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자광
1. 개요
조선 세조~중종 초기 때의 정치가. 전라남도 영광군 출신.
조선시대 차별의 대상인 얼자로 태어나 당대 권력의 계단에 올라갔다 내려가기를 반복했던 인물이자 조선 초기 정치판을 크게 휘저었던 풍운아.
업적의 공과를 제외하더라도 인생 자체는 파란만장했고 이 말을 대변해 주듯 남이의 옥, 무오사화, 갑자사화, 중종반정 등을 비롯한 조선 초기의 온갖 굵직한 정치적 사건에 관여했으며 말년에 결국 몰락하여 유배지에 있다가 죽은 인물이다.
예로부터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간신 가운데 한 명으로 손꼽히기도 한다. 현대에 와서는 간신이라는 의견과 역사의 승리자에 의해서 간신으로 이미지가 덧씌워졌다는 불행한 인물이었다는 의견이 대립되고 있다.
동시대의 남이나 구성군은 저리가라 할 정도의 파격적인 승진 속도를 자랑한 인물이다. 남이는 병조판서, 구성군(종친 이준)은 영의정까지 올랐을 때 둘은 그럴만한 집안 배경이 있었지만[1] 유자광은 겨우 노비 신분에서 벗어난 얼자[2] 였다. 거기에 이시애의 난 때 직위도 일개 갑사에서 1년만에 정3품 당상관 병조참지(兵曹參知) 자리에[3] 올랐다. 이 정도면 조선 시대에 최고속 승진이었던 조광조와 비견될 정도다. 과거 급제 후 당상관까지 2년 정도가 걸렸다.
2. 일생
2.1. 초기 일생
유자광은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유규(柳規)의 서얼로 태어났다. 야사에 따르면 유규가 백호 꿈을 꾸고 난 뒤 부인과 동침하려 했다가 거절당하자 부인의 몸종과 동침하여 유자광이 태어났다는 이야기도 전해오는데 이 말대로면 유자광은 그냥 서자도 아니고 홍길동처럼 얼자였다는 이야기.[4]
어린 시절 유자광이 적자인 형들을 제치고 총명함을 드러내자 유자광의 친부는 이를 위험으로 판단해 유자광을 제거하고자 한다. 하루는 장마철 물이 불어나자 유자광 친부는 유자광을 강으로 데려가 강을 헤엄쳐 건너에 있는 메밀밭을 확인하게 한다. 본래 어린이인 유자광을 급물살이 있는 강에 빠져죽게 할 생각이었으나 총명한 유자광은 큰 나무판자를 배를 삼아 무사히 강을 건넌다.
이후 가문의 견제를 피해 젊은 시절을 방탕하게 보내었으나[5] 무술에 일가견이 있었는지 경복궁 건춘문을 지키는 갑사(甲士)가 되었다가[6] 1467년에 이시애의 난이 일어나자 세조에게 상소를 올려 공을 세울 기회를 줄 것을 청했고, 그를 만나 보고 크게 마음에 들어한 세조 덕에 연락관에 임명되어 남이의 휘하에 들어가 공을 세웠다. 난이 평정된 이후로는 세조에게 공을 인정받고는 큰 총애를 받아 그 벼슬이 정5품인 병조정랑[7] 에까지 이르렀는데 모든 과정이 3개월 만에 이루어졌다. 그야말로 벼락 출세.
세조의 유자광 사랑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으며 다음 해는 유자광으로 하여금 온양별시[8] 문과를 치르게 하였다.[9] 신숙주는 유자광의 답안을 '고어(古語)를 전용(全用)하고 문법이 소홀하다.'는 이유로 낙방시켰지만 세조가 '묻는 본의(本意)에 어그러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유자광을 장원 급제로 삼았다. 그 해 정3품 병조참지에 올랐는데 서얼이 서른이 되기도 전에 갑사 신분이었던 때로부터 채 1년도 걸리지 않은 벼락 출세를 했다. 오늘날로 치면 거의 사관생도나 소위가 단박에 장관, 차관 다음인 국장이 된 기세다. 그 해 적개공신(敵愾功臣) 2등에도 녹훈되었다. 대간이 천한 서자에게 말도 안되는 특혜라고 반발하자 "니들이 유자광 발끝이라도 따라가냐? 난 절세의 인물을 얻었다고 본다!"라고 화를 내며 반발을 모조리 잠재웠다.
