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야마 미노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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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 고베 태생의 일본프로야구 선수, 지도자, 해설가.
2. 학창시절
스미토모 공고를 졸업하고 대학 진학을 지망하여 릿쿄 대학의 지명을 받았으나, 키가 작다는 이유로 탈락당하고(...) 천신만고 끝에 간사이 대학에 진학했다. 간사이 6대학리그 통산 42게임 등판에 20승 10패라는 준수한 성적을 남겼고, 2학년 때 전일본 대학야구 선수권에 출장하여 전경기 완투로 간사이 대학을 우승시켰다.[6] 그러나 다음 해 간염에 걸려 출장하지 못했고, 팀은 무라야마의 영입을 거절한 릿쿄대에게 패배. 릿쿄대에 대한 원한과 투지는 프로 입문 후 릿쿄대 출신 나가시마 시게오를 상대로 여지없이 불살랐다.
여담으로 대학 시절 배터리를 이루던 포수는 부상으로 일찍 선수생활을 접은 그저 그런 선수에 그쳤지만, 훗날 지도자로서 한큐 브레이브스의 3연패를 이끄는 명장이 되었는데 그가 바로 우에다 토시하루다.
3. 프로시절
1958년 한신 전기철도 팀에 입단한 무라야마는 파견 형태로 1959년 한신 타이거즈로 적을 옮겼는데 프로입문 당시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한신이 제시한 계약금의 4배인 2천만엔을 내밀었지만 무라야마는 거인에 대한 반감과 나가시마에 대한 라이벌 의식을 앞세워 이를 쿨하게 거절했다.[7][8]
1959년 데뷔 첫 해에 신인이 거둔 것이라고 믿겨지지 않을 18승 10패 평균자책 '''1.19'''(1위)라는 성적을 거두었지만 아쉽게도 신인왕은 그해 홈런 1위인 타이요[9] 의 구와타 다케시에게 돌아갔고, 대신 사와무라상을 수상한 것으로 아쉬움을 달래야 했다.[10][11] 데뷔전에서 가네다 마사이치와 맞대결했는데, 6회까지 노히트, 9회까지 2안타 완봉을 기록했다. 같은 해에 요미우리를 상대로 9이닝 14탈삼진 무자책을 기록했으나 3루수 미야케 히데시와 투수인 본인의 수비 실책으로 2점을 헌납하면서 노히트 노런이 아닌 노히터 게임만 기록했다.
1962년 친선경기차 일본을 방문한 디트로이트 타이거즈를 상대로 완봉승을 거두기도 했다.[12]
현역 시절 그는 온몸을 내던지는 듯한 폭발적인 투구폼 때문에 '''자토펙 투수'''라는 별명으로 유명했고,[13][14] 특히나 앞서 언급한 대로 요미우리와 나가시마에 대한 라이벌 의식은 누구보다도 강렬하여 요미우리 전에 등판할 때 그의 얼굴은 무슨 전쟁터에 나가는 것 마냥 엄숙하고 비장했다고 한다. 데뷔 첫 해 이던 1959년 6월 25일 대 요미우리 와의 원정경기[15] 에 구원투수로 등판했다가 나가시마 시게오 에게 좌측 폴대를 맞히는 끝내기 홈런을 맞았는데, 무라야마는 죽기 전까지 이 얘기만 나왔다 하면 "그건 파울이었다" 라고 거품을 물었다 카더라.[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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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끝내기 홈런 장면.
등번호 3번이 나가시마, 마운드에서 고개를 숙인 투수는 무라야마.
그런 고로 유독 요미우리 경기때엔 판정에 민감하여 이건 아니다 싶은 판정이 나오면 다짜고짜 심판의 멱살을 붙잡거나 포수를 끌어안고 통곡을 하는 퍼포먼스를 선보이기도.[18] 이후로 나가시마와의 라이벌 관계는 무라야마가 1972년 유니폼을 벗을 때 까지 계속되었는데, 무라야마의 통산 1500 탈삼진(1966년 6월 8일)[19] , 2000 탈삼진(1969년 8월 1일) 기록은 전부 나가시마를 제물로 한 것이었다.
