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무라 켄

 



'''시무라 켄
志村 けん|Shimura Ken'''
''' 본명 '''
'''시무라 야스노리 (志村康徳(しむらやすのり, Shimura Yasunori)'''[1]
'''출생'''
1950년 2월 20일
연합군 점령하 일본 도쿄도 [image] 키타타마군 히가시무라야마정[2]
'''사망'''
2020년 3월 29일 (향년 70세)
일본 도쿄도 신주쿠구
'''국적'''
일본 [image]
'''직업'''
게닌, 영화감독, 작가
'''신체'''
168cm[3] 젊은 시절 171cm
'''학력'''
도쿄도립구루메 고등학교 (졸업) (-1968년)
'''데뷔'''
1972년
'''소속사'''
이자와 오피스[4]
'''동기'''
기타노 다케시, 쇼후쿠테이 츠루베
'''SNS'''
블로그
1. 개요
2. 생애
3. 사망
4. 주요 캐릭터
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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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image]
대표적인 캐릭터 바보 영주 (바카토노 バカ殿) 분장 시
일본의 국민 개그맨이자 일본 콩트 코미디의 본좌.[5] 그리고 빅3 이전 일본 예능계의 황제.[6] 우리나라로 치면 한국 코미디의 황제로 불린 이주일과 비슷한 지위와 관록으로 볼 수 있다. 공교롭게도 생전 담배를 많이 피웠고 이것이 직간접적으로 사망과 관계되었다는 것도 두 사람의 공통점이다.[7]
별명은 '''일본의 희극왕'''. 예능계에서 후배들이 붙여준 별명 역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가리키던 별칭인 오고쇼(大御所)'''.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게닌(개그맨)이라면 타모리, 아카시야 산마, 기타노 다케시[8]의 '빅 3'[9][10] 정도.
활동명인 시무라 켄의 '켄'은 아버지의 이름 '켄지(憲司)'에서 딴 것.
70년대부터 TV를 점령했던 게닌 1세대로, 70대의 고령임에도 예능계에서 왕성한 활동을 보였다. 일에 몰두하느라 결혼도 안 했으며,[11] 그 명성과 어마어마한 재산 때문에 접근한 이들이 많지만 모두 이어지진 못했다.[12] 원로 게닌임에도 비교적 최근까지 각종 버라이어티에 활발하게 등장했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고령층부터 젊은층까지 어마어마한 범위의 세대를 아우르는 국민적 인지도를 자랑했다.[13]
국내에서 시무라 켄의 인지도를 한국으로 치면 유재석[14]이나 이경규에 비교하는 글이 이따금 보이지만, 사실 국내에서 시무라 정도의 경력에 이정도로 폭넓은 세대에서 인지되는 개그맨은 선뜻 예시를 들기가 어렵다. 굳이 비슷한 사람을 찾자면 오히려 바보 영주 - 영구와 같은 상징적인 캐릭터가 존재하는 심형래나 깊은 관록의 원로 개그맨인 이주일, 구봉서가 전성기의 폼을 어느정도 유지하면서 최근까지 꾸준히 활약한 것으로 보는게 가장 정확하다. 최근엔 진행자 위주로 활동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폭 넒은 인지도는 송해와도 비슷하다.[15]
대선배인 우에키 히토시노력하는 범재의 인상이 강하다면 이쪽은 게으른 천재. 웃기는 건 일본 제일이라 자부하던 카토 챠를 2인자로 만든 일본 코미디계의 일인자다.
일본의 학부모 교사 연합회(PTA)가 좋아하는 프로그램, 싫어하는 프로그램을 동시에 프로듀스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천재 시무라 동물원'은 '어린이에게 보여주고 싶은 프로그램'에 거의 매번 들어간다. 싫어하는 프로그램은 '바보 영주'로 아이러니하게도 섹드립[16] 때문이 아니라 수박 빨리 먹기, 파이 던지기 등 먹을 것을 낭비한다는 컨셉 때문에(...) '어린이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프로그램' 10위권 안에 항상 들어간다. 참고로 전성기 바보영주라는 코너는 골든타임에 여자들이 모두 헐벗고 나오는 프로였는데 여기서 섹드립이나 스킨쉽을 통한 개그가 AV 뺨쳤다. 이때문에 비판도 많이 받았다. 그 영상들은 유튜브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말년에는 주로 잘나가는 사회자로 활동했지만 사실 콩트 코미디에 대한 애착이 남다르다. 만자이나 토크쇼 위주로 트렌드가 바뀐 일본 방송가에서도 계속해서 콩트 코미디를 만들며 최전선에서 뛰었으며, 쿠라베루 쿠라베라[17]에서 김병만, 류담, 노우진(달인 팀)을 초청, 극찬하며 일본에는 이제 이런 슬랩스틱이 없어져서 아쉽다는 발언도 한 바 있다. 사실 한국의 여러 유명 공개형 코미디 중에서도 달인이 유독 일본에 먹히기 좋은 방송이기도 하다. 달인의 개그 스타일은 김병만의 노력과 노우진, 류담의 서포트로 이루어지는 만국 공통적으로 먹힐 수 있는 슬랩스틱과 가벼운 만담 캐릭터극 정도로 진행되며 특히 원맨쇼, 토크쇼류의 코미디가 유독 발달한 미국 보다 오와라이 트리오, 콤비 같은 팀 형태의 코미디언이 존재하고, 만자이 개그가 자리잡은 일본에서는 더더욱 먹히기 좋다. [18]

