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
1. 개요
일본에서 2013년 7월 21일 치러진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
2012년 제4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아베 신조 총리의 자유민주당이 그야말로 '''초압승'''을 하여 자민당-공명당 연립정권이 325석을 먹어 중의원 2/3를 장악한 상황에서 치러진 참의원 선거였다.
주요 승부처는 도쿄도 같은 중선거구제 선거구들이 아니라 47개 선거구 중 무려 '''31곳'''이 걸려 있는 소선거구제 1인 선거구[1] 였다.
한국에서 치러지지 않는 방식인 참의원(상원) 선거는 중의원 의원 총선거처럼 한꺼번에 뽑지 않고 1/2씩 뽑기 때문에, 자민당이 비개선(50석) 합쳐서 단독 과반수 이상을 확보할려면 72석은 얻어야 했다. 결과는 이번에도 개선 총 119석 중 자민당이 개선 65석(+31), 공명당이 개선 11석(+1)으로 32석을 늘리며 압승. 유신회와 민나노당의 극우정당(개선 각각 8석)을 더하면 개헌 세력이 개선 81석으로 최소 2/3를 차지한 셈이 되었다.
2. 선거 전 화제
2.1. 아베 신조 정권의 신임 여부
23대 참선은 자유민주당 정권의 존폐가 위협받지는 않겠지만, 아베 신조 정권이 제대로 유지될 수 있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선거였다. 자민당이 참의원 선거에서 패배하면 자민당 내에서 아베 신조 퇴진요구가 거세질 것이기 때문.
2월 시점에서는 일단 아베 신조가 이끄는 자민당이 참의원 선거에서 크게 앞설 것으로 예상되었다.# 기사 아베 신조가 밀어붙이고 있는 일본 엔화의 무제한 양적완화 및 무제한 외환시장 개입을 통한 아베노믹스의 ''''엔화 떨어뜨리기 환율전쟁'''이 일본 내에서 큰 지지를 얻었기 때문이다.[2]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의 센카쿠 열도와 독도 강경발언 역시 크나큰 지지를 얻으며 자민당의 인기 급상승요인이 되었다.
참의원에서 자민-공명당이 참의원 과반을 얻으려면 개선 의석에서 지역구 + 비례대표을 더해 62석을 얻어야 했다. 공명당은 창가학회 조직표에 힘입어 최소 9~10석 정도를 얻을 것이 확실시되었으므로, 자민당이 53석 이상을 챙겨야 내각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는 31석이나 걸려 있는 소선거구제 1인 선거구에서 '''25석''' 이상의 선거구를 건져야하는 목표치였다.
아베 신조의 높은 지지율 때문인지 아베 신조와 부인 아키에와 친분이 있는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공천해서 뒷말이 나왔다. 심지어는 아키에와 친분이 있는 개훈련 전문가(...)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술친구(...), 심지어 자기 아버지가 사장으로 있었던 회사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는 가수까지 공천했는가 하면 아베 신조도 자신과 친한 고향 친구를 공천하기까지 했다. 자민당의 이시바 시게루 간사장조차 공천후보를 보고 "이사람 누구?"라고 했다고 할정도라니 말 다했다.(...)
그러나 이런 공천에도 자민당의 승리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라 일본 정치가 갈 데까지 갔다는 증거인듯 하다.
자민당이 6월 지방의원 선거인 도쿄도의회선거에서 '''전원당선'''이라는 기록을 세우면서 상황은 더욱 고조되었다. 물론 도쿄도의회 선거에서 결과가 나왔다고 해서 무조건 그 결과대로 가지 않지만[3] , 도쿄가 일본 제1의 도시임을 감안한다면 정국의 풍향계 역할을 하기엔 충분했다. 또 일부 자민당 인사가 성추문으로 물의를 빚었지만 반향은 크지 않았다. 결국 자민당은 대승을 거두었다.
2.2. 개헌의석 가능성
후술하듯 일본유신회가 스스로 자폭했기에 자민-공명이 과반수를 확보해도 개헌선 확보에는 실패할걸로 예상되었다. 애당초 개헌선인 2/3를 한번에 차지하려면 개선 121석 가운데 '''101석'''을 차지하는 말도 안 되는 의석을 획득해야했다(...)
