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리 레인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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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미국 출신의 전 일본프로야구,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선수. 빠른 발과 날렵한 수비로 '''검은 번개''' 또는 '''검은 매''' 라는 별명으로 불리었다. 쿠바 출신의 내야수 로베르토 바르본[1] 이전, 파워 보다는 스피드가 돋보였던 외국인 야수의 원조 격으로 이름을 남겼다.
2. 현역 시절
시카고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1953년 한큐 브레이브스에 입단하면서 프로에 입문했다. 공, 수, 주 3박자를 갖춘 내야수로 호평을 받았으며, 데뷔 첫 해인 1953년 '''61도루'''로 '''도루왕''' 타이틀을 획득하고[2] 개막 첫 경기부터 '''20경기 연속 안타'''로 '''개막 후 최다 연속 안타 경기'''를 기록하는 등[3] 맹 활약을 보였다. 특히 그 해 레인즈가 기록한 '''3루타 16개'''는 아직까지도 퍼시픽 리그 개인 시즌 최다 기록이자 NPB 전체 2위의 기록이다.[4] 또한 그 해 올스타 게임 에도 출장하는 등 팬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았다.
이듬해인 1954년 시즌에는 2년 연속 올스타 게임 출전을 달성하고 '''137경기 출장, 184안타, 18홈런, 96타점, 96득점, 45도루, 타율 0.337'''로 타격 1위, 그것도 '''일본 프로야구 사상 최초의 외국인 선수 타격왕을 획득'''하는 등 호타 준족을 마음껏 선보였으며 유격수 부문 베스트 나인에도 선정되면서 최고의 한 해를 구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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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리블랜드 시절의 레인즈.
1954년 시즌 종료 후 레인즈는 메이저리그에 도전하기 위해 한큐에서 퇴단했고, 1955년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와 마이너 계약을 맺고 입단하여 1957년 시즌 중 빅 리그로 승격, 1번 타자로 96경기 출장에 타율 0.262로 나름 활약을 보였다.[5] 그러나 1958년 시즌 개막을 앞두고 다시 마이너리그로 강등, 그 해 9월 잠깐 빅 리그로 복귀하여 7경기에 출장한 것 외에는 두 번 다시 메이저리그 무대를 밟지 못했다.
1962년 일본으로 돌아와 한큐에 재입단 했지만, 73경기 출장에 55안타, 5홈런, 27타점, 8도루, 타율 0.252라는 평범 이하의 성적만 남긴 채 정규 시즌이 끝나기도 전인 그해 9월 구단으로부터 해고 통지를 받고 유니폼을 벗었다. 그것으로 레인즈의 현역 생활에는 종지부가 찍혔다.
NPB 3시즌 통산 '''330경기 출장, 383안타, 31홈런, 172타점, 209득점, 114도루, 타율 0.302'''를 기록했으며, 타격왕과 도루왕, 베스트 나인을 각 1회 수상했다. MLB 2시즌 기록은 '''103경기 출장, 64안타, 2홈런, 16타점, 40득점, 5도루, 타율 0.253'''.
2.1. 사생활 논란, 편지 및 서류 조작 사건
1961년 시즌이 끝나고 11월 말 경, 미국에서 '''에드 서버스타인''' 이란 인물이 쓴 편지가 항공 우편으로 한큐 구단 사무소에 도착하였다. 내용인 즉슨 '''"수년 전 귀 구단에서 활동했던 래리 레인즈가 다시 한번 한큐에서 뛰고 싶다는 의향을 밝혔다. 레인즈는 현재 마이너리그에서 탑 클래스의 성적을 올리고 있으며 예전 일본 시절보다 실력이 더 늘었고 경험도 풍부해졌다. 레인즈의 복귀에 대해 귀 구단의 최대한 빠른 답변을 바란다"'''는 요지였다.
당시 한큐 구단대표(단장) '''오카노 타스쿠'''는 이 편지 내용을 곧이 받아들이지 않고 '''"레인즈가 실제로 마이너리그에서 거둔 상세 성적 데이터도 없고, 무엇보다 그가 우리 팀에서 활약했던 건 7년 전 일인데..."''' 라며 신중하게 접근하려 했지만, 감독이던 '''도쿠라 카츠키'''[6] 는 전력 보강이 우선이라는 입장을 내세우며 '''"레인즈라면 우리가 잘 아는 선수 아니냐. 전혀 모르는 선수 보다는 계산이 선다"''' 라면서 레인즈의 재영입을 강하게 주장했다. 결국 한큐는 도쿠라 감독의 의견을 수용하여 레인즈를 입단 시키기로 결정하고 레인즈에게 일본으로 속히 들어오라는 전보를 쳤다. 레인즈는 "(1962년)2월 말 캠프 때 까지 일본에 돌아오겠다" 라는 답변을 보냈지만 그 후 연락이 두절되었고, 레인즈의 이적을 허가하는 MLB 커미셔너 사무국의 서류도 받지 못한 상태였다.