2. 생애


가부장적인 엄격한 가정에서 3남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군인에 교감까지 역임한 엄한 아버지 때문에 집안은 항상 무거운 분위기여서, 당시에는 드물었던 텔레비전의 개그 프로그램 혹은 라쿠고를 보면서 우울한 기분을 잊을 수 있었다고 한다. 코미디 방송을 볼 때는 근엄했던 아버지도 (근엄함을 유지하기 위해서) 웃음을 참아 가며 TV를 보고 있었다고. 그때의 경험을 계기로 중학교 때부터 게닌을 지망하게 되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시무라 스스로가 '나의 가장 큰 팬'으로 칭할 정도로 아들의 예능을 좋아했고 바보 영주에도 출연해서 '''"야스노리, 왜 결혼을 안 하는 거니?"'''[19] 하는 대사를 하기도 했으나, 2015년 96세의 나이로 작고했다.
[image]
그 근엄의 시절.
이후 1968년 고교 졸업 직전에 유명한 밴드이자 콩트 그룹인 더 드리프터즈(ザ・ドリフターズ - The Drifters 줄여서 '도리후')의 심부름꾼[20]으로 개그맨 활동을 시작[21], 1972년에 역시 다른 선배의 심부름꾼을 하고 있던 이야마 준(井山淳)과 함께 개그 콤비 맥 봉봉을 결성해서 연예계에 데뷔했다. 당시 그의 예명은 오늘날과 발음이 똑같고 표기만 다른 志村健. 게다가 보케가 아닌 츳코미 역할이었다고 한다.

8시라구! 전원집합
한동안 견습생으로서 관객들에게 소개되던[22] 시무라 켄은 1974년 3월 31일, 아라이 츄의 탈퇴와 함께 정식으로 도리후의 멤버가 된 후 일본의 전설적인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인 <8시라구! 전원집합(8時だョ!全員集合)>[23]에 레귤러로 출연을 시작했다.[24] 처음에 그는 도라후의 다른 멤버들과는 이질적인 콘셉트로 그다지 큰 인기를 얻지 못하였지만[25] 1976년 자신의 고향을 주제로 한 테마곡 히가시무라야마 온도가 대히트한 것을 계기로[26][27] 차츰 역량을 발휘하기 시작하여 수염 댄스(77년)을 비롯한 히트 코미디를 양산하며 70년대 후반에는 도리후 내에서도 가장 큰 인기를 얻는 멤버가 된다. 도리후 시절에는 주로 연령대가 비슷한 카토 챠와의 콤비 플레이로 유명하였다.[28]

시트콤 <탐정 이야기>

바보 영주
1985년 전원집합이 종영한 이후 시무라 켄은 <카토쨩 켄쨩의 기분 좋은 TV (1986 ~ 1992)>[29] , <바보 영주 (1986 ~ 2020)>, <시무라 켄의 괜찮다 (1987 ~ 1993)>[30] 등으로 제 2의 전성기를 맞았다. 이 시기에 우에키 히토시의 히트송 '운쟈라게'를 커버하여 마찬가지로 히트시켰다.
하지만 90년대 들어 다운타운, 웃짱난짱으로 대표되는 오와라이 3세대가 떠오르기 시작하면서 시무라 켄은 점점 방송에서 설 자리를 잃어서 1996년에는 사망설까지 나올 정도로 슬럼프를 겪었다. 그러나 당시 시무라는 칸무리 프로그램 몇 개가 종영했을 뿐 딱히 입원할 만한 건강상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사망설의 정확한 근원은 지금도 여러 가지 설만 떠도는 상태이다. 같은 드러프터즈의 일원 타카기 부가 전해들었던 발생 원인 중 하나는 '시무라 켄'이라는 전혀 다른 사람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와전되었다는 것. 본 항목 시무라의 본명은 '켄'이 아닌 '야스노리'이므로 코미디언 시무라가 사망했다면 병원 차트에도 '시무라 야스노리'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이후 어릴 때 시무라를 보며 자란 후배 연예인들의 언급으로 그는 다시 주목을 받고 각종 예능 버라이어티에 게스트로 출연을 시작, 2004년부터 방영을 시작한 <천재! 시무라 동물원>의 성공으로 마침내 제3의 전성기를 맞으며 다시 활발히 활동했다. 다만 단독 개그는 바보 영주 정도만 이어나가는 중이고, '시무라 동물원'을 제외한 대부분의 방송 활동은 토크 프로그램 게스트, 코미디 프로그램 사회자 및 심사위원 등에 집중되어 있다. 고령에다 일본 예능계에서의 입지에도 불구하고 망가질 때는 여전히 사정없이 망가진다.

2016년에는 기린맥주하이츄 '''효케츠(氷結)'''의 텔레비전 광고[31]모델로 출연하여 초반엔 시그니처 캐릭터인 바카도노 분장을 하고 특유의 바보 연기를 보여주다가 장면이 바뀌면서 진지한 표정으로 멋들어지게 샤미센을 연주하는 모습을 보였다.[32] 이 광고에서 시무라는 그가 기간 한정 멤버로 활동한 도쿄 스카 파라다이스 오케스트라와 시무라의 샤미센 스승인 '''아가츠마 히로미츠'''와 협연을 선보였다. 참고로 시무라는 아가츠마에게 약 10년 동안 샤미센 연주를 배웠다고 한다. 이처럼 시무라는 노년기에 접어들면서 그동안 바보 연기에 가려졌던 간지나는 모습이 재조명 되기도 했다.

