로 작은 크레이터가 생겼다.
「스-!!」
충격파만으로 옆으로 날아간 스리는, 만일 지팡이 바로 밑에 있었다면 지금쯤 곤죽이 되었으리라고 생각하면서 나인의 외침에 대답하며 다시 일어났다.
그 뒤로 전황은 일변했다.
중력을 자유자재로 조종하는 엠퍼러를 상대로 스리는 방어 일변도가 되었다.
몸이 중력장에 익숙해졌다 싶으면 금세 또 중력의 크기가 바뀌어 의표를 찔린다. 이래선 제대로 공격할 방법이 없었다.
나인도 중력이 변화할 때마다 그 범위와 값을 측정해야 했기에 유효한 공격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어떻게든 버티고는 있었다.
스리는 전위 담당으로서 확실히 우수했고 밀리면서도 엠퍼러에게 결정타를 가할 기회를 주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 시간을, 후방의 나인 역시 헛되이 하지 않았다.
「스-」
일단 엠퍼러와 거리를 둔 스리에게 나인이 말을 걸었다.
「조금 알 것 같아」
「그래, 부탁해」
엠퍼러의 공격을 경계하며 나인의 말을 기다리는 스리.
「3년 전에 싸웠을 때랑 비교해서 뭔가 달라진 점은 있어? 특히, 왼손. 뭔가 가지고 있지 않았어?」
지금의 엠퍼러는 왼손에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스리가 경험했던 과거의 전투에선……
「분명…… 금으로 된 까마귀 조각이 새겨진 구체를 들고 있었던 것 같아. 그리고 그땐 지금보다 더 일방적인 싸움이었어」
「역시」
스리도 희미한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지만, 자신들을 업신여겨 봐주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나인의 반응을 보니 아무래도 그게 아닌 듯했다.
「호오? 눈치챘나」
엠퍼러는 감탄하는 듯한 음성을 흘렸다.
그리고 『답을 확인하게 해 주마』라고 하듯 공격을 멈추었다.
「저 녀석이 몸에 두르고 있는 것,중력을 조작하는 고대유물아티팩트은 원래 4개가 한 세트일 거야」
「4개?」
「중력장을 발생시켜 중력의 크기를 변화시키는 황금 투구. 공격을 받은 순간 그 대상의 중력을 흡수하는 갑옷. 접촉한 곳에 국소적으로 강력한 중력파를 전달하는 지팡이의 왕홀. 그리고, 대상을 지정해 중력장의 효과를 구별하는 까마귀 보주」
즉 엠퍼러는 고대유물아티팩트을 전신에 장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확실히 로브를 쓰고 싶어질 만도 했다. 그 모습을 드러냈다간 틀림없이 칠요교회에 포착당할 것이다.
「확실히…… 이번에는 이쪽이 감속당하는 일은 있어도, 동시에 저쪽이 가속되는 일이 없어. 3년 전에는 그 때문에 꼼짝도 못했거든」
이번에도 엠퍼러의 중력장에 농락당하고는 있으나, 어디까지나 쌍방이 같은 중력 아래에서 싸우고 있다. 상대와 다른 중력 아래에서 싸웠던 저번과 비교하면 아직 활로가 있었다.
「아마 보주는 어딘가에서 잃어버렸거나 아까의 낙석으로 부서졌을 거야」
그런 의미로도, 지금이야말로 엠퍼러를 쓰러뜨릴 최대의 찬스.
「훌륭하다」
엠퍼러의 낮은 목소리가 전해져 왔다. 유열이 섞여있는 목소리.
「내가 보유한 고대유물아티팩트, 《조림의 레갈리아》를 단시간에 이만큼이나 분석해내다니. 역시 너는 일재다, 소드의 9나인 오브 소즈」
「당신한테 칭찬받아 봤자 하나도 안 기뻐」
엠퍼러는 고양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갑자기 폭풍 같은 살기를 발했다.
「하지만 아무리 우수한 도구라 해도 내게 쓰이지 않는다면──」
엠퍼러는 자신과 주위를 공중에 띄우더니 부유하는 암석들을 지팡이로 차례로 후려쳤다.
「가치는 없다!!」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부서져 흩어지는 바위가 있는가 하면 덩어리의 크기를 유지한 채 날아가는 바위도 있었다.
