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호동/씨름

 



1. 그 이전
2. 1989년
3. 1990년
4. 1991년
5. 1992년
6. 강호동의 시대
7. 성적
7.1. 백두장사
7.2. 천하장사
8.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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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 이전


강호동은 중학교 이전부터 이미 씨름 업계에서 엄청난 유명인이었다.
마산중학교 2학년 시절 마산중학교 근처에 있는 산상고등학교에 가서 고등학교 씨름부 형님들과 씨름으로 맞붙어서 '''깡그리 발라버렸다.''' 심지어는 이 때 얻은 엄청난 유명세로 인해 중학교 2학년 나이로 무려 경남대학교 씨름부 선수들과 씨름으로 맞붙어 박빙의 역량을 보였다. 자신보다 5살 이상 연상의 형님들과 비빌만큼 강호동은 어렸을 때부터 씨름 천재였다. 씨름을 어찌나 잘 했는지 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프로 선수들 틈바구니에 끼어서 같이 뉴욕으로 전지훈련도 다녀왔다.
마산 산호초등학교,[1][2] 마산중학교,[3] 마산상고(現 마산용마고)를 졸업하고 부산조흥금고에 입단했다.

2. 1989년



1987년 5월 1일자 동아일보에 이미 씨름 유망주로 소개되었는데, 그때 키가 182cm, 몸무게가 110kg에 달했다고. 데뷔전은 89년 3월 대전 천하장사대회 8강전이었다. 데뷔전 때부터 괴성을 지르며 등장했지만 경기 도중 양선수 모두 상대방의 샅바를 놓치게 되었고, 아직 심판의 중단 신호가 없었음에도 경기가 중단되었다고 생각한 강호동이 방심한 사이 상대인 일양약품 이종식 장사의 기습적인 밧다리에 당해 넘어지면서 데뷔전에서 첫 패를 기록한다.[4] 재미있는 점은 이만기와 붙었을 당시 똑같은 상황이 발생했는데,[5] 이번에는 이만기가 이 규정을 몰랐던 것인지 허점을 보이다가 강호동이 달려들자 뿌리쳤지만 이후 강호동이 이종격투기식으로 테이크다운을 성공시킨다. 이렇게 이기고 난 뒤 인터뷰에서 본인도 데뷔 전 당시 패배에 대해 언급한다. 당시 자신도 억울했지만 이 패배가 약이 되었다고 한다(...).
이때는 고3 시절에 당했던 큰 부상 후유증 때문에 초반에는 별 활약을 못했지만 점차 부상 후유증에서 회복하고 기량을 찾았다. 그러다가 1989년 5월 일양약품으로 트레이드되면서 일양약품의 간판으로 활동하게 된다.
그리고 데뷔 후 44회 장사씨름대회에서 백두장사로 처음으로 타이틀을 거머쥔다. 특히 준결승전에서 이만기와의 첫 공식전을 치러서 2:0으로 승리를 거두는 파란을 일으켰는데, 첫 경기 때는 강호동이 자체적으로 개발한 기술로,[6] 두 번째 경기 때는 뒤집기로 승리했다.

3. 1990년



일양약품에 입단하여 100%의 몸상태로 맞은 1990년은 이미 일양약품의 감독이 올 시즌을 이만기 vs 강호동으로 정의할 만큼 씨름판에서 강호동이 최강자로 자리매김한 시즌이다.
1990년 3월 성남에서 열린 18회 천하장사대회에서 씨름판의 슈퍼스타이자 마산상고 대선배 이만기와 처음으로 천하장사 대회에서 맞붙었고,[7] 그 전날 백두장사 결승에서 승리하고 준결승에서 또 다시 승리하면서 대선배 이만기에게 모래를 뿌렸던 전설의 세레모니로 전국구 스타가 되었다.[8] 그리고 90년 씨름판은 3번의 천하장사대회를 싹쓸이하면서 본좌로 등극[9]했다. 백두장사는 2회 등극했다.

4. 1991년


1991년에는 황대웅 장사와 김칠규 장사와 함께 민속 씨름을 3분했었다. 천하장사는 황대웅이 많이 차지했지만 강호동은 23회 천하장사에 등극했고, 백두장사는 54~57회 4연패를 달성했다. 그래서 91년 종합 승률에서도 당당히 1위였다.