3. 사망


복수의 매체를 통해 시무라 켄이 2020년 3월 17일부터 권태감을 보였고 19일에는 발열과 호흡곤란 증상을 일으키며 20일에 입원, 23일에 코로나 19 양성 판정을 받았다는 소식이 보도되었다. 한때 시무라는 하루에 담배 60개비를(3갑) 피우는 골초였으며, 2016년 폐렴으로 사경을 헤멘 후 이를 계기로 담배를 끊었지만, 그 당시의 폐 손상이 여전히 남아 회복이 더뎠다고 한다. 입원 중 한때 상태가 호전되었으나 26일부터 상태가 다시 악화되어 인공 심폐기기까지 동원하여 집중 치료에 들어갔지만,#1 #2 '''결국 3월 29일 밤 11시 10분에 도쿄 도내 소재 병원에서 향년 70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1 #2
감염 경로는 불명이나 지인들의 말로는 입원 전 장사를 하고 있는 지인들이 코로나 사태로 인한 경영난을 호소하자, 시무라는 이들을 격려하려 매우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돌아다녔다고 한다. 금전적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고.
사망 사실은 3월 30일 오전에 알려졌는데 이 시간대에 일본 지상파에서는 생방송으로 아침 프로그램을 진행하던 도중이었고, 상단 자막으로 속보를 내보내며 시무라 켄의 사망 소식을 일제히 알렸다. 각 방송국에서 프로그램을 진행하던 진행자나 패널들은 놀라움과 함께 고인의 사망을 추모하는 분위기로 방송을 이어갔으며, 특히 닛테레의 아침 정보 프로그램인 슷키리에 패널로 출연 중인 콘도 하루나[33]는 고인을 추모하며 오열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고인의 사망에 대해 연예계 각지에서 추모의 목소리가 나왔으며, 정계에서도 고인을 애도하는 코멘트가 나왔다. 더 드리프터즈의 다른 멤버들도 '''"이카리야 씨 다음이 우리 중에 가장 젊은 시무라 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죽기 전에 다 같이 콩트를 한 번 더 해 보고 싶었는데 우리보다 먼저 가다니..."'''라며 비통함을 감추지 않았다.
또 사망 사실이 알려진 당일 대한민국의 포털 사이트 등에서도 시무라 켄의 이름이 실시간 검색어 상위권에 오르고 언론 등에서 소식으로 보도되기도 했다.
비슷한 시기에 미국에서는 유명 배우 마크 블럼코로나 19 감염으로 사망했는데 둘 다 1950년생 동갑이다. 이렇듯 유명인의 사망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의 위험성에 대해서 경각심을 더 느낀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실제로 일본은 얼마 전까지 코로나의 심각성에 대한 인지가 약해 꽃놀이 가자는 분위기가 꽤 있었으나 시무라의 죽음으로 인해 그동안 밀집지역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모여 사실상 통제가 안되던 일본의 거리가 한산해 지는 등, 젊은 층 위주로 위기감을 갖자는 의견이 확산되고 있다.
NHK는 고인을 추모하는 의미에서 사망 발표가 난 당일 오후 11시 50분에 고인이 출연했던 패밀리 히스토리를 긴급 편성해 재방송했으며, 2020년 4월 4일과 5일 추모 프로그램을 추가 편성 및 방영, 6일에는 츠루베 가족에 건배에서 예정되어있던 방송을 뒤로 미루고, 과거 2010년 3월 29일과 4월 5일에 방송한 것을 재구성해 추모 프로그램을 편성해 방영했다. 생전에 출연해 5월 초에 등장할 예정이었던 연속 TV 소설 방영분도 방영했다. 후지 테레비에서는 4월 1일 오후 7시부터 시무라 켄 추모 방송을 편성해 방영했으며, TV 아사히 역시 4월 5일에 특집 프로그램을 방영했다.
고인이 생전 출연했던 후지 테레비의 시무라로 나이트(志村でナイト)는 4월 1일부로 종영했다. 해당 프로그램 자체는 2018년 10월 10일부터 시작했었지만, 실질적으로 1996년 10월 9일부터 계속된 시리즈로, 같은 시간대에 제목, 출연진, 설정을 바꿔가며 시무라 콩트 프로그램을 방송하는 고정코너였다. 4월 29일부터는 동시간대에 시무라로 나이트의 출연진이었던 언터처블의 시바타, 치도리의 다이고가 진행을 맡고, 생전의 시무라와 교류가 있었던 게스트[34]를 초청하여 함께 시무라의 콩트를 보면서 시무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시무라 친구(志村友達)'가 편성되어서 시리즈의 계보를 이어가고 있다.
니혼 TV의 시무라 동물원은 시무라 켄의 사망 이후 시무라 켄 특집 방송을 편성해 그를 추모하는 시간을 가졌다.[35] 한동안 프로그램은 시무라 동물원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유지한채 아이바 마사키를 메인 MC로 내세워 프로그램을 이어나갔으나 이후 제작진 측은 같은해 7월 발표에서 "시무라 씨의 조언으로 설계하고 시무라 씨의 추억이 담긴 스튜디오에서 시무라 씨라는 존재없이 프로그램을 계속 이어나가기가 어려워 내부 논의를 거쳐 9월 방영을 끝으로 종영을 한다."고 발표했다. 시무라 동물원 종영 이후로는 시무라 동물원에서 메인 MC를 맡던 아이바 마사키가 MC를 맡아 'I LOVE 모두의 동물원(가제)'를 방영한다.기사
고인의 시신은 코로나 전염의 우려가 있어 유족들조차 사망하는 순간이나 이후 화장 절차까지도 함께하지 못했으며, 곧바로 화장 처리한 유골이 유족에게 인계됐다. 시무라의 3살 위인 형은, 동생의 마지막 모습을 보지 못했다며 오열하며 인터뷰하기도 했다.