그것들은 일직선으로 나인을 향해 쏘아졌다.
「나인!!」
부서진 것은 산탄, 덩어리진 것은 포탄처럼 나인을 덮쳤다.
마치 이곳만이 전쟁터가 되어 적군의 집중 포화를 당하고 있는 듯한 형국이었다.
스리는 황급히 탄도 사이로 뛰어들었다.
날아드는 바위를 검으로 쳐내고, 막고, 부수고, 몸을 방패 삼아서라도 나인을 지키려 했다.
하지만 원체 거리가 있었던 탓에 이미 태반의 바위가 그의 위치를 뛰어넘고 있었다.
――늦은 것이다.
별다른 방어 수단이 없었던 나인은 피하는 수밖에 없었지만 그 수는 너무나도 많았다.
작은 바위를 무시하고 큰 바위만 피하려 노력했지만 그럼에도 마지막에는 유달리 큰 바위가 복부에 명중했고 그녀는 피를 토하며 그 자리에 쓰러졌다.

10. 제9권: 분노와 읽기


「나이이이인!!!!」
비통하게 소리지르며, 스리는 나인에게로 달려갔다.
이마, 입, 손, 다리…… 온몸에 핏자국이 흩어진 어린 소녀의 모습은 너무나도 무참했다.
아무리 스리가 불러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지키겠다고 약속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겠다고 자신에게 맹세했다.
그런데 그녀는 지금 이런 모습이……자신이 너무나도 한심스러워서, 스리는 온몸이 불타고 있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거기서 엠퍼러가 입을 열었다.
「아직 숨은 붙어 있나? 그렇다면 네가 끊어라. 그러면 목숨을 살려주마. 그때처럼 말이다」
무언가가 자신 안에서 터지는 소리를, 스리는 들었다.
「남매가 사이좋게 같은 상대, 같은 파트너에게 죽는다면 그것도 나름 만족스럽겠지」
투구에 가려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추악한 얼굴이 선명히 눈앞에 떠 있는 것 같았다.
「이놈… 엠퍼러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
몸속을 방황하던 자신에 대한 갈 곳 없는 분노가 출구를 찾아낸 것처럼 단숨에 폭발했다.
다리가, 팔이 움직인다. 목이 떨리고 팔이 삐걱거리고 피가 솟구친다. 분노가 스리의 몸을 움직여 엠퍼러에게로 덤벼든다.
원래도 빨랐던 스리의 참격이 더욱 빠르고, 더욱 힘차고, 사납게 휘몰아치는 폭풍처럼 눈앞의 적을 삼키려 했다.
응전하는 엠퍼러는 다시금 중력을 변화시켰지만, 그 「변화」 자체에 스리는 점점 익숙해져 갔다.
반쯤 본능에 몸을 맡기고 있는 스리. 그로 인해 감각이 예민하게 작용하여 어마어마한 속도로 순응해 갔다.
점점 스리의 공격을 받아내지 못하는 엠퍼러는 여러 번 참격을 맞지만 그럼에도 여유로운 표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야수가 된 건가. 물론 도구에 의사 따위 필요 없다지만 이렇게나 이성이 느껴지지 않게 되다니, 이쯤 되니 우습군!」
사실 엠퍼러는 거의 타격을 입지 않았다.
화려하게 움직이는 스리는 일견 우세해 보이긴 했지만 실제로는 아직 엠퍼러의 손바닥 안에서 놀아날 뿐이었다.
문득, 스리는 나인의 말을 떠올렸다.
떠올릴 수 있었던 건 그의 마음속이 아직 “냉정”함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3년 전과는 달리 분노에 몸을 맡기고 있는 자기자신을 냉정하게, 그리고 냉철하게 바라보고 있는 또 하나의 자신이 있었다.
언제라도 멈출 수 있지만 하지 않는 편이 사태를 좋은 방향으로 이끌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일부러 멈추지 않았다.
자신은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지금 그가 하고 있는 「감정을 컨트롤하고 그에 더해 그것을 힘으로 변환하는」 행위는 무술의 달인이라도 그리 쉽게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공격을 받은 순간 그 대상의 중력을 흡수하는 갑옷』
나인은 그렇게 말했다. 확실히 아무리 베어도 전혀 반응이 없다.
