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석사
한자 : 浮石寺 / 로마자 : Buseok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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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조건축물로는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美)를
가지고 있는 건물이라고 할 수 있다.
부석사 무량수전에 대해서..
1. 개요
경상북도 영주시 소백산 국립공원의 봉황산에 위치한 사찰.
2. 역사
신라 문무왕 16년(676년)에 승려 의상대사가 왕명으로 세운 화엄종 사찰이다. 현재 대한불교 조계종 제16교구 본사 고운사의 말사이다.
부석사의 이름을 직역하면 '하늘에 뜬 돌'이란 뜻인데, 이는 의상이 이 부석사를 창건할 때의 설화와 관련이 있다.
의상이 당나라에 유학을 갔을 때, 그를 사모하던 선묘라는 여인이 있었다. 하지만 의상은 승려라서 끝내 선묘의 애정을 거절했고, 의상이 신라로 귀국하자 선묘는 바다에 몸을 던져 용이 되어서 의상의 귀국 뱃길을 안전하게 지켰다고 한다.
이후 의상이 부석사를 창건할 때 지역의 도적떼들이 이를 방해하자, 선묘가 큰 바윗돌이 되어서 하늘을 떠다니며 도적들을 물리쳤다. 그 바윗돌이 부석사 뒤뜰에 잇는 큰 바위이며, 이 바위가 땅에 살짝 떠 있어서, 바위 밑으로 줄을 넣으면 통과된다 카더라. 그래서 절 이름이 뜰 부(浮), 돌 석(石)을 써서 부석사라고 전해진다.(실제로 돌석자의 네모 안을 보면 점이 하나 찍혀있는데, 이는 바위가 하늘로 떠오르지 않도록 고정한다는 의미로 찍어놓은 것이라고 한다.) 이 설화에 따라, 부석사에는 선묘에게 제례를 지내는 선묘각이 있다. (이 문서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알길 원한다면 선묘항목 참조)
삼국사기 궁예전에 의하면 궁예가 후고구려를 건립한 후 전국 시찰중에 부석사에 이르었을 때 주지승으로부터 이 곳에 신라 왕의 어진[2] 이 모셔져있다는 말을 들은 후 칼을 내리쳤다고 한다. 김부식은 (집필 당시인 고려 중기 기준으로) '''아직도''' 부석사에 그 칼자국이 남아있었다고 밝혔다. KBS 대하드라마 태조 왕건에서의 묘사는 칼을 꽂은 자리에 '''피'''가 흘러 내리는 등 흠좀무한 연출을 보여준다. 후에 다른 승들이 뽑으려 해도 뽑히지 않으나 왕건이 나서서 건들자 뽑히는 것을 보고는 주지승이 신기하게 여겨한다.[3]
고려시대에는 선달사나 흥교사로도 불렸다는 기록이 남아있으며 공민왕 21년(1372년)에 주지가 된 원응국사(圓應國師)에 의해 크게 증축되었다. 한국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 중 하나인 무량수전과 조사당 또한 이 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결정하는 세계유산위원회(WHC)는 2018년 6월 30일 바레인 수도 마나마에서 열린 제42차 회의에서 한국이 신청한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했다. 우리나라가 등재 신청한 산사는 양산 통도사, 영주 부석사, 안동 봉정사, 보은 법주사, 공주 마곡사 등이다.#
3. 가람
엄격한 양식을 가졌던 삼국시대의 평지가람(절)과 달리 산지가람이며, 보다 더 자유로운 건물의 배치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고려와 조선 시대로 갈 수록 점점 심해진다. 회전문, 범종각, 법당, 안양문, 무량수전의 차례로 이루어지는 공간 구조는 화엄경의 질서와 세계관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현재 부석사는 전성기의 모습 그대로는 아니다. 문헌과 그림 등에 나온 과거의 가람 구조가 현재와는 다르다. 1840년에 발간된 '순흥읍지'에는 10세기 중반의 부석사의 모습이 적혀 있는데, 지금은 없어진 건물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1. 무량수전 앞 석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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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량수전 건물보다 오래된 통일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석등. 4면의 보살상과 석등의 하단의 연꽃 무늬가 아름답게 새겨져 있고, 전체적으로 균형미가 아주 뛰어난 걸작이다.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과 마찬가지로 본전의 중앙 앞에 놓여져 있는데, 이는 빛을 부처님의 진리의 상징으로 보고 본전 앞을 비취는 광명등(光明燈)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 이르면 석등이 가람 앞에 2개가 놓여지는 형태로 바뀌는데, 석등이 광명등(光明燈)의 역할을 상실하고, 조명기구의 역할로 전락해 버렸기 때문이다.