세조가 이토록 유자광을 밀어 주었던 것은 재위 기간 동안에 지나칠 정도로 세력이 커져버린 구 공신 세력들을 견제하기 위해서라는 설이 있다. 특히 이시애의 난을 치르는 동안에 한명회 등이 역모를 꾀한다는 유언비어를 듣고는 한명회를 잠시나마 옥에 가뒀던 사실을 보면 비록 세조가 공신들을 아끼기는 했으나 그 세력이 비대해지는 것에 대해서만큼은 경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10]
2.2. 남이의 옥
이처럼 승승장구하던 유자광은 세조가 사망하고, 그 뒤를 이어 예종이 왕위에 오르자 이전에 존재했던 공신 세력과 이시애의 난 이후로 생겨난 신진 무신 세력의 싸움에서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게 되었다. 신진 무신 세력의 대표 주자였던 남이는 세조 시절부터 자신들을 견제해오던 공신 세력들에 대해 큰 불만을 품고 있던 중에 세력을 규합하여 공신 세력과 권력을 두고 한바탕 권력 다툼을 벌일 준비에 들어갔다. 이때 남이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던 유자광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기로 결심하고 그와 접촉하여 여러 불온한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러나 유자광은 오히려 공신 세력에 붙어서 남이가 역모를 꾀하고 있다고 고변하였다. 유자광이 남이가 유자광을 찾아와 정변을 일으켜 한명회, 신숙주를 비롯한 대신들을 제거하자고 설득했다고 진술하였던 것이다. 이 일로 말미암아 남이와 강순 등을 비롯한 신진 무신 세력은 역모 혐의를 받아 대부분 죽음을 면치 못하였으며 25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유자광은 역모를 막은 공을 인정받아 익대 공신 1등에 책록되었으며 남이가 살던 집을 받고 무령군 자헌대부에 봉해졌다. 예종의 신임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조선의 실세였던 공신 세력의 눈에 띄게 되어 정치적인 입지를 더욱 강화할 수 있었다.
이 '남이의 옥' 사건에는 유자광의 철저한 정치적 계산이 깔려있었다는 설이 있다. 일단 유자광은 출신부터가 한미한데다가 세조가 죽은 이후로는 자신을 지지해줄만한 세력이 없는 상태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공신 세력과 신흥 세력의 갈등을 철저하게 이용하여 새로운 정치적 기반을 마련했다는 것이다.[11]
야사에 따르면 유자광이 함께 싸우며 같은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보다 높은 벼슬을 얻은 남이를 질투한 나머지 남이를 모함하여 죽였다고 한다.[12] 유자광 본인이 얼자의 몸으로 분에 넘치는 엄청난 지위에 올랐으면서 종친인 남이를 질투했다는 건 그냥 간사한 유자광의 이미지에 후대에서 갖다붙인 말에 가깝지 신빙성은 극히 떨어진다.[13]
2.3. 무오사화
비록 남이의 옥 사건으로 유자광은 본격적인 탄탄대로에 올랐다고 하지만 서자 출신이라 여러 곳에서 공격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실의 신임으로 버틸 수 있었는데 일례로 성종 1년에 자신의 부하였던 박성간이 자신이 남이처럼 반역을 계획했다고 고변하여 유자광이 고문과 심문을 당하는 일이 있었는데 하루 만에 수렴청정을 하던 정희왕후가 유자광은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석방을 지시했고 오히려 박성간이 무고를 저지른 게 확인되자 참형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유자광이 오랫동안 가졌던 무령군 칭호도 성종 초에 받은 칭호였다.
실록(연산군 일기)에 사관이 써둔 일화로 유자광이 함양을 유람하다가 자신의 시를 현판에 적어 달아놨었는데 김종직이 함양 군수로 부임하던 중 이를 보고는 불태워버렸고 이후부터 유자광은 김종직과 사림들에 대해 강한 불만을 품었으나 김종직이 워낙에 네임드였던 인물인지라 해코지하지 못하다가 후술할 무오사화 때 이 때의 원한으로 김종직의 제자들을 죽였다고 평했는데 위 박성간 사건 때문에 일개 군수인 김종직이 그런 짓을 했다가는 박성간의 공범으로 몰려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오히려 유자광이 복귀할 때 김종직이 지지했으며 반대로 김종직이 죽고 시호를 정할 때 유자광이 우호적인 의견을 내는 등 나쁘게 봐도 데면데면했지 사이가 안 좋았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더불어 실록의 기록도 후일담처럼 잠깐 언급한 내용이지 이 사건을 두고 정쟁이나 논의가 된 적이 1번도 없기 때문에 이 일화는 신빙성이 떨어지는 내용이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은 김종직 문서 참조.