결국 정규시즌 개막 직전인 1962년 4월이 되어서야 레인즈는 MLB 사무국의 서류를 들고 일본에 입국하여 간신히 한큐와 입단 계약을 맺을 수 있었다. 10일 정도의 조정 기간을 거쳐 1군에 등록된 레인즈는 변함없는 활약으로 지난 해 5위에 그친 한큐를 시즌 중반까지 2~3위권으로 끌어올리는 데 한 몫 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 맹활약이 레인즈에게 독이 되어 돌아왔으니, 그가 한큐에서 부활했다는 소식을 미국 현지 신문에서 기사화하는 와중에 레인즈에 관한 여러가지 문제가 표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먼저 레인즈는 5년 전 이혼한 본처에게 위자료와 아이의 양육비를 전혀 지불하지 않았고, 레인즈가 일본에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본처는 레인즈의 5년 치 미지불 위자료 및 양육비 청구서를 한큐 구단 앞으로 보내오는 바람에 구단에서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더군다나 레인즈는 한큐 재입단 시에 "해결할 문제가 있어 돈이 필요하다"며 구단 측에 지원을 요청했고, 구단은 2천달러(당시 엔화로 72만엔 정도)를 레인즈에게 주었지만 레인즈는 다른 목적으로 그 돈을 써버렸다는 사실도 발각되었다. 한술 더 떠 '''한큐 입단에 필요한 MLB 사무국 서류와 전년도 말 에드 서버스타인 이라는 에이전트 명의로 보내온 편지 또한 레인즈 자신이 위조했다는 것'''까지 들통나면서, 레인즈의 도덕성은 도마 위에 올라야 했다.
그의 성적이라도 좋았다면 한큐에서 어떻게든 눈감고 무마할 수도 있었겠지만, 레인즈는 한 여름에 접어 들면서 훈련 부족에 따른 체력 저하로 인하여 타율은 2할 5푼대에 그치고 있었고 승부처에선 헛방망이질만 거듭하는 것은 물론 주특기인 도루 개수도 눈에 띄게 떨어진, 구단 전력에 전혀 도움이 안되는 존재에 불과했다. 끝내 한큐는 시즌이 끝나기도 전에 두말 없이 레인즈를 전력 외 선수로 풀어버렸고, 레인즈는 짐을 싸서 쓸쓸하게 미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결국 이해 한큐는 시즌 막판 패배를 거듭하며 리그 4위에 그쳤고, 그의 영입을 주장했던 도쿠라 감독 역시 성적 부진으로 시즌 종료 후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사전 조사 부족에 구단 대처도 미흡했다는 점을 오카노 구단대표도 인정 하면서도 레인즈의 해고에 관하여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면서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고, 레인즈의 젊은 시절 활약을 기억하던 한큐의 관계자는 '''"일본 음식을 좋아하고 팀 동료들과 친근하게 잘 지내면서 성실하게 열정적으로 연습하던 레인즈가 왜 그렇게 망가졌는지 이해할 수 없다"''' 라며 안타까움을 털어놓기도 했다.
3. 은퇴 이후
미국으로 돌아간 레인즈의 이후 행적은 전혀 알려진 것이 없으며, 1978년 1월 28일 미시건 주 랜싱에서 향년 47세를 일기로 별세한 것으로 기록[7] 되어 있다. 사망 원인도 불확실한 상태이다.
[1] 그는 1955년 부터 1964년 까지 레인즈의 소속 팀이던 한큐 브레이브스 에서 활약한 바 있다. 말하자면 레인즈의 팀 후배인 셈이다. 바르본은 메이저리그 생활을 접고 1962년 한큐로 돌아온 레인즈와 한 시즌 동안 같이 팀 메이트로 뛰기도 했다.[2] 일본 프로야구 역사에서 외국인 도루왕은 레인즈와 더불어 1958~1960년 3시즌 연속 도루왕을 차지한 로베르토 바르본, 단 두 명 뿐이다.[3] 이 기록은 1997년 한신 타이거즈의 와다 유타카가 '''24경기'''로 경신했다.[4] 시즌 최다 3루타의 일본 최다 기록이자 센트럴 리그 기록은 1951년 오사카 타이거즈의 가네다 마사야스가 수립한 '''18개'''이다.[5] 하지만 주특기이던 도루는 5개에 그쳤다.[6] 사회인야구 등에서 뛰다가 무려 '''35세(!)'''의 나이로 1950년 양대리그 발족과 동시에 신설된 마이니치 오리온즈에 입단하면서 프로에 데뷔, 그 해 퍼시픽 리그 최초 홈런 기록을 차지하는 등 맹활약하며 21홈런 22도루 96타점을 기록하여 오리온즈의 원년 퍼시픽리그, 일본시리즈 우승에 공헌했다. 그후 1951년 한큐 브레이브스로 이적해 베스트나인 2회 수상 등의 활약을 보이며 중심타자로 꾸준히 뛰다가 1958년 시즌 종료 후 은퇴했다. 이후 코치로 전임했다가 1959년 시즌 도중 감독인 후지모토 사다요시가 성적부진으로 도중사임하며 감독대행을 맡은 것을 시작으로 1962년까지 한큐의 감독직을 맡았다. 하지만 그도 역시 성적부진에 시달리며 결국 우승 경력 없이 한큐 감독직에서 물러났고, 1967년 데뷔팀이었던 오리온즈의 감독으로 복귀했지만 성적 부진으로 시즌 도중 해임되었다. 이후 해설자 등으로 일하다가 1997년 향년 82세로 사망했다.[7] 위키백과 기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