4. 주요 캐릭터


  • 바보 영주(バカ殿様): 본래 80년대 도리후 대폭소의 코너 중 하나였다가 부정기 프로그램으로 독립했다. 해당 문서를 참조.
  • 이상한 아저씨(変なおじさん): 원형 탈모에 분홍색 내복, 거기다 복대라는 OME스러운 패션으로 총 무장한 아저씨. 시무라의 칸무리 방송인 '괜찮다(だいじょうぶだぁ)'에서 최초로 등장했으며 이후 바보 영주에까지 출연하기에 이른다. 주 패턴은 아리따운 여성의 근처로 침투하여 변태적이고 엽기적인 행각을 일삼다가 여성의 보호자들에게 들키는 순서. 오키나와 민요인 하이사이 오지상을 패러디한 '헨나 오지상'이라는 노래와 춤을 불러 히트했으며, 정체가 들켰을 때 "뭐야 좌네는(なんだチミは)!"[36]라는 소리를 듣고 "그렇습니다. 제가 이상한 아저씨입니다!(そうです、 私が変なおじさんです!)"라고 대답하며 상기한 헨나 오지상 춤을 추는 패턴은 시무라를 대표하는 명대사로 회자되고 있다. 시무라 본인이 이 민망한 의상을 입고 편의점에서 물건을 사 오는 벌칙 미션을 수행하기도 했으며, 심지어 후배 코미디언들을 대상으로(남녀 불문) 제2대 이상한 아저씨를 뽑는 행사까지 열렸을 정도. 시무라의 노화로 인한 시력 저하 때문인지 최근에는 얇은 안경을 쓰고 등장하여 세월의 흐름을 보여주기도 했다.
  • 히토미 할멈(ひとみ婆さん): 나이가 들어 눈도 어둡고, 귀도 어두운 데다 손도 떨고 졸음도 많아 주변의 속 터지는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개그 캐릭터. 그야말로 젊은이들이 노인들에게 느끼는 답답한 기운을 극한까지 끌어올려 웃음으로 승화한 캐릭터. 노화 때문에 "뭣이라고?(なんだって?)"를 입에 달고 살며, 자기를 애칭으로 '히짱(ひぃちゃん)'이라 부르길 요구하는 부담스러운 할머니. 심지어 지금보다 수위가 훨씬 높던 80년대 시절에는 용변 조절이 잘 안 된다는 흠좀무한 개그까지 했었다. 보통 스튜어디스나 가이드, 점원, 마사지사, 아들을 찾아 상경한 할머니 등의 역할로 출연하며 이때 걸음걸이나 발음 등 하나하나 디테일한 노인 연기에 감명을 받았다는 후배 코미디언들의 증언이 많다. 지금이야 시무라도 60대이지만, 그는 24살에 드리프터즈의 정식 멤버가 된 직후부터 팀 내 최연장자인 이카리야 이상으로 노인 연기를 많이 해 왔다.
  • 수염 댄스(ヒゲダンス): 카토 챠와의 콤비. 엄청나게 큰 콧수염을 붙이고 배경음악에 맞춰 춤을 추며 흡사 김병만달인(개그콘서트)처럼 다양한 기예를 선보인다. 다만 이쪽은 거의 대사가 없고 류담과 같은 소개 역도 없어서 진행이 매우 다르며, 순수하게 중심 잡기, 칼에 과일 던져서 꽂기 등의 기예만을 보여준다. 수염 댄스 테마곡
  • 신(神様): '도리후 대폭소'에서만 등장한 캐릭터. 분명 일본의 전통 복장을 입긴 했는데 얼굴에는 매우 안 어울리는 동글 안경을 쓰고 있어 몹시 튄다(...). 등장인물들이 신에게 소원을 빌거나 '카미(神)'와 일본어 발음이 같은 단어들로 말장난을 할 때마다 등장한다. 신을 영접한 등장인물들이 "당신은 신인가요?"(あなたは神様ですか?)하고 물으면 "그럴리가 있냐, 난 신이라구."(とんでもねえ、あたしゃ神様だよ)라며 동문서답한다. 물론 등장인물들에게 하나도 도움은 되지 않는다.
  • 부부 콩트: 전원집합 시절(70년대 초)부터 현재까지 조금씩 변형을 거쳐 내려오고 있는 유구한 역사의 콩트. 게스트로 출연한 여성 출연진들과 콤비를 짠다. 그 종류로는 보케 천연 새색시가 "난 몹쓸 여자로군요(私ってダメな女ね)" 하며 과도하게 비관적으로 나오면 시무라가 이를 달래주는 콩트, 바가지 긁는 아내를 주체하지 못하고 부부싸움에 이르는 콩트, 손님들 앞에서는 생글생글 웃는 아내가 남편 앞에서는 무서운 악처로 돌변하는 콩트 등 매우 다양하다. 지금까지 아내 역을 맡아 봤던 여성 스타들로는 사쿠라다 준코, 마츠다 세이코, 마츠모토 이요, 이시노 요코(1번 항목), 호리 치에미, 켄 나오코, 그리고 일회성 출연이었지만 마츠코 디럭스(...) 등이 있다. 드물긴 하지만 과거에는 사와다 켄지가 남편, 시무라가 부인으로 여장하여 진행한 부부 콩트도 있었다.