개헌을 찬성하는 다함께당이 지난 제22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10석을 얻었지만, 연립여당인 공명당은 소속의원마다 찬반이 엇갈리는 정당이며[4] , 기본적으로 일본 민주당이 지난 선거에서 44석 차지한 것도 있고 일본 공산당 등도 개헌 반대 입장이다. 결국 지난 비개선의 60여석 + 공명당이 획득할 의석중 개헌 반대파 x석 + 민주당이 획득할 10석 중반대의 의석 + 기타 야당 의석 등을 감안하면 최소한 90석은 개헌 반대 의석이 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2015년 11월13일 기준 현재 참의원 242석에서 개헌 반대 의석은
민주당 59석 + 공산당 11석 + 생활당과 타로의 모임 3석 + 사회민주당 3석 + 유신당 잔류파 2석 (유신당 참의원 9명중에서 7명이 탈당해서 하시모토 도루가 2015년 10월에 새로 창당한 오사카유신회로 옮겼다. )+ 오키나와 사회 대중당 1석 + 공명당 개헌반대입장 8명(임기 2019년까지) + @ (2010년 선출된 공명당 개헌반대파) 로 = 87석+@ 정도로 개헌저지선 81석을 아슬아슬하게 넘었다.
2.3. 일본 민주당의 지리멸렬
일본의 전 여당이었던 일본 민주당은 노다 요시히코 정권에서 치러진 46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57석'''에 그치면서 그야말로 시망했으며, 선거를 앞두고도 내분에 휩싸여있었다. 기사 2012년 오자와 이치로 계파가 민주당을 떠나 일본 미래당으로 당을 분당시킨 상황에서 추가 분당까지 예측되었으나 분당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나 개헌이나 TPP 관련해 당내 갈등이 노출되면서 사실상 민주당이 수습되기는 글렀다는게 대체적인 시각.
공천 결과 상당수가 노조 출신의 인사들로 인지도면에서 자민당이나 극우정당들에 미치지 못해서 심지어는 공천을 받은 후보들이 '''못 이길 것 같아서''' 자진 사퇴하는 황당한 사태가 줄을 이었다. 대안세력으로서 인정받지 못하게 된 것이다.
참의원 선거의 전초전인 2013년 6월 도쿄도의회 선거에서 127석 중 15석(4당, 선거 전 43석의 1.3)을 건지는데 그쳐 17석을 확보한 일본 공산당에게 '''도쿄 제1야당 자리를 내줘버렸다.''' 이로 인해 참의원 선거에서의 참패가 확실해 보였으며, 실제로 참패했다.
2.4. 극우정당들의 약진 여부
3년 전 2010년 22회 참의원 선거에서 다함께당(민나노당)이 10석으로 약진하면서 본격적으로 극우정당이 성장하기 시작하였고, 1년 전인 2012년 46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다함께당과 일본 유신회가 동시에 약진하면서 중의원에서 15%를 차지하는 급성장을 보였다.[5] 이런 기세를 타서 2013년도 극우정당들이 크게 약진할 것으로 보이는 상황이었으나...
일본 유신회의 하시모토 도루 대표가 5월 중순 종군 위안부 문제로 망언을 하면서 일본 정계에 핵폭탄을 떨궜다.(...) 하시모토의 망언에 천조국에서 '''역겹다'''라고 맹비난하면서 당장 자민당, 다함께당이 일본 유신회와의 공조 파기를 선언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아베 신조의 높은 지지율로 고전을 면치 못할것으로 예상된 상황에서 망발을 일삼은 하시모토 도루때문에 일본 유신회는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여성표 이탈은 덤.
결국 이시하라 신타로가 일본 태양당으로 닦아 놓은 텃밭이어야 했던 도쿄 도의회 선거에서 다함께당이 그럭저럭 의석을 늘린 반면에 유신회는 그나마 있던 의석을 까먹으며 패배했다. 거기에다가 하시모토 도루는 자신의 말과 달리 퇴진하지 않으면서 리더십 위기까지 일어났다. 이번 선거에 걸려있는 유신회 의석이 적었던데다가 아직 오사카 지역에서의 지지세가 남아있어서 의석은 늘어나지만, 군소당 수준은 면치 못하게 되었다.