5. 1992년


1992년 3월 24회 박광덕[10]과 결승에서 만나서 3:2로 이기면서 천하장사 타이틀을 5회 획득했고, 천하장사에 등극하여 역대 2위인 5차례 천하장사등극의 기록을 달성했지만 이 다음 대회인 63회 체급별장사씨름이 끝난 뒤 소속팀 일양약품을 무단이탈한 뒤 잠적해 버려서 큰 논란이 있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92년 5월 "신인들의 체격과 힘을 감당하기 힘들다. 부상 문제로 선수 생활을 끝낸다"라는 여러모로 이해하기 어려운 발표를 한 후 은퇴했다.[11][12]
다만, 이때 반항아라고만 부르기에는 지나친 행동도 있었는데, 내가 이만기보다 못한게 뭐냐라는 말을 시작으로 이만기의 연봉 6천만[13]보다 무조건 더 받겠다는 선언과 함께 팀을 이탈해 연봉협상을 벌이던 도중 도중에 갑자기 마산으로 내려가는 뗑깡을 부린 적이 있다. 작은 회사인 일양약품이 감당하기엔 애초에 너무 커버린 거물이 되어버린 것이다.

6. 강호동의 시대


90년 3월 천하장사로 등극하면서 당시 최연소 천하장사(훗날 백승일에 의해 경신했다.), 최단기간 5회 천하장사(이만기선수가 7년에 걸쳐 10회의 천하장사 타이틀을 보유했는데, 강호동은 불과 3년에 5회의 천하장사 타이틀을 보유했다.), 당시 현역 승률 1위 기록을 보유했다.
강호동이 현역으로 활동하던 당시 백두급 주력 선수들은 이만기 시대와 달리 신장 180cm 체중 100kg 전후급에서 점차 올라가 신장 180cm중반, 몸무게 120kg 내외였는데, 강호동의 전성기 체급은 182cm 체중 130kg였다. 강호동은 당시 백두급에서도 체중과 힘이 상위권이었지만 그 이상으로 스피드와 경기운영능력이 극강이었다. 그야말로 완전체다. 강호동이 완벽한 기술 씨름꾼이었던 이만기와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당대 최고의 스피드와 힘을 조합한 기술 씨름을 해냈던 '''유일한 백두급 선수'''였고 2년뒤 등장한 백승일[14]과 더불어 마지막 백두급 테크니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1991년 160kg의 박광덕(당시 럭키증권)이 입단하여 22회 천하장사 결승전까지 올라가는 임팩트를 남기고, 그 다음해 슈퍼두꺼비 김정필이 입단하면서 백두급 장사들의 평균체중이 급상승하기 시작했다. 이때 최전성기였던 강호동은 변화하는 백두급 장사들의 사이즈에 고전할 것이라 예상했지만 자신보다 40kg나 무거웠던 박광덕을 92년에 결승에서 이기고 천하장사에 오른적도 있다.
거구들의 시대에 강호동이 얼마나 위력적이었을지는 미지수이지만 1. 기존 스타일 그대로 그만큼의 지배력은 발휘하지 못했을 것, 2. 그럼에도 굉장한 위력을 보이긴 했을 것만큼은 분명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z7sHH93Seto 당시 박광덕과의 결승전을 보면 이 점이 명확한데, 강호동은 그 무거운 박광덕을 상대로 들배지기에 성공하며 첫판을 따내고, 뒤이어 잡채기를 성공하면서 2대0으로 앞선다. 그러나 나머지 두 판에서는 박광덕의 덩치를 감당하지 못하고 연이어 넘어가고 만다. 실제로 세 번째 판과 네 번째 판 모두 강호동의 기술이 제대로 먹혀들어갔음에도 박광덕이 힘과 체격으로 버텨낸 다음에 이후 역습을 당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강호동의 덩치가 육안으로도 차이가 날 만큼 훨씬 작았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균형을 잃으면 황소처럼 덤벼드는 박광덕의 역습을 당해내기 힘들었던 것이다. 강호동 특유의 들배지기가 성공한 첫 번째 판에서도 기존처럼 화끈하게 제압하는 것이 아니라 겨우 넘어뜨리는 수준이다. 강호동은 위에 언급됐다시피 기술과 피지컬 모두가 만렙인 선수라 단기간에 그야말로 폭발적인 성적을 기록했지만 기존의 스타일로는 그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피지컬을 넘는 선수에게는 고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경기에서 보듯이 기술이 제대로 안 먹혀도 경기를 끌어나갈 수 있는 기술, 스피드와 거구들에게도 밀리지 않는 힘이 있었기에 상성으로 밀리는 박광덕도 제압할 수 있었다.
일부 폄훼하는 사람들의 주장과 다르게 당시 전성기의 강호동은 거대한 신인들을 제압하고 있었다. 하지만 기존과 다르게 훨씬 힘겹게 제압해야 했던 것이 사실이고, 그 추세대로라면 그 괴물같던 파괴력을 이어갈 순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당시 23살로 아직 젊었고, 기술 면에서도 만렙이고 머리가 굉장히 좋은 선수인 만큼 새로운 시절에 적응해 스타일을 바꿨다면 얼마나 그의 시대가 이어졌을지는 말 그대로 미지수다.
하지만 가난했던 소속팀 일양약품과의 연봉협상 갈등이 폭발하면서 강호동은 사실상 씨름을 그만두고 연예계 전업을 선언했다.

