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네다 마사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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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田 正泰(1920년 7월 21일~1992년 12월 5일)
일본의 프로야구 선수, 지도자, 해설가.
일본 교토부 교토시 태생이며, 재일동포로 본명은 김정태(金正泰)이지만, 일본 국적으로 귀화한 것으로 알려져있다.[1][2]
좌투좌타이며, 포지션은 외야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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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명문 헤이안 중학 시절 중심선수로 학교를 수차례 고시엔 대회에 출장시켰다. 중학 졸업 후 대학에 진학하여 교사가 되려 했지만,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돈을 벌기 위해 1942년 프로야구에 입문했는데 당시 여러 구단이 입단 제의를 했지만 다른 구단엔 헤이안 중학 선배들이 많다는 이유로 전부 거절하고 계약금이 가장 저렴한 오사카 타이거스에 입단한 어찌보면 괴짜이면서 반골 기질이 뚜렷한 인물이었다.[3]
프로 2년차인 1943년부터 주전 좌익수로 자리잡았고[4] ,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46년 재개된 정규리그에서 비로소 실력이 만개하여 '''438타수 152안타, 타율 0.347'''로 전후 최초로 타격왕을 차지하였다. 또한 1951년엔 '''18개의 3루타'''로 개인 시즌 최다기록을 작성하였고 이것은 아직도 일본 기록[5] 으로 남아있으며, 1이닝 3루타 두개라는 진기록도 갖고 있다. 1949년엔 일본 프로야구 사상 2번째로 사이클링 히트를 기록했다.
정교한 타격에 빠른 발을 앞세운 전형적인 테이블 세터 스타일의 선수였고, 외야수비도 훌륭했다. 현역시절 타격왕 1회 포함 3할을 6번 기록했고, 베스트 나인에 3회 선정되었다. 15년 통산 '''1476경기 출장, 1527안타 55홈런 568타점 881득점 187도루 타율 0.285'''의 성적을 남기고 1957년 시즌을 끝으로 유니폼을 벗었다.
팀의 주장을 맡고 있던 1956년, 오사카 타이거스의 감독 겸 선수로 독선적인 행동과 상식 밖의 경기운영으로 선수들의 인심을 잃고 있던 후지무라 후미오 배척 운동의 중심 인물로 후지무라를 팀에서 몰아내는 데 공헌(?)한 이력이 있다...
현역 은퇴 후 1958년 오사카 타이거스의 2군 감독으로 임명되었다가 1959년 시즌 도중 1군 코치로 승격되었고, 그해 시즌 오프 감독직에 취임하여 1960년부터 오사카 타이거스의 지휘를 맡았다. 그러나 첫해 성적은 5할을 겨우 넘는 어중간한 성적으로 리그 3위에 그쳤고, 구단명이 한신 타이거스로 바뀐 이듬해인 1961년엔 시즌 초부터 성적 부진에 빠지면서 결국 6월 6일을 끝으로 교진군 출신의 후지모토 사다요시 수석 코치에게 감독직을 넘겨주고[6] 팀 지휘에서 물러났다.
