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애의 난

 


1. 개요
2. 배경
3. 전개
3.1. 관군, 정면 대결을 회피하다
3.2. 계속되는 이시애의 후퇴
3.3.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살아나다: 북청 포위전
3.4. 이시애의 게릴라전
3.5. 주도권의 분수령, 2차 북청 전투
3.6. 난의 결말, 만령 전투
4. 영향
5. 기타
6. 같이보기


1. 개요


조선시대 세조 13년(1467) 5월에 함경도 길주에서 일어난 대규모 반란. 북한이 부르는 정식 명칭은 함길도 인민봉기.
실제로 이시애의 난은 단순한 봉기라기보다는 한 도(道)가 사실상 독립하는 내전에 가까웠다. 경군 역시 한 지역을 새로이 정복하는 형식으로 반란 종식에 성공했다.
30년전 세종대왕의 4군 6진 개척 이후 이시애와 함경도 토호들은 최후의 변방 세력으로서, 이 내전은 통일국가로서의 한반도의 최종국경을 확정하는 성격도 있다고 할 수 있다.

2. 배경


1455년에 세조는 단종을 몰아내고 즉위했다. 이후 중앙집권을 강화하고자 북도 출신 수령은 임명을 제한하고 경관(京官)으로 대체하고, 호패법을 강화하여 지방민이 이주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세조는 워낙 의심이 많아 측근을 제외한 이들의 말은 잘 믿지 않았고, 특히 북쪽 변방 출신 장수를 불신했다.
반란의 주역이 된 이시애는 길주 출신으로 대대로 함길도에서 세력 있는 호족이었다. 조부 이원경은 원래 평안도 출신으로 이름이 이오로테무르(李吾魯帖木兒)였는데, 공민왕 19년(1370)에 이성계가 동녕부를 정벌할 적에 30여 호를 거느리고 항복하였다. 조선 건국 이후 삭방도 첨절제사, 검교문하부사를 역임하며 함길도에 터전을 닦았다. 아들 이인화는 판 영흥 대도호부사, 함길도 첨절제사를 지냈고, 손자 이시애경흥진 병마 절도사, 첨지중추부사, 판 회령 부사를 지냈다.

3. 전개


세조의 중앙집권 정책 때문에 북도인은 불만이 쌓일 대로 쌓였다. 세조 13년(1467), 마침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고향 길주에 머무르던 북부 출신 호족 이시애는 아우 이시합 등과 모의하여 '''중앙집권 정책에 반대하여''' 불만에 찬 다른 호족들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길주에 온 함길도 절도사 강효문을 죽이고 목사 설정신이 다스리는 길주를 점령한 뒤 세조에게 아래와 같은 내용으로 편지를 보내었다.

'''신숙주, 한명회가 강효문과 짜고 반역을 일으키려 했습니다. 그래서 신이 강효문, 설정신, 김익수를 죽였습니다.'''

의심이 많은 세조는 일단 한명회신숙주를 옥에 가두었다.(이는 현대에서도 비슷하게 벌어지는 일로, 쿠데타군이 거병할 때면 현역 국방장관이며 참모총장 등을 "우리 대장임!" 하고 내세울 때가 많아(당연히 본인들은 황당무계) 정부 입장에서 반란을 진압해야 할 군 수뇌를 경계토록 하는 의심암귀다) 신숙주는 이때 함길도 관찰사로 있던 아들이 이시애 군에게 목숨을 잃는 참변을 감옥 안에서 들었다.[1] 이후 구성군 이준에게 군사 3만을 주어 함길도로 보냈다.
진압군의 구성을 보면 세조가 기존 공신들에게 완전히 신뢰를 잃어서 불안해함을 알 수 있다. 총지휘관 구성군 이준은 25세로 문과에 급제해서 1년밖에 안 되었고, 남이 역시 19세에 무과 급제한 후 7년차에 불과했다. 이를 보좌한다고 보낸 부사령관 격인 강순은 무려 77세. 25살 총사령관을 77살 부사령관이 보위하는 진풍경이 일어난 것. 세조가 젊은 종친들을 신뢰했기 때문이었다[2]. 한편 이준과 남이를 보좌한 강순도 비록 종친은 아니지만 세조와 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는데, 강순은 태조의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사촌인 강진행의 아들로써 태조의 정비 신의왕후의 후손인 세조와는 직접적인 혈연관계는 아니지만, 강순은 세조에게 대략 '''증조모의 당질''' 정도의 관계가 된다.
이준은 혈기왕성한 20대인데도 불구하고 매우 신중하고 철저히 준비했다. 사사건건 세조에게 군량미를 보내달라, 증원군을 보내달라, 무기를 더 보내달라고 요구하여 세조가 짜증을 낼 정도였다고 한다. 이준은 자신이 만족할 정도로 지원을 받은 다음에야 철령(강원도 북부)을 넘어 반군 진압에 나섰다. 이시애의 난이 종결되기까지 약 4개월이 걸렸지만 관군의 피해는 적었다.

