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르트 괴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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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출신 미국의 수학자, 철학자. 완전성 정리와 불완전성 정리를 증명하여 철학과 수학에 대한 새로운 시야를 제공했다. 괴델은 논리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알프레드 타르스키, 고틀로프 프레게와 함께 역사상 가장 중요한 논리학자로 지목되며 20세기의 수학 및 철학 사고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또한 게오르그 칸토어 이래 62년간 난제였던 연속체 가설과 선택공리가 반증될 수 없음을 증명하였고 상대성 이론에서의 괴델 우주를 고안하였다. 그리고 그는 고전 논리, 직관 논리, 양상 논리의 관계를 명확히 해서 증명 이론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괴델은 기계식 컴퓨터의 발달에도 크게 기여했는데, 이는 불완전성 정리 증명 시 사용된 방법론에서 최초로 '알고리즘의 집합' 개념을 정의하여 사용했던 것에 기인한다. 그 몇 년 후 발표된 앨런 튜링의 튜링 머신은 사실 괴델의 저 알고리즘 집합을 바꾸어 표현한 것이다. 튜링은 저 튜링 머신을 이용하여 불완전성 정리를 증명해 보이기도 하였다.
괴델에 관한 주요한 오해와 달리,괴델은 불완전성 정리를 '''수학이 실재한다는 깊은 플라톤주의적 신념을 가지고 증명하였다.''' 그는 평생 수학의 실재론을 주장했고, 수학을 이데아의 위치로 올려놓으려고 했었다. '증명 불가능하지만 참'인 명제는 괴델에게 있어서 수학적 이데아의 존재를 암시하는 내용이었다. 당시 수학자들의 주류 이념이었던 빈 학파나 형식주의가 주장하던 수학의 토대의 완성은 불확정성 원리를 통해 그가 무너뜨렸지만, 수학의 포스트모던성이나 수학의 비본질성 같은 걸 주장하는 의도가 아니라 오히려 "수학은 형식이나 논리 같은 '허상'으로 어설프게 표현되는 게 아니라 객관적이고 실재적인 '실체'다!"라고 주장하려고 했다.
2. 생애
2.1. 유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브르노에서 태어났으며 모든 교육을 독일계 학교에서 받았다. 괴델의 꼼꼼한 성격때문에 초등학교 시절부터의 자료들이 오늘날까지도 남아있는데, 전 과목에서 최고점수를 기록했으며 메모는 매우 많았다. 괴델은 초등학교 때부터 이마누엘 칸트와 같은 고전 철학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했고 언어에도 뛰어난 소질을 보이기 시작했다. 8살에 쿠르트 괴델은 류마티스 열병을 앓았다. 이 질병은 괴델에게 아무런 영구적인 신체손상을 입히지 않았지만 백과사전에서 류마티스 열병 환자가 심장과 관련된 합병증을 앓을수도 있다는 글을 읽은 뒤 자신의 심장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 괴델은 5세때부터 불안 신경증이 있었다.[3] 그의 형인 루돌프는 그가 어렸을때조차 정신적으로 불안정했다고 증언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1차대전 이후 분열되고 브르노에 살던 괴델 가족은 체코의 국적이 되었다. 브르노에서 남쪽으로 68마일 밖에 떨어지지 않은 오스트리아의 빈에는 훌륭한 일류 대학들이 많았고 괴델 형제는 빈에 이끌리기 시작했다. 괴델의 형 루돌프는 의과대학에 진학했고 괴델은 빈 대학교에 진학했다. 입학전에 이미 어학, 철학에 대해 많은 지식을 쌓아놓았고 특히 수학의 경우 학부 수준을 이미 끝낸 상태였다. 괴델은 물리학과로 진학했지만 정수론에 관한 강의를 듣다가 정수 사이에서 반복되는 형식의 아름다움을 보고 물리학 대신 수학에 종사하기로 맹세한다.
2.2. 빈 학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분열되며 생긴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은 1938년 나치 독일에 합병되기 전까지 20년밖에 지속되지 않았다. 이때는 사회민주당이 집권한 붉은 빈과 극도로 보수적인 지방 정부 사이에서 일어난 내전 국면으로 나라가 매우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빈 학파가 성장한 때는 이런 혼란스러운 분위기 속에서였다.
