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터 베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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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 직전에 독일 공군의 초대 참모총장을 역임한 군인으로 최종 계급은 중장이었다.
2. 생애
2.1. 젊고 유능한 프러시아 장교
발터 베버가 태어났을 때, 그의 고향 포메라니안 지방은 프러시아 제국의 영토였었다. 현재는 그가 태어난 고향 포즈난은 폴란드 영토의 서부에 속해있지만 당시만 해도 독일 제국령이었던 것이다. 그의 할아버지는 프로이센 왕국의 최고 감찰관이라는 고위 관리직을 지낸 카를 게오르크 베버였으며, 아버지는 베를린 은행장을 지낸 아르놀트 베버였다. 아비투어에 합격한 후 대학으로 가는 대신 군사학교에 들어가 군인이 되는 길에 발을 내디뎠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발터 베버는 일선이 아닌 후방에 있는 사령부에서 참모장교로 근무하며 방어 대형을 고안하거나 연합군에 대한 반격 작전을 입안하는 작업을 보좌하면서, 전략적인 안목을 키우게 된다. 1917년부터는 파울 폰 힌덴부르크 원수가 이끄는 육군 최고사령부의 작전과에 전속되었다. 독일 황제 빌헬름 2세가 퇴위를 결정했을 때 그에게 네덜란드로 망명할 것을 권고한 것은 베버 혼자였다고 한다.
그는 또한 바이마르 공화국 정부에서 새롭게 민주적으로 선출된 권력자를 황제를 섬기듯이 잘 따를 것이라며 공화제를 찬성한 장교 중 하나이기도 했다. 1919년에 파울 폰 힌덴부르크의 명령에 의해 참모차장 에리히 루덴도르프의 회고록를 필기했다. 그런데 그가 제 I 군관구 참모부에 전속을 간 싯점에서 카프 반란이 일어났다. 바이에른 출신이 아닌 장교로서는 처음으로 사단 참모 직위가 주어질만큼 유능했던 그는 뮌헨 봉기도 겪게 된다.
2.2. 군에 계속 남게 되다
항복 이후, 대부분의 장교들은 제대 조치되었지만 베버는 그 꼼꼼한 실무 능력 덕택에 병무청에 복직되었고, 1931년부터는 육군 훈련부장을 맡게 된다. 이렇게 육군에 복무하고 있던 베버는 1933년 9월 1일에, 새롭게 창설될 독일 공군을 준비하는 기관인 제국항공성으로 전출 명령을 받고 항공통수국장에 취임했다. 1935년 3월부로 제3제국에 징병제가 부활되면서 이제 모든 가면을 벗어던진 루프트바페는 초대 공군 참모총장으로 발터 베버를 선택하였다.
2.3. 전략폭격 지지자
이탈리아의 항공 이론가 지울리오 두헤 장군의 사상에 깊이 공감하고 있던 베버는 참모총장이 되자마자 항공전의 전략 전술을 철저히 분석하는 기관을 만들고 이론을 발전시켜 현대적인 공군력 건설에 필요한 기술적 선행 과제들을 결정했다. 공군의 작전 운영 목적을 충족시키는 것은 급강하 폭격기와 전투폭격기, 경폭격기지만, 종래 전쟁의 승리를 가져올 무기는 전략폭격기라는 이론을 강하게 주장하며 주변 장교들도 설득시켰으나, 시대가 시대인 만큼 반신반의하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터 베버는 상관 헤르만 괴링의 영향력 아래에 놓여있는 자신의 제한적인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풀어나가려고 했다. 이리하여 베버 장군은 우랄 폭격기 계획이라고 명명한 전략폭격기의 개발 사업에 나서게 된다. 이렇게 해서 나치 독일도 Ju 89나 Do 19 같은 시제 중폭격기를 갖게 되었으나, 히틀러 정권은 오로지 눈앞에 보이는 결과에만 관심이 있었고, 당시 독일의 한정된 국력으로는 전술 폭격기로 가까운 장래에 전쟁을 벌이는 쪽으로 전략을 세우고 있었던 탓에 안그래도 많은 자원이 필요하고 기술적으로 어려운 중폭격기 개발에는 속도가 붙지 않았다. 결국, 그가 죽기 몇 주전에 이미 우랄 프로젝트는 중지되고 있었으며, 그는 벽에 부딛히고 좌절하게 된다.
2.4. 의문의 사고사
1936년 6월 3일, 직접 조종간을 잡고 몰던 연락기 하인켈 He 70가 드레스덴 근교의 비행장에서 이륙한 직후 추락했고, 베버는 동승한 기술장교와 함께 사망하고 말았다. 이 사고 후 원인 분석에서 알려지게 된 것은 이륙 전에 모두 제거하게 되어 있는 조종타면의 고정핀이 완전히 제거되지 않은 것이었다. 승강타에 고정된 채로 발견된 핀은 이륙 직전 점검을 소홀히 했거나, 누군가 고의적으로 끼워놓았다는 의심이 들만한 정황이었으나, 결국 사건은 사고사로 정리되었다.
3. 기타
3.1. 가족
베버는 아들이 둘 있었는데, 둘 모두 공군사관학교에 입교해 2차 대전 동안 전투기 조종사로 복무했었다. 아버지와 같은 이름이 붙여진 둘째 아들 발터 베버(1923. 1. 16~1945. 4. 10) 중위는 250회나 출격하며 적기 44대를 격추한 에이스로서 1945년 4월에 기사철십자장을 수여받기도 했다. JG 51에서 제3비행중대장으로 활동하던 때에는 IL-2를 5분간 3대나 격추시킬 정도로 숙련된 전투기 조종사였던 아들 베버는 1945년 2월에 JG 7로 옮겨져 제트전투기 Me 262로 갈아타고 독일 본토 항공전에서 계속 싸웠으나, 패전을 맞기 직전인 4월 10일에 베를린 근교의 노이루핀(Neuruppin) 상공에서 연합군의 P-51 전투기에게 격추당해 전사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