자신의 힘을 너무 과신한 탓인지 성종 7년에는 괜히 한명회에게 개겼다가 파직되는 굴욕을 겪었다. 다만 이 과정이 훈구파(특히 한명회)를 억제하고자 한 성종의 눈에 들기 위한 정치적 모험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실제 한명회는 성종의 친정을 반대해서(성종실록 7년 1월 13일) 여러 곳에서 공격을 받고 있었고, 유자광은 자신의 위치를 고려해(훈구파의 중상층 위치 + 친 왕실 신하) 한명회를 공격했을 가능성이 높고 이때 성종의 눈에 들었는지 유자광은 반년만에 관직에 복귀하고 다음 해에는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유자광은 도총관에 임명된다.
그러나 정치적 능력과는 별개로 행실은 나빠서 1478년에는 부정부패 사건이 터져서 조정을 더렵혔다 하여 공신적을 박탈당했다가 1481년에 다시 되찾았다. 이때부터 까칠하고 다혈질인 대간 현석규가 왕 앞에서 팔을 걷어붙인 일을 가지고 임사홍 등과 함께 "그 새끼 막나가는 거 아니야? 완전 소인이구만!"하고 몇마디 씹었던 게 화근이 되어 임사홍과 같이 나란히 쫓겨났다가[14] 4년이 지나서야 다시 관직이 제수되어 종1품 숭정대부 겸 도총관이 되었다가 임사홍과 함께 공신에서 물러나 삭탈되는 등 다사다난한 시기가 성종 때였다. 실제로도 가뜩이나 서자 출신인데 세조의 총애 덕에 과분한 출세를 했다는 이미지가 강해서 대신들에게도, 사림 출신 대간들에게도 미움을 받아 사간의 탄압을 받기도 했다.
연산군이 즉위하고 전대 왕 성종의 실록을 집필하던 과정에서 이극돈이 김일손이 쓴 왕실 모독 사초를 발견하게 되고 내용이 거의 역모에 해당하는 내용이라 대신들과 논의하던 중 이극돈은 유자광을 찾아간다. 그리고 이극돈은 김종직이 썼던 조의제문 등이 실린 사초가 있다는 사실을 유자광에게 알리며 왕에게 알려야 할지를 놓고 조언을 구했다. 좋은 건수를 잡았다고 생각한 유자광은 즉시 조의제문에 세조와 계유정난을 비판하는 등 반체제적인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고 연산군에게 고변하였다. 성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연산군은 아버지와는 달리 왕의 권위를 대단히 중요시하는 성품의 소유자로 왕권에 도전하는 사림들을 고깝게 여기고 있었다.[15] 그렇지 않아도 왕을 길들이기 위해 즉위 4년 내내 시위를 벌이던 사림과 알력 관계에 있던 연산군의 손에 굴러들어온 조의제문은 그야말로 엄청난 정치적 무기였다.
연산군은 조의제문의 반체제적인 내용을 빌미로 삼아 무오사화를 일으켰다. 조의제문을 썼던 김종직은 이미 죽은 몸이었기에 부관참시당하였고 그것을 실은 김일손이 처형당했으며 그의 제자들이었던 수많은 사림들도 이에 연루되어 처벌받았다. 유자광은 앞장서서 사림파들을 때려 잡았으며 이로 인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유자광은 또다시 공을 인정받아 다시 권력의 핵심으로 떠오를 수 있었다. 자신의 정치 생명을 위협할 사림들을 탄압함으로써 수많은 목숨을 자신의 권력과 맞바꾼 셈이었다.
무오사화를 주도한 사람이 유자광이라고 여기는 경우가 많지만 진정한 주체는 어디까지나 연산군이다. 그 역시 조의제문을 자신의 정치적 야심을 위해 철저히 이용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와 별개로 김종직 일파가 왕조 시대 기준으로는 죽을 짓을 벌인 것도 사실이다.
2.4. 중종반정
훗날 성희안, 박원종 등이 중종반정을 일으켜 연산군을 쫓아내고 중종을 옹립할 때 이에 참여하여 공신으로 책봉된다.[16] 연산군에 붙어 권세를 누리다 다시 성공한 쿠데타에 참여하는 뛰어난 처세술을 부린 것이다.