베어도 쳐도 소용이 없다면―― 내부를 폭발시킬 수밖에!!
보통이라면 이 상황에서 포기했을지도 모르지만, 스리에게는 오히려 적합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스리는 양손에 든 각각의 칼을 합체시켜 한 자루의 대검으로 만든 뒤 다시 쥐었다. 그리고―― 베었다!
그의 검은 두 자루의 검이 각각 같은 곳을 베고, 합체시킨 세 자루째의 검으로 다시 한번 베면 내부를 폭발시키는 특성이 있다.
엠퍼러에게는 이미 상당한 참격을 가해 몇 군데 쌍검을 교차시켰다.
남은 공정은 하나뿐. 이 대검으로 같은 곳을 베면 된다.
아까까지의 기세를 유지한 채 스리는 엠퍼러를 후려 베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맞질 않았다. 노린 위치가 꼭 1, 2리쥬씩 어긋났다.
스리의 이 “점격 폭발”을 발동시키는 단계로, 첫 번째 공격과 두 번째 공격은 선과 선을 교차시키면 된다. 하지만 세 번째 공격은 그 선과 선이 교차한 “점”을 정확히 포착해 그 한 점에 참격을 가해야만 한다. 당연히 세 번째 공격의 난이도가 월등히 높아진다.
하지만 스리는 그것을 명중시킬 자신이 있었다. 그럴 기량도 있다. 그런데도 맞지 않았다.
엠퍼러는 마치 희극을 감상하고 있는 것처럼 스리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도구의 성능도 모르는 명수가 어디 있나? 네 공격 방법도, 그 무기의 특성도 파악하고 있다」
그 말을 증명하듯 스리의 참격이 다시 빗나갔다.
그리고 즉각 날아오는 엠퍼러의 반격. 지팡이를 이용한 일격이 최적의 각도로 스리에게 쏘아졌다.
이유는 안다.
공격이 닿기 직전 중력이 변화한다. 실로 절묘한 타이밍. 그 순간에 궤도를 수정하는 건 불가능했다.
지팡이의 중력파 공격은 접촉하지 않는 한 발동하지 않지만, 닿기만 하면 그 충격은 매우 크다.
스리는 상대의 공격을 전부 검으로 막거나 비껴내고 있었지만 그것마저도 엠퍼러의 계획대로였다.
접촉만 하면 결정적인 일격이 아니더라도 충격에 의한 타격은 확실하게 축적된다.
언제까지고 유효한 타격을 가하지 못하고 있는 스리.
반면 확실하게 타격을 축적시켜 가는 엠퍼러.
승부의 행방은 명백했고 상황을 뒤집을 방법도 보이지 않았다.
거듭된 공방으로 인해 스리는 이미 너덜너덜해져서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그때―― 스리가 잘 알고 있는, 언제나 졸린 듯한 “그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해석… 완료」
비틀거리며, 쓰러져 있던 나인이 일어났다.
「무…슨」
엠퍼러에게서 경악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나인! 괜찮아?!」
기절한 게 아니라 기절한 척하며 적을 해석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가능성을 스리도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확신은 없었다.
나인은 일부러 스리에게 아무것도 알리지 않았다. 그렇지 않으면 엠퍼러에게 간파당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괜찮아, 그냥 찰과상. 몸 앞에 실을 쳐서 바위의 기세가 많이 꺾였어」
도저히 찰과상만 입은 상태로는 보이지 않았지만, 일단 치명상은 피할 수 있었던 모양이었다.
스리는 우선 엠퍼러와 거리를 두었다. 그리고 신중하게 세 사람의 위치 관계를 의식하며 나인에게 다가갔다.
「저 녀석의 중력을 조작하는 능력, 그 약점은 순간적으로는 발동시킬 수 없다는 것」
「무슨 소리야?」
「아츠 같은 구동은 필요없지만 저 녀석이 중력을 조작할 때 그 효과가 발동하기까지는 반드시 몇 초의 타임 래그가 있어. 낙석이 있던 순간 막을 수 없었던 이유가 그거야」
「하지만 아까 공격할 때는 전부 절묘한 타이밍에 중력이 변화했어. 그건 어떻게 가능했다는 거야?」
「전부, 읽었어. 그 녀석이, 스-의 움직임을, 전부」
「뭐!?」
「전부 읽고, 전부 예측해서, 전부 조작한 거야」
「그런 게 가능해!?」
「고대유물아티팩트을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야, 그런 전투 센스를 지니고 있어서지. 그러니까 저 녀석은 괴물이야」
거기서 엠퍼러가 낮은 웃음소리를 냈다.