7. 성적



7.1. 백두장사


  • 1989년 7월 44회 부산 백두장사대회 우승 (vs 임용제)
  • 1989년 9월 45회 잠실 백두장사대회 준우승 (vs 이봉걸)
  • 1989년 11월 46회 울산 백두장사대회 준우승 (vs 이만기)
  • 1990년 3월 47회 성남 백두장사대회 우승 (vs 이만기)
  • 1990년 4월 48회 김해 백두장사대회 준우승 (vs 황대웅)
  • 1990년 5월 49회 원주 백두장사대회 우승 (vs 황대웅)
  • 1990년 10월 52회 인천 백두장사대회 준우승 (vs 임종구)
  • 1990년 11월 53회 이리 백두장사대회 준우승 (vs 임종구)
  • 1991년 3월 54회 부산 백두장사대회 우승 (vs 한병식)
  • 1991년 4월 55회 태백 백두장사대회 우승 (vs 임용제)
  • 1991년 5월 56회 마산 백두장사대회 우승 (vs 황대웅)
  • 1991년 6월 57회 이리 백두장사대회 우승 (vs 황대웅)
  • 1992년 4월 19일 부산 백두장사대회 강호동 6품(7위)
임용제 백두장사 김정필 1품 준우승 나머지 순위 이민우 황대웅 박광덕 김칠규 강호동 남동하
강호동 6품(7위)기록하며 사실상 은퇴경기 대회

7.2. 천하장사


  • 16회 천하 및 40회 백두장사대회 (1989-03-03~89-03-12 대전충무체육관)
순위: 이만기(우승) 고경철 이종식 심인섭 이승삼 손상주 장지영 강호동
  • 17회 천하 및 45회 백두장사대회 (1989-09-09~89-09-12 잠실학생체육관)
순위: 김칠규(우승) 이봉걸 강호동 곽연근 임용제 황대웅 이만기 이민우
  • 18회 천하 및 47회 백두장사대회 (1990-03-09~90-03-12 성남실내체육관)
순위: 강호동(우승) 유영대 이만기 김칠규 이승삼 문위경 이종식 문성식
  • 19회 천하 및 50회 백두장사대회 (1990-07-14~90-07-17 춘천실내체육관)
순위: 강호동(우승) 남동하 김칠규 임종구 심인섭 황대웅 임용제 임광섭
  • 20회 천하 및 52회 백두장사대회 (1990-10-26~90-10-29 인천실내체육관)
순위: 강호동(우승) 황대웅 남동하 임종구 박태일 이민우 임광섭 김칠규
  • 21회 천하 및 54회 백두장사대회 (1991-03-22~91-03-25 부산구덕체육관)
순위: 황대웅(우승) 임종구 강호동 박태일 김성우 강순태 고경철 이기수
  • 22회 천하 및 54회 백두장사대회 (1991-06-21~91-06-24 이리원광대체육관)
순위 :황대웅(우승) 박광덕 김칠규 임종구 남동하 오시양 서찬호 강광훈
  • 23회 천하 및 59회 백두장사대회 (1991-09-21~91-09-24 대구실내체육관)
순위: 강호동(우승) 남동하 김칠규 황대웅 지현무 임광섭 임종구 서찬호
  • 24회 천하 및 62회 백두장사대회 (1992-03-20~92-03-23 장충체육관)
순위: 강호동(우승) 박광덕 임용제 황대웅 김칠규 이기수 강기승 지현무