유자광이 갑작스럽게 연산군을 배반한 데에도 이유가 있었다. 유자광이 믿을 것은 오직 연산군뿐이었는데 연산군은 이극균과의 교분을 비롯해서 여러 차례 유자광을 겁주고 의금부에서 형량을 정해오면 짐짓 이를 용서하는 척하면서 유자광을 길들였다. 비빌 언덕이 하나뿐인데 이렇게 불안감을 조성했으니 유자광도 새로운 비빌 언덕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갑자사화 중에는 "너는 뭐했냐?"라고 죽일 듯 화를 내며 옥에까지 가뒀다가 풀어주기도 했다. 또한 반정 세력이 군사적 재능이 있는 유자광을 집요하게 회유한 것도 한몫했다.
2.5. 말년과 최후
어쨌거나 중종반정에도 앞장선 덕에 그는 다시 공신이 되어 녹을 받아먹으면서 어느 정도 큰소리를 쳤는데 연산군의 축출과 함께 조정에 대거 진출한 사림은 바로 유자광의 철천지 원수들이었으니 그의 벼슬길이 순탄할 리 만무했다.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김공저 등이 박원종, 유자광 등을 죽이기 위해 음모를 꾸민 일도 있었는데 중종은 관련자들을 대충 처벌하면서 중종반정의 공신들과 유자광을 매우 불만스럽게 만들었다.[17]
그러던 중 창녕과 고창의 수령이 부패하다는 이유로 벌을 받은 일이 있었는데 중종이 구언의 언지를 내리자 유자광은 그들에게 로비라도 받았는지 "창녕과 고창 사람들이 자기네 수령들이 자기들을 잘 다스렸는데 대체 뭘 잘못해서 쫓겨났는지 모르겠다네요."라는 말을 올렸다가 사림의 표적이 된다. 사림들로 가득한 대간들은 유자광이 폐주에게 빌붙어서 무오년에 그 많은 사림을 죽여놓고도 정신 못 차리고 청탁이나 받는다고 비판하며 유자광을 궁지로 몰았다.
유자광은 이것에 대해 적극 항변하고 당시 최고 실세였던 박원종을 찾아가 지금 자신이 공격받는 것은 무신 출신이기 때문이며 자신이 쫓겨나면 역시 무신인 박원종도 위험해질 것이라고 주장하며 도움을 청했다. 그러나 박원종은 "지금 네가 위기에 처한 건 무신이어서가 아니라 악행을 많이 한 것 때문이거든? 무오년에 댁이 한 일 때문에 사림이 이를 간 걸 모르고 하는 말이냐?"라고 비웃으며 무시했고 누구도 옹호해주지 않는 상황에서 유자광은 결국 공신위를 박탈당하고 귀양을 가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늘그막에는 병환까지 앓는 바람에 장님이 되었다고 하며 결국 귀양간 지 5년 만에 유배지에서 전립선암으로 생을 마쳤다. 향년 74세. 그래도 당시 기준으로 매우 오래 살았고 서자로 태어나 정치적 줄타기를 반복하며 막강한 권력을 누렸다.
여담으로 그를 외면하던 박원종은 유자광보다 먼저 병으로 죽었다. 박원종도 44세로 죽긴 했어도 1509년 영의정에 오르고 평성부원군에 봉해지며 왕족 급으로 부귀영화를 누렸다. 박원종의 외조카 딸과 수양 딸이 각각 왕비와 후궁이었기 때문이다. 영의정 1년만에 죽어서 애통했을 듯[18]
야사에 의하면 귀양간 지 얼마 안 돼 꿈에서 남이의 혼령이 나타나 그의 눈을 벤 뒤부터 유자광이 장님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나중에는 시체도 부관참시당하고 두 아들도 참형당했다고 하지만 이는 실록과는 다르다. 실록에 따르면 오히려 중종은 유자광이 죽자 공신 녹훈도 두 아들에게 돌려주고 복권시켜 예를 갖춰 장례를 치르도록 배려하였다. 그것도 대간들이 몽땅 들고 일어나는 상황이었음에도 중종이 밀어붙여 자기의 뜻을 관철한 것이다.
자신이 저지른 죄가 많아 시체조차도 무사하지 못하리라 보고 자신을 닮은 거지 노인을 발견해 시체를 대역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유배당한 죄인으로서 이렇게 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기에 죽어서도 간사한 이미지로 전해오는 야사라고 할 수 있겠다. 비슷한 설로 MBC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의 풍란에서는 자신이 부관참시 당할 걸 예측하고[19] 자신의 무덤은 작게, 하인의 무덤은 크게 만들어 부관참시를 면했다라는 야사를 인용했다.
