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지무라 후미오

 

'''한신 타이거스 No. 10'''
'''후지무라 후미오
(藤村 富美男)
'''
'''생년월일'''
1916년 8월 14일
'''사망'''
1992년 5월 28일 '''(향년 75세)'''
'''국적'''
일본
'''출신지'''
일본 히로시마구레
'''포지션'''
투수, 2루수, 3루수
'''투타'''
우투우타
'''신체조건'''
173cm, 79kg
'''프로입단'''
1936년
'''소속팀'''
'''오사카 타이거스 (1936~1958)'''
'''지도자 경력'''
한신 타이거즈(1946, 1950~1957)
도에이 플라이어즈(1964~1965, 1967~1968)
'''1949년 일본프로야구 MVP'''
야마모토 카즈토
(난카이 호크스)

'''후지무라 후미오
(오사카 타이거스)'''

고즈루 마코토
(쇼치쿠 로빈스)[1]
벳토 카오루
(마이니치 오리온즈)[2]
'''한신 타이거스 영구결번'''
No.10
1. 개요
2. 선수 시절
3. 지도자 시절
4. 이후
5. 에피소드


1. 개요


일본프로야구 前 선수, 감독, 해설자. 일본야구를 대표하는 전설의 강타자이며 한신 타이거즈의 초대 '''"미스터 타이거즈"'''로 한신의 초창기를 빛낸 선수였다.

2. 선수 시절


고코 중학 졸업 후 1936년 한신 타이거즈에 입단하여 갓 출범한 프로야구에 원년멤버로 발을 들였다. 학창시절 강속구 투수로 명성을 떨쳤던 후지무라는 투수와 내야수를 번갈아 맡으면서 젊은 나이에 한신의 주축 선수로 성장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1939년 군대에 징집당해 4년간의 복무를 마치고 1943년 제대 후 다시 한신에 복귀하여 프로리그가 중지된 1944년 까지 한신의 주축 선수로 맹활약 했다.
1945년 2차대전이 끝나자 프로야구는 다시 부활하였고, 후지무라는 투수 겸 3루수로 여전히 팀의 중심축을 지켰다. 1946년에는 감독 겸 선수로 플레이 하기도 했고[3] 그해 투수로 13승을 거두면서 타자로서도 0.323의 준수한 타율을 기록했다. 그러나 1947년 이후 타격을 살리기 위해 3루수로 전업하였고[4] 이때부터 중장거리 스타일이던 후지무라는 슬러거로 변신하기에 이르렀다. 1948년 시즌 처음으로 두자리수 홈런(13개)를 기록하더니 이듬해 1949년엔 무려 46개의 홈런[5]으로 캐리어 첫 홈런왕 타이틀을 쥐며 바야흐로 후지무라 전성시대를 열어젖히게 된다. 또한 1950년 그가 기록한 191안타는 스즈키 이치로가 1994년 210안타로 경신할 때 까지 무려 44년간 NPB 사상 한 시즌 최다안타 기록으로 남았다.[6] 팀 후배인 벳토 카오루다이너마이트 타선을 구축하며 타 팀에 공포스러운 존재감을 유감없이 발휘했고, 무려 37인치 길이의 배트(일명 빨래장대)를 풀스윙하여 홈런을 뻥뻥 날려대는 장타자로 팬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일본 야구 역사상 37인치나 되는 배트를 쓴 선수는 후지무라 뿐이었고, 후지무라가 현역에서 은퇴한 이후 37인치 배트는 지금도 생산되지 않고 있다(...).[7]
또한 수비에서도 후지무라는 진가를 여실히 발휘하였다. 3루 수비는 날렵하거나 화려하진 않았지만 투수를 보던 강한 어깨를 바탕으로 항상 수비 위치를 3루 베이스에서 두 걸음 정도 뒤로 잡았고, 타구가 날아오면 잡아먹을 듯한 표정으로 달려나와 포구하여 1루에 총알같이 송구하는 모습은 팬들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같은 3루수의 레전드나가시마 시게오가 이 후지무라의 플레이에 감명받고 3루수를 맡게 된 것은 유명한 이야기.
후지무라는 전후 10년간 프로야구의 슈퍼스타 이자 한신의 대들보로 시대를 풍미했고, 강타와 호수비 그리고 파이팅 넘치는 패기로 50년대 초중반 까지의 프로야구 부흥기를 이끌었다. 그리고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대한 강렬한 라이벌 의식[8]을 갖고 요미우리 전에선 평소보다 더한 허슬플레이로 강하게 맞서며 요미우리와 한신 경기의 인기를 한 차원 더 높이는 기폭제가 되기도 했다. 17년 현역생활 동안 후지무라는 수위타자 1회, 홈런왕 3회, 타점왕 3회를 차지했고, MVP 1회, 베스트나인 6회를 수상했다. 덧붙여 2게임 연속 만루홈런사이클링 히트 2회라는 진기록도 보유하고 있다. [9]
한편으로 후지무라의 성격은 지독한 고집불통에 자존심이 누구보다도 강했으며 지는 것을 죽기보다도 싫어했다. 현역 시절 라이벌이던 요미우리의 카와카미 테츠하루가 시합 전 인사를 건네도 후지무라는 번번히 못본 척 무시하였고, 1948년 한신에 입단한 벳토 카오루가 미남 슬러거로 인기를 높이며 자신의 명성을 위협하자 동료이자 후배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경원시 하기도 했다. 벳토가 홈런을 치고 들어와 동료들과 악수를 나누는 와중에 후지무라는 뒤돌아서서 외면한 적이 있을 정도였다(...).[10] 이런 성격 때문에 스즈키 이치로가 후지무라의 시즌 최다안타 기록을 1994년에 경신하자, 야구계에선 "후지무라 사후에 경신했기에 망정이지(후지무라는 1992년 타계했다), 생전에 그랬다면 아마 말도 못하게 불쾌해 했을듯" 이라는 얘기까지 나왔다고.
1956년 시즌을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한 후 한신 감독을 지내다가 불명예 퇴진 후 1958년 다시 한신 선수로 깜짝 복귀했지만 부진한 성적만 남기고 완전히 선수생활을 정리하였다. 통산 성적은 '''17시즌 1558경기 출장, 1694안타 224홈런 1126타점 타율 0.300.'''