5. 여담


  • 드리프터즈 멤버 중 가장 막내인데, 젊을 때부터 M자형 탈모가 생겨 노안 소리를 들었다. 게다가 자주 노인분장을 맡았으니 그럴수 밖에. 이카리야 생전에 같이 찍은 영상을 보면 또래로 보인다. 참고로 둘의 나이 차이는 19살. 이카리야가 일찍 결혼했으면 아들뻘이다. 시무라는 후배 다운타운과 함께 한 토크쇼에서 "그런 사람을 무대 위에서 사정없이 때려대는 게 또 재미있는 점 아냐" 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 시무라는 종종 히가시무라마야 온도를 부르면서 백조의 호수 패러디라며 가랑이에서 백조 머리가 툭 튀어나오는 발레 복장을 하고 나왔는데, 이것이 일본 내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일본의 창작물에서 가랑이 사이에 백조 머리가 달린 옷이 나오면 이것을 패러디한 것이다.[37] 다만, 일본의 발레리나 중에서는 시무라가 발레를 모욕했다며 그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다소 선정적일 수 있어 링크로 대체한 사진
  • 유행어도 많이 만들어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바보 영주에서의 "아잉~"[38] 츳코미 하면 떠오르는 말투인 "오마에, 소레와 나이다로(너, 그건 아니지)!"가 있다. 참고로 일본 수어에서 아잉~ 포즈는 시무라 켄을 의미한다.
  • 한국에서 가위바위보를 하기 전에 "안내면 진거!"를 하듯 일본에서는 가위바위보를 하기 전에 '처음에는 바위!(사이쇼와 구!)'라고 외치고는 하는데, 이것도 시무라 켄이 고안해 낸 것이다. 8시다 전원집합 녹화를 마치면 도리후 멤버들은 항상 스태프들과 모여서 뒤풀이로 술자리를 가졌고 술자리가 파하기 전에는 술값 내기를 했다고 한다. 이때 시무라 켄의 제안으로 술에 취한 상태에서 게임에 집중하고 심리전에 말리지 않기 위해서 첫 번째내는 걸 주먹으로 정하고 가위바위보를 하기 시작했는데 이 규칙을 기반으로 시무라 켄과 나카모토 코지가 전원집합의 코너 중 하나로 가위 바위 보 코너를 만들었고 해당 코너가 유행, 일본 전역으로 퍼져서 이제는 일본인 전부가 사용하는 말이 되었다. 그리고 2000년대 후반 이후에는 이것이 한국 코미디언들에 의해 수입되어 "남자는 주먹 가위바위보"로 정착했다.[39]
  • 히게 댄스나 부부게 같은 시무라 켄의 개그는 당시 한국 개그 프로그램에서도 많이 참고해갔다. 말이 참고 수준이지 아예 표절인 경우도 허다했는데 1970년대와 80년대 당시에는 개편철만 되면 예능PD들이 포맷이나 아이템 구성을 하기위해서 부산에 내려간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왔고 아이디어가 떨어진 출연진들이 일본 프로그램에 나온 콩트 내용까지 베껴 써먹기도 했다. 그래서 1970~80년대의 코미디 프로그램들을 보면 일본스러운 색채가 은근슬쩍 나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시무라 켄 같은 스타일의 캐릭터와 코너로 재미를 많이 본 개그맨이 서세원, 심형래였다. 이경규이봉원도 일본 유학 시절에 시무라 켄이나 비트 다케시의 연기를 깊게 연구한 적 있으며 이경규는 일본 방송국에서 실제로 대면한 적도 있다.[40]


