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 임영관 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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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 태조 丙申年(936년)에 창건된 강릉부 '''객사'''[1] 인 임영관의 정문이다.[2] 이 때문에 미술사 및 역사 전공자에게는 '''강릉 객사문'''으로 알려져 있다. '임영'은 강릉의 옛 별칭이다.[3]
강릉 임영관 삼문은 1962년 국보 제51호로 지정되었다.
2. 내용
고려시대부터 있었다는 기록 때문에, 수덕사 대웅전, 부석사 무량수전, 봉정사 극락전,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과 함께 학술적인 가치가 매우 높은 건축물이다. 특히 앞에 명시한 건축물들이 전부 불교 건물인 것에 비해, 고려시대 건축양식이 일부 남아있는 국가기관의 건축물이라는 점에서 특별하다.
강릉시에서는 강릉 대도호부[4] 터에 있던, 강릉시청, 강릉경찰서, 우체국 지점 등을 순차적으로 이전하면서 객사문 일대를 역사공원하는 사업을 진행 중이다. 이 과정에서 강릉시는 객사문의 활용 방안을 다양하게 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객사문의 구조는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이루어져 있다. 기둥 초석은 자연석 덤벙주초이다. 외부 기둥인 외진주는 배흘림 원주며, 내부 기둥인 내진주는 민흘림 각주로 되어 있다. 또한 무고주 5량 구조이며, 내부 연등천정이다. 공포는 주심포계 익공[5] 인데, 이 때문에, 조선시대에 완전 개보수되었다고 추정하고 있다. 지붕은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다.
3. 기타
임영관이 강릉부 객사로써 창건된 것이 936년이기 때문에, 이 문 역시 936년에 지었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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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공민왕이 1366년 병오(丙午)년에 친필로 임영관의 판액을 하사했다는 기록 때문에, 고려 후기에 지어졌다고 보는 견해가 존재하며, 건축 양식으로 볼 때, 고려말~조선초에 객사문이 지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이 후 기록에는 '''객사'''의 중수 및 개조에 대한 기록이 남겨져 있을 뿐, '''객사문''' 별도의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1627년, 임영관 대청에 화재가 발생했다는 기록을 토대로 이 시기에 객사문도 개조 및 보수가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일제시대에는 강릉 관아가 철거되고 그 자리에 일제의 건축물들이 자리잡는다. 임영관 터에는 강릉공립보통학교가 들어섰으며, 객사문은 그 와중에 철거되지 않고 그 자리를 지켰다. 해방 후 학교 터에 강릉 경찰서가 들어왔고, 이 과정에서 1959년 번와보수공사를 시작으로 4차례의 보수를 했다. 그 중 2000년 객사문 해체보수공사는 객사문의 지붕 모양을 바꾸는 큰 공사 였다. 원래 지붕의 마감 부분이 와구토[6] 로 덮어져 있었는데 이를 막새기와로 바꾸었다. 이 때문에 고증에 맞는 공사를 한 것이 맞는지 의문이 드는 상황이다.
현재에도 그 자리에 자리잡고 있으며, 강릉시가 강릉 내 행사[7] 를 관아에서 치루고 있으므로, 많은 관광객들이 국보 안을 통과하는 진풍경을 볼 수 있다.
4. 바깥고리
5. 국보 제51호
고려시대에 지은 강릉 객사의 정문으로, 현재 객사 건물은 없어지고 이 문만 남아 있다. 객사란 고려와 조선시대 때 각 고을에 두었던 지방관아의 하나로 왕을 상징하는 나무패를 모셔두고 초하루와 보름에 궁궐을 향해 절을 하는 망궐례를 행하였으며, 왕이 파견한 중앙관리나 사신들이 묵기도 하였다.
이 객사는 고려 태조 19년(936)에 총 83칸의 건물을 짓고 임영관이라 하였는데, 문루에 걸려 있는 ‘임영관’이란 현판은 공민왕이 직접 쓴 것이라고 한다. 몇 차례의 보수가 있었고, 일제강점기에는 학교 건물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학교가 헐린 뒤 1967년에 강릉 경찰서가 들어서게 되고 현재는 마당에 객사문만 남아 있다. 남산의 오성정·금산의 월화정·경포의 방해정은 객사의 일부를 옮겨 지은 것이다.
문은 앞면 3칸·옆면 2칸 크기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짠 공포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으로 간결한 형태로 꾸몄다. 앞면 3칸에는 커다란 널판문을 달았으며, 기둥은 가운데 부분이 볼록한 배흘림 형태이다.
간결하고 소박하지만 세부건축 재료에서 보이는 세련된 조각 솜씨는 고려시대 건축양식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1] 객사(客舍)란 고려와 조선시대 때 각 고을에 두었던 지방관아의 하나로 왕을 상징하는 나무패를 모셔두고 초하루와 보름에 궁궐을 향해 절을 하는 망궐례를 행하였으며, 왕이 파견한 중앙관리나 사신들이 묵기도 하였다.[2] 하지만, 이 당시에 객사문이 지어졌는가? 라는 것은 확정할 수 없다.[3] 조선 세종의 적 4남인 임영대군의 군호가 여기서 유래됐다.[4] 명칭에 관해서 이견이 있으나, 통칭 강릉 관아를 말하는 것이다.[5] 공포에 날개를 다는 듯한 익공양식은 조선초에 시작되었다고 본다.[6] 석회, 화강암, 정적토의 혼합[7] 단오제, 커피축제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