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오르크 칸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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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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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에 활동한 독일계 러시아 출신의 독일 수학자. 집합론의 창시자로 유명하며 무한이라는 개념에 관한 연구의 선구자로도 잘 알려져 있다.
칸토어는 1845년 3월 3일 (율리우스력 2월 19일)에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살던 독일인 부모 밑에서 6형제 중 첫째로 태어났다. 태어난 후 독일로 돌아온 칸토어는 레오폴트 크로네커(Leopold Kronecker) 같은 수학자에게 배우며 수학 연구에 전념하게 되었고 결국 1867년 베를린대에서 정수론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는다. 또한 크로네커 등의 도움으로 독일 할레 대학교에서 교편을 잡게 된다. 1874년에 발리 구트만과 결혼하여 슬하에 6명의 자녀를 두게 된다.
곧 그의 흥미는 집합과 무한에 관한 내용으로 돌아갔는데, 특히 무한에 관한 급진적(?) 주장 때문에 여러 수학자들에게 비판을 받은 바 있다. 철저한 유한주의를 고수하던 지도교수 크로네커는 그를 고깝게 여겼는지 칸토어가 베를린대에서 교수직을 얻는 것을 막았다고 하며, 이외에도 앙리 푸앵카레 등 직관주의자들은 칸토어의 무한집합론을 '''수학적 질병'''이라며 강하게 비판하였다.
이러한 배경 탓인지 칸토어가 앓던 정신질환은 나날이 심해졌다. 할레 대학에서 교수로 있던 동안 칸토어는 우울증 비슷한 증세를 보이며 수년 주기로 입원, 복귀를 반복했는데, 이후 각종 이상행동을 하기에 이른다. 특히 셰익스피어의 정체가 사실은 프랜시스 베이컨이었다는 설에 집착하여 강의에서 이런 소리만 주구장창 늘어놓는다든지, 중상모략을 당하고 있다며 대학에 이상한 편지를 보낸다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레 대학은 대인배스럽게 칸토어가 교수직을 유지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었고, 칸토어는 이런 와중에도 대각선 논법을 발표하고 집합론을 정립하는 등 여러 업적을 이루어낼 수 있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칸토어는 궁핍과 영양 부족에 시달렸고, 1918년 1월 6일 정신병원에서 사망했다. 아내에게 마지막으로 보낸 편지는 병원에서 내보내달라는 내용이었다.
칸토어의 주요 업적으로는 수학에 집합 개념을 도입한 것과 동시대 수학자 데데킨트와 더불어 실수 개념의 엄밀한 정의, 그리고 당대 수학자들이 기피하던 무한에 대한 적극적인 탐구로 볼 수 있다.
칸토어는 일대일 대응의 개념을 통해 집합의 크기. 즉 원소의 개수를 정의했고, 이에 따라 무한집합도 그 크기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보였다. 실제로 그는 자연수와 짝수, 유리수는 그 개수가 같지만, 실수는 자연수보다 훨씬 많다는 것을 증명했다. 이 증명에서 그는 유명한 대각선 논법을 개발했다.
말년에 그는 연속체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그 뒤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 괴델과 코언에 의해 연속체 가설의 독립성이 증명되었다.
젊은 시절의 모습.
'''수학의 본질은 그 자유로움에 있다'''[2]
''Das Wesen der Mathematik liegt in ihrer Freihe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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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세기에 활동한 독일계 러시아 출신의 독일 수학자. 집합론의 창시자로 유명하며 무한이라는 개념에 관한 연구의 선구자로도 잘 알려져 있다.
2. 생애
칸토어는 1845년 3월 3일 (율리우스력 2월 19일)에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살던 독일인 부모 밑에서 6형제 중 첫째로 태어났다. 태어난 후 독일로 돌아온 칸토어는 레오폴트 크로네커(Leopold Kronecker) 같은 수학자에게 배우며 수학 연구에 전념하게 되었고 결국 1867년 베를린대에서 정수론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는다. 또한 크로네커 등의 도움으로 독일 할레 대학교에서 교편을 잡게 된다. 1874년에 발리 구트만과 결혼하여 슬하에 6명의 자녀를 두게 된다.
곧 그의 흥미는 집합과 무한에 관한 내용으로 돌아갔는데, 특히 무한에 관한 급진적(?) 주장 때문에 여러 수학자들에게 비판을 받은 바 있다. 철저한 유한주의를 고수하던 지도교수 크로네커는 그를 고깝게 여겼는지 칸토어가 베를린대에서 교수직을 얻는 것을 막았다고 하며, 이외에도 앙리 푸앵카레 등 직관주의자들은 칸토어의 무한집합론을 '''수학적 질병'''이라며 강하게 비판하였다.
이러한 배경 탓인지 칸토어가 앓던 정신질환은 나날이 심해졌다. 할레 대학에서 교수로 있던 동안 칸토어는 우울증 비슷한 증세를 보이며 수년 주기로 입원, 복귀를 반복했는데, 이후 각종 이상행동을 하기에 이른다. 특히 셰익스피어의 정체가 사실은 프랜시스 베이컨이었다는 설에 집착하여 강의에서 이런 소리만 주구장창 늘어놓는다든지, 중상모략을 당하고 있다며 대학에 이상한 편지를 보낸다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레 대학은 대인배스럽게 칸토어가 교수직을 유지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었고, 칸토어는 이런 와중에도 대각선 논법을 발표하고 집합론을 정립하는 등 여러 업적을 이루어낼 수 있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칸토어는 궁핍과 영양 부족에 시달렸고, 1918년 1월 6일 정신병원에서 사망했다. 아내에게 마지막으로 보낸 편지는 병원에서 내보내달라는 내용이었다.
3. 주요 업적
칸토어의 주요 업적으로는 수학에 집합 개념을 도입한 것과 동시대 수학자 데데킨트와 더불어 실수 개념의 엄밀한 정의, 그리고 당대 수학자들이 기피하던 무한에 대한 적극적인 탐구로 볼 수 있다.
칸토어는 일대일 대응의 개념을 통해 집합의 크기. 즉 원소의 개수를 정의했고, 이에 따라 무한집합도 그 크기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보였다. 실제로 그는 자연수와 짝수, 유리수는 그 개수가 같지만, 실수는 자연수보다 훨씬 많다는 것을 증명했다. 이 증명에서 그는 유명한 대각선 논법을 개발했다.
말년에 그는 연속체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그 뒤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 괴델과 코언에 의해 연속체 가설의 독립성이 증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