  • 김병만은 2011년에 일본 진출을 하면서 이 문서 상단에도 적혀 있는 '쿠라베루 쿠라베라'라는 일본 방송에 시무라 켄의 초청을 받아 출연했는데, 패널 석에 앉아 있던 시무라 켄을 보고 반가워하며 "한국 개그맨들은 당신의 비디오를 보고 연구를 한다."라는 말을 하기도 했는데 단순히 시무라 켄 기분 좋아지라고 인사말로 했을 수도 있지만, 충분히 사실일 수도 있다. 실제로, 한국에서 시무라 켄의 개그를 대놓고 베낀 사례가 아예 없던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방송에서 김병만은 "DVD를 통해서 당신의 개그를 접했다"라고 언급했다. 이 날 출연분에서 김병만, 노우진, 류담 3인조는 달인 코너의 차력 개그 몇 가지를 선보이자 매우 좋아했는데, "일본에서는 이제 슬랩스틱 콩트 코미디가 점점 사라져가고 있는데 한국에서 명맥을 이어가서 매우 기쁘다"라고 했다.
  • 당시 최고의 인기를 자랑하던 개그 콤비인 콩트 55호의[41] 심부름꾼이 될 생각도 있었다고. 하지만 음악적인 면 때문에 드리프터즈에 들어가기로 했다. 콩트 55호에 들어갔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 도리후의 멤버들 중 동기나 후배 게닌들과 사이가 가장 친하다. 3년 연상이지만 같은 히가시무라야마 출신이고, 1972년에 연예계에 같이 데뷔한 비트 다케시는, 도리후를 중심으로 먼저 브레이크한 시무라를 좋아하였고, 칸 영화제의 인터뷰에서도 "다케시 군단은 드리프터즈를 의식해서 만들어졌다"라고 할 정도로 찬사를 하였다. 1999년에 1년간 방영했던 "신출귀몰! 타케시무켄"에서 같이 공연한 이후, 여러 방송이나 특방에서 같이 나오는 횟수가 많아졌다. 이런 교류를 통하여, 다른 연예인들과 회식을 마치고 자기가 내겠다고 좋게 다투는 에피소드도 나올 정도로 친하다. 특방의 엔딩으로 타케시의 텝댄스와 시무라의 샤미센의 협연을 하기도 했고. 비슷한 시기에 데뷔하고 개그 스타일이 제법 일치하는 요시 이쿠조나 이웃지역 출신이자 교우관계인 도코로 죠지 하고도 친한 사이.
  • 후배 중에서는 타카 앤 토시를 가장 아끼는데, 타카토시의 스타일을 마음에 들어 하며 호평하였고, 이후에도 바카도노에 타카토시가 자주 등장하고 있다. 하마다 마사토시하고도 의외로 친한 사이인데, 이카리야를 대신하여 시무라를 때리거나 시비 거는 존재는 하마다가 유일하다고 말했기 때문.[42]그래서인지 요즘 하마다와 시무라의 공연 빈도가 늘어났다. 최근 리액션 개그에 능력이 부족한 게닌들의 실력을 향상시키는(?) 새해 특방에서 같이 활약하고 있다.
  • PC 엔진으로 시무라 켄을 주인공으로 한 횡 스크롤 액션 게임이 발매되기도 하였다. 한국에서는 오락실에서 PC 엔진 통에 시간제 가동되었는데 일본 오와라이를 모르는 한국의 아케이드 키드들에게는 그냥 이주일 2라고 통했다. 참고로 이주일 1은 이거.[43] 원제는 <카토짱 켄짱>으로 전원집합 종영 후 방영한 콩트 코미디 프로그램 <카토쨩 켄쨩의 기분 좋은 TV>내 꼭지였던 시트콤 <탐정 이야기>를 모토로 삼아 개발된 게임이다. 게닌 후배이자 시무라 켄의 술친구인 치도리의 야마모토 다이고가 술자리에서 어릴 적에 이 게임을 플레이했다는 얘기를 하면서 플레이시에 주로 카토짱을 많이 골랐다고 하자, 은근슬쩍 불편한 얼굴을 했었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1] 아버지 시무라 켄지(志村憲司)가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를 좋아했기 때문에 이름의 양 끝의 글자 徳과 康을 뒤집어서 명명했다고 한다.[2] 현재의 히가시무라야마시[3] 이카리야 쵸스케보다는 작다. 나머지 멤버들보다는 크다.[4] 와타나베 엔터테인먼트 계열로 이시다 아유미도 같은 소속.[5] 간토에서 특히 선호도가 높은데, 후지 TV에서 맡는 시무라의 30분짜리 칸무리 프로그램도 만자이 선호도가 강한 간사이TV에서는 방송이 안 되며 본인도 간사이 게닌과는 칸무리에서 잘 방송하지 않는다. 대신에 선 텔레비전에서 틀어준다.[6] 빅3 중 비트 다케시와는 데뷔 시기가 같지만 시무라 켄은 데뷔한지 1년도 안되어 전국민적인 인기를 끈 반면, 다케시는 만자이붐 전까지 긴 무명시절을 겪었다. 참고로 시무라의 전성기 시절에 타모리와 산마는 갓 데뷔한 신인이었다. 데뷔 시기나 빅3 이전 시대를 풍미한 점으로 볼 때 사실상 빅3 위에 존재하는 인물이다.[7] 시무라 켄이 이주일에게 영향을 준 점도 있는데 1977년에 시무라 켄이 카토 챠와 같이 정장을 입고 가짜 수염을 달고 나와서 음악에 맞춰 엉뚱한 춤을 추는 '수염 댄스'라는 콩트에서 영향을 받아 이주일의 상징적인 개그인 '수지 큐'가 탄생한 점은 암묵적이긴 하지만 공공연한 사실로 인정되고 있다. 