한편 민나노당도 유신회와는 달리 상황이 괜찮은 편이지만 그래도 2010년 선거 때보다 획득 의석이 적을걸로 예상 되었다. 2010년에는 자민당과 민주당 모두의 대안으로 자리를 잡을 수 있었지만, 2013년에는 더이상 아니기 때문이었다.
2.5. 일본 공산당의 화려한 부활?
1970년대까지 일본 정치의 중심축 중 하나였던 일본 공산당은 2000년대에 들어 민주당에 세를 빼았겨서 군소정당으로 몰락하였지만, 참의원 선거의 전초전인 도쿄도의회 선거에서 17석을 확보하며 '''단숨에 제1야당의 위치에 올라섰다. '''
대부분의 일본 언론들은 공산당 대약진의 원인을 대안 세력의 부재라고 분석했다. 민주당, 유신당이 몰락한 상황에서 갈 곳 잃은 표심이 자리를 잡은 곳이 공산당에 모인 것. 실제로 도쿄도의회 선거 출구조사에서 아베노믹스에 반대한다고 대답한 유권자의 절반이 공산당에 투표한 것으로 나타났다. 기사1기사2
참의원 선거에서도 비슷한 양상. 특히 유신회와 민나노당이 따로 후보를 내서 후보가 난립하면서 도쿄, 오사카, 교토, 아이치 등 주요 선거구에서 당선 커트라인이 크게 낮아지면서[6] 전국 지지율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선전할 가능성이 매우 커졌다.
2.6. 인터넷 선거 운동의 허용
2013년 봄에 이루어진 선거법 개정으로 이번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부터 인터넷을 활용한 선거운동이 허용되었다. 그에 따라 각 정당에서는 인터넷과 SNS를 활용해 활발하게 선거운동을 진행했다. 한국의 선거가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부터 SNS 선거운동을 시작한 것에 비하면 많이 늦은 셈이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투표율은 50%를 갓 넘기며(52.61%) 3년 전 선거 때(57.92%)와 비교해 크게 밑돌며 인터넷 선거운동이 큰 영향을 주지 못한 것으로 밝혀졌다.
3. 선거 예상과 결과
2013년 6월 29일 아베 신조 일본 수상이 정식으로 선거를 공포함에 따라 선거에 돌입하였다. 기사
7월 1일 나온 요미우리 신문 여론조사에서는 자민당 40%, 민주당 9%, 공명당 6%, 일본 유신회 5%, 다함께당 5%, 일본 공산당 4%가 나왔으며, 마이니치 신문 여론조사에서도 자민당 45%, 민주당 8%, 다함께당 7%, 공명당 6%, 유신회 5%, 아사히 신문 여론조사에서도 자민당 44%, 민주당 7%, 다함께당 7%, 유신회 7% 등으로 나왔다. 기사
7월 18일 아사히 신문이 공개한 각당의 예상 의석수는 자민당이 64석에서 72석, 공명당이 9석에서 11석으로 두 당은 합쳐서 최소 70석 이상을 확보해 절대과반으로 모든 상임위 의장을 장악할것이라고 전망되었다.
3.1. 선거결과
3.2. 출구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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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시 출구조사 발표 때부터 이미 승부는 결정이 났다. NHK 기준으로 자민당은 당선 확실만 61석(...)을 띄우는 괴물같은 성적표로 단독 과반을 만들었다. 연립여당 공명당이 10석~11석(전원당선)으로 예상되면서 연립여당 확정 의석만 71석을 확보했다. 특히 자민당은 1인 선거구에서 3곳을 제외한 28곳을 쓸어담는 출구조사 결과가 나왔다. 자민당 단독으로 최대 74석까지 예측되었다. 자민당이 지역구에서 100% 당선되어도 비례대표 득표율이 45%는 되어야하는데, 따라서 최대 74석까지 가능할 것이라는 출구조사에서는 '''자민당 정당득표율이 40%를 넘었던 걸로 나온 셈이다.'''