「알았다 해도 결과는 변하지 않는다. 네 전투 방식은 이미 훤히 안다. 스피드, 파워, 검의 궤도, 버릇…… 오랜 세월 몸에 익은 전투 방식을 갑자기 바꿀 수는 없지」
「스-」
「그래, 알아. 끝을 내자」
시선을 교환하고 서로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두 사람은 다시 엠퍼러와 대치했다.
스리는 최고 속도로 발을 내디뎠다.
검을 쥐고 대각선으로 상단 대시 베기. 당연하다는 듯 엠퍼러는 그것을 피하고 계속해서 반격했다.
처음 몇 번은 페인트를 섞은 사전 준비.
서로가 그것을 알고 진정한 일격에 대비한다……여기다! 엠퍼러는 그렇게 판단하고 중력을 조작했다.
예상대로 스리는 반 발짝 빠르게 검을 내밀어 두 번이나 “마킹”한 한 점을 노렸다.
중력이 바뀌고 검의 궤도가 살짝 어긋났……으나, 마치 그것을 예측했다는 듯, 어긋난 궤도가 정확한 위치로 향했다.
엠퍼러는 강제로 물러나면서 아슬아슬하게 그것을 회피했다.
스리의 지금 동작은 이전과는 어딘가 달랐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잠시. 엠퍼러에게 다음 참격이 덮쳐들었다.
이번에도 타이밍과 궤도를 예측해서 중력을 조작한다.
그러나――펑!!――――둔한 폭발음이 울려 퍼지며 엠퍼러의 갑옷 일부와 왼팔이 타격을 입었다.
「이럴 수가!!?!」
즉시 또 한 번의 섬광. 펑!!――――이번에는 오른쪽 다리가 손상되었다.
대체 왜지!?
움직임을 예측하고 실행한 중력 조작을, 한층 더 예측해서 사전에 궤도를 수정했다고!?
나의 읽기 능력을 완전히 뛰어넘었다는 건가!?
그런 것을 스리가 할 수 있을 리가――거기서 엠퍼러는 겨우 알아차렸다. 스리의 몸에 몇 개나 되는 투명한 실이 감겨 있다는 것을.
연결된 실 끝에는 말할 것도 없이―― 나인.
나인이 딱히 꼭두각시처럼 스리를 조작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적절한 타이밍에 적절한 각도와 적절한 방향으로 스리를 유도한다.
엠퍼러가 읽은 것을 또다시 읽어 공격의 궤도를 수정해 명중시킨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나인의 우수한 두뇌는 물론, 무엇보다도 파트너인 스리를 이해하고 있었던 덕택이었다.
스리가 전장에서 어떤 식으로 움직이고 어떻게 싸우는지 나인은 가장 잘 이해하고 있었다. 자연히 스리의 전투 방식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도 안다. 그렇다면, 그 의표를 찌르면 될 뿐.
「이 계집이――!!」
엠퍼러가 처음으로 분노를 드러내었다.
그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바위를 날려 나인을 공격하려 했으나, 지금 자신이 서있는 곳에 날릴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스리와 나인, 어느 쪽이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것도 없는 이곳으로 유도당했다는 것은 틀림없을 것이다.
한층 더 분노가 치미는 엠퍼러. 그렇다면 차라리 이 손으로 직접 가지고 놀다 죽여줄까……그렇게 생각하고 주위의 중력장을 줄이며 빠른 속도로 나인에게 달려갔다.
「오길 기다리고 있었어」
엠퍼러의 진행 방향, 공중에 갑자기 거대한 바위가 나타난다――아마도 아츠를 이용한 것인 듯하다――
「시시하군」
같은 수법이 두 번이나 통할 것이라고 생각했나, 심지어 이번에는 기습조차 아니었다.
중력장의 영역에 들어온 바위를 엠퍼러는 지팡이로 손쉽게 파괴했다.
――거기서 그의 운명이 결정되었다.