이를 부정하기엔 복장부터 전체적인 컨셉이 너무 흡사하고 시기적으로도 시무라 켄의 수염 댄스가 2~3년 정도 더 앞선다. 굳이 차이가 있다면 수염이 있냐 없냐와 기예도 중간에 펼치는 수염 댄스와는 달리 수지 큐는 그런 게 없었다는 정도.[8] 통칭 비트 다케시.[9] 후지 TV에서 만들어낸 단어.[10] 굳이 여기서 더 넣자면 쇼후쿠테 츠루베도 포함 시킬 수 있다.[11] 다만, 동거했던 여성은 두 명정도 있었다고 한다.[12] 이것때문에 AV배우 출신 연예인인 미히로의 연예 활동에 대해 시무라 켄이 후견인 노릇을 해줄때 '여자에 무심한 그가 이렇게 챙기다니!'라며 열애, 결혼설 등이 돌았다. 시무라 켄측에 의하면 재능이 있어 키워주고 싶은 것이라고는 하는데... 실제로 이 사람의 오랜 행적과 미히로의 뛰어난 연기력을 보면 사실일수도 있긴 하다. 그런데 미히로를 높이 치는 건 사실이겠지만 키워주고 싶다기 보다는 미히로의 연기력과 그 자질을 높이 사서 그만큼 투자를 하면 나중에 뿌린 만큼 거둔다는 계산 하에 행동했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13] 코로나 19 감염으로 사망후 열린 추모공간에는 20대뿐 아니라 교복을 입은 어린 학생들도 많이 보였다.[14] 유재석은 오히려 비교적 젊은 나이(30대 ~ 50대)에 최정상의 위치에서 개그맨, MC로 지속적으로 활동한다는 점에서 마츠모토 히토시쪽에 가깝다.[15] 굳이 2020년 비교될만한 인물을 찾아보자면 한국에 대입시킬만한 인물은 이경규가 맞는 편이다. 일단 송해와 시무라 켄의 나이차이는 너무 크다. 이경규와는 10살 차이긴 하지만, 비교할만한 한국의 스타중에서 가장 근접한 나이대고 일본이 아무래도 예능계 발전이 빨랐다보니 데뷔와 활약 당시의 상황이 비슷했던 편이다. 행보면에서도 둘 다 젊은 시절엔 망가짐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몸개그와 함께 최고의 자리까지 올라갔었고 잠시 침체기를 겪었지만, 죽지않은 입담으로 사회자 역할을 주로 맡으며 부활했고 게스트로 나와도 망가지는 역할은 물론이며 후배들에게 공격당하는 역할도 잘 소화하며 재미를 보장하고 있으니. 그리고 이경규 역시 10대부터 노인층까지 한국인 대부분이 아는 인지도를 가지고 있다.[16] 여성 성추행 기믹이라 지금 보면 문제가 많다.[17] 한국과 일본을 비교하며 조사하는 프로그램이다. 카라도 나왔다고.[18] 일본은 이미 3명 이상의 인원으로 펼치는 그룹만자이도 있다. 트리오는 보케2+츳코미1이 일반적인데 일본 식으로 비교하자면 김병만, 노우진은 보케, 류담은 츳코미를 맡고 있기도 하다.[19] 바보 영주가 꿈에서 미인을 만나고자 베개 밑에 야한 사진을 넣어두고 잠에 들었는데, 그의 장난에 당한 가신들이 베개 밑의 야한 사진을 몰래 어머니 사진으로 바꾸어 놓았다. 결국 꿈속에서 어머니의 꾸지람을 들은 바보 영주는 소스라치게 놀란다는 스토리. 야스노리는 시무라의 본명.[20] 정확히는 츠키비토(付き人)라고 해서, 일본의 도제제도 상에서 제자의 일종으로서 잡무와 예능인일 경우 어느정도 매니저의 역할도 하는 계급을 뜻한다. 현재와는 달리 당시 일본 코미디업계에서는 이렇게 스승이 될 사람에게 츠키비토 같은 제자로 시작해야 입문할 수 있었다. 다케시 군단이 대표적 사례.[21] 처음에는 이카리야 쵸스케의 심부름꾼이었다가 1년만에 그만두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먹고 살다가 다시 카토 차의 밑에 들어가서 심부름꾼으로 생활하였다고 한다. 그러고보니 스와조노 치카하루도 처음엔 카토 챠의 운전수였다. 이때 시무라는 도리후 멤버들이 남긴 잔반을 긁어모아 억지로 1인분을 만들어 배를 채울 정도로 어려운 시절을 보냈다. 다만, 운전 면허가 없다는 이유로 당시 코미디언으로서 큰 인기를 끌고 있던 카토에게 운전을 시키고 자기는 조수석에 편히 앉아 간다든지, 식객인데도 멋대로 목욕물에 먼저 들어간다든지 하는 아이러니한 상하관계를 만들기도(...).[22] 원래는 10분의 시간이 배당되었지만, 점점 시간이 줄어 나중에는 4분까지 줄어든 적도 있다고 한다. 그래도 굴하지 않고 열심히 소재를 짜고 공연을 계속했다고...[23] 1969~1985년 TBS에서 방송한 공개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방영 당시에 그야말로 전 국민적인 인기를 끌었다.(그 인기는 전성기의 무한도전급이라고 생각하면 될 듯) 현재도 여전히 전설(최고 시청률 50.5%)로서 자주 회상되고는 한다. 심지어 동시대에 KBS 2에서 '토요일 전원출발'이라는 인기 쇼가 있을 정도였는데 이름은 당연히(?) 저기에서 유래되었을 것으로 추측. 