3. 평가
유자광은 원래 천출(미천한 출신)이라서 벼슬도 무관에서 출발했다. 그 때문에 세조 이후에 공신 집단이 형성한 관료층과는 꽤 달랐지만 세조의 총애 덕분에 정5품 병조정랑으로 벼락 출세했고 마침내는 삼정승 바로 다음 고관인 종1품 숭정대부까지 차지했다. 이것은 문과에 급제한 양반도 노리기 힘든 자리다.[20] 이렇게 유자광은 그야말로 벼락 출세한 남자로 손꼽힌다. 어두운 배경을 버티고 바닥에서 나라를 쥐락펴락하는 고관대작까지 갔다. 그만큼 유자광은 파란만장하게 살았다. 최명희의 소설 혼불에서는 농민들의 입에서 "자식을 낳으려거든 유자광 같은 자식을"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조선 시대 당시에는 유자광이 사림을 탄압했던 일 때문에 희대의 간신으로 두고두고 까였지만 파란만장한 삶 때문에 현대에서는 당대 정치판의 풍운아라고 일컫는 경우도 있다.
3.1. 정말로 간신배인가?
보통 그를 간신으로 묘사하는 경우는 남이의 옥사와 무오사화다. 전자는 이시애의 난에서 과감하고도 타고난 무재로 공을 세운 남이에 대한 세조의 총애를 시기하여 세조 사후 예종에게 남이를 무고해 극형을 받도록 만들었다는 내용이다. 후자는 사초에 기록된 김종직이 자기 시를 불태워버리자 앙심을 품고 김종직 사후에 조의제문을 이용하여 그 유명한 무오사화를 일으켰다는 것.
남이의 난에 대해서는 보통 유자광이 이시애의 난 이후 정5품 밖에 승진하지 못해서 앙심을 품었다는 설도 존재하지만 갑사(甲士)라는 한미한 직책과 서자라는 출신적 배경에 얽매여 있던 그로서는 이 정도만 해도 엄청난 출세였다. 때문에 사실은 벼락 출세 이후 더이상 승진하지 못하거나 밀려난 것을 우려했다는 것에 가깝다. 그리고 유자광은 비록 정5품이긴 했지만 얼마 안가 치뤄진 과거시험에 급제해 정3품 당상관으로 승진해 남이의 옥 당시엔 당상관이었다. 이정도면 서자 아니라 명문가 출신이라고 해도 몇년 정도가 아니라 적어도 10년 이상은 벼슬생활 해야 가능할까 말까 한 자리에 앉은거라 이정도만 해도 인생 역전 수준이다. 반면 남이의 경우 그의 위치와 했던 짓으로 보면 유자광이 비견할 수 없었으며 그의 질투 대상이 되기나 했을지 의문이다. 물론 28세 병조판서의 조선 역사상 전무후무한 타이틀을 가지긴 했지만 왕에게도 공신에게도 견제받는 그의 신세를 보면[21] 유자광이(과거엔 몰라도) 당시에 질투를 하긴 했을까? 설령 남이에 대한 질투가 있었다고 쳐도 그게 주된 감정은 아니었을 것이다.
남이의 옥이 터진 까닭은 바로 남이 본인이 보여준 처신이었다. 예종에게 의심을 받아서[22] 아직 든든한 기반도 마련하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공신 세력에게 도전하려고 했던 것이 바로 남이의 큰 실책이었다. 유자광의 입장으로서는 무리하게 공신들과 권세 싸움을 벌이려는 남이를 지지하려다 자기 목숨까지 버리기보다는 공신들을 지지하는 편이 더욱 안전할 것이라고 판단하여 일을 벌인 것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무오사화 때 분명 유자광은 김일손의 사초를 고하고 국문을 주도하여 조의제문을 보고하는 등 무오사화에 상당한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사실 관계를 따져보면 무오사화는 연산군이 폐위되고 사림파가 집권해서 사화로 인정받았지 내용을 살펴보면 빼도박도 못하는 준역모급 사건이었다. 괘서급 유언비어와 왕을 역적으로 치부하는 글을 사초에다 실어버렸으니 연산군이 아니라 그 어떤 성군이라도 대규모 처벌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조의제문은 유자광이 왜곡하거나 과장해서 뜻풀이한 것이 아니라 김일손이 단종의 살해 소식에 김종직이 충성심과 분노에 차서 쓴 글이라고 김일손이 직접 증언했고 사초로도 그대로 기록되어 있어서 매우 객관적으로 보고한 것이다.[23] 유자광이 무오사화 때 다른 사림파 인물들도 모두 연계시켜 죽이려 했다가 노사신에게 면박당했다는 실록의 정리 기록도 뭔가 모순이 있는게 오히려 실록에서 유자광은 6명의 처형 대상자 중에서 강겸은 정상 참작 사유가 있다고 주장했고 이것이 받아들여져서 강겸은 참수형에서 곤장 & 유배로 감형을 받는다. 물론 본인은 얼마 안가 남효온이 지은 시를 핑계로 몇명 더 잡아패자는 주장을 펼쳐 연산군이 받아들인 일이 있긴 했다.