8. 여담


선수시절 이미지 및 움짤 보기(데이터 광탈 주의)
유명한 얘기지만 현역시절 온갖 괴상한 표정과 포즈와 함께 괴성을 지르고 윙크를 하고 경기 전에 덤블링을 하는 등 쇼맨쉽으로 유명했다. 훗날 1박 2일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이는 내로라하는 선배들에게 기죽지 않기 위한 퍼포먼스였다고 한다.

"시합은 똑같은 위치 아닙니까? 선수 대 선수로서... 선배 대 후배로 시합하는 게 아니고 선수 대 선수로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선후배를 잘 안 따집니다. 시합 때는." - 인터뷰 중에서

그러나 이런 성격이 같은 마산 출신의 대선배이자 씨름황제 이만기를 상대로도 드러났기 때문에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세월이 흘러 1박 2일 등을 통해 이만기와 강호동이 증언한 내용들을 간추려 보자면, 이만기와 강호동은 당대의 씨름 명사 김학용의 집에서 같이 하숙하며 동문수학했다고 한다. 즉, 무협식으로 말하자면 사형과 사제와도 같은 사이였던 것이다. 그래서 더더욱 강호동의 행동이 대중들의 눈엔 지나치게 보였던 감도 있다.
결국 이만기가 강호동의 지나친 쇼맨쉽에 짜증을 내는 일까지 생겼다.

당시 강호동은 기습공격[15]으로 이만기를 이기고 난 뒤였는데, 이만기가 슬슬 짜증이 났던지 다음 판 시작 직전에 깝죽거리지 말라고 일갈하자 어리벙벙해진 강호동이 "예...?"라고 대답하고 정색하며[16] 자리에서 일어나 심판에게 "이 새끼, 저 새끼 해도 됩니까?"라고 항의했다. 이후 강호동이 그 다음판도 이기고 난 뒤 평소처럼 환호하려다가 문득 팔을 바로 내리고 이만기에게 공손하게 악수를 청했는데, 그걸 뿌리친다. 아무리 스포츠 경기였고 강호동이 이만기에게 이긴 적도 있었지만 당시가 현재보다 더 서열문화에 엄격했던 시대였음을 상기해보면 악수를 거부한 이만기도 선배로서 보기 좋은 모습을 보였다고 할 수 없다.[17] 물론 강호동의 도발 행동이 원인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두 선수 모두 불같은 승부욕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생긴 해프닝이고, 은퇴 이후 두 사람 모두 성격이 유해지면서 지금은 서로에 대한 존중을[18] 표하는 상태다. 하지만 무릎팍도사에서 이만기가 강호동에게 당한 첫 패배를 기억이 안 난다고 하고, 강호동은 장난스럽지만 은근히 이 점을 강조하는 등 아직도 조금은 신경전을 벌인다. 다만 무릎팍도사는 원래부터 대사가 있는 것이라...