화이트헤드와 버트런드 러셀은 《수학 원리》라는 저서에서 수학의 정리들에 대한 증명을 기호들의 형식적 조작으로 나타낼 수 있는 인공언어을 제시하였다. 빈 학파는 마흐와 헬름홀츠의 경험-실증주의를 잇는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이 1924년에 만든 것으로, 이 학파는 전통적인 형이상학을 혐오하며 수학뿐만이 아닌 경험주의 과학도 포함하게 될, 화이트헤드-러셀의 작업과 같은 기호 체계의 발전과 연구를 철학의 주요한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믿었다.
버트런드 러셀이 수학 기초론에 대한 생각을 수학원리에서 구체화 할 때 그의 제자인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 논고라는 자신의 생각을 내보였다. 이 두 철학자의 생각은 빈 서클의 모임에서 진행된 토론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괴델은 자신의 스승인 한스 한의 권유로 1926년에 이 모임에 나가기 시작했지만 모임에서의 내용들 대부분은 공감하지 않았다.
그렇다해도, 모든 일반 수학은 형식 논리 체계로 요약될 수 있다는 러셀의 논증과 언어 내부에서 언어에 대해 말하는 비트겐슈타인의 강조, 이 두가지의 혼합은 괴델의 연구방향에 영향을 끼쳤다. 비트겐슈타인의 이러한 관심은 형식 논리체계가 내부에서 수학적 추론을 나타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수학적인 방법들을 사용하여 외부에서 형식논리체계가 연구될 수도 있다는 다비트 힐베르트의 견해에 답하는 것이었다.
2.3. 완전성과 불완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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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델의 불완전성 정리 논문
1929년, 괴델은 23세에 지도교수 한스 한 밑에서 1차 논리의 완전성을 증명하는 완전성 정리를 제출했고 이는 그의 박사학위 논문이었다. 괴델의 아버지는 그 해 세상을 떠났으며 성공한 사업가였던 아버지가 많은 유산을 남겨 가족은 풍족한 삶을 살았다. 괴델의 어머니는 빈에 큰 아파트를 샀고 거기서 괴델 형제도 같이 살았다. 이 시기는 이미 형 루돌프 또한 성공한 방사선 학자였다.
2년 뒤인 1931년, 괴델은 <「수학원리」와 관련 체계들의 형식적으로 불가능한 명제들에 관하여(On Formally Undecidable Propositions of Principia Mathematica and Related Systems)>라는 논문에서 불완전성 정리를 증명했다. 이는 대략 그 어떤 공리 체계가 되었든 무모순성을 포기하지 않는 한 모든 수학적 참을 포괄할 수는 없다는 함축을 갖는다.
다시 말해 공리적 수학 시스템엔 시스템의 공리 내에서 증명할 수 없는 명제가 있음을 증명한 것이다. 그런데, 이는 빈 학파와 다비트 힐베르트를 포함해 수백 년 간 수많은 학자들이 꿈꿔왔던 수학적으로 완전한 체계의 구성을 그 근본부터 부정한 것이다. 이 논문은 괴델의 하빌리타치온[4] 논문으로 제출되었고, 당연히 수용되었다.
2.4. 컴퓨터 프로그래밍에 기여
1930년 당시, 다목적 정보 처리 프로그램 컴퓨터로 기능할 수 있는 실제 물리 장치가 실현되는 것은 아직 수십 년 뒤의 일이었다. 그렇지만 오늘날 현대의 프로그래밍 언어에 지식을 가진 사람이 그 해에 씌어진 괴델의 결정 불가능성 논문을 살펴보면 컴퓨터 프로그램과 닮은, 45번까지 번호가 붙은 식을 보게 될 것이다. 닮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불완전성 논리 증명, 그러니까 PM(수학원리)에서의 증명의 부호라는 속성이 PM 내부에서 표현 가능하다고 논증하는 과정에서 괴델은 프로그래밍 언어를 설계하는 사람들과 그 언어로 프로그램을 작성하는 사람들이 맞부딪칠 문제들과 같은 여러가지 문제를 다뤄야만 했다.
가장 기본적인 수준에서, 현대의 컴퓨터는 0과 1의 짧은 문자열을 통해 간단한 기초 연산만 수행할 수 있다. 이른바 고급 프로그래밍 언어의 설계자들은 프로그래머들이 다루고 싶어 하는 복잡한 연산을 응축시킨 언어를 그들에게 제공하는 업무를 맡게 된다. 이런 언어를 사용하여 작성된 프로그램이 컴퓨터로 실행되기 위해서는 기계어[5] 로 번역되어야 한다. 이것은 이른바 인터프리터나 컴파일러라고 부르는 특별한 프로그램에 의해 수행된다.