뭐 이건 가요톱10과 더 베스트 10의 관계처럼 80년대 방송가가 다 그 모양이긴 했지만...[24] 이때 그의 나이 24살이었는데, 잘생긴 인상 덕분인지 그 당시를 보여주는 자료화면이 나올 때마다 방송에 출연한 여성 패널들의 탄성이 쏟아져나온다. [25] 시무라 켄은 도리후 내에서 유일한 전후세대(베이비부머)였고 리더 이카리야 쵸스케와의 나이차는 무려 19살, 가장 나이차가 적게 나는 카토 챠와의 나이차도 7살이었을 정도로 다른 멤버들과 나이차가 많이 났다. 그래서 다른 멤버는 전원집합 종영(1985, 쇼와 60) 이후 슬슬 전성기가 끝나기 시작해 그 후로 연기에 전념하게 된다. 리더 이카리야 쵸스케가 배우로 유명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26] 원래는 제일 맏형인 이카리야 쵸스케가 항상 "어이, 히가시무라야마의 촌놈"이라고 놀리면 이 온도로 받아치며 놀곤 했었다고 한다. "그렇다" 코너 중에 유명 민요를 부르는 기획이 있었는데 시무라가 반 장난삼아 이 곡을 불렀던 것이 히트한 것이라고.[27] 이 곡은 대히트를 쳐서 히가시무라야마 시를 전국적인 네임드 시로 만들었다. 지금도 히가시무라야마역 앞에는 시무라 켄의 나무가 남아있다.[28] 두 사람의 콤비는 "카토켄"이라는 애칭으로 친숙하다.[29] 방송사상 최초로 시청자 홈비디오 코너를 선보인 것으로 유명한 프로그램. 해당 프로그램의 1부로 방영된 시트콤 <탐정 이야기>도 유명하다. 당시 라이벌 프로그램인 <우리들은 익살족>을 제치고 예능 프로그램 시청률 1위를 달성하였다.[30] 주로 선정성이 강한 성인 코미디를 선보인 콩트 프로그램. 사실 80년대만 해도 일본 방송가의 규제가 엄격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무라 켄 등의 보케 캐릭터들이 콩트에서 여자 게스트 가슴을 막 주물러대는 장면 정도는 흔하게 방송을 탔었다.[31] 이 때 효케츠는 '''새롭게 가자(あたらしくいこう)''' 라는 캠페인을 진행하면서 시무라 외의 다른 연예인이나 유명인의 평소와 다른 모습을 주제로 광고를 찍었다. 이 캠페인에 타카하시 미나미, 마키 요코, 사카나군, 가와사키 무네노리 등이 모델로 나왔다.[32] 하지만 마지막에 바카도노가 "오케이~!"를 외치며 끝내면서 희극인으로서의 아이덴티티도 잊지 않았다.[33] '천재 시무라 동물원'의 레귤러 패널로서 수년간 시무라 켄과 호흡을 맞춘 여성 코미디언 후배이다.[34] 제 1회 게스트가 타조 클럽이었다.[35] 추모 방송에서 MC 아이바를 비롯한 출연진들은 영상을 보면서 계속 눈물을 흘려 진행을 힘들어하기도 했다.[36] '난다 키미와'를 새는 발음으로 '난다 치미와'로 바꾼 것이 포인트.[37] 한국에 가장 잘 알려진 것으로는 Mr.2 봉쿠레 같은 것이 대표적.[38] 크레용 신짱 만화책을 보면 신짱이 이 유행어를 종종 사용한다.[39] 한국 쪽에는 원래 '안 내면 술래 가위바위보'란 가락이 있었는데, 이게 1박2일 복불복 등에서 '남자는 주먹'이란 말이 이 가락과 묘하게 합쳐진 것.[40] 하지만 시무라 켄이 그다지 이경규에 대해 흥미를 보이지 않자 실망하고 절치부심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이는 출판된 이경규 회고록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자서전 저술 시점에서는 "나 같아도 아시아 어느 나라에서 굉장히 유명한 코미디언이 왔다고 해도 심드렁했을 것이다. 내가 그 사람의 연기를 본 적이 없는데 알 게 뭔가"라고 적어놓았다.[41] 하기모토 킨이치와 사카가미 지로가 1966년에 결성한 개그콤비. 드리프터즈의 라이벌로 꼽혔다. 70년대에 접어들며 인기가 줄어들어 1975년 사실상 콤비가 해산된 이후에도 하기모토 킨이치는 한동안 MC로 대활약, "시청률 100%의 사나이"라는 별명으로 불릴 만큼 인기를 얻었다. 실제로 1985년까지만 해도 후지TV는 게닌 Big3 중 한명으로 아카시야 산마 대신 하기모토 킨이치를 꼽았다.[42] 바카도노 특집방송에서 시무라 대신에 하마다가 바카도노의 복장을 하고 등장하는 몰래카메라를 한 적이 있다.(하마다와 시무라 이외의 출연진은 모두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후 진짜 바카도노가 등장해서 둘이 티격대다가 하마다가 하늘같은 대선배인 시무라를 하리센으로 정말 인정사정없이 두들겨 팼는데, 시무라도 당황하면서 "지금 예능계에서 날 두들겨 패는건 너밖에 없다 이놈아!!"라고 했다.[43] 웃기게도 그건 비리 정치인을 비꼬는 게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