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 19

 

[image]'''Dornier Do 19'''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직전에 독일의 항공기 메이커 도르니어 사에서 개발한 4발 중폭격기의 프로토타입.
1. 중폭격기를 포기하다
2. 중폭격기 신봉자
3. 계획의 경과
4. 동작 그만!
5. 찬반 논란
6. 어쩔 수 없었다
7. 제원(Do 19 V2)


1. 중폭격기를 포기하다


레힐린 실험 비행장에서 폭 35미터가 넘는 거대한 날개를 당당히 펴고 1936년 10월 28일에 첫 비행에 성공을 거둔 중폭격기 Do 19는 계속 발전하지 못하고 2년도 채 지나지 않아 수송기로 개조되어 버렸다. 제작이 한창이던 2호기와 3호기도 작업이 중단되고 스크랩되어 버렸을 때, 루프트바페전략 폭격에 관한 비젼을 송두리째 지워 버린 것이다.

2. 중폭격기 신봉자


전쟁 동안 연합군의 폭격기에게 그토록 시달린 독일이었으나, 정작 독일 공군은 실전에 쓸만한 수준의 4발 전략폭격기를 보유하지 못했다. 독일 공군의 초대 참모총장 발터 베버 중장은 장차 전쟁에서 적국의 후방을 공습하는 전략 폭격이 가지는 효과를 예측하고 폭격기무적론을 바탕으로 장거리 전략폭격기 편대를 육성해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강력한 지지자였고, 종래는 그의 지휘 아래 우랄 프로젝트로 추진되었다. 제국항공성(RLM)의 기술부(Technisch Amt)는 4발 엔진을 가진 중폭격기의 요구 사양을 발표했다.
그러나 1936년 6월에 베버 장군이 직접 조종해 비행하던 연락기 He 70이 어이없는 안전사고로 추락해 사망하자, 그의 후임자로 임명된 알베르트 케셀링은 전략 폭격의 야심적인 비젼에 대해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모호한 후방 공습 보다는 눈 앞의 지상군을 쓸어 버릴 전술 폭격기에 전념하기 위해 장거리 폭격기 계획을 모두 취소해버렸다.

'''"총통께서는 나에게 폭격기가 몇 대인지만 물으셨지 엔진이 몇 개 달려있는지는 묻지 않으셨지." - 헤르만 괴링'''


3. 계획의 경과


그런데, 사실 이 폭격기는 1935년 연말에는 이미 베버와의 계약에 따라 융커스와 도르니어(Dornier-Werke GmbH) 사에서 각각 3대씩 프로토타입의 제작 발주를 받은 상태였다. 도르니어 개발진들이 제시한 디자인은 기종 번호 Do 19가 주어졌고 융커스의 프로토타입은 Ju 89가 되었다.
도르니어 Do 19는 조종타나 방향타 같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곤 전부 경금속으로 만든 직사각형 단면의 동체와 캔틸레버식 날개, 그리고 꼬리 날개는 같은 시기 영국의 암스트롱-위트워스에서 개발하고 있던 A.W.38 휘틀리 중형 폭격기와 매우 흡사했다. 이 꼬리 날개들은 서로 교차되어 구조 강도를 높이도록 설계되었고, 버팀대로 더욱 보강되어 있었다.
테일 드래거 방식의 착륙 장치는 인입식에다, 엔진은 BMW 브라모 322 파프니르 성형 공랭식 엔진을 날개 앞전에 각각 2개씩 합계 4기를 장비할 것을 예정했다. Do 19는 거대하고 복잡한 탓에 승무원도 많이 필요했는데, 이와 같은 인원 구성은 독일 공군으로서는 처음 경험하는 생소한 것이었다. 조종사, 부조종사, 항법사, 폭격수, 통신수라는 필수 요원에 더해 기총 사수가 5명이 더해져 모두 10명이 한 팀이었다.

4. 동작 그만!


프로토타입에 해당되는 Do 19V1호기는 베버 중장이 추락 사고로 죽고 나서 4개월이 지난 후인 1936년 10월 28일에 처녀 비행을 성공시켰으나, 우랄 계획 자체가 후임자에 의해 폐기된 이상 더 이상의 개량에 필요한 추진력을 잃고 생산도 중지되었다. 독일 공군에서도 혜안이 있는 일부 장교들이 자신들이 저지른 실수를 뼈저리게 후회한 것은 훗날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RAF 요격 부대에게 엄청난 타격을 입고 연일 격추되는 중형 폭격기들을 지켜볼 때였다.
그러나, 사실상 Do 19나 Ju 89나 개발에 들어간 시점이 너무 늦어 있었고, 실제로는 계획을 밀고나갔더라도 영국 침공 작전에 동원할 수 있었을 가능성은 매우 낮았다. 그 무렵 항공성이 동원할 수 있는 제한된 자원과 기술로 4발 중폭격기 같은 복잡하고 운용 인원이 많이 필요한 기종을 그처럼 단 시간에 실전에서 통할 만한 완성도를 갖출 수 있었을 지는 의문이다. 무엇보다 중폭격기를 때맞춰 생산했다 하더라도 만성적인 항공 요원 부족에 시달리던 독일로서는 무리가 있었다.

5. 찬반 논란


반면에, 중폭격기는 우월한 탑재량을 바탕으로 같은 양의 폭탄을 투하하는데 있어 조종 교육을 받은 조종사가 그만큼 덜 필요하다. 기총 사수나 통신수, 폭격수 같은 기타 요원들은 단기 속성 교육이 가능하거나 대안이 있었기 때문에 실제로도 승무원 문제가 불거졌을 것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는 일이다. 게다가, 쇼트 스털링이나아브로 맨체스터 같은 예를 들지 않더라도, 연합군의 중폭격기들이라고 해서 처음부터 압도적인 위력을 보일 만큼 완성되어 실전에 투입된 것은 아니다. 이런 반론을 바탕으로 루프트바페도 충분히 중폭격기를 운용할 수 있었다는 의견에도 힘이 실린다. 그리고 우랄 프로젝트가 성사되었다면 적어도 가장 중요한 독소전 시점에서는 실전 투입이 가능했을 것이다.

6. 어쩔 수 없었다


발터 베버의 후임 케셀링 장군은 현실적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만 집중하려고 했고, 그 결과 자원과 시간이 많이 필요하면서 결과는 확신할 수 없는 중폭격기 보다는 더 많은 전투기와 전술 폭격기를 보유하겠다고 작정했기 때문이다. 결국 얼마간 제작이 진행되어 있던 2, 3호기는 버려지고 기왕 완성된 1호기는 수송기로 개수해 재활용했다. Do 19는 성능면에서는 경쟁 후보인 Ju 89에 조금 뒤지고 있었으나, 기본적인 비행 성능은 더 안정적이어서 훗날 개량이 더해졌다면 충분히 유용한 장거리 폭격기로 완성될 가능성이 있는 잠재력을 품은 기체였다.

7. 제원(Do 19 V2)


승무원 : 10명
전장 : 25.4 m / 전폭 : 35.00 m / 전고 : 5.77 m / 익면적 : 162 m2
중량 : 11,865 kg ~ 18,500 kg
동력 : BMW 132F 공랭식 엔진 4기 (각 810 hp)
최대속도 : 315 km/h
순항고도 : 5,600 m
항속거리 : 1,600 km
무장 : MG FF 기관포 2문 / MG15 기관총 3정
폭탄 탑재량 : 16 × 100 k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