3.1.1. 국보 제17호
부석사 무량수전 앞에 세워져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등으로 부처의 광명을 상징한다 하여 광명등(光明燈)이라고도 하며, 대개 대웅전이나 탑과 같은 중요한 건축물 앞에 세워진다.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로는 3단의 받침돌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을 올린 후 꼭대기에 머리장식을 얹어 마무리한다.
4각 바닥돌은 옆면에 무늬를 새겨 꾸몄으며, 그 위의 아래받침돌은 큼직한 연꽃 조각을 얹어 가운데기둥을 받치고 있다. 전형적인 8각 기둥형태인 이 기둥은 굵기나 높이에서 아름다운 비례를 보이는데, 위로는 연꽃무늬를 조각해 놓은 윗받침돌을 얹어놓았다. 8각의 화사석은 불빛이 퍼져 나오도록 4개의 창을 두었고, 나머지 4면에는 세련된 모습의 보살상을 새겨놓았다. 지붕돌도 역시 8각인데, 모서리 끝이 가볍게 들려있어 경쾌해 보인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얹었던 받침돌만이 남아있다.
통일신라시대를 대표하는 가장 아름다운 석등으로, 비례의 조화가 아름답고, 화려하면서도 단아한 멋을 지니고 있다. 특히, 화사석 4면에 새겨진 보살상 조각의 정교함은 이 석등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3.2. 무량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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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안 되는 고려 시대 건축물인 부석사 무량수전이 유명하다. 무량수전은 고려시대 중기의 건물로 추정되며, 경상북도 안동시 봉정사 극락전과 누가 오래되었나로 엎치락 뒤치락 하고 있다. 왜냐면 확실한 시기를 알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부석사 무량수전은 1376년에 중수된 것으로 알려져 있어서, 건립시기는 이보다 약 100년 정도 이를 것이라고 본다.
여하튼 둘 다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일반적으로는 봉정사 극락전이 더 오래되었을 것으로 본다. 아무튼 봉정사 극락전이 한국 건축의 구조미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면, 무량수전은 한국 건축의 형태, 비례미를 잘 보여준다고 평가받고 있다. 순수하게 건축물로써의 완성도를 본다면 무량수전이 더 급이 높고 훌륭하다고 할 수 있다.
참고로 현재까지 창건 연대가 정확히 밝혀져 있는 것으로는 수덕사 대웅전이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이다.[4]
국사 시간에 졸지만 않았다면, 배흘림기둥은 들어봤을 것이다. 배흘림기둥을 포함한 무량수전의 각 부분요소들은 전체적인 시각적 균형을 고려해서 실제 형태가 조금씩 왜곡되어 있다. 이러한 방법은 결과적으로 동북아시아 삼국 중에서 한국 건축에만 남은 것으로 한중일 삼국 중에서는 한국 건축의 고유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단 전 세계에서 한국만의 유일한 양식은 아니다. 궁금하면 배흘림기둥 문서 참조. 특히 이 부석사 무량수전의 기둥을 배흘림 기둥으로 만든 이유는 일자로 생긴 기둥을 멀리서 보았을 때 안쪽으로 굽어보이는 착시현상을 방지하여 건물을 안정적으로 보이게 하기 위한 선조들의 지혜라고 한다.
주심포 양식이란 점을 포함하여, 유난히 장식적인 부분이 적기 때문에 수수하면서도 가라앉은 느낌을 가지고 있는 건물이다. 과거에는 단청이나 녹유전으로 만들어진 화려한 바닥돌을 가지고 있었지만, 세월과 어떤 이유로 인해 사라졌다. 이 때문에 조선시대의 현란한 단청을 싫어하는 사람이 특히 좋아하기도 하는 건물이다.
위와 같은 특징들 때문에 한국 전통 건축물 중의 하나의 전형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이 많다. 전통 건축물의 기본이 되는 건물. '''국보 18호'''다.