민주당은 최소 11석을 확보하면서 참패했고, 유신회가 칸사이 지방의 선전으로 최소 6석, 다함께당이 칸토 지방의 선전으로 최소 5석을 확보한 것으로 예측되었다. 공산당은 지역구에서는 한 석도 못 얻는걸로 나왔지만 경합으로 나온 곳이 3곳 있어 지역구 1석 정도는 가능할 것으로 보였고, 비례에서 3석을 확보한 것으로 예측되었다. 사민당 생활당 신당대지 녹색바람 등은 제로(0). 미확정(경합)은 24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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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결과는 자민당 65석, 공명당 전원 당선(20석), 민주당 17석 등으로 모두 적중했다. 반면 공산당이 3석 ~ 6석을 훌쩍 넘는 8석을 얻었으며, 유신회와 민나노 역시 지역구와 비례에서 각각 1석을 많이 얻은 8석과 2석, 1석을 더 얻은 8석을 얻었다. 오키나와 사회대중당의 의석 확보 역시 특기할 점.
3.3. 개표과정
개표 초반부터 '''자민당이 1인 선거구 31곳을 전부 휩쓸고 도쿄나 오사카 등은 공천한 2명의 후보를 모두 당선권에 올렸으며,[11] 비례대표 정당득표율이 60%를 넘나들면서 출발했다'''. 자민당의 압도적인 표심이 어느정도였냐면, 개표 극초반에는 연립여당인 공명당마저 자민당에 밀려 비례대표 정당득표 의석배분 기준인 2%를 아슬아슬하게 넘겼다.
그러나 전국 개표가 10%를 넘어 중반을 향해 치닫자 자민당의 독주가 서서히 깨졌다. 1인 지역구인 오키나와와 이와테에서 자민당 후보들이 1위를 빼앗긴 것이다. 오키나와에서는 지역정당인 오키나와사회대중당 후보에 밀리기 시작하고, 이와테에서는 무소속 후보가 1위로 치고나왔다. 다른 1인 선거구는 자민당의 독주가 계속되긴 했지만 저 두 곳을 내주는 바람에 '''1인 선거구 31석 싹쓸이'''에는 실패했다! 그래도 29석을 쓸어담았고[12] 2인 이상의 선거구에서도 대부분 목표치를 채웠다. 유신회와 다함께당이 선전한 칸사이와 수도권[13] 에서 의석이 좀 갈려서 지역구에서 최종적으로 자민당이 47석을 차지했다.
비례대표도 전국 개표가 10%를 넘으면서 중반전에 접어들자 자민당 정당득표율이 40% 아래로 '''DTD를 찍었고(...)''' 민주당과 공명당이 10%를 넘어 2위를 놓고 각축을 벌이기 시작했으며, 유신회, 다함께당, 공산당이 4위권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양상으로 흘러갔다. 나머지 정당은 2% 자체가 힘들어보였고, 실제로 개표 후반까지 자민, 공명, 민주, 유신, 공산, 다함께 6당만 비례대표를 얻는 것으로 나왔다.
개표가 막판으로 치닫자 간사이 지방의 몰표를 기반으로 유신회가 갑자기 10%를 돌파(...) 비례 6석을 챙겨가고, 대도시에서 많은 지지를 받는 공산당이 다함께당을 눌러 자민 - 공명/민주 - 유신 - 공산 - 다함께 순으로 순위가 굳어져갔다. 마지막 관전포인트는 사회민주당의 생환여부. 결국 막판에 아슬아슬하게 2%를 돌파, 최종 2.4%로 비례 1석을 얻어 막차를 탔고, 공명당이 제1야당 민주당을 누르고 비례대표 제2당이 되었다. (비례대표 의석 자체는 민주당과 동석인데 득표수에서 조금 더 많았다.)
4. 각 당 평가
4.1. 연립여당
4.1.1. 자민당
자민당은 선거 전 단독으로 과반수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돌 정도로 낙관적이었던 전망과는 달리 65석에 그쳤지만 어쨌거나 1992년 참의원 선거 이후 최다 의석을 기록했다. 특히 비례대표 득표율에서 단독 34.68%를 확보한 것은 지난 두 번의 20%대 득표에 그쳤던 참의원/중의원 승리에서도 없었던 결과.
