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해사

 



1. 개요
2. 유물
2.1. 영산전
2.1.1. 바깥고리
2.1.2. 국보 제14호

한자 : 銀海寺 / 로마자 : Eunhaesa
홈페이지

1. 개요


경상북도 영천시 청통면 청통로 951(치일리 479)에 있는 팔공산 도립공원 동편에 있고 대한불교 조계종 제10교구 본사이다.
809년(신라 헌덕왕 1) 혜철국사가 해안평에 창건한 사찰로 처음에는 해안사(海眼寺)라고 하였다. 그 후 1264년(고려 원종 5)에 중창하였다. 1545년(조선 인종 1)에 소실되어 1546년(명종 1)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지었다. 그리고 법당과 비석을 세워 인종의 태실을 봉하고 은해사라고 하였다. 1563년(명종 18)에 다시 소실되어 이듬해 중건했다. 1589년(선조 22)에 다시 중창하여 큰 절이 되었다. 1847년(헌종 13)에 또다시 불탄 것을 후에 중수하였다. 이때 극락보전 건물을 대웅전으로 사용해 왔다가 2011년 다시 극락보전으로 변경하였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극락보전과 설선당, 심검당, 종루, 보화루, 독성각, 승당, 요사채 등이 있다. 주요 문화재로는 국보 제14호인 거조암 영산전, 보물 제486호인 백흥암 극락전 수미단, 보물 제514호인 운부암 청동보살좌상, 보물 제790호인 백흥암 극락전 등이 있다. 이 밖에도 60여 점의 문화재와 24동(棟)의 건물이 있다.
부속 암자로는 기기암, 백흥암, 운부암, 거조암, 중암암 등이 있다. 말사로는 경산시 환성사, 군위군 인각사, 경산시 불굴사, 청송군 대전사 등이 있다.

2. 유물



2.1. 영산전



[image]
좌측에서 바라본 영천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
[image] '''대한민국 국보 제14호'''
'''영천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
永川 銀海寺 居祖庵 靈山殿


'''소재지'''
경상북도 영천시 청통면 거조길 400-67, 은해사 거조암 (신원리)
'''분류'''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 불교 / 불전
'''수량/면적'''
1동
'''지정연도'''
1962년 12월 20일
'''제작시기'''
고려시대 말기/조선시대 초기

1980년대 대한뉴스에 방영 된 모습
거조암은 은해사에 소속된 말사로 영산전은 거조암의 중심 건물이다. 본래 은해사보다 거조사(거조암의 본래 명칭)가 더 먼저 지어지긴 했지만[1] 이후 은해사에 속하는 말사가 되어 암자가 되었다.[2]
거조암의 영산전은 고려말인 1375년(우왕 원년)에 지어졌으며, 이는 1970년대에 있었던 영산전의 해체수리때 밝혀졌다. 물론 영산전이 건립되었을 때의 원형 그대로 전해진 것은 아니며 이후에도 여러 차례 중수되었다.
영산전은 주심포 양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건축물로 강진 무위사 극락보전보다 앞선 양식을 보인다. 내부에는 석가모니불과 500여 개의 나한상이 가득 차 있는데, 이렇게 많은 나한을 모신 것은 대한민국에서 유일한 경우라고 한다.
거조암 영산전은 고려말 건축사 연구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건립 연대가 명확하며 오래된 바, 그 중요성을 일찍이 인정하여 1962년 국보 제14호로 지정되었다.

2.1.1. 바깥고리



2.1.2. 국보 제14호


은해사는 통일신라 헌덕왕 1년(809) 혜철국사가 지은 절로 처음에는 해안사라 하였다고 하며 여러 차례 있었던 화재로 많은 건물을 다시 지었는데, 지금 있는 건물들의 대부분은 근래에 세운 것들이다.

거조사는 은해사 보다 먼저 지었지만, 근래에 와서 은해사에 속하는 암자가 되어 거조암이라 부르게 되었다. 돌계단을 오르는 비교적 높은 기단 위에 소박하고 간결하게 지은 영산전은 거조암의 중심 건물이다. 고려 우왕 원년(1375)에 처음 지었으며, 석가모니불상과 526분의 석조나한상을 모시고 있다.

앞면 7칸·옆면 3칸 크기의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보았을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를 기둥 위부분에만 설치한 주심포 양식이다. 특히 영산전은 고려말·조선초 주심포 양식의 형태를 충실하게 보여주고 있어 매우 중요한 문화재로 평가받고 있다.



[1] 신라 효성왕 2년(738년)에 원참 조사가, 또는 신라 경덕왕때 창건했다고 본다.[2] 어떠한 경위로 은해사의 말사가 되었는지는 명확하게 밝혀진 것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