결정 불가능한 명제가 존재한다는 괴델의 증명의 핵심은 PM의 증명 가능성이 PM 자체에서 표현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괴델은 몹시 회의적일 사람들에게 자신의 혁명적인 결과를 제출할 것이라는 점을 매우 잘 알고 있었고 어떠한 의심도 없기를 원했다. 그리하여, 그는 외부에서 본 PM의 추론 규칙과 공리에 상응하는 기호열들의 부호들에 대한 복잡한 연산들을 알기 쉽게 세분화하는 문제와 그 연산들을 PM의 기호 언어로 쓴 표현들로 변형하는 문제에 부딪혔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 괴델은 특수 언어라고 할 수 있는 것을 고안했는데, 그 언어를 통해 필요한 연산이 단계적인 방식으로 전개될 수 있었다. 각 단계는 숫자들에 대한 연산의 정의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숫자들에 대한 연산은 괴델이 사용하고 있던 부호들을 통해서 PM의 표현들에 대한 해당 연산에 상응한다. 그 정의들은 괴델의 특수언어에서, 이전 단계에서 이미 정의한 항목들에 의해 표현되었다. 이 언어는 잘 설계되어서, 그런 정의에 따라 도입된 연산들을 PM안에서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라이프니츠는 인간의 사고 대부분을 계산으로 환원시킬 인공 언어의 개발을 제안했었다. 고틀로프 프레게는 자신의 《개념 표기법》에서, 수학자들이 널리 쓰이는 추론을 어떻게 실제로 포착할 수 있는지 보여 주었다. 화이트헤드와 버트런드 러셀은 논리학의 인공언어로 실제의 수학을 발전시키는데 성공했다. 다비드 힐베르트는 그러한 언어에 대한 메타수학적 연구를 제안했다. 그러나 괴델 전까지는 아무도 이런 메타수학적 개념들을 어떻게 언어 자체에 구현할 수 있는지 구상하지 못했다.
게다가 괴델은 결정 불가능한 명제 U를 구성하면서, 이 명제를 서술하는데에는 어떠한 색다른 수학적 개념도 필요하지 않다고 논증하기를 원했다. 이 목적을 위해 괴델은 중국인의 나머지 정리라고 알려진 기초 정수론에서 나오는 정리를 사용해서 자신의 특수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모든 연산이 어떻게 자연수의 산술이라는 기초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지 보여주었다. 이를 통해 결정 불가능 명제 U 자체가 이 기초 언어로 표현될 수 있었다. 이것이 특별히 의미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자연수를 값으로 가질 수 잇는 변항들, 산수의 연산 +와 ×, 기호=, 프레게의 논리학의 기초 연산으로 오늘날에도 쓰이는 ¬, ⊃, ∧, ∃. ∀만을 사용해 결정 불가능한 명제 U를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이다. 결론은, 이런 빈약한 어휘로 제약받더라도 PM안에서 결정 불가능한 명제들이 구성될 수 있다.
2.5. 사랑과 탈출
1938년, 괴델은 아델레 포커트(Adele Porket)와 결혼했고 이 둘은 결혼으로부터 10년 전, 나방(Der Nachtfalter)이라는 이름을 가진 빈의 나이트클럽에서 처음 만났다. 그녀의 부모는 정규교육을 거의 받지 못한 사람들이었으며 아델레는 괴델보다 6살 연상이고, 이혼녀였다. 또한 클럽의 댄서 일을 했었는데, 당시 빈에서는 여성 댄서란 적당한 돈을 주면 성관계를 가질 수 있는 천한 직업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때문에 괴델의 가족들은 아델레와의 결혼을 격렬하게 반대했으며 특히 형 루돌프(그 자신은 죽을 때까지 독신이었지만)는 동생의 결혼에 더이상 할 말이 없다고 밝혔다. 많은 사람들이 학력적, 관심사적, 지적 차이로 인해 이들의 결혼이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 보았다. 그러나 수많은 우려와는 반대로 이 둘은 서로만을 보며 죽을때까지 행복한 결혼생활을 나눴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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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이 아델레이며, 이 사진은 1938년 오스트리아 빈에서의 결혼식 사진이다. 당시 괴델은 32세, 아델레는 38세였다.