특히 1박 2일에서 두 선수가 20년 만에 벌인 재대결은 현역 선수를 연상케 할 만큼 혈투였던데다 막상 승부가 시작되자 그 강호동이 장난스러운 말을 단 한마디도 하지 않을 정도로 진지하게 시합에 임했다.
강호동이 이만기를 잘 잡아서 한창 명성을 날렸다면 역으로 약한 상대는 대표적으로 이봉걸이 있었다. 2m가 넘는 거구에 힘과 기술이 갖춘 이봉걸은 이만기를 대처하는 데 주력했던[19] 강호동에게는 완전히 다른 스타일의 난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봉걸은 강호동이 데뷔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연이은 부상으로 은퇴했기 때문에 씨름계가 정말로 기대했을 '이만기 > 이봉걸> 강호동 > 이만기'라는 형태의 물고 물리는 형태의 구도는 얼마 지속되지 못했다.
상대전적
강호동 vs 이만기 4승 2패
강호동 vs 이봉걸 0승 4패
이만기 vs 이봉걸 21승 10패
백두급 평균체중이 120kg대로 상향 조정된 이후에도 명백히 테크니션이었던 강호동은 박광덕, 김정필등 140kg 이상 중량급 선수들이 등장하는 그 시기에 씨름 외적인 이유로 조기은퇴한다. 이 때문에 강호동이 은퇴하지 않고 박광덕, 김정필, 이후 백승일, 신봉민, 이태현, 김경수 등 140kg을 넘는 장사들이 줄줄이 등장했던 92년 이후에 얼마나 롱런할 수 있었을지도 떡밥거리 중 하나이다.[20]
결과적으로 이만기, 강호동 이후 강호동을 이을 씨름스타의 명맥이 끊겼고, 점점 사양세와 내분으로 멸망한 씨름계에 강호동의 빈자리가 얼마나 컸는지는 씨름계를 지켰던 이만기를 포함해서 수많은 씨름인들이 안타까워하는 일이다.
( 힘만 믿는 씨름 이제 그만" 1991.06.01. 동아일보 15면 스포츠 기사(뉴스)“힘만 믿는 씨름 이제 그만” 멋진기술 사라져 관중 외면 초창기 30%수준 전문가들 샅바규정등 경기방식 개선촉구 한때 절정의 인기를 누렸던 씨름이 사양길에 접어들고 있다. 출범초기만 해도 체육관이터져나갈...) 91년 당시에도 씨름의 인기는 하락세였다.
1박 2일 외연도 편에서는 김C와 술자리 콩트를 하다가 선수 시절의 경험담을 말했는데, 샅바를 매지 않고 경기장에 들어간 적도 있었고, 천하장사가 걸린 마지막 한 판에서 갑자기 배탈이 나는 바람에 경기를 포기한 적도 있다고 한다. 27분 20초부터.[21] 유재석은 강호동이 이런 일화를 쿵쿵따에서 얘기하자 경상도 어투로 "쌌으면 이깄을텐데~"라고 말해 강호동의 부아를 돋궜다(...).
사실 씨름을 하고 싶어서 한 것은 아니고 그냥 부모님이 하래서 했다고 한다. 사실 씨름보다 먼저 태권도를 하기도 했다고. 그래서 황정민이 무릎팍도사에 출연했을 때 "꿈이란 게 없는 건 말도 안 된다. 꿈을 만들어서라도 가져야 한다."라고 하자 강호동은 "난 학생이었을 때 꿈이 없었다"며 아리송해하는 모습을 보였다.[22][23]
학생이었을 때 받았던 훈련이 어지간히도 힘들었는지 이에 관해 얘기할 때면 항상 힘들었다고 토로했다. 그냥 학교에 가서 하루도 안 빠지고 운동하고 먹고, 잠깐 쉬었다 또 훈련(...)하고, 집에 가서는 그냥 잠들었다고 한다.[24]
해피투게더에서 밝힌 일화인데, 한번은 훈련이 너무 힘들고 지긋지긋해서 씨름부가 단체로 가출을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어찌어찌 갖고 있던 돈으로 민박집에 머물러 있었다고. 민박집 주변이 그냥 조용하다는 자체가 너무 좋았고, 괴로운 운동을 안 하니 지나가는 사람들만 봐도 웃음이 실실 나왔다고...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런 일상적인 일도 행복하다고 여겼을지는 상상에 맡긴다...[25]