소선거구제 1인 선거구 31곳 중 29곳을 쓸어갔고, 대부분의 소선거구에서 득표율 50%를 넘기는 압도적인 득표율을 보여주었다(총 선거구 득표의 42.7%). 이는 중의원 선거구 득표의 43.0%와 별반 다를바 없으며, 아베 내각의 지지가 유지, 상승 하고 있다는 신호가 되었다.
오키나와에서 지역정당에서는 오키나와사회대중당이라는 지역정당에 밀리고, 이와테에서 무소속에 밀린 것이 옥의 티. 그러나 오키나와는 주일미군기지 문제로 전통적으로 지역기반 정당이 강세이고, 이와테는 오자와 이치로의 텃밭이라 자민당보다는 오자와 왕국의 붕괴 여부에 초점이 맞춰졌던 점을 감안하면 별로 놀랄 일은 아니다. 이와테에서 자민당을 제치고 당선된 히라노 전 부흥성 대신은 민주당 출신이었다가 무소속으로 출마해서 자민당과 오자와 이치로의 지원을 받는 생활당 후보를 눌렀다.
4.1.2. 공명당
공명당도 '''전원당선'''이라는 역사적인 기록을 세웠다. 자민당과의 선거 전략 거래에 따라 지역구 4명(2010년 3.8% → 5.1%)과 비례대표 7명(2010년 13.07 → 14.2%)을 공천하였는데, 이 후보들이 전원 당선된 것이다. 도쿄도의회 선거에서 후보를 전원 당선시킨 이후 1달만에 참의원까지 전원 당선시키는데 성공하면서 창가학회의 영향력을 다시한번 보여주었다.
공명당 당선자 11명 중 평화헌법 개정및 헌법 9조 개정을 모두 찬성하는 의원은 3명이고 나머지 8명은 둘중 하나라도 반대하거나, 무응답이다. #참고 사이트
4.2. 야당
4.2.1. 일본 민주당
민주당은 17석을 확보하는데 그치면서 2001년의 26석은 물론이고 일본사회당[14] 이 기록한 1986년의 20석 조차도 밑도는 역사적인 제1 야당의 참패를 기록했다. 2010년의 참패에서 다시 두,세 토막 당한 셈.
모든 소선거구제 선거구에서 패배했고, 중선거구제 선거구에서도 칸사이의 일본 유신회나 다함께당[15] 등에 밀려서 좋은 성적을 내는데 실패했다. 선거구 10석, 비례대표 7석을 얻었다.
그나마 중선거구로 의석을 벌며 원내 2당 자리는 유지하게 된 것이 다행일 수는 있다. 개헌선 사수, 의석 사수는 고사하고 공명당, 유신회에게 밀려 원내 4당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 그러나 이것도 유신회의 참패 때문이지 비례 득표율은 15.9%에서 다시 13.4%, 지역구 득표율은 22.8%에서 16.3%로 떨어졌다. 비례대표 득표는 공명당(14.2%)에 밀린 제3당이었다.
4.2.2. 일본 유신회
일본 유신회는 비례대표에서 10%대(11.9%)의 득표율을 올리며 총합 8석을 확보했다. 민나노당, 공산당에 조차 밀릴 것이라는 당초 예상과 출구조사[16] 보다는 선전한 것. 그러나 하시모토 자신이 내세운 승리기준(개선/비개선 합해서 10석)에 1석 모자라며, 비례대표 득표가 중의원 때의 자그만치 20.3%(제2당)에서 반토막이 났다(제4당, 제2야당).
하지만 유신회를 하시모토로부터 빼앗을 생각을 하고 있던 이시하라 신타로 입장에서도 치명적인 선거결과인데, 칸토 지방에서는 '''전패'''했기 때문이다. 이시하라는 선거 전에 하시모토를 비난하다가 선거 후에는 하시모토를 두둔하는 등 태도가 돌변하게 되었다. 2012년 12월 중의원 의원 총선거 때는 중의원을 칸토 지역에서도 배출하는데 성공하면서 하시모토와 나름 비슷한 입지를 가졌던 이시하라였지만, 7개월 만에 칸사이를 제외한 전지역에서 전패하면서 눈치를 보게 된 것이다.