이후 약 10년간 현장을 떠나 마이니치 방송 등에서 해설가로 일하다가 1972년 한신 타이거스의 수석코치로 현장에 복귀하였다. 그런데 시즌 개막 초에 플레잉 매니저를 맡고 있던 무라야마 미노루가 성적부진을 이유로[7] 선수로만 뛰겠다는 입장을 밝히며 감독직을 가네다에게 양도하였고,[8] 가네다는 감독 대행으로 시즌 대부분을 이끌며 그 해 잔여시즌에서 '''122시합 69승 50패 3무 승률 .559'''의 호성적을 거두며 한신을 센트럴리그 2위로 이끌었고 이것을 인정받아 1973년부터 다시 정식 1군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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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신 감독으로 돌아온 가네다(1973년)
다시 정식으로 감독에 취임한 이듬해인 1973년 시즌에도 센트럴 리그 2위를 마크하였지만, 시즌 막판 우승까지 매직넘버 1을 남겨두고 잔여시합 2경기를 전부 패하는 바람에 불과 0.5게임차로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9년 연속 센트럴리그 제패를 허용하였고,[9] 그 다음해인 1974년 시즌엔 전반기까지 2위 팀과 2~3게임차의 1위를 유지하며 우승 가능성을 보였으나, 후반기에 연전연패를 거듭하며(...) 리그 4위(B클래스, 즉 하위권)로 시즌을 종료하는 바람에 결국 그 해를 끝으로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선수 시절 감독이던 후지무라 후미오를 독선적이란 이유로 몰아냈던 가네다였지만, 정작 자신도 남을 배려할 줄 모르는 대단히 독단적인 성격의 인물이었다. 그래서 감독 시절 선수들과 많은 트러블을 일으켰다. 1973년 시즌 도중 가네다가 한신의 노장투수이던 곤도 마사토시[10] 에게 "원숭이도 담배를 피우나?" 라고 폭언을 뱉어, 이에 마음의 상처를 입은 곤도가 그해 시즌 종료 후 11월 23일 한신 고시엔 구장에서 열린 팬 감사행사가 끝난 후 감독실로 찾아가 가네다에게 그때 일에 대해 사과하라고 요구했지만 가네다는 "난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설령 그랬더라도 뭐 어쩌란 말이냐?"라며 일언지하에 거절했고, 감정이 폭발한 곤도가 가네다를 마구 구타한 사건이 그 대표적인 예. 이 사건으로 곤도는 유니폼을 벗어야 했지만 평소 온후한 심성을 가진 곤도였기에 야구계 주변에선 오죽하면 그랬겠냐며 오히려 곤도를 동정했다고 한다.[11]
더불어 가네다는 팀의 주축 선수였던 후지이 에이지와 에나츠 유타카 와도 의견충돌이 잦았는데, 곤도가 가네다를 마구 구타할 때 말리러 갔던 코치들을 막아선 선수가 바로 에나츠였다(...).결국 한바탕 푸닥거리가 끝나고 곤도가 씩씩거리며 나온 뒤[12] 들어가 보니 가네다는 코뼈가 완전히 돌아갔다고 한다.
1974년 한신 감독직에서 물러난 이후 해설가나 평론가도 맡지 않고 야구계를 완전히 떠나 성씨를 오부나이(小武内)로 개명하고, 오사카에서 스테이크 가게를 운영하며 여생을 보냈다.
1992년 12월 5일, 가네다는 급성 심부전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72세. 장례식이 조용히 치뤄진 탓도 있겠지만, 그의 장례식을 찾은 야구 관계자는 무라야마 미노루 이외엔 거의 없었다고 한다.
金田 正泰(1920년 7월 21일~1992년 12월 5일)
1. 소개
일본의 프로야구 선수, 지도자, 해설가.
일본 교토부 교토시 태생이며, 재일동포로 본명은 김정태(金正泰)이지만, 일본 국적으로 귀화한 것으로 알려져있다.[1][2]
좌투좌타이며, 포지션은 외야수이다.
2. 현역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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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명문 헤이안 중학 시절 중심선수로 학교를 수차례 고시엔 대회에 출장시켰다. 중학 졸업 후 대학에 진학하여 교사가 되려 했지만,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돈을 벌기 위해 1942년 프로야구에 입문했는데 당시 여러 구단이 입단 제의를 했지만 다른 구단엔 헤이안 중학 선배들이 많다는 이유로 전부 거절하고 계약금이 가장 저렴한 오사카 타이거스에 입단한 어찌보면 괴짜이면서 반골 기질이 뚜렷한 인물이었다.[3]
프로 2년차인 1943년부터 주전 좌익수로 자리잡았고[4] ,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46년 재개된 정규리그에서 비로소 실력이 만개하여 '''438타수 152안타, 타율 0.347'''로 전후 최초로 타격왕을 차지하였다. 또한 1951년엔 '''18개의 3루타'''로 개인 시즌 최다기록을 작성하였고 이것은 아직도 일본 기록[5] 으로 남아있으며, 1이닝 3루타 두개라는 진기록도 갖고 있다. 1949년엔 일본 프로야구 사상 2번째로 사이클링 히트를 기록했다.