오스트리아에서 교수 경력을 쌓으려는 괴델의 시도는 당시의 거칠고 비참한 정치, 사회, 경제상황과 밀접한 영향이 있었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의 사람들은 대다수가 독일과 통일하길 원했지만 연합국에 의해 금지당하고 있었고 파시스트 자경단과 사회민주당의 내전이 1927년에 극에 달했다. 한 노인과 어린이가 반동 세력에게 살해당하고 재판정이 살인자에게 유죄선고를 거부하자 사민당의 군중시위로 법무부 건물이 불타고 100명이 사망했다. 1929년까지 공화국은 비상법으로 통치했으며 그러는 동안 대공황이 닥쳤다. 1932년에 선출된 극우정부인 돌푸스 정부는 독재체제로 의회를 정지시켰다. 상황은 점점 안 좋아졌다. 1934년에 히틀러가 권력을 잡자 돌푸스의 정당을 제외한 모든 정당이 해산되었다. 그리고 돌푸스는 나치주의자들에게 토사구팽으로 살해당했다. 4년뒤 1938년 3월에 나치 독일은 오스트리아를 병합했다.
괴델은 1933년에 사강사(Privatdozent)에 임명되면서 빈 학파의 멤버인 카를 멩어가 진행중인 콜로키움이나 지도교수였던 한스 한이 지도하는 논리학 세미나에 자주 참여했다. 그의 인생 첫 강의는 어려운 조건에서 시작됐다. 대학은 어떤 날은 나치의 활동때문에 폐쇄됐으며 나치 테러리스트의 폭탄이 빈 곳곳에서 일주일 내내 터지기도 했던 것이다.
이때문에 미국인들이 괴델에게 새로 생긴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서 1933~1934년 학기를 지내라고 했을 때 괴델은 거부할 수 없었다. 미국에는 나치와 같은 정치적인 광기도 없었고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나 존 폰 노이만 같은 우수한 동료들도 기대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한 해의 대부분을 가족과 친구들(특히 아델레)와 떨어져 지내라는 것은 내성적이고 우울증 걸린 남자에게 여러가지 걱정을 불러일으켰다. 실제로 그는 대서양을 건너기로 준비한 배를 타려고 출발하고 나서 열이 났고, 되돌아가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가족들이 설득해 다른 배편을 탔다.
괴델이 프린스턴에서 보낸 1년간 어땠는지 기록은 나타나 있지 않다. 알려진 것은, 그가 빈에 돌아오고 나서 몇달간 신경쇠약으로 고생했다는 것이다. 몇달간 그는 요양원에 있었으며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은 바그너 야우레크에게 진찰받았다.
오스트리아 복귀 이후 괴델은 힘든 사건들에 시달렸다. 나치는 권력을 뺏으려고 했다. 지도교수였던 한스 한은 암 수술 합병증으로 죽었고 돌푸스는 7월 말에 암살당했다. 대학 당국자들은 정부로부터 파시스트 조국전선에 참가하라고 강요당했다. 또한 좌익으로 여겨진 교수들과 심지어 정치에 무관심한, 유대인 학자들이라고 여겨진 교수들까지 광범위하게 해고당했다.
지나고 나서 보면 파시즘의 성장에서 위협을 읽어 내는 것은 쉽다. 그러나 미래를 볼 수 있었다면 달아났을 사람들 사이에선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은 지금의 위태로운 상황이 언젠간 나아질 것이라고 긍정적인 마음을 가졌다. 괴델의 형은 "가족들 중 아무도 정치에 흥미를 느끼지 않았고" 그래서 1933년에 히틀러가 권력을 잡은 일의 중대성을 몰랐다고 썼다. 하지만 계속해서 말하기를,
괴델은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와 계속 접촉하며 빈 대학에서 강의자리를 찾았다. 1935년 5월에 빈 대학에서 강의 과정을 맡았고 9월에 다시 프린스턴으로 떠났다. 그러나 객원교수직을 사임하고 12월에 빈으로 돌아왔다. 괴델은 슐리크가 암살된 1936년이 자기 인생의 최악의 해라고 말했다. 정신상태 또한 좋지 않았고 많은 시간을 요양소에서 보냈다. 1937년엔 비교적 좋아졌는데 집합론 강의 중 연속체 가설에 대한 중요한 발견을 한 것이다.두 가지 사건이 우리의 눈을 뜨게 했다. 바로 수상이던 돌푸스가 암살당한 것과, 국가사회주의 오스트리아 노동자당 당원 학생이 동생이 있던 학파의 철학교수 슐리크를 암살한 사건이다.
