ハイサイおじさん
1. 개요
오키나와 팝 가수 키나 쇼키치[1] 의 히트곡. 그가 이끈 밴드인 키나 쇼키치 & 참프루즈(喜納昌吉&チャンプルーズ)가 1976년 발표, 오키나와에서만 30만 장이 팔리는 대히트를 쳤다.[2] 오키나와의 민요로 알려져 있는 경우도 있지만[3] 키나 쇼키치가 작곡한 민요풍의 곡이다. 굳이 민요라고 한다면 창작민요라고 할 수 있다.
하이사이(ハイサイ)는 오키나와어로 윗어른에게 인사할 때 쓰는 '콘니치와'로 "안녕하세요"라는 뜻. 남성어로 여성이 말할 때는 '하이타이'라고 한다. 곡 제목을 한국어로 풀면 "안녕하세요 아저씨"가 된다. 가사가 오키나와어로 되어 있어서 본토의 일본인들은 거의 알아듣지 못하지만 상당히 인기가 있는 곡이다. 여러모로 오키나와 록의 시조라 할 수 있는 곡이여서 이 곡이 수록된 앨범은 일본 록 명반선에서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곡이 발매된 1976년에 오사카의 라디오 진행자 겸 텔런트였던 나카무라 에이이치(中村鋭一)에 의해 본토에 소개되었다. 같은 해 키나 쇼키치 본인도 에이이치의 라디오 방송에 출연하여 <하이사이 오지상>을 불렀다. 80년대에는 <비트 타케시의 올 나잇 일본(ビートたけしのオールナイトニッポン)>의 엔딩 테마로도 사용되었다. 게닌 시무라 켄이 <시무라켄의 괜찮다>(志村けんのだいじょうぶだぁ)에서 자신의 테마송(?) "이상한 아저씨"(変なおじさん)(...)로 어레인지한 것도 유명하다.
한국에서는 2014년 12월 5일 그것은 알기 싫다에서 소개가 되기도 했다.
고시엔 경기에서도 응원가로 쓰이는데, 오키나와의 고교가 경기를 펼치면 아마가사키고교의 취주악부를 동원하여[4] [5] 찬스테마로 연주하고, 오키나와에서 온 응원단이 카챠시[6] 를 추며 떼창을 한다. 2010년 지역 언론에서 "술과 유곽 얘기가 가사로 나오는 노래는 고교야구에 부적합하다"라는 내용이 개제되어 잠시 쓰이지 않으려는 움직임도 있었지만, 그 해 코난고교(興南高校)가 준결승전에 진출하자 시들시들해지더니 아예 코난고교가 봄여름 고시엔 통합 우승을 차지해 버렸다. 지역은 축제 분위기였으며 앞서 있었던 아무래도 좋을 이야기는 싹 잊혀졌다. 앞으로도 50년 정도는 전혀 문제 없을 듯.
인지도가 상당한 곡이다 보니 당연히 하츠네 미쿠가 부른 버전도 있다.
2. 가사
작곡 및 작사 : 키나 쇼키치(喜納昌吉)
3. 곡에 얽힌 사연
오키나와의 독특한 느낌을 살린 흥겨운 곡이지만 사실 키나 쇼키치가 어린 시절 겅혐한 어두운 사연이 얽혀있다.
곡을 부른 키나 쇼키치의 어린 시절 겪은 일을 바탕으로 한 가사이다. 쇼키치의 마을에는 오키나와 전투의 후유증으로 정신이 이상해진 아주머니와 가족이 살고 있었다. 1962년 5월 23일, 집에 돌아온 남편(53세)은 이불에 덮혀진 딸이 목이 잘려 죽은 것을 발견한다. 부인(39세)이 7살난 자신의 딸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도끼로 목을 잘라 죽인 것이다. 그리고 그 머리를 솥에 넣어 끓였고 "내 딸을 내가 먹겠다는데 뭔 상관이야."라고 소리질렀다. 남편의 비명을 듣고 몰려든 이웃 주민들 중에는 당시 중학생이던 13살 키나 쇼키치가 있었다.
아주머니는 끝내 자살하고, 아저씨는 매일매일 술에 빠져 사는 폐인이 되고 만다. 마을 사람들은 아저씨를 왕따 취급하며 꺼렸지만, 술을 구하기 위해 쇼키치의 집에 술을 얻으러 오곤 했다. 아저씨는 자신은 이전에는 교장선생이었다고 했으나, 그것은 거짓말이었고 유곽에서 손님들을 데려가는 마부(삐끼)직을 했으나 사건 당시 실직한 상태였다. 아저씨를 불쌍하게 생각한 키나 쇼키치는 아저씨의 술 심부름을 하곤 했다. 고등학생이 된 키나 쇼키치는 아저씨를 떠올리니까 쉽게 악상이 떠올라 <하이사이 오지상>을 만들게 되었다.
- 참고 기사 (일본어): 悲惨な事件が授けた曲 「ハイサイおじさん」
[1] 喜納昌吉(1948~). 오키나와 민요의 명인인 키나 쇼에이(喜納昌永, 1920~2009)의 아들이다. 키나 쇼에이도 오키나와 음악에 있어서 중요한 인물로서, 산신(악기) 속주의 달인이며, 산바(三板)라는 타악기를 개발하였다. 키나 쇼키치는 제23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민주당(일본) 비례대표로 당선되어 참의원이 된 적도 있다. 2014년에는 오키나와 현지사 선거에 출마했는데, 민주당이 미군 기지에 대한 방침을 현외이전에서 현내이전으로 주장을 바꾸는 바람에 낙선하고 말았다. 키나 쇼키치 본인은 당의 지침 변경에 격렬히 항의했지만 결국 그의 탈당으로 끝이 나고 만다.[2] 1975년 당시, 오키나와 현의 인구가 104만 여 명이었다는 걸 감안하면 엄청난 거다.[3] 오키나와 전통 음악은 '도-미-파-솔-시'로 이루어진 독특한 5음계를 사용한다.[4] 아마가사키는 일본 효고현 남동단에 위치한 도시, 오사카와 인접해 있다.[5] 오키나와 미야코지마 출신 선생님이 고문으로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6] カチャーシー 오키나와에서 결혼식과 같은 신나는 날에 추는 전통 막춤. 우리나라의 어깨춤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7] 청일전쟁이후 대만에서 돌아온 병사들 사이에 대머리가 되는 병이 유행한데서 생긴 단어.[8] 辻(つじ、チージ), 中島(ナカシマ), 渡地(ワタンシ) 모두 오키나와의 유곽이 있던 지명이다. 나하 시에 있었으며, 지금은 모두 辻라는 지명으로 통합되었다. 유이레일 겐초마에역에서 가장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