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사(역사)

 

1. 개요
2. 역사
2.1. 초기
2.2. 격하된 갑사
2.3. 쇠퇴
3. 종류
3.1. 경갑사
3.2. 양계갑사
3.3. 착호갑사(捉虎甲士)
4. 요건
5. 실제 인물
6. 매체에서의 등장
7. 여담
8. 같이 보기


1. 개요


조선 전기 취재로 뽑혀 오위의 중위에 속했던 직업군인 집단.

2. 역사



2.1. 초기


갑사는 양인의 의무 군역인 정병과 수군을 제외하고는 조선군에서 가장 많은 숫자를 차지했던 병종이다. 또한 경국대전이 반포될 무렵에는 1만 4,800명에 달하였다. 사실 이 명칭은 중국 주나라의 상층 군인을 부르던 데에서 기원하였고, 신라 ·고려 시대에도 보이고 있으나 제도적인 특징을 지닌 군인으로 전환한 것은 조선 건국 무렵에 이성계가 자신의 휘하 군사를 중심으로 의흥친군위를 설치할 때였다. 그러나 이때는 아직 국가 제도적인 공병으로 확립된 것은 아니어서 각 통솔자의 사적인 목적에 이용될 소지가 컸고, 실제로 1~2차 왕자의 난 때 권력의 향방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정종 때 이방원이 추진한 사병의 혁파와 더불어 삼군부에 귀속되었다가 태종의 즉위와 더불어 복립되어 궁궐의 숙위와 도성 경비를 담당하였으며, 병농일치제에 따라 번상 형식의 군역제로 정비되었다. 그들은 사직(5품)·부사직(6품)·사정(7품)·부사정(8품) 등 5∼8품의 실직에 올라 자신의 품직에 따라 차등 있게 지급되는 과전과 녹봉을 받다가 세조 대에 직전법이 시행되면서 과전지급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이에 소요되는 국가재정은 한때 경관의 녹봉 중 63%를 차지하기도 하였지만, 국가가 안정되어가면서 그 성격이 일부 변하여 대우직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2.2. 격하된 갑사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국가에서는 차츰 재정부담을 줄이기 위해 갑사 중 고위품계를 줄이고 하위품계를 늘이기도 하고, 녹봉이 아닌 월봉(月俸)으로 그 대우를 격하시키고 실직에서 체아직(정해진 녹봉 없이 계절마다 근무성적을 평가하여 서로 높고 낮음을 바꾸어가며 녹봉을 주는 관직)으로 전환시켰다. 갑사의 체아직으로의 전환은 당시 증가하는 지배층을 포섭하기 위한 병력수 증가를 국가의 의도대로 가능하게 한 제도지만, 문제는 이 제도가 결국엔 조선의 정예병력이었던 갑사의 질을 제대로 떨어뜨리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갑사를 한부대로 몰아넣은 행정행위와 위의 상황으로 인해서 부대의 질을 유지해야할 부사관의 역할이 군관에게 넘어가면서 조선군은 가지고 있는 역량에 비해 제 능력을 발휘하기 힘들어졌으며 이는 결국 왜란과 호란에서 기껏 모집한 대규모 부대가 소규모 적군의 공격에도 우르르 무너지는 추태를 보여주게 되었다.
근무평가 단위인 도(到)에 따라 승진하는 인사관리 규정의 정비에 따라 국경을 수비하는 양계갑사(兩界甲士)와 왕성을 시위하는 경갑사(京甲士)로 분리되었는데, 이는 군공의 기회가 많은 양계갑사와 그렇지 못한 경갑사의 승진상의 불합리를 시정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는 자연히 경갑사의 우대조치로 귀결되었다.

2.3. 쇠퇴


일단 갑사가 된 자라도 번상근무를 마치고 하번할 때 실시하는 하번갑사취재에 불합격하면 파출되었다. 그러자 이러한 끊임없는 재시험에 대해 갑사들의 반발과 저항이 심하여 1458년(세조 4)에는 당번근무 중에 시취하여 성적 우수자는 도를 지급하고, 기준 미달자는 파출하여 정병 등에 속하게 하였다. 하번한 갑사는 지방에 있을 때 지방의 행정력이 부족하면 향촌사회의 치안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조선 전기의 갑사는 16세기에 들어와 사회경제적 변동 속에서 차츰 소멸되어갔다. 게다가 갑사는 양반층의 병역 기피로 인해 그 정원조차 채우지 못하다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맞이하게 되었고, 이때는 유명무실한 상태였기에 제대로 대응도 못하다가 양계갑사는 17세기 이후 역사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3. 종류



3.1. 경갑사


한양에서 왕실과 도성을 호위하던 갑사.

3.2. 양계갑사


평안도, 함경도 양계에서 국경수비임무를 수행했던 갑사.

3.3. 착호갑사(捉虎甲士)


호랑이를 잡기 위해서 만들어진 특수부대이며, 착호군이라고도 한다. 호랑이를 잡기 위해서 만들어진 만큼 활쏘기, 창 던지기, 사격 실력이 뛰어났다. 근무 임기를 마치고 거관하는 자에게는 종4품 실직이 제수되었고, 그 중 우수한 자들은 각 지방의 수령으로 진출하였다.