이 무량수전은 조선시대 건물과 비슷해 보이면서도 자세히 보면 다른 점이 눈에 띈다. 우선 창호의 배치가 다르다. 원래 고대 건축인 삼국시대 건물에는 창호가 없었다. 당시에는 종이(한지)는 매우 소량 생산되던 것으로, 그 자체가 매우 비싼 귀중품이었기 때문에 창에다가 종이를 붙이는 것은 매우 사치스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천이나 대나무 발 등으로 막아 놓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중세인 고려 시대에 들어와서야 창호란 단어와 함께 종이를 창문에 붙이기 시작했다. 그렇기에, 이 무량수전의 창호의 그 당시로써는 꽤 최신식이며, 고급스러운 장치였을 것이다. 이 때문에 창호의 살 형태도 가장 기초적인 정자살이란 것을 알 수 있다.[5] 조선시대로 가면 16세기부터 한지가 대량생산되어 창호가 일반 가정에도 보급되며, 절의 창호 역시 각종 장식이 붙게 된다.
무량수전의 기둥 사이의 창호는 크게 3부분으로 나뉘는데, 좌 우 양쪽의 창호는 창문으로서의 기능을 한다. 그래서 들어올리는 방식으로 열리며, 가운데 두 짝의 창호는 문으로 기능하기에 좌우로 열리는 여닫이 문이다. 조선시대에는 전부 여닫이인 동시에 창으로 들어올리는 4짝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흔하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또 한 가지는, 무량수전은 원래 입식용 건축이었다는 것이다. 현재 무량수전 실내에 있는 나무 바닥 아래에는 원래 녹색의 유약을 칠한 벽돌인 녹유전이 깔린 바닥이 있다. 즉, 고려시대에는 마치 중국의 건축물처럼 사람이 신발을 신고 서서 지내는 입식생활이 일반적이었고, 무량수전 역시 그러했다는 것이다. 이후 조선시대에 들어와 온돌 등 때문에 좌식생활이 일반화되고, 절에서는 엎드려서 절을 하는 것이 널리 퍼지자 새로 나무 바닥을 깔게 된 것이다. 부석사 안의 박물관(유물관)에 녹유전을 재현해 놓았다. 녹유전은 유리같이 광택이 뛰어나며, 이는 불국토의 수미산 바닥이 유리로 되어 있다는 말을 형상화 한 것이다.
이처럼 비슷해 보이는 건물이지만, 조선과는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고려시대의 건물이다.
부석사를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게 '누하진입'이다. 누각 아래로 들어간다는 뜻으로, 안양루 밑 계단을 올라가다 보면 천장(안양루 바닥)에 시야가 가려지면서 고개를 숙이거나 몸을 낮추며 들어가게 된다. 부처님의 진신이 모셔져 있는 탑이나 서방극락세계를 뜻하는 무량수전에 몸을 낮춰 겸손함을 저절로 보이게 되는 구조다.
무량수전 내부 아미타여래상은 왼편에 위치해 있는데, 무량수전이 바라보는 방향이 남쪽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아미타여래는 서쪽(극락세계)에서 중생들을 굽어보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무량수전의 불상이 아미타여래인지 아닌지 논란이 있다. 무량수전은 아미타여래가 주존불로 봉안되는 불전이지만 최근 불상이 무량수전보다 200년 정도 연대가 앞서는 걸로 파악된 데다, 부처의 성격을 규정하는 수인도 항마촉지인으로 석가모니불의 성도 순간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다. 연대만으로 보면 불상이 먼저 만들어지고 무량수전이 세워진 셈인데, 이렇게 되면 무량수전의 본존불을 '아미타여래'라고 확신하는 데 무리가 따른다. 이 때문에 키배가 격해지자, 교과서에서는 쿨하게 '아미타'라는 접두사를 빼버렸다.
지금은 부석사의 금당[6] 역할을 하고있지만 축조 당시에는 부석사의 강당[7] 으로 사용했을거라는 의견이 있다. 절의 중심부가 아닌 절의 끝부분에 위치해 있으며 불상이 건물 입구를 바라보는 위치가 아닌 측면을 바라보는 위치에 있는 특이성을 감안할때 모종의 이유로 이후 금당으로 역할이 바뀐 것이라는 의견이다.