후일담을 마저 얘기하자면 결국 감독님한테 도망가 있는 곳이 발각되어 잡혔는데 강호동만 홀로 도망을 쳤다는데 도망쳐 숨어들어간 곳이 민박집의 연탄창고였다... 당연히 출구가 있을 리 없고 임기응변으로 옷을 전부 벗고 연탄을 자신의 몸에 발라(...) 보호색 작전으로 위기를 모면하려 했지만 이걸 감독님께서 바보가 아닌 이상 모를 리가 없었고, 결국 다 벗은 채로 바깥에 끌려나왔다고 한다... 참고로 그렇게 벌거벗고 나왔을 때 같은 씨름부원뿐만 아니라 자신의 여자친구까지 있었다고 한다...
[1] MBC '기분 좋은 날-연예플러스'에서 찾아가서 생활 기록부를 보여주며 언급된 적도 있고# 달빛프린스 방송에서도 시청자 퀴즈를 위해 나온 초등학생이 마산 산호초등학교를 다닌다고 하자 직접 자신의 후배라고 말하며 반긴 적이 있다. # [2] 이전 버전에는 마산 교방초등학교로 되어 있었다. 아마 해당 학교가 1980년도부터 창설된 씨름부로 유명해서 오해한 듯한데, 정작 강호동은 아버지의 권유로 중2 때부터 씨름을 시작했다고 한다.[3] 배우 황정민과 같은 반에 있었다고 한다. 황정민은 중학교 졸업 후 서울로 유학했다. 지금은 서로 존댓말을 쓴다고 한다.[4] 이때 기습당하면서 충격이 있었는지 강호동은 코피를 살짝 흘렸고, 그렇게 코피를 흘리면서 패배를 인정할수 없다는 듯 드러누워 땡깡부리는 등 나름 임팩트 있는 데뷔전을 남겼다. 이후 2번째 경에서도 패배하여 2:0으로 광탈했다. 이 영상은 뒤늦게 아는 형님에도 공개되어 큰 웃음을 주었다.[5] 밑에 나오는 이만기가 짜증을 내는 동영상에 나온다.[6] 2007년 방영된 1박 2일에서 자신이 독자적으로 개발한 기술이라고 밝혔다. 당시 해설위원도 기술명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참 멋진 기술이었다는 표현만 사용했다.[7] 후술하게 될 이만기와 강호동 사이의 거친 신경전이 이 경기 때 벌어졌다.[8] 이 경기에서 89년 강호동의 첫 데뷔전 때 있었던 일이 재현되는데, 이번에는 샅바를 놓친 사이 방심하고 있던 이만기를 강호동이 기습해서 쓰러뜨리면서 1차전을 가져갔었다.[9] 20살(만19세)에 천하장사로 등극하면서 최연소 천하장사 타이틀을 썼다, 종전기록은 이만기가 기록했던 21살.[10] 럭키증권씨름단 소속의 160kg의 초 중량급 치고는 씨름계에서도 알아주던 실력파 선수였고, 큰키에 나름 있는 덩치를 잘 활용한 덕에 천하장사 대회 결승에만 5번이나 오르며 위엄을 뽐냈지만 5번 모두 준우승에만 그쳐 '''만년 우승후보'''라는 비운의 꼬리표를 가진 선수였다. 별명은 모래판의 람바다였고, 이렇게 부르게 된 이유는 항상 세레모니로 람바다 춤을 춰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이후 MBC의 강호동에 대항마격으로 KBS에서 영입해 갔지만 성공적으로 코미디언에 안착한 강호동과는 다르게 코미디 쪽에서는 부진을 겪었고, 이후 방송인으로 살고 있다.[11] 하지만 후에 방영된 모 방송사의 씨름 다큐멘터리에서는 씨름에 대한 부담감으로 인한 회피가 크게 부각되어 나타난 것으로 알려졌고, 선수로 보낼 당시에도 나서기 싫다는 식의 반응까지 선보여서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줬다.[12] 참고로 이 사실은 대회에서 활약하였던 전통 음악 단원 출신 여성분이 직접 말한 것으로 활동 당시 강호동과도 매우 친분이 있었다고 했다.[13] 1992년도 최저임금은 925원이었다.[14] 등장과 함께 강호동의 최연소 천하장사 기록을 경신하며 센세이션을 일으켰지만 140kg의 체중으로 강호동 스타일의 씨름을 하다가 무릎이 망가지면서 선수생활을 일찍 마감했다. 그리고 은퇴이후엔 트로트 가수로 활동[15] 상술했듯이 강호동도 데뷔전에서 3개월 만에 이적해 같은 팀 선배가 된 일양약품 이종식 장사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패배했던 경험이 있다. 자니 윤 쇼에 출연해서 그 때의 패배가 자기에게 약이 되었다고 밝혔다.[16] 강호동이 진심으로 화날 때 나오는 습관이 혀를 낼름거리는 것인데, 이 때에도 똑같은 습관이 나왔다. 