겐쇼 덴노
1. 개요
일본의 제44대 천황. 나라 시대 2번째 군주이자, 6번째 여성 천황이기도 하며, 여성 천황인 어머니 겐메이 덴노 바로 뒤에 여성 천황으로 즉위했다. 이름은 히타카(日高, 氷高)였다.
2. 행적
어머니인 겐메이 덴노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였다. 몬무 덴노[3] 사후 황위는 본래 그의 아들 오비토 황자(쇼무 덴노)가 이어야 했지만 황자의 나이가 너무 어려 오비토의 할머니인 겐메이 덴노가 대신 즉위했다. 그리고 오비토는 겐쇼 덴노가 즉위한 후 황태자로 봉해졌다.
천황 재위 도중인 717년 '양로(養老)'로 개원하였으며, 어머니 겐메이 상황의 마음에 따라 나가야 왕을 우대신으로 임명하고, 717년 10월에는 후지와라노 후사사키(후히토의 차남, 북가)를 내신으로 삼아 후사사키 체제를 구축하였다. 또한 후지와라노 후히토에 의한 '''요로 율령''' 편찬과 토네리 친왕 등에 의한 '''<일본서기>'''의 완성도 보았으며, 토지 확보 계획을 발표하고 구체적인 실행을 위해 '''삼세일신법'''을 시행하기도 하였다.
만요슈에는 겐쇼 덴노가 직접 지은 노래가 실려 있다.
겐쇼 덴노는 747년 병에 걸려 투병생활을 하다 748년 60대로 사망하였다.
3. 신라와의 공방전
삼국사기와 해동제국기에는 이 당시 신라왕인 성덕왕과 서로 공수를 주고 받았다는 기록이 각각의 입장에서 실려있다.
해동제국기에 따르면 720년, 신라가 서일본 변방을 공격했다고 전하고 있으나 삼국사기에는 관련 내용이 안나온다.원정 천황(元正天皇) 4년(서기 720년, 성덕왕 14년)
4년 경신에 신라가 서쪽 변방을 와서 쳤다. (四年庚申。新羅來伐西鄙。)
- 해동제국기
731년, 일본에서 후지와라노 나카마로의 지휘 아래 300척의 군함이 쳐들어왔으나 곧바로 신라군이 격퇴하였다. 일본의 신라 침공 계획의 원인이 된 '왕성국 사건'도 734년에 벌어졌는데, 일본에 보낸 신라 사신이 스스로 '''왕성국(王城國)'''에서 왔다고 말한 것이다. 서경, 주례등 옛 유교 경전에서 말한 세계관에 따르면 '''왕성(수도 궁성) - 왕기(수도 근처) - 6복(지방 = 9주 5소경) - 번국(외부 이민족 제후국)의 순서로 주종관계의 체계가 있다'''는 것을 말하는데 여기서 '''신라가 왕성국이라면 일본은 번국이라는 뜻'''으로 해석될 여지가 컸다. 이에 분노한 일본은 무례하다고 하며 사신을 쫓아 버렸다. 왕성국 사건은 앞서 신라가 일본의 침공을 손쉽게 격퇴했다는 자부심 때문으로 보인다.성덕왕(聖德王) 30년(서기 731년)
일본국 병선 300척이 바다를 건너 우리의 동쪽 변경을 습격하였는데, 왕이 장수를 시켜 군사를 내어 이를 크게 깨뜨렸다. (日本國兵船三百?, 越海襲我東邊, 王命將出兵, 大破之.)
- 삼국사기
또한 규슈(九州) 미야자키 현(宮崎県) 난고손(南鄕村)에 있는 미카도 신사(神門神社)에 전해내려오는 <능백묵서(綾布墨書)>에 따르면, 백제 왕 부여풍(扶餘豊)[4] 의 아들 부여사(扶餘絲)를 비롯한 일가가 나라 현에 정착했으나, 일본 내 정쟁에 휘말려, 부여사의 손자로 추정되는 정가왕(禎嘉王)은 나라 현에서 규슈 미야자키 현 일대로 이주한 뒤, '''백제왕'''을 칭하며, 연호를 '정거(定居)'라 하였다고 한다. 당시 정가왕은 미야자키에 정착한 뒤에 지역민들에게 불교 신앙과 건축술, 농업 등을 전파하였다. 그러나 718년경에 '''나당연합군 또는 신라군이 미야자키 현을 침공'''하여, 정가왕과 둘째 아들 화지왕은 백제 유민들 및 토착 지역민들과 함께 힘을 합쳐 저항하였으나 결국 패배하여 전사했다고 한다. 이 전투가 해동제국기에서 언급된 신라의 720년 일본 서쪽 변방 공격과 연관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만약 718년과 720년의 신라의 일본 침공이 사실이라면 731년의 왜국 병선 300척의 공격은 그에 대한 보복 공격일 수도 있다.
4. 가족관계
- 아버지 : 쿠사카베 황자(草壁皇子, 662~689) - 존호는 오카노미야 어우천황(岡宮御宇天皇)
- 어머니 : 아헤노 황녀(阿陪皇女)
- 남동생 : 몬무 덴노(文武天皇)
- 조카 : 쇼무 덴노(聖武天皇)
- 여동생 : 키비 내친왕(吉備内親王, ?~729) - 나가야 왕(長屋王)의 비妃
[1] 중국식으로 올린 시호이다.[2] 휘(이름)가 아닌 왕이 죽은 뒤 왜국식으로 올린 시호이다.[3] 겐쇼 덴노에게는 남동생이 된다.[4] 의자왕의 아들로 백제 부흥운동 주도자 중 한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