선거 참패에도 칸사이 지방의 강력한 지지로 대표직에서 사퇴하지 않을 것으로 보이고, 오히려 이시하라의 정치적 입지가 위태로워졌다. 이 조짐은 바로 전 달(2013년 6월)에 있었던 도쿄도의회 선거에서도 드러났지만, 전국 선거에서 드러난 것은 처음. 결국 평화헌법 개헌을 둘러싼 당 내 갈등을 이유로 2014년 5월 29일 분당의 길을 걷게 되었다.
비례대표로 출마했던 전 프로레슬러 안토니오 이노키가, 비례대표 부문에서 당 내 1위로 통과, 18년만에 국회 입성을 달성했다.
4.2.3. 다함께당
민나노당은 지역구 4석, 비례대표 4석을 확보하였다. 2010년 참의원 선거때 획득한 10석보다 개선 의석 수가 적었으나(8석), 8석 늘어난 총 18석을 확보, 중견 야당으로 성장하는데 성공했다. 3년만에 비례대표 정당득표가 반토막[17] 난 것은 확실히 위기의 신호이나, 이는 유신회라는 대체재에 의해 줄어든 것으로 중의원 비례대표때의 8.7%에 비해 선방했다고 볼 수 있었다.
선거구(지역구)에서는 3년 전 3석보다 많은 4석을 얻었다. 사이타마현[18] , 가나가와현[19] , 아이치현[20] , 미야기현[21] 에서 의석을 확보하는데 성공하였다. 중의원 때의 선거구 득표(4.7%)보다 7.8%로 월등히 높다. 그러나 칸토의 핵심인 도쿄와 치바(11.9% 4위)에서 당선자를 내지 못한 것은 약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도쿄는 5.7%로 득표율도 많이 낮았다.
총평을 하자면 그럭저럭 평타정도는 친 수준이다. 와타나베 요시미 대표의 리더십에는 변화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민나노당의 선거구 목표 의석은 달성되었으나, 비례대표 목표 의석은 실패하면서 약점을 드러냈다. 결국 다함께당이 앞으로 중견 야당으로써의 면모를 얼마나 잘 보여주는가에 따라 3년 뒤인 2016년 제24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의 성적이 갈릴 것으로 보인다. 정당득표율을 올리는 게 목표가 되었다.
4.2.4. 일본 공산당
일본 공산당은 8석을 확보하였다. 지역구 3석, 비례대표 5석(5당)으로 1998년 참의원 선거 이후 최다의석수이며 특히 '''도쿄, 오사카, 교토'''등 주요 대도시 선거구에서 민주당을 누르면서 도시의 제1야당으로 정치적 입지가 크게 향상되었다.
특히 교토에서는 창가학회와 공명당의 끊임없는 견제에도 굴하지 않고 지역구를 당선시켰으며, 도쿄의 중선거구역시 5명을 뽑는데 3위(12.5%)로 당선에 성공했다. 출구조사에서 예상한 경합 지역에서 모두 승리. 선거구 득표율은 10년 참의원 7.3%와 중의원 7.8%를 훌쩍 넘는 10.6%.
비례대표 지지율 역시 지난 참의원 때와 중의원 때 얻었던 6.1%에서 9.68%로 비약, 일약 제3야당이 되었다.
4.2.5. 사회민주당
사회민주당은 1석에 그치며 부진했다. 그나마도 선거구는 출마 자체가 없다시피했고(득표 2010년 1.03% → 0.51%), 비례대표에서도 막판 스퍼트가 없었으면 그대로 낙선이었다. 비례 득표율이 3년 전 3.84%에서 줄어든 2.36%를 건지며 간신히 1석을 확보했다. 개선 2석에서 개선 1석이 줄어들면서 후쿠시마 미즈호 당수의 입지가 위태로워질 것으로 보인다. 결국 후쿠시마 당수는 사퇴하였고, 요시다 다다토모가 당수로 당선되었다.
4.2.6. 생활당
오자와 이치로의 생활당은 주요 선거구는 물론 텃밭인 이와테에서 무소속에게 밀리며 대굴욕을 겪었다(1.77%). 그리고 비례대표(1.17%)에서도 일찌감치 나가떨어지며 전패. 이로써 오자와 이치로의 정치 생명은 완전히 끝장났다.
