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스파르 데 구스만
[image]
1. 개요
일명 올리바레스 백작-공작. 세비야 옆의 올리바레스의 작위를 가지고 있어 올리바레스 백공으로(Conde-Duque, 영어식으론 Count-Duke) 불리고 펠리페 4세 시절 재상 및 시종관으로 역임했으며. 당시 유입된 스페인으로 유입된 은화가 제노바 은행 등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겨 포르투갈 은행을 끌어들이려 했으나 이 과정에서 이단심문청, 교황 등과 많은 갈등을 빚었었다.
전반적으로 당대 부왕령 제도의 아래 부정부패, 여전히 법적으론 아라곤 왕국, 카스티야 왕국, 그라나다 왕국 등 반독립적 자치체들로 구성된 통치구조, 국왕의 직할령에 가까웠던 카스티야만 비정상적으로 국방비를 내는 형국 등 당시 스페인 제국의 이런저런 비효율성을 타파하고 개혁하려고 했으며, 1620년대-30년대 초반 경력상 전성기만 하더라도 나름 성과가 있었다. 암브로시오 스피놀라 지휘 아래 스페인군이 네덜란드군의 항복을 받아내는 장면을 묘사한 벨라스케스의 명작으로 남아 있는 브레다 공성전을 중심으로 20년대 후반기는 스페인의 적극 지원으로 30년 전쟁에서 개신교 연합은 야전에서 박살난 상태로 스웨덴의 구스타프 아돌프의 구원만 바라고 있었고, 12년 화약이후 실질적으로 독립국 상태였던 네덜란드는 다시 본토 7개주의 안전이 심각하게 위협 받았으며, 종교적으론 카톨릭에도 불구하고 스페인 견제를 위해 네덜란드, 독일 개신교 연합과 동맹맺은 프랑스는 파리가 스페인의 플랑드르 군단에게 위협받는 등 반세기전 펠리페 2세 시대 이후, 17세기 중후반의 급격한 몰락 이전 스페인 제국의 위세가 최고로 강했던 시절로 평가 받는다.
그러나 이런 전 유럽의 반카톨릭, 반합스부르크 동맹을 상대로 전쟁하는 것도 한계가 명확해 전비 카스티야 뿐만 아니라 아라곤, 포르투갈, 이탈리아 같은 스페인이 다스리던 다른 영토에서도 거둘수 있게 조세 제도, 정치 구조를 개혁한다는게 여전히 법적으론 근현대적 의미에서 식민지가 아니라, 엄연히 봉건제 유럽에서 동군연합 아래 이론적으로 동등한 구성국이었던 이 지방들의 토착 엘리트 상대로 큰 불만을 샀다. 올리바레스 백공과 스페인 중앙 조정 입장에선 나름 합리적인 당위성이 있다 한들 당장 포르투갈만 해도 이 전 펠리페 2세 시대때 애초에 이런 저런 스페인만의 국제적 이해 관계에 끌려다니지 않고, 내부 통치는 포르투갈 현지인 관료, 정치인들이 여전히 주도한다는 전제 아래 스페인 왕의 포르투갈 왕위 계승을 인정했던 것이기 때문에 토착 엘리트들은 당연히 계약 위반을 외치며 반란과 독립 전쟁이 터졌다. 이런 식으로 1640년대 들어가면 카탈루냐, 나폴리와 시칠리아가 있는 남부 이탈리아, 포르투갈 세곳에서 모두 동시에 대규모 반란이 터지면서 결국 대외 전쟁에서도 실패하고, 국내 정치도 혼란에 빠지게 되면서 올리바레스 또한 실각하게 된다.
명재상으로 불리는 리슐리외와 같은 시대, 같은 재상으로 있어서 그런지 관련 시대 저작물에서 꾸준히 나오며, 그 시대 다룬 역사물에서 리슐리외나 당시 구스타트 아돌프 시대의 스웨덴의 명재상 악셀 옥센셰르나의 아치라이벌 기믹으로 유명한 편이다. 이 시대를 대표하는 스페인의 거장 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초상화로도 유명하다. 본 페이지 위에 나와 있는 뒤돌아보는 기마초상화가 가장 유명한데, 사실 야전에서 직접 지휘관으로 종군한적은 한번도 없지만 당시 군사적으로 한창 승승장구하던 스페인 제국의 군사적 위업에 기반하여 자기 PR을 하려고 저렇게 그림을 부탁했다.
1620년대 스페인이 한창 잘나가고 본인의 경력상으로도 전성기였던 시절에 기반하여 그린 저 초상화에선 보다시피 활기넘치고 자신만만한 젊은 정치인으로 묘사되어 있는데[1] , 스페인의 전황은 다시 악화되고, 카탈루냐, 포르투갈, 남부 이탈리아에서 동시다발적 반란에 직면한 30년대 말에 다시 그린 아래에 있는 초상화는 진짜 그 몇년 사이에 고생을 얼마나 심하게 했는지 사람이 팍 늙고 피로에 쪄있는 난국의 스트레스에 압도된 현대 회사 부장님(...)스런 모습이 역력해서 미술사학도들에게도 나름 유명한 인물이다.
[image]
2. 생애
스페인의 오래된 명문 귀족출신으로 1587년 로마 에서 태어났다. 1599년까진 로마에 있다가 이후 스페인으로 들어왔으며, 살라망카 대학의 교수로 있었다. 그 후 펠리페 3세 때 외교정책고문으로 임명되어 정계에 발을 들이게 된다. 이 시기부터 왕자였던 펠리페 4세에게 영향을 주기 시작하였으며, 차후 왕자의 고문이 된다. 16세의 펠리페 4세가 재위에 오르자 전반적인 국정을 주도하였으며, 재위에 오른 펠리페 4세가 올리바레스 백작령을 공작령으로 올려주어 이 후부터 백작-공작으로 불리게 된다.
[1] 본 초상화는 1635년에 완성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