정교한 타격에 빠른 발을 앞세운 전형적인 테이블 세터 스타일의 선수였고, 외야수비도 훌륭했다. 현역시절 타격왕 1회 포함 3할을 6번 기록했고, 베스트 나인에 3회 선정되었다. 15년 통산 '''1476경기 출장, 1527안타 55홈런 568타점 881득점 187도루 타율 0.285'''의 성적을 남기고 1957년 시즌을 끝으로 유니폼을 벗었다.
팀의 주장을 맡고 있던 1956년, 오사카 타이거스의 감독 겸 선수로 독선적인 행동과 상식 밖의 경기운영으로 선수들의 인심을 잃고 있던 후지무라 후미오 배척 운동의 중심 인물로 후지무라를 팀에서 몰아내는 데 공헌(?)한 이력이 있다...
3. 감독시절
현역 은퇴 후 1958년 오사카 타이거스의 2군 감독으로 임명되었다가 1959년 시즌 도중 1군 코치로 승격되었고, 그해 시즌 오프 감독직에 취임하여 1960년부터 오사카 타이거스의 지휘를 맡았다. 그러나 첫해 성적은 5할을 겨우 넘는 어중간한 성적으로 리그 3위에 그쳤고, 구단명이 한신 타이거스로 바뀐 이듬해인 1961년엔 시즌 초부터 성적 부진에 빠지면서 결국 6월 6일을 끝으로 교진군 출신의 후지모토 사다요시 수석 코치에게 감독직을 넘겨주고[6] 팀 지휘에서 물러났다.
이후 약 10년간 현장을 떠나 마이니치 방송 등에서 해설가로 일하다가 1972년 한신 타이거스의 수석코치로 현장에 복귀하였다. 그런데 시즌 개막 초에 플레잉 매니저를 맡고 있던 무라야마 미노루가 성적부진을 이유로[7] 선수로만 뛰겠다는 입장을 밝히며 감독직을 가네다에게 양도하였고,[8] 가네다는 감독 대행으로 시즌 대부분을 이끌며 그 해 잔여시즌에서 '''122시합 69승 50패 3무 승률 .559'''의 호성적을 거두며 한신을 센트럴리그 2위로 이끌었고 이것을 인정받아 1973년부터 다시 정식 1군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image]
다시 한신 감독으로 돌아온 가네다(1973년)
다시 정식으로 감독에 취임한 이듬해인 1973년 시즌에도 센트럴 리그 2위를 마크하였지만, 시즌 막판 우승까지 매직넘버 1을 남겨두고 잔여시합 2경기를 전부 패하는 바람에 불과 0.5게임차로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9년 연속 센트럴리그 제패를 허용하였고,[9] 그 다음해인 1974년 시즌엔 전반기까지 2위 팀과 2~3게임차의 1위를 유지하며 우승 가능성을 보였으나, 후반기에 연전연패를 거듭하며(...) 리그 4위(B클래스, 즉 하위권)로 시즌을 종료하는 바람에 결국 그 해를 끝으로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선수 시절 감독이던 후지무라 후미오를 독선적이란 이유로 몰아냈던 가네다였지만, 정작 자신도 남을 배려할 줄 모르는 대단히 독단적인 성격의 인물이었다. 그래서 감독 시절 선수들과 많은 트러블을 일으켰다. 1973년 시즌 도중 가네다가 한신의 노장투수이던 곤도 마사토시[10] 에게 "원숭이도 담배를 피우나?" 라고 폭언을 뱉어, 이에 마음의 상처를 입은 곤도가 그해 시즌 종료 후 11월 23일 한신 고시엔 구장에서 열린 팬 감사행사가 끝난 후 감독실로 찾아가 가네다에게 그때 일에 대해 사과하라고 요구했지만 가네다는 "난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설령 그랬더라도 뭐 어쩌란 말이냐?"라며 일언지하에 거절했고, 감정이 폭발한 곤도가 가네다를 마구 구타한 사건이 그 대표적인 예. 이 사건으로 곤도는 유니폼을 벗어야 했지만 평소 온후한 심성을 가진 곤도였기에 야구계 주변에선 오죽하면 그랬겠냐며 오히려 곤도를 동정했다고 한다.[11]
더불어 가네다는 팀의 주축 선수였던 후지이 에이지와 에나츠 유타카 와도 의견충돌이 잦았는데, 곤도가 가네다를 마구 구타할 때 말리러 갔던 코치들을 막아선 선수가 바로 에나츠였다(...).결국 한바탕 푸닥거리가 끝나고 곤도가 씩씩거리며 나온 뒤[12] 들어가 보니 가네다는 코뼈가 완전히 돌아갔다고 한다.
