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걸
1. 소개
대한민국의 전직 씨름 선수로, 천하장사 2회, 백두장사 4회 우승하며, 80년대 이만기, 이준희와 함께 '모래판의 3이(李)'로 빅3를 형성했었다.
2. 선수 경력
영신중학교에 재학 중이던 1970년에 씨름에 입문하였다. 당대 씨름판은 물론이고, 체육계를 통털어도 찾아보기 힘든 초장신의 선수로 가는 곳마다 화제가 되었으며, 1978년 대통령기 전국 씨름대회에서 통산 9회 우승을 노리던 김성률을 꺾고 우승하여 화제가 되었다. 큰 키를 탐낸 농구계의 권유에 방열 감독 밑에서 잠시 농구로 외도하기도 했지만 곧 그만두고 씨름판에 복귀한다. 프로 씨름 출범 이후 럭키금성 황소 씨름단 소속으로 활동하였다.
프로 초창기에는 매우 큰 키와 엄청난 힘을 제대로 살리지 못해 단순한 밀어치기나 들배지기 공격이 실패하면 허무하게 주저앉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작은 선수들의 빠른 기습에도 취약하여[2] 관중들에게 좋은 볼거리가 되는 등, 최정상급의 위치와는 거리가 멀었다. 다른 선수들보다 머리 하나는 큰 이봉걸이 모래판에 등장하면 그 자체로 화제거리가 되곤 했는데, 당대 씨름판에서 두번째로 큰 선수가 189cm의 이준희였으니, 누구와 싸우건 다윗과 골리앗의 구도가 되어 이봉걸에겐 큰 부담이 되었다. 또한 외모와 달리 이봉걸의 성품이 매우 순박하고 선해서 투쟁심과는 거리가 멀었던 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코칭스태프와 함께 큰 신체를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씨름에 매진한 결과, 키만 큰 멀대 같은 이미지는 사라지고 비로소 인간 기중기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86년부터 차츰 이봉걸이 달라졌다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86년 백두장사, 천하장사 대회 결승에서 연달아 절대강자로 군림하던 황제 이만기를 꺾으며 첫 우승을 차지한다. 이 시기부터 이만기를 위협할 수 있는 강자로 이준희와 함께 빅3의 위치에 오른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힘을 활용하게 되며 단조롭던 기술에 힘과 체격을 더한 이봉걸의 씨름에 위협을 느낀 이만기는, 이때부터 105kg~108kg 이던 체격을 112kg~115kg 수준으로 벌크업하는 노력을 기울이며 이봉걸에 대항하게 되었다. 이렇게 이봉걸의 기량이 완성되며 이만기, 이준희와 함께 빅3 구도를 만든 86~87년 경을 씨름의 최고 황금 시대로 볼 수 있다. 당시 이만기 VS 이봉걸의 대결은 장안의 화제였으며, 전통적인 다윗과 골리앗의 이미지와 함께, 절대강자 이만기에 대항하는 늦깎이 거인 이봉걸에게 성원을 보내는 시선도 대단했었다. 이봉걸과 이만기의 결승전이라도 벌어지면, 9시 정규 방송을 뒤로 미루고 중계를 계속 하는 것은 물론, 심지어 9시 뉴스 중에도 진행을 멈추고 속보로 결승 실황을 보도할 만큼 최고의 히트 상품이었다. 실제로 이만기 VS 이봉걸의 천하장사 결승전은 역대 씨름 중계 최고 기록 68%의 시청률을 기록하기도 했다.[3]
그러나 워낙 거구에다 이미 30줄에 접어든터라 짧은 전성기를 보낸 후 부상과 복귀를 반복했다. 결국 1990년 설날 천하장사대회를 목전에 두고 다리의 인대가 파열되어 더 이상 선수 생활을 지속할 수 없게 되어 은퇴하였다.
강호동이 씨름선수 시절 유난히 약했던 상대가 이봉걸인데, 공식적으로 총 4번 붙어서 모두 이봉걸이 이겼다.
3. 은퇴 이후
1992년, 영화 돌아온 우뢰매에 출연하였다. 2006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열린우리당 후보로 대전광역시의회 의원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 영양군 출신이라는 설도 있다.[2] 고경철이 금강급에서 활동하던 시절, 이봉걸은 천하장사 대회 5, 6위전에서 고작 85kg에 불과한 고경철의 안다리 공격에 두번이나 힘도 못쓰고 주저앉아 관중들에게 놀림거리가 되기도 했다.[3] 씨름 빅3가 붙는 경기는 프로야구 코리안 시리즈를 능가하는 전국구 이벤트였으며, 86년 월드컵 축구예선 한일전에 필적할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