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마리아
[clearfix]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1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독립유공자 강영승, 강혜원의 모친이며, 강원신의 시어머니다.
2. 생애
황마리아는 1865년생으로 알려졌으며, 평안남도 평양부 출신이다. 그녀는 감리회 신자로, 강익보(康翊晉)와 혼인하여 3남 2녀를 두었다. 1905년 6월 13일 맏딸 강혜원, 차남 강영승, 강영승의 처 강원신, 차남 강영옥(康永玉)을 데리고 하와이로 이주하여 가피올라니(Kapiolani) 농장과 에와(Ewa)의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했다.
1909년 일제의 한국 병합 반대 의연금 모금에 참여했고, 1913년 4월 호놀룰루에서 국어 교육 장려와 일화 배척, 기독교 전도와 사회 개혁을 목적으로 하는 대한인부인회를 조직하고 재무에 취임했다. 같은 해 9월에는 부인회에 재봉소를 설치하고 남녀 양장을 제작 판매하기 위해 필요한 자금을 모으는 수전위원(收錢委員)으로 활동하였다. 1914년에는 회원들과 함께 서간도 재난동포에게 구제금 300달러를 송금하는 등 6년간 국내외 재난동포 구제사업을 하였다.
1919년 3.1 운동 소식이 하와이에 전해지자, 월 15일 하와이 각 지방의 부녀 대표자 41명이 모여 호놀룰루에서 공동대회를 열었다. 3월 29일 제2차 대회를 열고 조국 독립운동 후원의 목적으로 하와이 각 지방의 한국 부녀를 규합하고 부녀 사회의 운동 역량을 이에 집중할 것, 조국 독립운동에 대하여 부녀로서 할 수 있는 모든 사업에 봉사하되 우선 독립운동 후원금 모집에 착수할 것, 항일 군사 운동이 있을 경우에 출정 군인 구호 사업의 준비로 적십자 임무를 연습하며 재난 동포 구제에 노력할 것, 그리고 조국 독립운동과 외교 선전에 대한 후원 방침에 대한인국민회 지도에 따라서 진행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에 따라 3월 29일 대한부인구제회(大韓婦人救濟會)를 조직하고 부인회를 구제회에 통합시켰다. 대한부인구제회에 참여한 부녀들은 가정 살림을 절약하여 20만 달러에 이르는 애국금을 모아 독립운동 자금 지원과 구제 사업 활동을 전개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외교 선전 사업에 후원금을 보내는 한편 군사 운동을 위하여 만주의 군정서와 대한독립군 총사령부 출정 군인에게 구호금을 보냈다.
구제 사업으로는 3.1 운동 때 부상을 입은 이의 가족에게 구제금 1,500달러를 보냈으며, 국내에 재난이 있을 때마다 YMCA와 동아일보, 조선일보를 통해 구제금을 보냈다. 한편, 황마리아는 세탁업을 하여 자녀들을 교육시키고 교회와 사회를 위해 봉사했다. 1928년 5월 호놀룰루 감리교회 부인보조회 부회장으로 선임되어 회장 정월라(鄭月羅) 등과 활동하였다.
1930년 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적극 지원하기 위해 하와이 한인협회를 조직할 때 29인 중 한사람으로 참여하였다. 1934년 와히아와 미감리교회 부인보조회 회장으로 선임되어 와히아와 미 감리교의 사업을 더욱 확장하였다. 1936년 11월에는 구제회 회장으로서 김구에게 100달러를 보내며 군인 양성에 써줄 것을 부탁하였다.
1937년 8월 5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7년 황마리아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