3.1. 관군, 정면 대결을 회피하다


사실 관군의 입장에서는 토벌전이 여의치 않았다. 이시애가 반란을 일으키면서 함길도 정예군을 손에 넣었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이준의 진압군은 그대로 강원도 철원까지 밀려버렸다. 이렇게 되자 세조는 지원군을 더 파견한 후 인사개편을 단행했다. 강순을 진북대장으로 삼고 평안도 병력 3천을 영흥으로 파견한 후, 병조참판 박중선을 평로(平虜) 장군으로 삼아서 황해도 병사 1천 명을 이끌고 함길도 문천군으로 들어가게 했다. 어유소에게는 한성부의 경군 1천 명을 보내서 이준을 돕게 했다.
이렇게 지원을 받고 5월 15일에 이준 군은 강원도의 이시애 군을 밀어버리고 철령의 입구인 회양으로 진격했다. 이때 이준은 회양에서 보름을 버텼는데, 난의 사태를 파악하고, 경솔히 움직이다가 당하지 않으려 조심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세조는 '지금이라도 항복하면 죄를 묻지 않겠다.'는 조건을 걸고 사자를 보냈지만, 이시애는 오히려 사자를 참수함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였다.
6월 1일 이준 군은 철령을 넘어 안변까지 주둔했다.

3.2. 계속되는 이시애의 후퇴


관군의 진격은 계속되어 허종의 부대가 영흥으로 들어가 반란군과 교전을 벌이기 시작하고, 6월 초 영흥이 함락되면서 관군은 교두보를 마련하는 데 성공했다. 세조는 그 직후 신숙주 등을 풀어주고 본인의 친정을 고려하는 등 강경책을 내놓았다. 이시애 역시 저항이 어려운 함흥을 버리고 북청까지 후퇴했고, 관군은 함흥과 신익평을 지나 홍원으로 나가 함관령을 넘어가는 신원에 본진을 설치했다. 급기야 이시애는 북청을 지나 이성(현재의 이원)까지 퇴각하고 관군은 6월 20일에 북청성에 입성했다.
''' 여기까지는 관군의 무난한 승리 시나리오였지만 '''...

3.3.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살아나다: 북청 포위전


6월 19일 북청에서 퇴각할 당시 이시애 군은 둘로 흩어졌다. 둘 중 동생 이시합의 본군은 병력 2만 명으로 북청 근처 여주을현에 주둔하고, 이시애는 단천 이북의 여러 정예진군과 여진족 500명까지 합쳐 이성에서 대기했다. '''북청성의 관군을 완전히 고립시킨 것 '''
강순은 관군을 이끌고 북청성으로 들어갔지만, 직후 이시합 군은 북청성을 포위했고 뒤이어 이시애가 합류했다. 6월 24일 밤 2시 전후로 이시애 군은 강순 군을 기습했다. 하지만 강순은 이미 이를 예측하여 안에는 목책을 두르고 밖에는 녹각을 세우는 한편 성 밖에는 함정을 파두는 등 철저한 준비한 덕에 어느 정도 수성을 해내었다. 하지만 날이 밝자 관군의 화살은 다 떨어졌고, 북청성은 이시애 군에게 넘어갈 위기에 처했다. 그런데 이시애는 '"관군이 너무 잘 버틴다.'고 생각하여 갑자기 공격을 멈추고는 무릎까지 꿇으며 귀순을 시도했다. 하지만 강순은 "충의의 군사라면 대궐로 나와 자수하라." 하고 말했고, 이시애는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이시애의 뻘짓 덕분에 강순은 그렇게 한숨을 돌렸다. 이시애는 그 후 10여 차례 정도 싸움을 걸었지만 끝내 강순의 수비진을 뚫지 못했다.

3.4. 이시애의 게릴라전


보름이 넘어가자 이시애는 상당히 조급해졌다. 이시애는 사위 이명효와 홍원 / 북청/삼수 / 갑산의 백성들을 모아 1군을 만들고 탕구령을 넘어 신익평에 주둔하게 했다. 또한 이성, 길주, 경성의 본군들은 이시합이 수습하여 마어령을 넘어 2군을 형성하고, 마지막으로 회령 이북 6진의 백성들을 이시애가 이끌고 이성 후방으로 물러나 장기전을 기획했다. 결국 관군은 북청에서 퇴각하고 이시애는 북청을 회복했다.