예전에 KBS역사스페셜에서 선묘 낭자가 석룡으로 변하여 무량수전 앞마당에 뭍혀있다는 설화를 검증하고자 중장비를 동원하여 발굴한 적이 있었다. 그 결과 무량수전 안에 있는 불상 바로 밑에서부터 석등까지 이어진 커다란 돌이 있음을 확인한 바 있다. (단, 두동강이 나 있는데 이는 일제가 잘랐다는 썰이 있다.)
3.2.1. 국보 제18호
봉황산 중턱에 있는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16년(676)에 의상대사가 왕명을 받들어 화엄의 큰 가르침을 펴던 곳이다. 무량수전 뒤에는 ‘부석(浮石)’이라고 새겨져 있는 바위가 있는데, 『송고승전』에 있는 설화를 보면, 의상대사가 당나라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할 때 그를 흠모한 여인 선묘가 용으로 변해 이곳까지 따라와서 줄곧 의상대사를 보호하면서 절을 지을 수 있게 도왔다고 한다. 이곳에 숨어 있던 도적떼를 선묘가 바위로 변해 날려 물리친 후 무량수전 뒤에 내려 앉았다고 전한다. 무량수전은 부석사의 중심건물로 극락정토를 상징하는 아미타여래불상을 모시고 있다. 신라 문무왕(재위 661∼681) 때 짓고 고려 현종(재위 1009∼1031) 때 고쳐 지었으나, 공민왕 7년(1358)에 불에 타 버렸다. 지금 있는 건물은 고려 우왕 2년(1376)에 다시 짓고 광해군 때 새로 단청한 것으로, 1916년에 해체·수리 공사를 하였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3칸으로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한 구조를 간결한 형태로 기둥 위에만 짜올린 주심포 양식이다. 특히 세부 수법이 후세의 건물에서 볼 수 있는 장식적인 요소가 적어 주심포 양식의 기본 수법을 가장 잘 남기고 있는 대표적인 건물로 평가 받고 있다. 건물 안에는 다른 불전과 달리 불전의 옆면에 불상을 모시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무량수전은 우리 나라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안동 봉정사 극락전(국보 제15호)과 더불어 오래된 건물로서 고대 사찰건축의 구조를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건물이 되고 있다.
3.3. 조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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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량수전 뒤쪽으로 난 길을 따라 조금 올라가면 나오는 건물. 정면 3칸 측면 1칸의 작은 건물이지만, 1377년에 재건된 고려 말기의 건물로 꽤나 오래되었다. 국보 제19호.
이 안에 그려져 있는 사천왕, 보살상 등의 희귀한 고려시대의 불화가 있다. 또 건물 앞에는 요상한 철창이 있는데, 그 안에는 작은 나무가 있다. 의상대사가 사용하던 지팡이를 조사당 앞에 꽂았더니 자라서 나무가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철창으로 가둔 이유는 이 나뭇잎을 따서 달여 먹으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고 해서, 하도 많이 잎을 따서 나무가 말라죽을 지경이 되어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3.3.1. 국보 제19호
봉황산 중턱에 있는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16년(676)에 의상대사가 왕명을 받들어 화엄의 큰 가르침을 펴던 곳이다. 무량수전 뒤에는 ‘부석(浮石)’이라고 새겨져 있는 바위가 있는데, 『송고승전』에 있는 설화를 보면, 의상대사가 당나라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할 때 그를 흠모한 여인 선묘가 용으로 변해 이곳까지 따라와서 줄곧 의상대사를 보호하면서 절을 지을 수 있게 도왔다고 한다. 이곳에 숨어 있던 도적떼를 선묘가 바위로 변해 날려 물리친 후 무량수전 뒤에 내려 앉았다고 전한다. 또한 조사당 앞 동쪽 처마 아래에서 자라고 있는 나무는 의상대사가 꽂은 지팡이였다는 전설도 있다.
조사당은 의상대사의 초상을 모시고 있는 곳으로 고려 우왕 3년(1377)에 세웠고, 조선 성종 21년(1490)과 성종 24년(1493)에 다시 고쳤다.
