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산용마고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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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산호동에 위치한 일반계 고등학교며 2001년 개명 전 학교 이름은 마산상업고등학교다.
2. 역사
옛 마산 지역에서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학교이다. 1922년 마산고등보통학교로 설립되었으며, 마산부를 포함한 중부 경남지역에서는 한동안 유일한 공립 중등교육기관 역할을 담당했다. 마산고보 설립 이전에는 사설 교육기관이었던 창신학교, 호신학교(현재 폐교), 성지강습회, 일본인들이 다니던 마산심상소학교 중등과 등이 있었고 여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기관으로는 마산고등여학교가 있긴 했지만, 당시 마산고녀는 고등보통학교로 인가받지 못했다. 따라서 마산고보의 설립은 지역에 공립 중등교육의 초석을 놓는 것과 같은 역할이었다.
그러나 마산고보 또한 고등'보통'학교 학력, 즉 교과과정은 중등교육이지만 졸업학력은 현재의 초등학교(...)에 준하는 수준으로 취급해 주고 있었다. 최소한 중고등학교 학력 인정은 해 주어야 하는데, 일제 당국은 고등보통학교라는 괴상한 학제로 이를 제도적으로 막고 있었던 것. 이 때문에 마산지역의 중등학생들은 조선인뿐만 아니라 일본인조차도 구제고등학교와 제국대학, 심지어 일본 내 사립대학으로 진학할 수 없는 실정이었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식민지 조선에서는 자체적으로 대학을 설립하고자 하는 민립대학 설립 운동이 일어나게 되고, 이에 더불어 마산 지역에서는 대학은 몰라도 중학교 학력 정도는 일본과 동일하게 인정받을 수 있게 하려는 구제중학교 설립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그리하여 이 운동의 결과로 설립된 학교가 5년제 마산중학이다. 자세한 마산 지역의 일제강점기 중등교육 역사 및 그 당시 교육체제에 관하여는 마산고등학교 문서와 제국대학, 예과생 문서를 같이 참조하기 바라며, 이후 마산지역의 남자고등학교 학맥은 마산상고와 마산고의 2대 공립+기타 사립으로 나뉘어졌다.
해방 후 마산고보는 전국적 학제개편을 통해 마산동중학교와 마산상업고등학교로 분리되었고, 특히 마산상고는 마산지역의 상업 번영과 맞물려 '똑똑한 고학생들이 생업을 위해 많이 진학한다'는 이미지가 있었다. 아래 항목에도 있듯 김주열 열사 또한 전라북도 남원에서 마산까지 유학온 학생이었다. 마산지역 내에는 마산상고를 나온 은행 지점 간부급 직원이나 지역 중견기업 임원 등을 90년대까지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경제성장과 1988 서울 올림픽 등을 치루며 실업계 고등학교 기피현상[1] 이 생기면서, 마산상고 동문회는 상고의 인문계 전환을 위한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또한 이 때를 같이하여 가뜩이나 부족했던 마산지역 인문계 고등학교 정원 확충을 위한 지역여론이 규합되었고, 마산상고는 교명을 "마산용마고등학교"로 바꾸며 인문계로 전환하게 되었다.
2.1. 연혁
3. 상징
4. 특징
'''운동장이 어마어마하게 넓다.''' 물론 타 지역까지 합하면 아닐 수도 있지만, 일단 옛 마산시 권역 고등학교 중에서는 독보적인 부지 넓이를 자랑한다. 위성으로 보면 마산고등학교와 비슷하긴 한데, 고등학교만 놓고 보면 용마고가 약간 더 넓다.[3]
교기(스포츠)가 강력한 학교로도 지역 내에서 유명하다. 대표적으로 이만기와 강호동을 배출한 씨름부, 그리고 일제강점기 당시부터 굴곡 없이 지역 강호였던 마산용마고등학교 야구부가 있다.
5. 여담
- 3.15 부정선거 시위에 참여하여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된 인물인 김주열 학생, 열사의 출신학교이다. 1960년 3월 15일 당일 이승만의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에 참여했다가 행방불명되었다. 그리고 27일 후인 4월 11일에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눈에 최루탄이 박혀 사망한 그의 유해가 발견되어 전국적인 충격을 안겼으며, 곧 1주일 후에 서울을 비롯한 전국에서 국민들이 나서는 4.19 혁명으로 이어진다. 1995년 4월 11일 마산상업고등학교에서는 김주열에게 명예 졸업장을 추서했고, 그 졸업장은 김주열 열사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링크
6. 출신 인물
괄호 안은 입학년도
- 강호동(1986)[4]
- 공정식
- 김경회
- 김윤식(1936)
- 김인득
- 김주열(1960)
- 김진백
- 나균안
- 배덕광
- 배한성
- 백찬기
- 우병규
- 이만기(1979)
- 이원수(아동문학가)
- 장원삼
- 정홍일(1992)
- 정훈
- 조정제
- 주선회
- 허민(1929)
- 황낙주
7. 관련 문서
[1] 이 현상은 이미 1980년대 중반부터 뉴스에 나올 정도로 사회문제화되고 있었다. "실업계=학력이 떨어짐"이란 편견이 사회에 박힌 것도 이 즈음부터다.[2] 인문계로 전환하며 추가된 의미. 원래는 장식용 도형이었던 듯하다.[3] 이렇게 쓰는 이유는 마산고의 경우 마산중, 경남과학관, 마산고로 부지가 3개로 쪼개졌기 때문이다. 두 학교 모두 일제시대에 터를 닦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해방 후 개교한 학교들은 운동장이 이 두 학교보단 현저히 좁으며, 특히 마산서중학교나 마산중앙고등학교같은 곳은 산비탈에 축대 쌓고 억지로 부지를 만들어낸 경우고 무학여자중/고등학교는 아예 2개 학교가 같은 운동장을 나눠 쓴다.[4] 1박 2일 방송에서 "자! 용마고등학교 63회입니다!"라고 본인이 밝힌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