4.2.7. 기타 정당 및 무소속
녹색바람(비례 0.81%), 신당대지(비례 0.98%) 등 다른 정당들은 개표 시작부터 나가떨어져서 GG. 그 중 오키나와 지역정당인 오키나와사회대중당은 오키나와에서 자유민주당을 누르면서 당선에 성공했다. 무소속은 도쿄도에서 4위로 당선한 1명[22] 과 이와테에서 당선된 1명 등 총 2석에 그쳤다.
5. 결과 및 향후 전망
일본과 외교적으로 대립중인 한,중,러의 관심사는 자민-공명 연합의 압승은 기정사실이고, 다만 이들 및 이들과 연계된 개헌세력(일본유신회, 다함께당)의 총원이 '''개헌선(162석)'''을 넘을지의 여부였는데, 결과적으로 일단은 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일본의 개헌 정국은 2016년으로 7월로 예정된 제24회 참의원 선거로 유보되는데 그쳤다. 민주당이 2010년 제22회 참의원 선거에서 확보했던 41석이 교체 대상이기 때문이다. 민주당의 총 의석이 59석인데 무려 41석이 교체대상(...)
게다가 선거구마저 야당에게 꽤 불리하게 개편되었다.[23] 2인 선거구가 10곳에서 4곳으로 대폭 줄었고, 남은 2인 선거구 4곳조차 시즈오카,히로시마 2곳을 제외하면 2등 당선도 하기 힘든 곳이다.[24] 또한 3인 선거구는 5곳으로 개편되었는데, 3인선거구부터는 자민당이 후보를 2명씩 내는 경우가 많은데다, 후보 개인의 인물표로 각각 8%가 가산되면서 민주당 득표율이 또 잠식된다. 민주당이 확실히 당선을 장담할수 있는곳은 홋카이도 1곳정도다. 4인 선거구는 카나가와,오사카,아이치 3곳인데 가나가와,오사카는 보수세가 강한 곳이라 민주당이 확실히 당선을 장담할수 있는곳은 아이치 1곳정도다. 6인선거구는 도쿄 1곳인데. 민주당이 집권하던 전성기 같으면 후보를 2명 내보내는 전략도 가능했겠지만 지금 지지율에 그런 짓(?)을 했다간 전멸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 민주당은 후보 1명 보내서 확실하게 1석 확보하는게 최선. 4회 참선 항목 참조.
유신당의 경우 하시모토 도루가 오사카유신회를 창당하자, 당소속 참의원 9명중 7명이 탈당해서 오사카유신회로 옮긴 상태에 여론조사에서 지지율은 0%대로 추락했다. 그러므로 더 볼 것도 없는데다가, 공산당들과의 야권연대 자체도 중도지지자 이탈을 이유로 민주당 내에서 탈당카드까지 꺼내들면서 논란이 많다. 중대선거구에서 경합지역 3곳을 확실하게 추가하는 정도일텐데.
이것만 해도 아주 어려운데, 추가로 선거연령 조정으로 보수성향이 강한 만18세,19세가 선거권을 갖게 되었다. 결국 여권의 개헌선 돌파는 시간문제가 되었다. 물론 가장 논란이 많은 일본 헌법 96조 개헌에 대해서는 개헌을 찬성한다고 해도 이 부분을 고치는건 반대하는 의원들도 있기 때문에 확신할 수만은 없지만.