앞면 3칸·옆면 1칸 크기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처마 내밀기를 길게하기 위해 올린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며, 건물 자체가 작은 크기이기 때문에 세부양식이 경내에 있는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국보 제18호)보다 간결하다. 앞면 가운데 칸에는 출입문을 두었고 좌우로는 빛을 받아들이기 위한 광창을 설치해 놓았다.
건물 안쪽의 좌우에는 사천왕상·보살상 등 고려 후기에 그려진 벽화가 있었다. 이것들은 고려시대 회화 가운데 매우 희귀한 것으로, 고분벽화를 제외하면 가장 오래된 채색 그림 중 하나였다. 지금은 부석사 성보박물관에 보관하고 있으며, 원래 벽화가 있던 자리에는 본떠 그린 그림을 놓아 당시 벽화의 모습을 잘 전해주고 있다.
3.4. 영주 부석사 소조여래좌상
榮州 浮石寺 塑造如來坐像. 무량수전에 봉안되어 있는 불상이다. 국보 제45호.
소조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흙을 빚어서 만든 불상이다. 우리나라에는 흔치 않은 형태. 물론 금칠이 되어 있기 때문에 흙색의 불상을 떠올리면 착각이다.
고려 초기의 불상으로 추정된다. 수인은 석가모니불이 취하는 항마촉지인이나 무량수전에 봉안된 것, 수인이 후대에 수정되었을 가능성 등을 생각하여 아미타여래로 명명되어 있으나 아직 논란은 있다.
3.4.1. 국보 제45호
부석사 무량수전에 모시고 있는 소조불상으로 높이 2.78m이다. 소조불상이란 나무로 골격을 만들고 진흙을 붙여가면서 만드는 것인데, 이 불상은 우리나라 소조불상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된 작품으로 가치가 매우 크다.
얼굴은 풍만한 편이며, 두꺼운 입술과 날카로운 코 등에서 근엄한 인상을 풍기고 있다. 옷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 어깨에만 걸쳐 입고 있는데, 평행한 옷주름을 촘촘하게 표현하고 있다. 무릎 아래까지 이어지고 있는 이런 형태의 옷주름은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63호)에서도 보이는 것으로 이 작품이 고려 초기 불상들과 같은 계열임을 알 수 있다.
손모양은 석가모니불이 흔히 취하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으로, 무릎 위에 올린 오른손의 손끝이 땅을 향하고 있다. 하지만 불상을 모신 장소가 서방 극락정토를 다스리는 아미타불을 모신 극락전이라는 사실과, 부석사에 있는 원융국사탑비 비문에 아미타불을 만들어 모셨다는 기록이 있는 점으로 보아 이 불상은 아미타불임이 확실하다.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상징하는 광배(光背)는 불상의 뒤편에 나무로 따로 만들어 놓았는데, 가장자리에 불꽃이 타오르는 모양을 표현하였다. 머리광배와 몸광배는 원형으로 표현하고 그 안에는 화려한 꽃무늬를 장식하였으며, 작은 부처를 달았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온화함이 사라진 근엄한 표정과 평행의 옷주름 등에서 형식화된 모습이 보이지만 고려시대 불상으로서는 상당히 정교한 솜씨를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며, 특히 소조불상이란 점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양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점으로 보아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3.5. 부석사 조사당 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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浮石寺祖師堂壁畵. 부석사 조사당 외벽에 있었던 벽화다. 지금은 부석사 조사당에 가도 볼 수는 없고, 조사당 안에 있는 그림들은 스님들의 영정들이다. 벽화는 따로 유물전 안에 보관하고 있다.
벽화에는 제석천(帝釋天)과 범천(梵天)·사천왕(四天王) 등이 표현되어 있으며 이들은 불법을 지키는 호법신들이다. 특히 제석천과 범천은 호법신들 중 최상위의 신들로 이들의 직속부하가 바로 사천왕들이다. 이 벽화는 무덤벽화들을 제외하면 우리나라에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벽화로 조사당 안에 위치했던 의상대사의 영정을 보위하는 의미로 그려졌다고 한다.
사실 부석사 조사당 벽화말고도 예산 수덕사 대웅전에도 벽화가 있었어서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고려시대의 벽화가 유이하게 남아 있었다. 하지만 수덕사 대웅전의 벽화는 20세기 중엽 한국전쟁의 동란 와중에 완전 소실되어서, 고려 시대의 벽화는 현재 남아 있는 부석사 조사당의 벽화가 유일하며 가장 오래된 것이다.
