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티어 문제
어떤 사람이 주어진 명제를 안다는 것의 필요충분조건을 제시하기 위한 시도가 근 수 년간 이루어진 바 있다. 그 시도들은 대개 다음 형식과 유사하게 제시될 수 있다:
(a) S가 P를 안다 iff#s-1 (i) P가 참이다 (ii) S가 P를 믿는다 (iii) S가 P를 믿는 것이 정당화된다. [...]
나는 (a)의 조건들을 만족시키는 것이 곧 S가 P를 안다는 명제가 참이 되기 위한 충분조건을 구성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a)가 거짓임을 논하겠다 [...]
나는 (a)에 제시된 조건들이 어떤 명제에 관하여 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사람이 그 명제를 안다는 것은 거짓인 사례 두 가지를 제시해보겠다.
1. 개요
'''Gettier Problem'''
철학자 에드먼드 게티어(Edmund Gettier,1927~)가 1963년에 학술지 『Analysis』에 게재한 논문 「'''정당화된 참인 믿음은 지식인가?(Is Justified True Belief Knowledge?)'''」에서 제시된 인식론의 난제 혹은 역설.[1]
'''불과 2.5쪽'''에 불과하지만, '''인식론이라는 오래된 철학 분야를 뒤흔든 논문이다.''' 전문은 이 링크에서 읽을 수 있다. 이 짧은 논문에서 제기된 문제는 21세기 현재까지도 큰 파급력을 미치고 있다.
그리고 이 논문 하나 말고 저자인 에드먼드 게티어가 남긴 저작은 거의 없지만 그 이름은 철학사에 영원히 남게 되었다.
2. 상세
2.1. 앎의 JTB 조건
게티어는 플라톤의 『테아이테토스』 및 『메논』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앎" 혹은 "지식"의 전통적인 정의가 "정당화된 참인 믿음"이라고 파악한다.
- 명제 P가 참이다: 말 그대로 명제 P가 거짓이 아니라는 얘기.
- 주체 S가 명제 P를 믿는다: 말 그대로 어떤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이 주어진 명제를 믿는다는 얘기.
- S가 P를 믿는 것이 정당화된다: "인식적 정당화(epistemic justification)"는 그 자체로 인식론의 논란거리 가운데 하나다. 다만 현 맥락에서는 일단은 "S가 P를 믿는데 적합한 증거가 있다" 정도로 이해해도 된다. 다만 다음 두 가지 단서가 붙는다:
- (가) 실제론 거짓인 명제에 대한 믿음도 정당화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데카르트의 악마가 진짜로 있어서 실은 우리의 모든 과학적 믿음이 거짓이라고 가정해보자. 그렇다 한들 과학적 방법에 입각하여 엄격하게 이루어진 최신 과학이야말로 최선의 합리적 믿음이라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다. 즉 과학적 믿음은 설령 거짓이라 한들 인식적으로 정당하다.[2]
- (나) 만약 S가 P를 믿는 것이 정당화되고, P가 Q를 함축하며 S가 P로부터 Q를 도출해낸다면, Q를 믿는 것도 정당화된다: 예를 들어 "모든 사람은 죽는다"를 믿는 것이 정당화된다면, 그 논리적 함축인 "철수는 죽는다"를 믿는 것도 정당화된다.[3]
하지만 게티어는 이런 JTB 조건은 만족하지만, 앎이 아닌 사례가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즉 JTB 조건의 진리집합을 A, 앎의 진리집합을 B라 하였을 때, A-B에 속하는 반례가 있다고 말한 것이다.
2.2. 반례 1
스미스와 존스가 입사 시험을 보고 있는 중이다. 그 와중에 스미스는 면접관이 존스를 뽑을 거라고 말하는 것을 엿들었다. 그리고 스미스는 존스의 호주머니에 동전이 10개 들어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래서 스미스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사실 알고 보니 면접관이 실제로 뽑기로 결정한 사람은 스미스였다. 그리고 스미스 자신은 몰랐지만 스미스 호주머니 안에도 동전이 10개 들어 있었다. 이때 명제 (가)는 JTB 조건들을 모두 만족한다.
- (가)는 참이다:
- 스미스가 뽑히게 되며, 스미스 호주머니에 동전에 10개가 있기 때문이다.
- 스미스는 (가)를 믿는다.
- 스미스가 (가)를 믿는 것은 정당화된다.