1938년 3월에 오스트리아는 독일에 병합됐고, 괴델은 10월에 결혼 2주된 신부 아델레를 남겨놓고 세번째로 미국에 방문했다. 괴델은 8개월간 미국에서 자신의 새로운 업적을 밝혔고 노트르담 대학교의 객원교수로 있었다. 1939년 6월에 빈에 돌아왔는데 이 시기는 제2차 세계 대전 발발의 시작점인 폴란드 침공이 있기 두달 전이었다.
괴델이 빈으로 돌아오고 나니 빈은 이미 나치 독일의 핵심 도시가 되어 있었고, 히틀러의 '새로운 질서'의 일부분으로 개조되고 있었다. 사강사는 폐지되었으며 '새로운 질서의 사강사'라는 새 직책이 생겼다. 이 직책은 새로 지원해야하며 정치적 견해와 인종적 순수성에 대해 통과해야 했다. 9월에 괴델은 이 직책에 지원했고 승인되지 않았는데 이는 괴델에게 경악과 분노를 금치 못하게 했다. 당시 관료는 학장에게 괴델이 '유대인 교수 한스 한'밑에서 수학했으며 '유대인 해방' 서클에서 일했다고 적었다. 이러한 환경속에서 무언가를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또다른 사건은 괴델이 병역을 위해 건강 상태를 측정하는 신체검사에 소집되었을 때 날아왔다. 다시 한번 그는 놀랐는데 그가 수비대 임무에 적합하다고 판정받은 것이다. 1939년 11월에 괴델은 시내의 아파트로 이사했고 이사 직후 거리에서 선동하던 한 떼의 무뢰배들이 그를 쳐서 안경을 깨뜨려버렸다. 이때부터 괴델은 아내를 데리고 전력을 다해 유럽을 탈출해 미국에 망명하기로 결심했다.
그러기 위해선 독일 당국의 출국 허가서와 미합중국의 비자가 필요했는데 둘 다 쉽지 않았다. 괴델 부부를 빼내기 위해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의 소장으로 임명된 프랭크 아이델롯이 큰 도움을 주었는데, 그는 미합중국 국무부와 접촉하면서, 괴델이 교수가 아님을 명확하게 알고 있었지만 "괴델 교수"라는 표현을 썼다. 그리고 괴델이 연구소에서 어떤 직책을 가질 것이냐는 말에 "괴델 교수의 책무"는 "가르치는 것을 포함"하겠지만 고급 분야라서, 비공식 지위에 종사할 것이라고 말했다. 게다가 아이델롯은 워싱턴의 독일 대사관에 괴델이 "아리아인"이며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수학자 중 하나라고 강조하는 글을 썼다. 이것은 효과가 있어서 서류가 나왔고, 대서양 횡단은 너무 위험하다고 판단되어 시베리아-일본을 거쳐 태평양을 건너는 장장 3개월간의 원정 끝에 미국에 도착했다.
2.6. 미국 입성
미국 시민이 되려고 할 때, 판사 앞에서 보는 미국 제도에 관한 형식적인 시험이 있었다. 여기서 판사는 헌법과 관련된 질문을 하게 되는데, 괴델은 자기 방식대로 시험을 준비했다. 그러니까 그가 아니면 할 수 없는 방법으로 미국 헌법을 분석한 것이다.[7] 그리고 미국 헌법에 모순이 있다고 결론지으며 흥분하기 시작했다. 시험 절차를 밟으러 주도인 트렌턴으로 차를 몰고 가는 동안, 그를 도와줄 입회인인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 모르겐슈테른은 괴델이 그 얘기를 꺼내면 난처해질 것이라고 걱정해 괴델이 자신의 발견에서 주의를 돌리게 하려고 애를 썼다.
시험 중 아인슈타인은 계속해서 농담을 했다. 그러나 판사가 괴델에게 독일과 같은 독재정권이 미국에서도 가능할 것이냐고 묻자 괴델은 그렇다고 답한뒤, 판사에게 미국 헌법을 바탕으로 그러한 독재가 성립 가능함을 '''증명할 수 있다'''고 답했다. 그리고 자기의 발견을 말하기 시작했다. 입회인들은 재빠르게 그를 저지했고 판사 또한 자기가 대하는 인물들을 알아차려 중단시켰다. 그리고 모든 수속이 정상처리 되었다.
1938년 괴델은 연속체 가설과 선택공리가 집합론의 공리들로부터 반증 불가능함을 증명했고 이 결과물은 1940년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출판되었다.[8] 1940년부터 1956년까지 괴델은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의 멤버로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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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이 괴델, 우측이 아인슈타인. 아인슈타인은 퇴근 때 괴델과 함께 걷기 위해 일한다며 그 친분을 표했다. 둘의 나이 차이는 아인슈타인이 27세 많았다.