부석사 조사당 벽화는 이러한 가치를 인정 받아 국보 제46호로 지정되어 있다.
일제강점기인 1916년에 건물 보수를 이유로 떼어져 석고로 보존처리를 했는데[8] , 문제는 시간이 지나면서 균열이 더 생겨서 훼손과 손상이 심각해 2020년 6월부터 국립문화재연구소로 옮겨서 '''2026년까지 보존 처리를 받을 예정'''이다.
3.5.1. 국보 제46호
이 벽화는 부석사를 창건하고 우리나라에서 화엄종을 처음 시작한 의상대사를 모시고 있는 부석사조사당(국보 제19호) 안쪽 벽면에 사천왕과 제석천, 범천을 6폭으로 나누어 그린 그림이다. 현재는 일제강점기에 해체 분리된 벽화를 별도로 보관하고 있다.
흙벽 위에 녹색으로 바탕을 칠하고 붉은색·백색·금색 등으로 채색하였으며, 각각의 크기는 길이 205㎝, 폭 75㎝ 가량이다. 양쪽의 두 천부상은 우아한 귀족풍으로 양감이 풍만하며, 가운데 사천왕은 악귀를 밟고 서서 무섭게 노려 보는 건장한 모습이다. 훼손된 부분이 많고 후대에 덧칠하여 원래의 모습이 많이 사라졌지만 율동감 넘치는 유려한 선에서 고려시대 불화의 품격을 느낄 수 있다.
건물에서 발견된 기록을 통해 조사당을 세운 연대가 고려 우왕 3년(1377)임을 알게 되었으며, 벽화를 그린 연대도 같은 시기일 것으로 보인다.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벽화 가운데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 회화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4. 여담
2010년대에 쓰시마 섬에서 도난당해 대한민국에 반입된 불상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부석사와는 이름만 같다. 자세한 것은 부석사(서산) 참고.
부석사 칭찬이 매우 체계적으로 정리된 책으로는 뭐니뭐니해도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2권이 있다. 또한 앞 책의 저자인 유홍준의 스승인 최순우가 지은 책 제목이 그 유명한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이다. MBC 느낌표에서 이 책을 선정도서에 올렸던 적이 있어서, 책 내용은 몰라도 제목은 다들 들어보았을 것이다.
소설가 신경숙의 <부석사>라는 소설도 있다. 이 소설로 신경숙은 제 25회 이상문학상을 수상하였으며, 해당 작품은 교과서에 수록되기도 하였다. 다만 소설 제목은 부석사지만, 소설에는 부석사가 나오지 않는다. 부석사를 향해 차를 타고 가는 주인공들의 여정 중 소설이 끝나버린다.
1959년에 이승만 前 대한민국 대통령이 이 곳을 방문하고 직접 써 준 부석사 현판이 안양문인지 범종각인지에 걸려 있다. 당시 이를 두고 불교계에서도 말이 많았는데, 어찌된 일인지 그대로 남았다. 대통령이 크리스천이라 불교와 사이가 나빴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개인적으로는 어릴 때 불자인 어머니를 따라 절에도 다닌 적이 있다.
배낭여행 여행객이 찾아가기에는 약간 어려움이 있는데, 이는 영주시 시내버스 집결지인 영주여객 차고지가 영주역과는 도보 20 ~ 30분 정도 떨어져 있고, 영주터미널과는 차로 10분 정도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영주터미널은 풍기 경유 부석사행 버스가 다니기는 하지만, 영주여객에서 곧바로 가는 것보다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 기차로 찾아간다면 풍기역으로 찾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 배차간격은 더 길지만, 역 바로 앞에서 버스를 탈 수 있기 때문이다. 풍기역 앞에서 27번 버스를 타면 동양대 캠퍼스를 관통하여 영주선비촌 - 순흥향교[9] 를 지나 부석사로 간다. 상당히 거리가 멀기 때문에 시간 안배를 잘 하여야 하며, 배차간격이 넓기 때문에 미리 시간 계산을 해둬야 한다.
부기영화에서 국내 최고의 절밥 맛집으로 뽑혔다.(...)[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