3.2. 배경
유자광이 이런 행보를 보인 이유는 그가 등용된 배경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세조 때 집권 세력인 훈구파의 기원은 세조의 계유정난과 관련된 구공신 집단인데, 유자광은 세조가 구 공신들을 견제하려는 목적에서 이시애의 난에서 활약한 젊은이들을 밀어올리면서 나타난, 신 공신 집단에 들어가는 편이었다. 그러나 이 신 공신 집단이란 게 남이나 구성군을 필두로 하지 못한 일종의 '세대'였지 '정치 집단'은 되지 못했다.[24] 결국 남이의 성급한 일 처리와 유자광의 배신 등등으로 인해 신 공신들은 뭉치기도 전에 와해되고 말았으나, 그렇다고 구 공신들이 유자광을 진심으로 자기들과 한 패거리로 받아줄 리 없다.[25] 또한 온갖 더러운 일을 처리하면서 청렴결백함을 내세우는 사림 세력에게는 소인 간신배로 찍혔다. 거기다가 본래는 이런 자리에 오를 수가 없는 비천한 출신 성분[26] 이라는 약점까지 있었다.
결국 유자광은 당연히 왕에게 절대 충성을 바치며 왕의 권위에 기대어 벼슬과 권력을 유지하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는 것이다. 겉으로는 권신이었지만 실제 그의 권력 기반은 극도로 취약했으며 세조, 예종, 성종, 연산군, 마지막에는 중종에 이르기까지 오직 역대 왕들의 총애에만 기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왕들이 유자광에게 권력의 대가로 요구했던 것은 공신의 영애와 문벌, 좋은 출신 가문, 맑고 깨끗한 선비의 명성 같은 것들을 내세우는 신하들이 감히 할 생각을 낼 수가 없는 더러운 일들이었다. 처음부터 유자광은 세조에게 아첨하여 눈에 띄었던 것이고, 남이를 제거하고 싶어한 예종을 위해서 남이를 숙청했으며, 젊은 대간들[27] 을 숙청하고 싶어한 연산군을 위해서 무오 사화에 가담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중종에게 붙어서 연산군을 배신했다. 이런 일에 나서면 나설수록 원한을 샀기에 모두들 유자광을 더욱 더 싫어하고 미워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모두에게 욕을 먹을수록 왕의 입장에서 유자광의 이용가치는 더욱 올라간다. 말 그대로 왕에게 절대충성하며 기댈 수밖에 없는 입장이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유자광이 배신한 임금은 오직 연산군 뿐으로, 이 역시도 연산군이 말년에 유자광을 뜬금없이 견제하려는 치명적 실수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모두에게 미움받는 유자광이 기댈 것은 오직 임금의 보호 뿐인데, 그 임금이 자신을 견제하고 나선다면 그야말로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즉 유자광은 왕의 충실한 사냥개 정도의 위치였다. 그리고 왕을 대놓고 욕하지 못하는 신하들에게 사냥개는 충분한 악의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중간에 희대의 폭군인 연산군과 결탁한 것도 결정적인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연산군이 자신의 현조부(고조할아버지의 아버지) 태종처럼, 수단적인 측면에서는 잔혹했어도 왕권의 목표와 이에 따른 국가 발전의 성과만큼은 확고했던 유능한 철혈 군주였다면, 하다못해 세조같은 군주였으면 유자광도 단순히 왕 대신에 손을 더럽힌 부하 1인에 불과했다고 평가받았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태종의 측근이었던 이숙번이나 하륜, 조영무가 이러한 평가를 받았다. 그나마도 조영무는 외려 졸기에 "소박, 공정하며 바른말 하기를 잘했다." 라고 기록되면서 무신임에도 문신에게 호평을 받았다. 물론 이는 처신이 영 좋지 않은 이숙번이나 하륜과는 달리 처신에 발군이었던 이유도 있긴 하다. 그리고 이숙번과 하륜도 사관들에게 좀 까이긴 했지만 간신 수준의 폄하는 당하지 않았으며 '나름대로 유능하며 공적이 있다' 정도의 평가는 받았다.
