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지와라노 후히토
1. 개요
藤原 不比等
659년 ~ 720년
아스카 시대와 나라 시대의 인물.
덴지 덴노의 총신인 나카토미노 카마타리의 차남[1] 으로, 후지와라노 후히토의 자손만이 후지와라씨를 사용하고 태정관까지 오를 수 있었기 때문에 실질적인 후지와라 씨의 선조로 여겨지고 있다.[2]
2. 생애
나카토미노 카마타리가 덴지 덴노에게서 하사받은 카가미노 오키미(鏡王女)의 아들이다. 그 때문에 사학계에서는 나카토미노 카마타리의 아들이 아니라 덴지 덴노의 아들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후히토(不比等)'이라는 이름은 「다른 데에 비할 바 없이 우수하다」라고 하는 의미이다.
덴무 덴노 사후 우노노사라라 황후(鸕野讚良 皇后)는 자기 아들인 쿠사카베 황자(草壁皇子)를 즉위시키고자 했지만, 그가 급사하게 되자 쿠사카베 황자의 아들인 가루 황자(輕皇子)를 즉위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당시 가루 황자는 7살이었기에 우노노사라라 황후 본인이 직접 즉위하고자 했고, 이 과정에서 황후와 후지와라노 후히토가 서로 손을 잡고, 황후를 지토 덴노로 옹립하게 된다. 아마테라스 오오카미의 TS와 천손강림 신화는 지토 덴노의 신격화라는 추측이 많은데, 이는 이들의 이러한 인연이 원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토 덴노는 가루 황자에게 양위하였고, 그가 몬무 덴노가 된다. 몬무 덴노(재위: 683년-707년) 치세 때, 오사카베 황자(忍壁皇子), 후지와라 후히토, 아와타 마히토(粟田 真人), 시모쓰케노 고마로(下毛野 古麻呂) 등이 율령 선정을 담당하여 700년에 령이 거의 완성되었고, 남은 율의 조문 작성이 이루어져 다이호 원년(701년) 8월 3일, '''다이호 율령'''이 완성되었다.
후지와라노 후히토는 자기 장녀인 후지와라노 미야코(藤原宮子)를 몬무 덴노의 부인(夫人)으로 삼고, 후지와라노 미야코가 낳은 외아들, 즉 외손자인 오비토 황자(首皇子)를 즉위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몬무 덴노가 일찍 사망하자 쿠사카베 황자(草壁皇子)의 아내이자 몬무 덴노의 어머니였던 아헤(阿閇)를 겐메이 덴노로 즉위시켰고, 겐메이 덴노는 수도를 나라시로 천도하면서 나라 시대를 열게 된다. 쿠사카베 황자는 오카노미야 덴노(岡宮御宇天皇)로 추존되었다.
겐메이 덴노는 원로하다는 이유로 양위를 선언했고, 아직 오비토 황자가 어리기에 몬무 덴노의 친누나인 히타카(日高, 氷高)가 겐쇼 덴노로 즉위하게 된다.
후지와라노 후히토는 후지와라의 피를 이은 덴노를 즉위시키고, 이를 반복하는 것으로 과거 소가씨와 같은 방식의 영세를 누리고자 했다. 이를 위해 후히토는 오비토 황자에게 자기 딸 후지와라노 아스카베 히메를 주었다. 하지만 후히토는 오비토 황자가 즉위하는 걸 보기도 전에 사망했다.
이후 후지와라 씨족은 그의 네 아들이 이어받았으며, 이들은 아버지의 뜻을 이어 오비토 황자를 즉위시키고, 후지와라노 아스카베 히메를 역사상 최초의 비(非) 왕족 출신의 황후로 만들며, 정적들을 없애가면서 영세의 선례를 다졌다. 흔히들 헤이안 시대부터 섭관정치가 시작되었다고 알고 있지만, 후지와라씨의 권세는 이미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하지만 네 아들은 모두 일정 시기에 급사했고, 사람들은 이들의 뜻에 반대하다가 죽은 나가야 왕의 저주라고 믿었다.
그 때문인지 후지와라 씨족은 큰 절을 건설해 저주를 막는다는 의미로 대문 앞에 기둥을 세우거나 불상 광배에 대못을 박는 등의 조치를 취했으며,[3] 후지와라 씨족이 위험할 때마다 그곳에서 크게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아마 자기들이 권세를 잡는 과정에서 죽인 사람들의 원령이 두려워 원령들을 봉인하고 달래는 의미였을 것으로 보인다.
3. 가족관계
- 부인 : 소가노 쇼시 - 소가노 무라지코의 딸
- 장남 : 후지와라노 무치마로(藤原 武智麻呂) (680-737) - 남가(南家)의 중시조
- 손자 : 후지와라노 에미노 오시카츠(藤元惠美押勝)
- 차남 : 후지와라노 후사사키(藤原 房前) (681-737) - 북가(北家)의 중시조
- 3남 : 후지와라노 우마카이(藤原 字合) (694-737) - 식가(式家)의 중시조
- 장남 : 후지와라노 무치마로(藤原 武智麻呂) (680-737) - 남가(南家)의 중시조
- 부인: 가메노히메 - 가모노 에미시의 딸
- 장녀 : 후지와라노 미야코(藤原宮子) (?-754)
- 차녀 : 후지와라노 나가코 - 나가야 왕에게 출가. 훗날 나가야 왕의 무고로 인해 이복형제들에게 죽는다.
- 부인: 후지와라노 이오에노 이라쓰메 - 후히토의 이복누이. 덴무 천황의 후궁으로 후히토와 재혼
- 4남 : 후지와라노 마로(藤原 麻呂) (695-737) - 경가(京家)의 중시조
- 부인: 아가타노 이누카이노 미치요(県犬養 三千代) → 타치바나노 미치요(橘 三千代)[4]
- 의붓아들 : 카쓰라기 왕(葛城王) → 타치바나노 모로에(橘諸兄)
- 의붓아들 : 사이 왕(佐爲王) → 타치바나노 사이(橘佐爲)
- 3녀 : 후지와라노 아스카베 히메(藤原 安宿媛)(701-760)
- 생모 불명
4. 대중매체에서
100만인의 노부나가의 야망에서 특전무장으로 등장한다.
[1] 그의 형은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2] 애당초 나카토미노 카마타리는 후지와라 씨를 쓴 적이 없다.[3] 광배 대못은 메이지 덴노 시절에 메이지 덴노가 한 번 열어보라고 명령해서 연 것으로 알려진 사실이다. 원래 안을 여는 게 금지되어 있었고 스님들은 모두 저주받는다면서 꺼려 문을 여는 순간 다들 도망갔다고...[4] 비다츠 덴노의 후손인 미누 왕과의 사이에서 카쓰라기 왕과 사이 왕을 낳았다가 남편이 규슈로 내려가자 후히토에게 재가했다.[5] 훗날 현대에 와서 ZUN이 동방프로젝트 영야초를 만들면서 후지와라노 모코우라는 캐릭터를 창작했는데 정체를 알 수 없는 5녀가 703~704년에 태어났을 가능성이 높다. 동방영야초가 2004년에 발매된걸 감안하면 깔끔하게 1,300년 차이인지라 의미심장한걸 좋아하는 ZUN성격상 5녀를 후지와라노 모코우의 모티브나 또는 본인으로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모코우의 과거스토리를 보면 카구야와 연관되어 있기에 더더욱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