바위에 숨겨져 있던 토끼 봉제인형이 엠퍼러의 앞에 나타났다.
「뭐야!?」
그것이 평범한 봉제인형이 아니라는 것을 엠퍼러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퍼엉!――
눈앞에서 봉제인형이 폭발했다. 덮쳐드는 열파와 빛에 떠밀려 반사적으로 다리를 멈추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펑!!――――
등뒤에서 가한 스리의 참격을 맞고 갑옷이 폭발했다.
「끝이다――」
부서져 흩어진 갑옷의 한 점―― 뻗어나간 스리의 검이 엠퍼러의 가슴을 관통했다.

11. 제10권: 스-와 나-


땅에 쓰러진 “관리인”―― 엠퍼러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메마른 웃음소리를 흘렸다.
「뭐가 웃겨」
「설마 내가 쓰러지다니……」
「인정하지…… 너희는 강하다. 내가 키운 것들 중에서도 최고의 “흉기”야」
「닥쳐! 우리는 이제 “도구”가 아냐」
검을 휘둘러 마지막 일격을 꽂아 넣으려 한다.
다시 이 시간이 왔다. 결국 익숙해지지 않았던 혐오스러운 시간이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 사정은 다르다. 그런데도 손의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스-」
나인이 다가왔다.
「나-도 같이」
전에 없이 진지한 눈이었다.
「그래」
이것은 두 사람이 매듭지어야 할 과거다.
나인의 손이 검을 쥔 스리의 손을 붙들자 아주 조금 떨림이 멎었다.
둘이 함께 검을 치켜들자 그때 엠퍼러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희의 길은 피로 물들었다……앞으로의 인생도 분명 그렇겠지…… 죽고 죽이고, 지배하고 지배당하고……그 끝에서, 나와 같아질 거다… 큭큭큭큭큭」
「아니, 나-와 스-는 이제 “도구”도 아니고 누군가를 “도구”로 만들 생각도 없어. 그리고」
「사람을 죽이는 건 당신으로 끝이야」
「「잘 가」」
칼바드 공화국의 변방에서 한 대의 마차가 천천히 달린다.
철도를 제외하면 육지에서는 주로 도력차로 이동하는 요즘 시대에 드문 광경이긴 하지만 가끔은 운치가 있어 좋다.
마부는 어린 소년, 그리고 마차 안에는 동년배 소녀가 뒹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 “관리인”은 대체 어디 출신이었을까」
투구 아래의 얼굴이 의외로 미남이었던 것을 떠올리며 소년은 중얼거렸다.
「소문 정도는 들은 적 있어~」
너무나도 의욕 없는 졸음 어린 목소리로 소녀가 대답했다.
「어디?」
「그러니까……」
소녀의 이야기를 요약하면 대체로 이렇다.
어느 작은 나라에 대단히 난폭한 임금님이 있었다. 폭군으로 군림하며 악정을 펼쳐 백성들로부터 두려움을 샀다.
어느 날, 임금님이 죽고 그 아들인 왕자가 즉위했다. 왕자, 아니, 새 왕은 대단히 상냥한 사람으로, 부친의 과오를 반복하지 않도록 좋은 정치를 하려 했다.
하지만 선왕처럼 두려움을 사지 않았던 탓인지, 아무도 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심지어 폭군이 살아 있던 시절에는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지만 선왕이 죽은 뒤 불만이 커지면서 혁명이 일어났다.
혁명군은 왕궁을 함락시키고, 새 왕에게 악정의 책임을 묻고 나라를 공화제로 개편했다.
상냥한 새 왕은 목숨만을 건져, 모든 것을 잃고 나라에서 쫓겨났다. 이것으로 끝.
「즉 그 왕자가 “관리인”이라고?」
「몰라~ 애초에 그런 나라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마차의 흔들림에 소녀는 마차 안에서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관대함 때문에 나라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던 반동으로 강한 지배욕에 사로잡혔다……거나? 아니… 그만두자……」
동정할 생각은 전혀 없지만 비참한 남자라고 소년은 생각했다.
「저기…」
「왜~?」
소녀의 느긋한 목소리와는 달리 소년의 어조는 진지해졌다.
「네 오빠 일 말인데…… 너는 날 용서할 수 있어?」
「용서 안 해」
의외지만 납득한 듯 보이는 표정으로 소년은 침묵했다.