6. 관련 문서
[1] 아오모리, 이와테, 아키타, 야마가타, 후쿠시마, 도치기, 군마, 도야마, 이시카와, 후쿠이, 야마나시, 기후, 미에, 시가, 나라, 와카야마, 돗토리, 시마네, 오카야마, 야마구치, 도쿠시마, 가가와, 에히메, 고치, 사가, 나가사키, 구마모토, 오이타, 미야자키, 가고시마, 오키나와[2] 민주당 정권시절 7~8천엔대에 머물던 닛케이 지수를 최고 15,942.6엔(2013년 5월 23일 기준)까지 끌어올리고 엔-달러 환율도 목표로 세웠던 1달러-100엔대로 끌어올리는데 성공했'''었'''다. 단지 이게 거품처럼 너무 치솟하서 그런지 안정을 잡지 못하고 한달도 안돼서 닛케이 12,000엔대, 엔달러 환율도 94엔까지 급락했다는게 문제. 아베 노믹스 항목 참조.[3] 예를 들면 2005년 도쿄도의회선거 → 제44회 중의원 선거(일명 우정선거. 하지만 이건 민주당이 이겼다가 대패한 케이스였고...[4] 2013년 선거에서는 당선자 11명중 3명이 개헌및 헌법9조 개정을 모두 찬성[5] 유신회 54석, 민나노 18석으로 72석/480석(총원). 민주당 57석과 미래당 9석을 합쳐도 66석으로 극우정당이 전 여당이었던 민주당계 정당보다 의석이 더 많았다.[6] 공산당은 과거 2001년 참의원 선거 때까지는 중선거구에서 당선자를 내기도 했지만, 2004년 참의원 선거때부터 민주당이 부상하면서 선거가 양당제화 하여 당선 커트라인이 높아지는 바람에 당선자를 내지 못하게 되었다.[7] 중의원 총선과 달리 석패율제는 시행되지 않는다.[8] 소수점 득표수가 있을 수 있다. 안분표 항목 참고.[9] 소수점 득표수가 있을 수 있다. 안분표항목 참고.[10] 공명당한테도 비례대표에서 밀렸다.[11] 자민당은 소선거구와 2인 선거구에는 1명, 3인이상 2명씩 공천했다. 4~5인 선거구는 공명당이 한명씩 더 후보를 내서 실질적으로 3명 공천이다. 그러니까, 선거구 의석에서 1명 적게 냈다고 보면 되겠다.[12] 심지어 원전 사고지인 후쿠시마에서도 자민당 후보가 당선되었다. 아베정권이 원전 재가동을 추진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야말로 흠좀무.(...)[13] 도쿄도를 제외한 사이타마현, 가나가와현 등.[14] 1995년의 일본사회당 16석은 원내3당, 집권여당(당시 자민당과 연정)으로써 기록한 것이기에 제외.[15] 미야기현과 가나가와현, 사이타마현 등. 특히 미야기현은 치명적이었다. 자민당 1위에 이어서 민주당 후보가 계속 2위를 달리다가 '''개표 97%'''에서 다함께당 후보에 밀려서 5천표차 3위로 낙선했다.[16] NHK를 제외한 방송사에서 유신회는 6~7석 정도로 6당에 그칠것으로 예측되었다.[17] 2010년의 7석(13.59%, 공명당을 앞선 제3당) → 4석(8.93%, 공산당에 뒤지는 제6당)[18] 16.5%로 3명 당선 중 3위로 당선. 하지만 4위(민주당 후보)와의 표차가 '''10만표'''나 났다.[19] 4명 선거구인데 18.8% 2위로 넉넉하게 당선.[20] 도시 '''나고야에서'''는 일본 공산당 후보에 밀려서 4위로 낙선인데, '''나고야 외 지역'''에서 공산당을 싫어하는 보수적인 농민들의 표를 등에 업고 3위로 역전하여 당선에 성공했다.[21] 민주당 후보가 개표 초반에 앞서나갔으나, 개표 60%를 넘어서면서 민나노당 후보의 맹추격이 시작되어 개표 97%에서 역전해서 2위로 당선에 성공했다.[22] 야마모토 타로라는 배우로, 탈원전을 외치며 당선되었다. 다만 평소의 그의 기행으로 당선 결과에는 호불호가 갈리는 편.[23] 1인선거구의 경우 대부분 자민당의 압도적인 우세지역으로, 실제로 2013년 선거의 경우 오키나와,이와테 2곳을 제외하고는 자민당이 싹쓸이를 했다 야권연대를 한다고 해도 야당이 뭘 어쩔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단일화를 해봐야 자민당 45% 이상에 군소우익후보 15% 야권단일후보 30% 기타 무소속 정도.[24] 이바라키는 2013년 선거에서 우익성향 후보가 무려 72%(...)를 득표한곳이고, 교토도 자민당이 1위를 먹고 남은 2위 당선을 놓고 공산당,민주당,오사카유신회가 치열한 접전을 벌일것으로 예상되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