3. 지도자 시절


[image]
한신 감독 시절(우측). 좌측은 카와카미 테츠하루.
앞서 말했듯이 1946년 잠깐 감독직을 겸했던 후지무라는 1955년부터 1956년까지 다시 감독 겸 선수로 1957년엔 전임 감독으로 3년간 한신을 이끌었다. 성적은 3위-2위-2위로 그다지 나쁘지는 않았지만, 독선적인 성격으로 인해 선수들에게 많은 반감을 사고 말았다. 1957년 시즌 종료 후 구단에서는 후지무라와의 재계약을 추진했으나 인내심이 한계에 도달한 선수들이 당시 한신 주장이던 가네다 마사야스[11]를 중심으로 일제히 반란을 일으킨 이른바 '''"후지무라 배척운동"'''을 벌이며 후지무라를 강하게 보이콧 했고, 결국 후지무라는 감독직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이 당시만 해도 가네다는 강압적인 팀 분위기를 바꾼 인물로 신망을 얻었고 훗날 한신 감독을 역임하기도 했다.

1958년 시즌에 한신의 현역 선수로 복귀했지만 24경기 출장(그나마 선발출장은 꼴랑 1경기...)에 3안타, 타율 0.115 라는 초라한 성적을 뒤로 한채 완전히 은퇴했고, 동시에 20년 넘게 정든 팀 한신을 떠났다.
이후 코쿠테츠 스왈로즈토에이 플라이어즈에서 코치 직을 수행했지만 예전의 명성을 되찾지는 못했다. 다만 토에이 시절엔 오오스기 카츠오의 재능을 알아보고 비록 입단테스트 결과가 안좋게 나왔지만, 당시 감독이었던 미즈하라 시게루를 '''"이 녀석 소질이 있습니다. 만약 토에이가 받아주지 않으면 제 친정팀에 추천할 겁니다"''' 라고 설득하여 토에이 유니폼을 입혔고, 훗날 그가 양대리그 사상 첫 1천안타를 치는 강타자가 되는 기반을 마련하기도 했다.