「평생 용서 안 해. 내 단 하나뿐인 가족, 너무너무 소중한 오빠였으니까. 그러니까……」
거기서 한번 말을 끊고, 소녀는 얼굴을 붉히며 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책임지고 나-를 돌봐! 평생 나- 곁에 있어!!
「그래, 책임은 확실하게 질게. 평생 널 돌볼게」
소녀는 한순간 하늘로 날아오를 것 같았다. 하지만――
앞으로 내가 그 녀석을 대신해서 네 오빠로서 널 훌륭하게 키울게
예상과는 다른 말이 돌아와서 소녀는 울컥한 표정을 지었다.
「그거 아니야!!!!」
「뭐가 아닌데? 그나저나 낡은 마차니까 그렇게 막 움직이지 마」
소년의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고 「납득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지금은 됐어」라고 생각한 소녀는 다시 마차 안에서 뒹굴었다. 그리고 화제가 다시 바뀌었다.
「이제부터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일단은 당초 예정대로 리벨이나 레만으로 갈 생각이지만 그 다음은 아직 생각하지 않았다.
앞으로 “조직”의 추격자들이 따라올지도 모르지만 둘이서라면 어떻게든 될 것 같다.
그렇기에 지금 생각해야 할 것은 미래의 일이다.
「어쨌든…… 뭔가 일을 해야 하는데」
「어떤 일?」
「우리의 능력을 활용할 방법이라면…… 극단에서 일하는 건 어때?」
「뭐어~? 무리야~ 스-는 연기 못하잖아」
「그렇게 심하지는 않잖아, 평범한 연극이라면……」
조금 의기소침해졌던 소년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그럼 유격사는 어때?」
「뭐어~? 무리야~ 엄청 바쁘다고 들었는데? 과로사하면 어떡해?」
애초에 유격사 협회가 자신들처럼 사연 있는 자들을 받아들여줄지도 문제고. 나쁘지 않은 아이디어라고는 생각하지만.
「그럼 넌 대체 뭘 하고 싶은데?」
「나-는 그냥 매일 뒹굴거리면서 자고 싶어~」
「정말이지 얘는……」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온다.
「……그러고 보니 아직 못 들었지」
소년은 갑자기 무언가를 떠올렸다.
「뭔데~?」
「이름. 진짜 이름을 아직 못 들었다는 걸 방금 깨달았어」
「나- 이름은 나디아」
「나는 스윈」
「「…………」」
「뭐라 해야 하나, 엄청난 우연이네」
애초에 소녀는 여러 해 전부터 오빠의 편지로 소년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계속 호칭에 집착한 것이었다.
“도구”로서의 이름이 아닌, 진짜 이름에서 따온 애칭으로. 이 이야기를 소년에게 할 생각은 없지만.
「역시 스-는 스-고 나-는 나-야~」
「그러네」
그렇게 매듭지었다.
덜컹덜컹 흔들리며 천천히 달리는 마차.
그 안에서 끝도 없이 시시한 대화가 계속되고 있었다.
소년의 이름은 스윈, 스-.
소녀의 이름은 나디아, 나-.
둘은 이제 막 “인간”이 된, 여행자이다.

12. 기타


소설의 주인공 스윈나디아영웅전설 시작의 궤적의 주연으로 등장하고 3과 9의 메인 악역인 엠퍼러도 보스로 등장한다.
이 소설의 정체는 조직에서 탈주한 스윈과 나디아를 잡기위해 조직에서 발간한 실화 기반의 소설 형태의 수배서. 본래 목적의 기능은 제대로 하는지 크로스벨 시 도착 전 까지도 주기적으로 조직의 추적자들 에게 쫒기는 신세가 되었지만. 이 소설이 개정판이 출간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의 즐겨보는 국제적인 베스트셀러가 된건 굉장히 아이러니하다. 소설의 주인공인 스윈은 흑역사를 마주보듯 왜 이런 소설이 인기 있는지 골치 아파하고, 나디아는 자기가 귀여운 히로인으로 나와 내용 자체는 만족하는듯 하나, 우리들 에게도 인세를 달라고 울분을 토할정도(…)[1]

[1] 나디아의 이런 반응이 한두번 아닌지 스윈은 한숨부터 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