3.5. 주도권의 분수령, 2차 북청 전투


그러나 이런 이시애의 승전은 열흘을 채 가지 못했으니... 관군은 재정비를 한 후 역으로 이시애에게 당했던 기습을 역으로 활용했다.
강순의 제 1진은 산개령을 넘고 어유소의 2진은 종개령을 넘어 북청으로 진입하고, 이준의 군사는 북청 앞 평포로 진격했다. 강순과 어유소의 군사는 협공을 하여 산개·종개령의 이시애 군을 격파하고 북청으로 쇄도해 들어가, 이시애가 임명한 가짜 부절도사 유득지(劉得之)의 군을 격퇴하고 병력을 흡수했다. 그 덕에 관군의 수는 약 5만 명으로 늘어났다. 이시애는 북청 패퇴의 소식을 듣고 군병 1만여 명을 이끌고 북청 동쪽 68리에 있는 천험의 만령(蔓嶺)으로 갔다.

3.6. 난의 결말, 만령 전투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이시애 군은 이제 농성전으로 갔다. 이성(현재는 이원군)의 만령(蔓嶺)은 남으로는 동해를 등지고 북으로는 태산을 낀 천혜의 요새인데 이시애는 여기서 버티기로 했다.
관군 역시 만령에 전군을 집결한 후 이준 / 강순 / 박중선의 본군은 큰길로 나아가고 허종은 남쪽 중봉으로 우공은 이시애군 선봉이 있는 주봉 , 어유소는 바닷가를 돌아 동봉으로 가고 김교는 북산 밑으로 나아가 4면으로 포위했다. 그 사이 이시애는 여진족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사자가 도착하기도 전에 탈탈 털린다.
결국 이시애는 만령 중봉에 3중으로 진을 치고 결사적으로 버티면서 만령을 지키려 했지만, 음력 7월 31일 저녁 6시 유시에 어유소의 군대가 만령 동봉에서 좌측의 허를 찔러 방어선을 무너트렸다. 결국 만령이 함락되자 이시애는 이성으로 도망쳤다. 8월 1일 이시애는 이성의 객사와 창고를 불사르고 마운령을 넘어 단천으로 퇴각했다. 8일에 관군이 마운령을 넘자 이시애는 단천 앞 남대천에서 저항을 시도했지만 또 패했고, 12일에는 단천에서 패배해 마천령을 넘어 거병지 길주로 퇴각했다.
이에 관군이 마천령을 넘어 영동(嶺東)역까지 나아가자 이시애는 여진에게 투항할 생각을 했지만, 사옹원 별좌[3]인 처조카 허유례에게 포박당해 관군에게 넘겨졌졌다. 이시애는 한양으로 끌려가지도 않고 토벌군 진지 앞에서 즉결로 능지처참을 받고 효수되었다.

4. 영향


구성군 이준, 남이, 강순, 그리고 갑사 유자광 등은 이 사건을 계기로 급성장했다. 이것이 신 공신(신훈)이다. 세조가 구 공신(원훈 혹은 구훈)을 견제하고자 키운 세력인데, 신숙주와 한명회를 잠시 옥에 가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하지만 세조의 병세가 갑자기 악화되면서 구 공신을 다시 우대했고, 예종성종 시기가 되면서 유자광을 제외하곤 토사구팽을 당했다. 이 때를 기회로 훈구공신들은 종친들이 벼슬에 나가는 것을 막으려 시도했는데, 바로 종친사환금지법이다[4].
그리고 이시애가 난을 일으키기 위한 세력을 모을 때 유향소를 근거지로 삼았기 때문에 [5] 다시 폐지되고, 이후 성종 때나 돼서야 복구되었다.
이시애의 고향 길주는 반역향으로 낙인 찍혀 길성현으로 강등되었고, 함길도(함흥 + 길주) 또한 영안도(영흥 + 안변)로 개칭되기도 하였다.[6]
또한 조사의의 난이징옥의 난에 이어 이시애의 난까지 터지면서, 함경도 지역은 태조 이성계조선 건국의 발판이 된 곳임에도 불구하고 반역향으로 취급받고 유무형으로 차별을 받았다. 이런 차별 속에 함경도민의 분노는 쌓였고, 훗날 임진왜란 때 피난 온 임해군, 순화군이 함경도민에 온갖 횡포를 부리자 분노에 기름을 부었다. 결국 국경인을 중심으로 함경도민들이 두 왕자를 체포하여 당시 함경도 지역으로 침공해 온 가토 기요마사 휘하의 왜군에게 바쳐버리는 사태가 터지는 원인이 되었다.
군사적으로도 의미있는 사건이었는데 이 사건이 화약 무기가 조선에서 대량으로 맞붙은 최초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를 보고 화약 무기를 두려워한 세조는 화약 무기를 축소하게 된다.