다만, 다른 때와는 다르게 혀를 낼름거린 후 동공이 흔들리고 당혹스러운 기색이 역력한 것을 보면 화는 나지만 대선배인만 큼 어찌할 수도 없어 당황한 것으로 보인다. 후술되듯 결승행이 결정된 이후 평상시 환호도 하지 않고 바로 악수부터 청한 것을 보면 본인도 아차싶긴 한 모양이다.[17] 이만기로서는 평상시 안 하던 욕설을 할 만큼 크게 동요된 것으로 보이는데, 까마득한, 원래 알던 후배한테 희한한 방식으로 진 것도 모자라 그 후배가 면전에서 관중들에게 고함을 지르고 있으니 짜증이 난 모양이다. 이 때문인지 두번째 판에서 이만기가 시작 직후 곧바로 무리하게 공격을 하려다가 샅바를 놓치고 바로 역습당해 순식간에 저버리는 의외의 모습이 나온다. 첫번째 판에서 치열하게 수싸움이 일어난 것과 정반대로 이만기답지 않게 체격과 힘에서 앞서는 강호동을 상대로 성급하고 무리하게 공격하다가 허무하게 진 것이다. 후배의 행동에 모욕감을 느껴 냉정을 잃어버린 듯 보인다.[18] 특히 강호동은 가장 존경하는 선배라고 말한다.[19] 물론 강호동이 이만기만 잘 잡았던 것은 아니다. 원래 한라급이었던 이만기는 커리어 내내 자신보다 큰 선수들을 상대하는데 익숙했기에 자신보다 더 큰 이봉걸도 잘 상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강호동은 보기 드물게 당대 최고의 피지컬을 지닌 테크니션이었기 때문에 기술로 압도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둘의 경기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강호동은 이만기에 버금가는 스피드와 기술로 이만기가 거는 기술마다 바로 받아칠 수 있는 선수였는데, 강호동이 더 크고 힘이 셌기 때문에 상성이 좋지 않았던 것이다. 한편, 강호동은 기술도 뛰어나지만 피지컬도 이용하던 선수였는데, 이봉걸의 경우 본인의 피지컬이 안 통하는 상대니 고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봉걸이 무식하게 크고 힘만 센 선수였다면 몰라도 이봉걸 역시 뛰어난 기량을 가진 선수였다.[20] 박광덕은 부상으로 빨리 사그라들었고, 김정필이 짧게 93년을 지배했지만 이해 데뷔한 이태현, 백승일, 신봉민, 김경수 등 쟁쟁한 백두급 장사들로 인해 김정필의 시대는 오래가지 않았다. 강호동이 버티고 있었다면 93년 7월 최연소 천하장사에 등극한 백승일을 필두로한 93세대들과 강력한 경쟁구도를 형성했을 것이고, 90~92년 만큼 강호동이 압도적이긴 어려웠겠지만 신예들과의 경쟁으로 씨름의 관심도 그때보단 훨씬 높았을 것이다.[21] 다만, 이는 프로 데뷔 이후의 천하장사 대회는 아니거나, 준결승이나 8강 등 다른 토너먼트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강호동은 천하장사 대회 결승전에서 한 번도 진 적이 없다. 즉, 결승만 올라가면 무패였다는 것이다.[22] 언니네이발관 이석원은 이런 강호동의 말에 극히 공감했다고 한다. 자신도 어렸을 때 꿈이 없었다고 한다.[23] 사실 이 부분은 예능계의 대부인 이경규와도 어느 정도 맞닿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경규는 코미디언으로서의 길을 걷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예능은 자신의 직업이고, 영화야말로 자신의 꿈이라고 생각한다고 한다.[24] 늘 예능에 나와서 '''하루도 안빠지고'''를 강조한다. 이때 유재석이 그럼 일요일도 안쉬냐고 묻자 아 일요일은 쉬어요... 라고 맥빠지는 개그를 시전하기도...[25] 방송에서 밝히길 한 번은 아령으로 트레이닝을 하다가 손을 놔버리고 발등에 떨궈 버릴까라는 생각까지 했다고 한다. 순간 아프겠지만 힘든 트레이닝은 안 해도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고 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