1970~1972년 에는 선수생활과 동시에 감독을 겸임하기도 하였으나, 성적 부진을 이유로 1972년 시즌 초반에 감독직을 팀 선배이기도 한 수석코치 가네다 마사야스 에게 넘기고 선수로만 뛰었다.
1972년 시즌 후 은퇴를 선언하고, 1973년 3월 21일 은퇴 시합을 마지막으로 현역 생활을 마감했다. 14년 동안 프로통산 '''222승 147패, 평균자책 2.09'''[20] , '''2217 탈삼진'''의 성적을 남겼다.
4. 은퇴 이후
은퇴 후 1973년 부터 1987년 까지 니혼 TV의 야구 해설가를 역임했고,[21] 1978년 가네다 마사이치가 발족한 일본 프로야구 명구회에 입회하였다. 1988~89 시즌 요시다 요시오가 물러난 후 다시 한신의 감독을 맡기도 했지만 팀은 6위, 5위에 머무르며 별 소득 없이 퇴임.
1990년 이후 죽기 전까지 아사히 방송의 해설가로 활약했다.[22] 1993년엔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1995년 고베 대지진 당시 아시야에 위치한 자신의 아파트가 붕괴[23] 되어, 자동차에서 숙식을 해결한 적이 있다. 이런 무라야마의 모습이 TV에서 방송되기도 했고, 생방송 인터뷰도 하는 등 그닥 좋지 않은 일로 조명받은 적도 있다.
1998년 8월 22일 지병인 직장암으로 숨을 거두었다. 향년 61세. 장례식 때 한신 팬들이 그의 관을 실은 영구차를 뒤따르며 "롯코오로시"(한신의 응원가)를 열창하면서 가는 이의 명복을 빌었다.
그의 등번호 11은 한신 타이거스의 영구결번으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2006년에 입단한 중참급 투수가 무라야마보다 '''10배 더 잘하겠다'''는 의미로 11에 10을 더해 등번호 21을 달았다.
5. 나가시마 시게오 와의 관계
현역 시절 나가시마가 무라야마를 상대로 거둔 통산 성적은 302타수 85안타, 타율 0.281, 21홈런, 39삼진.
둘은 더이상 말이 필요없는 라이벌 관계였지만, 사실 인간적으로는 서로 존경하는 사이였다. 무라야마는 평소 나가시마에 대해 얘기할 때 꼭 이름에 상(さん)을 붙여 예우하는 모습을 보였고, 나가시마 또한 "그는 현역 때 나에게 빈볼을 던진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무조건 정면 승부였다." 라는 등 무라야마의 인간성을 대놓고 칭찬하고 다니기도 했다.
무라야마가 나가시마와 라이벌 관계를 형성했듯이, 한신 팀 후배 에나츠 유타카는 거인의 4번 타자 오 사다하루와 라이벌리를 형성했다.
무라야마가 별세하자 당시 요미우리 감독이던 나가시마는 원정 경기 중임에도 불구하고 먼 길을 달려와 빈소를 조문하여 눈물로 무라야마를 애도했다고 한다.
6. 진기록
- 1970년 시즌에 25경기 14승 3패 승률 .824 방어율 0.98을 기록했다. 선수 겸 코치로 달성한 기록이고, 양대 리그 체제 이후 유일한 방어율 0점대다. 시즌 방어율 0점대는 11번 기록되었으나 나머지 10번은 모두 양대 리그 체제 이전에 기록된 것이다.
- WHIP은 역대 통산 1위인 0.954다. 현대 야구에서 1.00 미만이면 야구계를 대표하는 에이스라고 말하는 경이적인 수치이다. 동 시대를 대표하는 에이스 가네다 마사이치는 통산 1.072로 통산 12위이다.
- 포크볼을 주무기로 한 투수였음에도 폭투가 적었다. 3,000이닝 이상 투구해도 단 16개에 불과하다. 시즌 최고는 1961년의 4개, 나머지 시즌은 모두 2개 이하였다. 1959년에는 295 1/3이닝, 1965년에는 307 2/3이닝을 던져 폭투를 1개도 기록하지 않았다.