연산군도 집권 초반에는 비교적 무난하고 괜찮은 왕이었으며, 예종 또한 대중적인 인식과는 달리 요절하지 않았더라면 그런 모습의 군왕이 되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유자광과 예종, 연산군은 그렇게 하지 못해 결국엔 유자광은 '폭군에게 아첨하는 간신'이라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맹꽁이 서당이나 고우영의 한오백년 만화, 신동우의 만화 한국사, 김삼의 야사 만화 등에서도 한결같이 간사한 악역으로 나온다. 그나마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실록 위주로서 그를 잘 파악할 수 있게끔 보여준다.
이렇게 욕을 대차게 먹었어도, 노비 출신인 자신의 어머니를 서울로 모시고 올라와서 봉양하던 효자였다고 한다.
4. 사극에서
MBC 조선왕조 오백년에서는 배우 변희봉이 유자광을 연기하였다. 실로 유자광의 대표 연기라 할 수 있으며, 이 때 변희봉의 대사 '이 손 안에 있소이다'가 유행어가 되었으며, 그가 출연한 광고에도 등장하였다.#[28]
KBS 2TV 한명회에서는 손호균이 유자광을 연기하였다. 조선왕조 오백년을 쓴 작가와 동일인이라서 그런지 인물상이 조선왕조 오백년과 비슷하게 표현 되었다.
KBS 장녹수에서는 백인철이 유자광을 연기하여 전형적인 간신, 천하의 개쌍놈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KBS 왕과 비에서는 임병기가 연기하였다.
영화 간신에서는 송영창이 연기했다. 판부사라고만 불리는 변태 늙은이가 바로 유자광. 중반부부터 본명이 나온다. 장녹수와 편먹고 설중매를 연산군에게 보낸다. 중종 반정 때 수문장과 함께 도성을 지키다 재빨리 수문장을 죽이고 반정군에 합류한 후에 박원종에게 공신 자리를 달라고 한다.
KBS 2TV의 7일의 왕비에선 유승봉이 연기했다.
[1] 각각 왕의 외증손(태종의 외증손자), 왕족으로 이 당시 왕족도 벼슬길에 오를 수 있었다.[2] 어머니가 노비[3] 세조 때 장원 급제하고 얻은 자리이다. 이전에는 정5품 병조정랑(兵曹正郞)에 있었다. 당시 병조정랑, 참지에 오를 때 반대가 심했고 급제도 세조의 특은이 있었다.[4] 뭉쳐서 서얼이라고 부르지만 서얼도 양인 첩과의 관계에서 태어난 서자와 천인 첩과의 관계에서 태어난 얼자로 나뉜다. 더구나 후자는 일천즉천이거나 노비 종모법이건 간에 모조리 천민으로 대우를 받았다. 이들이 종살이를 대놓고 하지 않는 경우는 부친이 이런 저런 형태로 노비에서 제외시켜 주기 때문이다. 금성출판사에서 낸 신동우 화백이 그린 한국 역사 만화에서는 양반은 아니지만, 양민도 아닌 중인 출신이라고 그의 출생을 소개한 바 있다. 그니까 삼남매 또는 세자매, 삼형제에서 애매한 둘째 포지션인 셈이다(...)[5] 내기 장기, 내기 바둑, 아녀자 희롱, 술, 원나잇 등[6] 보통 양반의 자제들이면 할 수 있었다.[7] 근데 그 게 자기를 천대한다고 잘못 생각하여, 남이와 갈라서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8]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에 또는 인재의 등용이 필요한 경우에 실시되었다.[9] 과거를 본다는 것은 양반 자격을 준다는 의미와 같은데 이전에는 편법으로 양반에 들게 해줬다면 이번에는 정식으로 준 것.[10] 유자광을 비롯하여 난을 진압한 구성군 이준이나 남이도 상당히 파격적인 대우를 받은 것을 보면 세조는 공신들과 이들의 측근을 중심으로 기존 공신 세력과 대립하는 세력을 만들려고 했을 가능성이 높다.