4. 이후


니혼 TV와 오사카 스포츠 등의 언론매체에서 해설가 또는 평론가로 일했다. 한때 TV 탤런트로 드라마[12]에 레귤러 멤버로 출연한 적도 있다. 호쾌해 보이는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게 을 전혀 못했으며, 단팥빵사이다같은 단 음식을 굉장히 좋아했다고 한다. 팀 선배이자 감독으로 한신에서 같이 활동한 마츠키 켄지로가 "그 녀석(후지무라)은 항상 사이다를 입에 달고 살았다" 라고 기록할 정도였으니... 그래서였는지 1988년 당뇨병이 발병하여 죽을 때 까지 병원과 보호시설에서 병마와 싸웠고, 결국 1992년 5월 28일 당뇨병으로 인한 신부전증으로 숨을 거두었다. 향년 75세. 후지무라가 별세하자 한신 구단은 한신 고시엔 구장에 조기를 걸고 고인을 애도하였다.
1974년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였다. 또한 그의 현역시절 등번호였던 10번은 현재 한신의 영구결번 이다.

5. 에피소드


1954년 7월 25일 주니치 드래곤즈 와의 홈경기 도중 후지무라가 심판 판정에 불만을 품고 주심을 폭행하여 퇴장 처분을 받자 홈팬들이 분노하여 구장 내에서 난동을 벌였고, 경기가 1시간 7분 가량 중단되었다. 난동은 진정되었지만 자신의 퇴장을 받아들이지 않은 후지무라는 자기 타순이 되자 무작정 타석에 나와 심판의 퇴장 명령에 불복하며 계속 뻗대었고, 이에 팬들이 다시 들고 일어나 그라운드에 난입하는 등 도저히 경기를 진행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러 결국 심판은 한신의 몰수 게임 패배를 선언하였다. 그리고 후지무라는 난동의 원인 제공자로 지목되어 출장정지 처분을 받으며, 그 경기까지 이어가고 있던 연속경기 출장 기록이 1,014경기 에서 허무하게 종지부가 찍히고 말았다(...).[13]
게다가 후지무라의 출장정지를 막기 위해 그라운드에 나와 일부러 심판에게 강하게 어필하며 몸싸움을 벌인 마츠키 켄지로 감독마저 같이 출장정지를 먹었고, 이 일로 인해 마츠키는 감독을 사임하여 한신을 떠났다(...).

[1] 센트럴 리그.[2] 퍼시픽 리그.[3] 일본 프로야구 사상 최초의 고졸출신 감독이란 기록을 세웠다.[4] 투수를 완전히 폐업하진 않고 1951년 까지 틈틈히 마운드에 올랐다.[5] 이는 전 시즌에 카와카미 테츠하루오시타 히로시가 세운 25홈런을 경신하는 시즌 기록이기도 했다.[6] 2010년 에는 한신의 맷 머튼이 214안타를 기록하며 구단 기록에서도 2위로 내려앉았다(...)[7] 그보다 1인치 아래인 36인치 배트도 웬만해선 거의 쓰이지 않는다는걸 생각한다면... 다만 두산 베어스주니치 드래곤즈에서 활약하던 타이론 우즈는 36인치짜리 배트를 애용했다고 한다. 그래서 두산에서 뛰던 당시 국내의 배트 제조업체 관계자가 우즈의 36인치 배트를 보고 '''"이걸 어떻게 휘둘러?"''' 라면서 혀를 내둘렀다고(...)[8] 무라야마 미노루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못하진 않았을 것이다. [9] 한국에도 하루에 만루홈런 2개이틀에 걸쳐 만루홈런 2개가 있다.[10] 이 때문 이었는지, 벳토는 1950년 마이니치 오리온즈로 트레이드 되었다.[11] 재일동포 출신으로 한국 이름은 김정태(金正泰). 1960년 한신 감독에 취임하여 한국계로는 최초로 일본 프로야구의 감독이 된 인물이다. 그러나 장훈의 증언 이외에는 자세한 정보가 없어 한국계인지는 확실치 않다. 해당 문서 참조[12] 그것도 그저그런 드라마가 아니라 초인기시리즈인 필살 시리즈. 1977년작 '新・必殺仕置人 (신・필살사치인)'에서 암살자 모임의 수장인 '토라(虎)'로 등장한다. 암살에 사용하는 무기는 현역 시절부터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37인치 길이의 배트(일명 빨래장대)였다. 한 에피소드에서는 금속구를 던져 살상을 일삼은 배신한 암살자에 대해 그 금속구를 그대로 풀스윙하여 처치한 장면도 있다(...)[13] 아는 사람은 다 알지만, 일본 프로야구의 연속출장 기록은 기누가사 사치오가 '''2,215경기'''로 후지무라를 훌쩍 뛰어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