- 손가락이 짧았던 무라야마는 포크볼을 던지기 위해 스스로 검지와 중지를 째기 위한 시도까지 했다.
- 사와무라상 3회 수상은 역대 최다 타이기록이다.
- 통산 방어율 2.09는 센트럴리그 기록이다.
[1] 검은 안개 사건에 연루되어 영구제명되었다.[2] 다만 태어난 곳은 효고현 고베시 북구.[3] 입단 당시 팀 이름은 오사카 타이거즈였다. 한신 타이거즈로 바꾼 것은 1961년.[4] 은퇴시합은 1973년 3월 21일 이었다.[5] 이 당시는 플레잉 매니저[6] 일본 서부지역 대학으로선 최초의 우승이었다.[7] 후일 무라야마는 저서에서 고질적인 어깨부상 때문에 거인에서 성공할 수 있을지 우려했고, 한신 타이거즈로의 이적을 주선해 준 한신 전기철도의 배려를 저버릴 수 없어 제의를 뿌리쳤다고 밝혔다.[8] 다른 구단에서 제시한 계약금보다 적기 때문에 은퇴 후에도 무라야마를 돌봐 주는 조건으로 계약금을 보전하는 방식이었다.[9] 요코하마 DNA의 전신[10] 신인으로서 사와무라상을 타고도 신인왕을 놓친 선수는 지금까지도 무라야마가 유일하다(...).[11] 이 해 오 사다하루도 데뷔했으나 프로 적응에 어려움을 겪던 시기라 신인왕을 수상하지 못했다. 센트럴리그와 달리 경쟁자가 많이 없었던 퍼시픽리그에서는 장훈이 신인왕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12] 그것도 8회 2사까지 노히트노런 이었다(...). 이날의 완봉승은 일본인 투수가 미국을 상대로 거둔 최초의 완봉승이었다.[13] 세계 육상계의 영웅 에밀 자토펙의 후덜덜한 스태미너와 커리어를 본따서 만든 별명이다. 실제로도 다이나믹한 투구폼에 강타자 앞에서는 정면승부를 두려워 하지 않았다. [14] 반면에 팀 동료였던 고야마 마사아키는 무라야마와 달리 힘들이지 않고 편안히 던지는 투구임에도 면도날같은 제구력과 상당한 구속으로 타자들을 농락했다.[15] 이날 경기는 천람시합, 즉 당시 일본의 천황 히로히토가 직관하는 경기였다.[16] 사실 조명 상태가 좋지 않아 좌측 폴대를 맞혔는지, 파울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한다. 이 때가 저녁 9시 무렵이었는데, 천황(히로히토)의 귀가시간이 9시 15분으로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협회에서 홈런 판정을 내리게 했다는 뒷얘기가 있다. [17] 다만 80년대 한 방송사가 해당 경기를 기념하기위해 마련한 특집프로그램에 출연해서는 당시 홈런을 때린 나가시마 시게오와 농을 치는 등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당시 썰을 풀었다.[18] 한번은 요미우리전에서 나가시마에게 던진 회심의 1구가 볼로 판정되자 그대로 심판에게 뛰어가 들이받아서 KO를 시킨 후, 포수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린적이 있다.#[19] 이제 천람경기의 빚을 갚았다"라고 코멘트했다.[20] 대졸 투수 200승은 일본 프로야구 사상 와카바야시 타다시와 함께 유이한 기록이고 평균자책은 센트럴리그 1위이다.[21] 같은 계열인 요미우리 TV 방송과 히로시마 TV도 역임했다.[22] 편집 전에 TV 아사히에서 해설가를 했다고 되어있었으나, 사실 TV 아사히의 준키국인 아사히 방송 해설가로 일했다.[23] 그냥 자택이 아니라, 사업수완이 좋던 무라야마가 돈을 모아 직접 산 아파트였다. 안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