- (가)는 스미스의 또다른 믿음인 '존스가 일자리를 잡게 되었으며, 존스 호주머니에는 동전 10개가 있다'로부터 논리적으로 도출된 것이다. 그리고 이 믿음은 면접관의 말을 엿들었다든지 동전 10개를 확인해봤다든지 하는 증거를 충분히 갖추고 있다.
2.3. 반례 2
스미스는 존스가 포드 차를 몰고 다니는 것을 자주 봤고 최근에 차를 얻어탄 적도 많아 존스한테 포드 차가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스미스 친구 중에 방랑벽이 있어 도통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는 브라운이라는 친구가 또 있다. 이런 상황에서 스미스는 무작위로 한 장소를 정하여 가설을 수립했다:
그런데 사실 존스의 포드는 렌트카였다. 그리고 사실 어쩌다 보니 브라운은 정말로 바르셀로나에서 여행중이었다. 이때 명제 (나)는 JTB 조건들을 다 만족시키는 것 같다.
- (나)는 참이다:
- 존스가 포드 차를 갖고 있다는 것은 거짓이지만, 브라운이 지금 바르셀로나에 있다는 것은 참이기 때문이다.
- 스미스는 (나)를 믿는다.
- 스미스는 (나)를 믿는 것이 정당화된다:
- 존스한테 포드 차가 있다고 믿는 것은 충분한 증거가 있으므로 정당화된다. "p다. 그렇다면 p 혹은 q다."는 타당한 연역추론이다. 이때 p 자리에 "존스한테 포드차가 있다", q 자리에 "브라운이 지금 바르셀로나에 있다"를 대신 집어넣으면 (나)가 도출되므로, (나)는 정당화된다.
3. 영향
그저 사소한 개념적 퍼즐 혹은 말장난이라고 보일 법한 이 사안은 시간이 갈 수록 점점 큰 파급력을 낳기 시작했다. 왜냐면 위와 같은 반례를 차단하기 위하여 JTB 조건을 강화하거나, 혹은 JTB 조건 외의 제 4의 조건을 추가할 때마다 예측하지도 못했던 온갖 부적합한 귀결들이 튀어나오는 불상사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즘에 해당 난제는 그냥 학계에서 '''"게티어 사례(Gettier Case)"''', 혹은 '''"게티어 문제(Gettier Problem)"''' 같은 말로 통한다. 게티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 십년에 걸친 이런 몸부림의 역사는 현대 인식론 관련 교과서를 읽어보면 알 수 있다.
이를테면 게티어 사례를 접했을 때 제일 먼저 나올법한 진단은 '''"거짓인 전제나 증거가 있어서는 안된다."'''라는 제4의 조건을 제시하는 것이다.[4] 종종 "거짓 전제 부재 조건"이라고 불리는 이러한 제4의 조건은 게티어가 처음으로 제시한 두 사례 (ㄱ)과 (ㄴ)을 성공적으로 차단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JTB+거짓 전제 부재 조건)이 앎의 필요조건도 충분조건도 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면서도 원 게티어 사례와 충분히 유사한 여러 반례들이 제시되었다. 이로써 거짓 전제 부재 조건이 게티어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은 일찌감치 널리 받아들여졌다. 스탠포드 철학 백과사전의 해당 항목 참조.
관련하여 연구가 하도 오래, 그리고 많이 이루어진 나머지 21세기 현재에는 게티어 문제와 관련된 담론들을 "게티어학(Gettierology)"라고 부르며 아예 쉰 떡밥으로 간주하는 시각도 많다. 하지만 그럼에도 게티어 문제로부터 '인식적 정당성', '지식' 같은 여러 인식론적 개념들 자체에 관하여 전혀 새로운 인식론적 시각들과 논쟁들이 촉발되었다는 점만큼은 대부분이 인정하는 점이다.
4. 더 읽을만한 글
[1] Edmund L. Gettier, "Is Justified True Belief Knowledge?" Analysis, Vol. 23, pp. 121–23 (1963)[2] 현대에는 '인식적 정당화에 대한 오류가능주의(fallibilist) 전제'라고 자주 불린다.[3] 현대에는 '인식적 폐쇄성(epistemic closure) 원리'로 자주 불린다.[4] 이는 실제 철학사에서도 게티어의 논문에 대해서 즉각적으로 나온 반응이다. Clark, Michael, 1963, “Knowledge and Grounds. A Comment on Mr. Gettier’s Paper”, ''Analysis'', 24(2): 46–48. doi:10.2307/33270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