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푸앵카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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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이작 뉴턴, 라이프니츠, 오일러, 가우스 등과 같이 수학과 물리학의 전 방면에서 동시에 위업을 달성한 인물이다. 그리하여 과학계에서는 그를 the last universalist(최후의 만능과학자)라고도 한다. 오늘날에는 물리-수학은 방법론이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두 방면에서 동시에 대가에 오르는 것은 어렵다. 현대에는 물리학자가 수학의 일부에만 능할 뿐 수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것은 어렵다. 에드워드 위튼을 반례로 제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위튼은 물리-수학이 겹치는 좁은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었을 뿐 '''물리 전체와 수학 전 방면에서 두루''' 업적을 남긴 사람이 아니다."과학자는 유용하기 때문에 자연을 연구하는게 이니다. 과학자는 자연이 아름답기 때문에, 그 속에서 기쁨을 느끼며 연구한다. 만약 자연이 아름답지 않다면, 알 가치도 없다. 만약 자연이 알 가치가 없다면, 인생도 살 가치가 없다."
"The scientist does not study nature because it is useful; he studies it because he delights in it, and he delights in it because it is beautiful. If nature were not beautiful, it would not be worth knowing, and if nature were not worth knowing, life would not be worth living.”
그는 수학에서는 위상수학(topology), 대수기하학의 아버지이며, 물리에서는 상대론, 천체역학에서 엄청난 업적을 남겼다. 이밖에도 확률론, 미분방정식, 열역학에도 지대한 공헌을 했다.
수리철학 및 과학철학에도 큰 공헌을 남겼다. 이마누엘 칸트의 인식론을 비판적으로 계승 및 보완한 입장을 제시함으로써 20세기 철학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푸앵카레는 칸트가 수학 명제를 선험적 종합(synthetisch a priori) 명제라고 규정한 것을 받아들였지만, 유클리드 기하학을 유일무이한 기하학으로 보는 칸트의 견해를 수정하여 기하학에 대한 규약주의(conventionnalisme)를 제안한 초기 철학자이고, 푸앵카레의 철학은 논리 실증주의를 거쳐 현대 철학에서도 서양 철학사 가운데 고전적인 입장이다.
2. 생애
프랑스 로렌주의 낭시 출생.
에콜 폴리테크니크 수석입학, 차석졸업에 빛나는 천재이다.[1] [2] 일부 위인전이나 수학전문학원의 찌라시에서 그가 고등학교 졸업시험(바칼로레아)의 일부 과목에서 낙제점을 받은 것을 두고 '학창시절 공부를 잘 못해도 대가가 될 수 있다.' 혹은 '천재는 정규 교육과정에는 잘 맞지 않는다.'는 식으로 왜곡하곤 하지만 사실과는 전혀 다르다. 푸앵카레가 고등학교 졸업시험을 볼 무렵에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터져 그가 살던 알자스-로렌주가 전쟁터의 한복판이 된 탓에, 공부에 집중할 수가 없어 일시적으로 성적이 저조했을 뿐 학창시절 내내 두각을 나타냈다. 그렇지 않았다면 프랑스 전국의 수재들이 모이는 에콜 폴리테크닉 입학시험에서 1등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에콜 폴리테크닉과 에콜 데민(광산전문학교)[3] 을 졸업하고, 소르본 대학교에서 미분방정식에 관한 연구로 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광산감독 공무원으로 잠시 일하다가 캉(Caen) 대학에서 수학강사로 임용되어 학계에 진입했다. 당시부터 독일의 펠릭스 클리인과 편지로 교류하며 대수학을 연구했고, 그 업적으로 소르본 대학교 수학과 교수로 임용되었다. 수학만이 아니라 물리학에도 상당히 능해서 소르본 대학교에서도 물리학의 모든 분야를 강의했고, 여러 논문을 남겼다.
이렇게 20대 후반부터 학계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그때부터 파리에서 사망할 당시까지 소르본 대학 교수, 에콜 폴리테크닉 교수를 역임했다. 워낙 학력이 뛰어났고, 어릴 때부터 학벌로도 프랑스 학계의 정석 출세코스[4] 만을 밟아왔기 때문에 퀴리 부인이나 아인슈타인과 같은 재미있는 일화는 거의 없다. 특별한 정치성향은 없었지만, 드레퓌스 사건에서 드레퓌스 편에서 서서 경찰 측이 제시한 증거를 과학적 소견으로 뒤집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전립선 비대증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58세에 사망했다.
3. 기타
- <과학의 가치>에서 수학자들을 연구전개방법에 따라 '논리파'와 '직관파'로 분류하고, 수학적 재능과 함께 이러한 경향도 타고난 것이라고 언급했다. 그 책에서는 본인은 어떤 부류인지 밝히지 않았지만, 그는 전적으로 직관파에 속한다. 실제로 수학사에서 그는 초기 직관주의의 대표적 인물로 평가된다.
- 에콜 폴리테크닉과 함께 양대 산맥을 이루는 고등사범학교(에콜 노르말 쉬페리외르) 입시에서는 5등을 했다. 이것도 상당히 높은 등수이지만, 입학시험 수석을 한 에콜 폴리테크닉으로 진로를 결정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한국에서 알려진 바와는 달리, 수학이나 물리학의 대가들은 대부분 어릴 때부터 공부를 엄청나게 잘 하고, 정규교육과정인 학교에서 최우등생으로 두각을 나타낸 사람들이다. 고등학교 중퇴생이라 본의 아니게 한국에서 학습지진아로 오해받는 아인슈타인은, 독일의 인문계 고교인 김나지움의 입학경쟁이나 학력수준을 한국으로 환산해 비교한다면 과학고등학교 부적응 중퇴생 정도로 보는 게 맞다.[5] 입시 위주 교육에 대한 대중적 반감이 일부 학자들의 일화와 결합하면서 생긴 도시전설.
- 2000년대 초반 러시아인 그리고리 페렐만이 푸앵카레 추측을 푼 후에 한국에서도 대중적 인지도가 올랐다.
-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프랑스 대통령 레몽 푸앵카레의 친사촌이다. 푸앵카레의 둘째 큰아버지의 맏아들이 레몽 푸앵카레이다.
- 삼체 문제의 일반해를 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한 사람도 푸앵카레다.
- 아래 동영상은 EBS 다큐프라임 문명과 수학 마지막 편 남겨진 문제들에서 나오는 푸앵카레 추측을 설명하는 동영상이다.
[1] 미술과 체육은 재능이 없어서 평균에 못 미치는 성적을 받았다고 하며, 에콜 폴리테크닉 필수과목인 군사학 분야에서 학점이 나빴기 때문에 차석을 받은 것이다.[2] 그 수석졸업한 인물은 푸앵카레와 똑같이 광산 근무 공무원으로 일하다가 안타깝게 광산 사고로 요절했다.[3] 왜 이런 학교를 갔나 의아해하고 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이 학교는 에콜폴리테크닉 졸업생을 대상으로 광산계 고급공무원을 양성하기 위한 학교로, 한국으로 치면 고급공무원 연수원 정도의 개념이다. 당시는 석유가 아니라 석탄이나 철광석이 국부의 척도가 되었기 때문에 광산 감독이 국가요직이었다.[4] 한국으로 비유하자면 과학고-서포카-해외명문대유학 박사- 박사후과정-서포카 교수의 경력을 밟은 셈이다.[5] 다만 아인슈타인이 일반적이지 않은 커리어를 걸었던 것은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