5. 기타


이시애의 난은 애초부터 별다른 명분이 없었다. 난을 일으키기는 했지만 정작 요구 사항은 함길도 지방의 관리를 다시 함길도 출신 북방민으로 임명해달라는 정도였다. 명분으로만 본다면 시작부터가 이미 진 게임에 가까웠을 수 있다. 비교할 만한 선례로, 조사의의 난 때는 함경도에서 절대적인 지지를 얻었던 태조 이성계가 사실상의 지휘관이었고, 그 태조신덕왕후의 원수(1차 왕자의 난)를 갚자는 명분 때문에 초반의 지지가 상당했다. 이시애의 난은 그만한 명분이 없었다.
종친 구성군 이준, 남이와는 달리 서얼 출신 일개 갑사[7]였던 유자광이 중앙 정계에 진출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좁은 쥐구멍에 쥐 둘이 만나면 용감한 쥐가 이기듯이, 강경한 대책을 주문하는 상소를 올려서 세조에게 신망을 샀다.[8][9] 이후 토벌군과의 연락관으로 활동하며 공을 세워서 세조의 총애를 받아 정계에 진출할 수 있었다. 참고로 유자광은 이 난을 반란이 크게 번진 까닭을 함길도에 파견된 수령들이 모두 무인이라 백성들을 혹사했기 때문이라고 파악하였다.[10]
문헌상으로 제일 먼저 집향촌 양동마을에 입향했다고 기록된 인물인 손소는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공로로 적개 공신 2등에 올라 계천군(鷄川君)에 봉해져 공조참의가 되었다.
이시애의 난을 진압한 장수들과 병력이 바로 이만주를 명군과 합공하기로 하고 이만주 근거지로 쳐들어가 이만주와 측근들을 토벌했다.[12]

6. 같이보기


[1] 이때 죽은 아들이 공주의 남자에도 등장한 차남 신면이다. 한편 세조는 '신숙주의 목에 채운 칼이 너무 헐겁다.'는 첩보를 듣고는 감옥의 관리들을 모두 처형했다고...[2] 귀성군 이준은 세조의 조카, 남이태종의 외증손자로 세조에게는 5촌 내종 조카가 된다. 한편, 6촌 관계인 이준과 남이는 1441년 동갑내기이다.[3] 지금으로 치면 조선 도자기 공사 직원[4] 왕실 종친을 완전히 정치에서 배제해버리는 법률로, 조선이 후대로 갈수록 왕권이 약해지는 원인이 되었다.[5] 유향소는 고려시대에 있었던 사심관 제도를 기반으로 삼은 제도로, 지방 수령의 보좌기관 / 향리의 감찰 역할을 했다. 그러나 점차 중앙에서 파견된 수령과 대립하는 경향이 강해져서 태종 때 폐지했다가 세종대왕 때 중앙의 감독기관으로서 경재소를 두고 복구시켰다.[6] 함경도 (함흥 + 경성군)로 개칭된 건 중종 치세.[7] 시대가 흐를수록 일반병사보다 좀 나은 대우를 받는 병사처럼 되었지만, 조선 초기에는 일정한 재산과 신분이 보장되어야 가능했던 고위 군관들이었다. 고급 병종이었던 갑사는 조선 초기 조선 군사력의 중추였다.[8] 원래 이건 전국시대 조나라 관리 조사의 표현이다.[9] 뿐만 아니라 세조는 유자광을 만난 뒤 자기 앞에서도 거침없이 할 말을 하는 모습에 마음들어했다고 한다.[10] 실제로도 무인 출신들은 아무래도 승진에 제약을 많이 받고 특히 삼정승이나 육조판서 같은 자리 혹은 삼사 등에 임용될 수 없기에 부패에 빠지기 더 쉬웠다. 물론 문관 출신이라고 부패하지 않은건 아니지만[11] 명과 북원이 전쟁을 하는 도중 이만주가 요동 공략에 나섰고 이것이 명나라의 분노를 샀다.[12] 다만 이건 완전 황당하게 벌어진 일인데 명나라 측에서 이만주 토벌에 나서려고 하자[11] 조선 측에도 도움을 구했는데 이 때 세조는 이만주는 벌써 튀었을 거라며 굳이 잽싸게 갔다가 이만주 못 잡으면 명나라측에서 조선군 때문에 못 잡았다고 갈굴테니 이만주 잡느라 무리하지 말라고 했는데 이게 왠걸 '''이만주와 그 가족들에 측근까지 몽땅 근거지에 남아있었다.''' 덕분에 이만주와 그 세력은 모두 조선군에 의해 일망타진되었는데 그럼 명나라는 뭘 했느냐면 강순이 '이만주를 잡아죽였는데도 명군이 안 보여서 이만 돌아갈게요.' 라는 내용의 장계를 올린걸 보면 끝내 명군은 안 나타난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