4. 이후
1974년 한신 감독직에서 물러난 이후 해설가나 평론가도 맡지 않고 야구계를 완전히 떠나 성씨를 오부나이(小武内)로 개명하고, 오사카에서 스테이크 가게를 운영하며 여생을 보냈다.
1992년 12월 5일, 가네다는 급성 심부전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72세. 장례식이 조용히 치뤄진 탓도 있겠지만, 그의 장례식을 찾은 야구 관계자는 무라야마 미노루 이외엔 거의 없었다고 한다.
[1] 다만 이에 관해선 그가 한국계가 맞다고 한 장훈의 증언#을 제외하면 자세한 정보가 없어서 진짜 한국계인지는 아직도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 위키피디아에서도 가네다가 한국계란 이야기는 적혀 있지 않다.[2] 여담으로 일본 위키피디아에서는 타케무라(竹村)라는 성으로 태어났으나, 양자로 들어가면서 가네다라는 성을 갖게 된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관련 근거는 1992년 발간의 '오사카 타이거스 구단사.[3] 그러나 이것 때문에 구단이 가네다를 만만하게 보았는지 연봉도 늘 짜게 줬으며(...) 이에 가네다도 불만을 품고(...) 타격왕을 차지한 1946년 오프시즌에 '''"부양할 가족이 많은데, 연봉 8천엔 가지고는 생활할 수가 없다"'''란 이유로 한신에서 퇴단하고 중개인으로 전향하는 소동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일이 어찌저찌 풀렸나 본지 이듬해인 1947년 시즌 개막일에 복귀하기도 했다.[4] 다만, 입단 후부터 초기 3년간은 타율 2할 5푼도 못칠 정도로 실력이 영 좋지 못했다. 그러나 당시 주전들이 전부 태평양 전쟁 등에 동원되어 야구판을 떠났기 때문에 구단으로써는 어쩔수 없이 그 대체제로 가네다를 주전으로 세울 수 밖에 없었다.[5] 퍼시픽 리그 기록은 1953년 래리 레인즈(한큐)의 16개.[6] 이후 후지모토는 한신을 1962년, 1964년 센트럴리그 우승으로 이끌었다. [7] 퇴임 당시 성적이 '''8시합 2승 6패, 승률 .250(...)'''이었다.[8] 무라야마는 1972년을 끝으로 선수생활까지 은퇴했다.[9] 그것도 우승이 결정된 최종전이 '''하필 한신 코시엔 구장에서 열린 "한신 - 요미우리戰"'''이었고(...) 시합 자체도 '''0:9'''로 한신이 대패했다(...) 거기다 이날 시합에서 무승부만 거뒀어도 한신 타이거스가 우승할 수 있었다. 그래서 시합 종료 후 분노한 팬들이 그라운드에 난입해 요미우리 측 벤치에서 깽판을 치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10] 다이요 훼일즈 시절이던 1955~1957년 시즌에 걸쳐 무려 '''28연패'''라는 일본 기록을 세운 적이 있다. [11] 이것 말고도 잘 알려지진 않은 사건이나, 시즌 중인 8월에도 자팀의 스즈키 키요타케란 선수에게도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결국 이해 스즈키는 근신 1개월 처분을 받았고, 이듬해인 1974년 시즌 오프 때 롯데 오리온즈로 트레이드되어 롯데에서의 첫 해인 1975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했다.[12] 이때 에나츠가 '''선배... 이젠 분이 풀렸수?''' 하고 물어보자 곤도는 '''그래...''' 하면서 짧게 대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