겐메이 덴노

 


'''
(げん(めい(てん(のう
겐메이 덴노
'''
'''출생'''
661년
'''사망'''
721년 12월 29일 (60세)
'''능묘'''
일본국 나라현 나라시 나호야마동릉 (奈保山東陵)
'''재위'''
707년 8월 18일 ~ 715년 10월 3일
(8년 47일)
'''연호'''
게이운(慶雲)→와도(和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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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풍시호'''
겐메이 덴노(元明 天皇, 원명 천황)
'''화풍시호'''
야마토네코아마츠미시로토요쿠니나리히메노스메라미코토
(日本根子天津御代豐國成姬天皇)
''''''
아헤노(阿閇)
'''부모'''
부친 덴지 덴노, 모친 소가노 메이노이라츠메
'''형제'''
2녀 중 둘째
'''배우자'''
쿠사카베 황자(草壁皇子)
'''자녀'''
1남 2녀 (겐쇼 덴노, 몬무 덴노, 기비나이 친왕)
'''황거'''
후지와라쿄(藤原京)→헤이죠쿄(平城京)
'''십이지'''
닭띠 (신유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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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행적
3. 가족관계


1. 개요


일본의 제43대 천황이자, 5번째 여성 천황이다. 이름은 아헤(阿閇). 아스카 시대 마지막 여성 천황이자 나라 시대 초대 여성 천황이다.[1]
덴지 덴노와 소가노 메이노이라쓰메(蘇我姪娘)의 딸로, 이종사촌이자 이복언니인 지토 덴노[2]의 아들 쿠사카베 황자와 결혼했다.

2. 행적


지토 천황의 이복 여동생으로 덴지 천황의 넷째딸이었다. 황위 계승 전에는 아헤노 히메미코(阿閇皇女)라 불리었고, 어머니는 우대신 소가노 쿠라노야마다노 이시카와노마로(蘇我倉山田石川麻呂)의 딸 메이노이라쓰메(姪娘)였다.
덴무 천황(天武天皇) 4년(675年)에, 도오치 황녀(十市皇女)와 함께 이세 신궁(伊勢神宮)을 찾았다는 기록이 있다.
덴무 8년(679년)경, 한 살 어린 외조카인 황자 쿠사카베(草壁)와 혼인, 그의 정비(正妃)가 되었고, 이듬해 히타카 황녀(氷高皇女)를, 덴무 12년(683년)에 가루 황자(珂瑠皇子)를 낳았다. 쿠사카베 황자는 덴무 10년(681년) 2월 25일(3월 19일)에 황태자가 되었지만, 지토 천황(持統天皇) 3년(689년) 4월 13일(5월 7일)에 즉위하지 못하고 요절하였다. 지토 천황의 즉위를 거쳐 몬무(文武) 원년(697년) 8월 17일(9월 7일)에 가루 황자가 몬무 천황으로 즉위하고, 그 날 아헤도 황태비가 되었다.
게이운(慶雲) 4년(707년) 4월에 쿠사카베 황자의 10주기를 맞았고, 6월 15일(7월 18일)에 아들 몬무 천황이 병으로 쓰러져, 붕어하고 말았다. 남은 손자 오비토 황자(首皇子, 훗날의 쇼무 덴노)는 나이가 아직 어렸기 때문에 황자가 자랄 때까지의 중계로써, 아헤가 처음 황후의 지위를 갖지 않은 채 즉위하게 되었다.
게이운 5년(708년) 1월 11일(2월 7일)에 무사시 국(武蔵国)에서 구리를 바친 것을 계기로 연호를 '와도(和銅)'로 바꾸고, '''화동개진(和同開珎)'''이라는 화폐를 주조하였다. 이 시기는 다이호(大宝) 원년(701년)에 제작된 '''다이호 율령(大宝律令)'''을 정비하고, 운용한 시대였다. 그 때문에 실무는 오랫동안 후지와라노 후히토(藤原不比等)가 맡았다.
와도 3년(710년) 3월 10일(4월 13일)에 후지와라쿄(藤原京)에서 '''헤이조쿄(平城京)'''로 천도하였다. 이 때 좌대신(左大臣) 이시카와 마로(石上麻呂)를 후지와라쿄의 관리자로 남겨두었으므로, 우대신이던 후지와라노 후히토가 실질적인 최고권력자가 되었다. 와도 5년(712년) 정월에는 여러 구니(国)의 고쿠시(국사)들에게 요역을 가볍게 해서 백성의 부담을 줄일 것을 지시하였다. 같은 해에는 덴무 천황의 대에 칙으로 제작하게 했던 '''《고사기》(古事記)'''가 바쳐졌고, 이듬해 6년(713년)에는 '''《풍토기》(風土記)'''를 편찬하라는 조칙이 내려졌다.
715년에는 '''향리제(郷里制)'''가 실시되었다. 같은 해 9월 2일에 자신의 나이 많음을 이유로 양위를 선언하였다. 오비토 황자가 아직 정무를 맡기는 미숙한 상태였기에 딸인 히타카 황녀를 다시 중계로 하여 양위하고, 같은 날 태상천황이 되었다. 요로(養老) 5년(721년) 5월에 병을 얻어 사위 나가야 왕(長屋王)과 후지와라노 우마카이(藤原房前, 후히토의 3남, 식가)에게 후사를 맡긴다는 유조를 내리고 자신의 장례를 간소하게 할 것을 명한 뒤, 12월 7일에 붕어하였다.
구리를 발견한 땅은 현재 일본의 사이타마현(埼玉県) 지치부 시(秩父市) 구로타니(黒谷)로 그곳의 진좌(鎮座)인 히지리 신사(聖神社)에는 겐메이 천황이 하사한 것으로 전하는 구리로 만든 지네상 암수 한 쌍이 신보(神宝)로써 보관되어 있는데, 이것은 겐메이 천황이 사망한 이듬해인 요로 6년(722년) 11월 13일에 겐묘고가네노미코토(元明金命)로써 신사에 합사되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한편 겐메이 천황이 사망하고 이듬해인 요로 6년, 신라에서는 일본을 경계한다는 명분으로 동쪽 경계에 모벌군성을 쌓았다.
참고로 자기 남편인 쿠사카베 황자는 후에 '오카노미야 어우천황(岡宮御宇天皇)'이란 존호를 받았다. 그래서 추존 천황으로서 '''오카노미야 덴노'''라고 불리며 자신도 추존 황후가 되었다.

3. 가족관계


  • 아버지 : 덴지 덴노
  • 어머니 : 소가노 메이노이라쓰메(蘇我姪娘)
  • 친자매:미나베 황녀(御名部皇女) - 다케치 황자(高市皇子)와 혼인

[1] 야마타이국의 히미코, 토요는 천황이 아니다.[2] 지토 덴노의 어머니 소가노 오치노이라쓰메와 겐메이 덴노의 어머니 소가노 메이노이라쓰메는 자매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