[11]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이 설을 채택하고 있다.[12] 지경사에서 나온 조선왕조 오백 년 상편에서는 이 설을 채택했다.[13] 서자 신분으로 한직이라도 한다는 것 자체가 가문이 좋거나 가문을 잇는 이가 아니면 엄청난 영광이다. 서자가 벼슬살이 할 수 있는 조건은 역모를 막거나 전쟁에서 공을 세우는 것 혹은 가문을 잇는(예를 들면 아버지에게 자식이 없어서 서자를 계승자로 삼는 것) 등의 조건을 충족시켜야 가능하다. 유자광은 세조의 맘에 들어서 난을 진압하고, 정5품 병조정랑까지 고속 승진을 한 케이스인데, 이 건 서자가 아닌 경우에도 극히 드문 경우이다.[14] 유자광, 임사홍 모두 이 일에 있어서는 억울한 것이 이들을 탄핵한 게 대간인데 현석규 일로 조정이 시끌시끌할 때 현석규를 소인이라 탄핵한 게 바로 대간이었다. 그야말로 내로남불이었던 격.[15] 세조는 기존 공신들을 견제하기 위해서 남이나 이준과 같은 종친들을 등용했지만 이건 성종 대에 공신 사환 금지법으로 완전히 막혀버린 상태였다. 이에 성종은 사림을 동원해서 공신들을 견제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이 사림이 너무 커서 기존 공신보다 더 왕권에 위협이 되고 있었다. 늑대를 쫓으려다 호랑이를 들인 꼴이었다.[16] 성희안은 문신이었고 무술은 뛰어났지만 실전 경험이 없었던 박원종에게 이시애의 난 토벌과 여진 정벌 등 실전 경험이 풍부했던 유자광의 합세는 반정이 성공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17] 박원종도 그 타깃이었는데 그래서인지 김감, 유숭조를 무죄로 하는 걸 격렬히 반대해 결국 그들을 귀양보냈다.[18] 박원종은 사실 사림들에게서는 유자광만큼은 아니어도 혹평의 대상이었다. 실록에도 연산군의 창기를 거느렸다, 뇌물로 창고가 가득 찼다, 음식이나 거처가 신하의 도를 넘었다 등 안 좋은 얘기가 가득이며 심지어 박경, 김공저 사건 때 신진 세력들이 박원종과 유자광을 제거하려 했었다. 사림들 입장에서는 박원종이 유자광을 꾸짖는 게 웃기네 정도의 반응을 보일 만한 일이었다. 사실 유자광은 출신을 생각해보면 동정론이 아주 없진 않을 수 없지만 박원종은 누나가 월산대군 부인이었고 성종과 연산군에게 각별한 대접을 받은 것을 감안해보면 동정의 여지가 없다.[19] 이전 시리즈인 설중매 때부터 무술에 능하고 앞날을 내다보는 능력이 있다고 묘사되었다.[20] 중국의 전국시대 조나라 인물 조사를 인용한 상소가 대표적이었다.[21] 게다가 예종이 즉위하자마자 병조판서에서 쫓겨났다.[22] 남이는 지극히 오만하고 돌출적인 성격인지라 종친이면서도 예종에게 미움을 받았다. 처신에 밝았던 구성군 이준은 남이보다 높은 자리를 차지했는데도 마찬가지로 공신들에게 적대당했을지언정 예종이나 왕비가 극구 두둔했다. 혈연의 엹고 짙음을 고려해도 차이가 좀 많이 난다.[23] 게다가 김일손이 계유정난을 비난하려고 올렸으니 그렇게 보고하는 게 사실상 옳은 일이었다.[24] 남이도 구성군을 질투하고 깎아내리려 했었다.[25] 유자광 본인이 서얼 출신인 것도 적용했다고 할 수 있다.[26] 유자광은 서얼 출신으로, 어머니가 노비인 얼자로 원래대로라면 노비신분이어야 했던 인물이다. 공교롭게도 유자광에게 고모부가 권채로 고모되는 인물이 첩을 학대하여, 실록에까지 오르는 일이 있었다. 고모는 당연히 사대부의 처로 처벌을 받지 않았다.[27] 이 대간들이 주로 사림파 출신이었다.[28] 자세한 내용은 광동제약 광동탕 참고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