4. 요건


갑사는 스스로 기마와 복마(짐말), 군장은 물론 종자까지 거느리고 왕성의 시위와 궁궐의 숙위를 담당하며, 유사시 변방 방어 임무에도 동원되었으므로 웬만한 경제력이 아니고서는 그 임무 수행이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대체로 노비 5~6구, 토지 5~6결 이상의 소유자로 입대를 제한하였다.
그러나 세종 후반 이후 증가된 병력 숫자를 채우기 위해 경제력이 미치지 못하는 자의 입대도 허락하였다. 이에 따라 지방의 부유한 사족 자제들은 사회적으로 보다 대접받는 유학 공부로 돌아섰고, 갑사직은 차츰 의무 군역을 피하려는 일반 양인들의 입대처로 변하였다. 법제적으로 갑사직은 모든 양인에게 개방되어, 한량은 물론 양인 농민의 의무 군역인 시위패(정병), 영진군, 선군(船軍) 그리고 이전(吏典) 등도 갑사에 들어갈 수 있었다. 심지어 업천이라 하여 일반인들이 결혼하기를 꺼리던 백정들도 들어갈 수 있었다.
갑사는 중앙군의 중추적인 군사력이었기 때문에 엄격한 심사를 거쳐 뽑았는데, 새로이 갑사를 뽑는 충보갑사취재와, 일단 갑사가 된 후 그 실력을 재확인받는 과정인 하번갑사취재가 있었다. 충보갑사취재는 1423년(세종 5) 구체적인 정비가 이루어져, 서울은 5부→한성부→병조로, 지방은 수에서 감사, 절제사에서 병조로 이어지는 시험절차를 거쳤다. 그러나 시취과정에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부정행위 등으로 1443년 다시 국가에서 관리하는 체제로 전환하였다.
취재 과목은 편전(片箭), 기/보사(騎步射)와 수박(手搏) 등 무예만으로 시험되고 무과에서와 같은 병서에 대한 지식은 요구되지 않았다. 세종 때를 기준으로 하자면 시험 과목은 활쏘기, 마상 사격, 완전 무장한 채 300 보 이상 달리기라고 한다. 300 보는 대략 540 미터 가량이라 고작 그것밖에 안되냐고 생각할 수있는데 당시 일반 보병이 찰흉갑이나 반팔상의형 쇄자갑 정도만 입었던 것에 비해 조선조 최고의 중무장보병인 갑사가 입는 갑옷 자체가 더럽게 무겁고 갑갑한 전신찰갑이었단 것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병조에 보병과 갑사를 뽑을 것에 대해 전지하다

“보병과 갑사(甲士)를 시험하여 뽑는 법을 금년 봄에 시험해 보려 하니, 먼저 신장(身長)이 8척 이상 되는 건강한 사람을 골라 보사(步射)는 1백 80보(步)에서 화살 3개 중의 2개 이상 맞히는 것과, 기사(騎士)는 세 번 쏘아 한 번 이상 맞히는 것과, 갑주(甲胄)를 입고 궁전(弓箭)과 환도(環刀)를 차고 달음질로 3백 보(步)까지 가는 것 등, 3가지 재주에 다 입격된 자를 시험해 뽑으라. 시험할 때 남과 함께 달음질하지 못하게 하고 저 혼자서만 달음질하게 하되, 달음질의 더디고 빠름은 논하지 말고 다만 3백보를 달려간 자면 뽑으라.”

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세종 99권, 25년(1443 계해/명 정통(正統) 8년) 2월 3일(기축) 3번째 기사


5. 실제 인물


갑사 출신으로 유명한 인물은 유자광이 있는데 서자 출신의 한량이었지만 무재가 타고났는지 갑사가 되었고 이시애의 난을 계기로 고속승진했다.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 설중매 편에서 변희봉이 연기한 유자광이 무예를 발휘하는 장면이 몇 번 나온다.

6. 매체에서의 등장


임진왜란을 다룬 게임인 임진록2와 그 확장판인 조선의 반격에서 나온다. 일본군 진영의 사무라이와 더불어 영웅이 아닌데도 말을 탄 2 병종 중 하나다. 기마궁사라서 어느 정도 먼거리에서 치고 빠지기에 좋지만 생명력이 그리 좋다고는 할 수 없고 공격력도 약한 축에 속한다. 그래도 비전 연구를 하면 공중유닛에 대해 강력한 타격을 가하므로 대공유닛으로도 제법 쓸만해진다. 실제로 임란 전후가 되면 창기병은 거의 사라지고 신립의 기마군단처럼 궁기병이 대다수였으므로 그럭저럭 고증이 맞는 셈.
토탈 워: 쇼군2 임진왜란 모드에선 조선의 주력병종이라 할 수 있을정도로 유지비나 비용이 저렴하면서도 매우 강력하다. 갑사인 경우 활 사거리가 무려 '''300'''[1]이고, 근접전 또한 야리 사무라이급으로 잘 싸운다. 착호갑사는 부대인원이 적은 대신 카타나 영웅 내지 하타모토급으로 강하다.[2]
킹덤영신이 착호군 출신 캐릭터로, 작중 최강급의 무예 실력과 총기 실력을 가지고 있다.

7. 여담


  • 환도 항목에도 있는 "삼가 <육전>을 상고하건데 이르기를 갑옷을 입고 창을 잡고 능히 삼백보를 달리는 자가 상등이고, 이백보를 달리는 자가 중등이다. 또 수박의 기능이 능히 네 사람을 이기는 자가 상등이고 세 사람을 이기는 자가 중등이 된다 하였다."라는 말도 세종실록 세종25년(1443) 11월 기록인 조선 최초의 법전이었던 '육전(六典:경제육전)'에 실렸던 임금의 호위 보갑사(步甲士)에 대한 말이다.
  • 근무 중이라도 무예가 뛰어난 자는 수령이나 만호·군관 등으로 진출하였고, 군공을 세우면 당상관으로 올라가는 경우도 있었다. 예종 때 영의정을 지낸 강순·유자광 등은 모두 갑사 출신이었다.

8. 같이 보기



[1] 모드 2.0v부터 갑사 사거리가 200으로 조정됐다. [2] 다만 부대 인원차이로 인해 실제 착호갑사와 카타나 하타모토와 겨루면 하타모토가 간신히 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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