괴델은 미국에서 거주하며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폴 에어디쉬, 헤르만 모르겐슈테른, 존 폰 노이만과 같은 석학들과 친하게 지냈다. 괴델은 매우 까다로운 인간으로, 자신의 건강에 대해 걱정해서 후기생애에서 여행이나 강연을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는 많은 사람들의 끊임없는 편지와 개인적 접촉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자유롭고 철학적인 토론을 즐겼다.
괴델은 50년대 이후로 미국과 영국에서 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종전 이후 오스트리아가 그에게 과학적, 예술적 성취와 관련된 가장 높은 국가훈장을 수여하고자 하는것은 거부했다.
2.7.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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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의 괴델
괴델은 평생동안 정신적으로 심한 편집증이 있었다. 그는 라이프니츠가 기호논리학과 관련되어 고안한 어떤 천재적인 발상이 음모로 인해 현대수학계에 전해지지 않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또한 그는 전립선이 부어 요도 막힘 증세로 고생할 때, 진찰 받는 것을 거부하고 이미 상당히 의존중이던 설사약을 더 복용해서 치료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한번은 몸에 꽂은 도뇨관을 화를 내며 떼어냈다. 도뇨관은 보통 이런 증상을 누그러뜨리는데 효과가 있었고 한참동안 이런 외과수술을 거부하다가, 마침내 받아들였고 남은 생애동안 도뇨관을 썼다.
또한 그는 프린스턴의 여러 아파트에 있는 냉장고나 난방기가 유해가스를 내뿜는다고 믿기도 했다. 그 결과로 그와 아델레는 여러번 이사했다. 그리고 그는 눈에 거슬리는 장치를 다 치워버렸고 자신의 아파트를 "겨울철에는 꽤 불편한 곳"으로 만들었다.
그의 형 루돌프는 의사였는데, 동생인 괴델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괴델의 아내 아델레는 그에게 큰 도움이 되었으며, 그녀는 괴델을 괴롭게 하는 긴장을 완화하기 위해 많은 것을 도왔다. 그러나 그녀 또한 나이가 너무 많았고 두 발에 큰 수술을 하면서 건강 문제를 겪기 시작했다. 괴델은 독극물로 인한 암살을 염려해 아델레가 주는 음식만을 조금씩 음용했다. 그녀는 죽을때까지 괴델에게 매우 헌신적이었지만 너무 아파서 입원했고, 괴델은 아델레가 없는 동안 음식을 먹지 않은 채 굶어죽었다[9] . 사망년도는 1978년으로, 향년 71세. 사망 당시 키는 168cm 몸무게는 29kg에 불과했다.내 동생은 모든 것에 대해 매우 개인적이고 고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불행히도 그는 평생 동안 자신이 수학뿐만 아니라 의학에서도 옳았다고 믿었기 때문에 의사에게는 매우 어려운 환자였다... 십이지장 궤양으로 인한 심한 출혈 후 ... 남은 생애 동안 그는 극도로 엄격한 식단을 유지하였고 체중 감량을 유발했다.
3. 관련 문서
[1] 현재의 체코 브르노[2] 사망 당시 몸무게다.[3] 이 정신불안은 훗날 죽음의 원인으로 이어진다.[4] 독일어권 국가들의 교수자격시험. 합격시 Dr.Habil.이라는 영구적인 칭호가 주어진다.[5] 다시 말해서 프로그램을 실행하기 위해 필요한 기초 연산의 세부 목록.[6] 괴델은 1978년에 사망했고 그로부터 3년뒤, 1981년에 사망한 아델레는 괴델의 곁에 안장되었다.[7] 아마 수학의 모델론처럼 미국 헌법에 관한 일종의 '모델'을 만들어서 이를 분석한 것으로 추정된다.[8] 23년 뒤 폴 코언이 괴델의 증명을 바탕으로 연속체 가설과 선택공리의 증명이 불가능함을 증명했다. 당시 괴델은 증명 소식을 듣고 대단히 기뻐하며 코언에게 감사편지를 보냈다.[9] 아델레는 주변사람들에게 남편을 돌봐달라는 부탁을 하고 입원했는데 괴델은 다른 사람들이 가져오는 모든 음식을 완강하게 거부해서 먹일 수가 없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