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투 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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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투 재판을 묘사한 그림
1. 개요
2. 상세
3. 금지령
4. 관련 문서


1. 개요


Trial by combat
중세 유럽 등지에서 증인이나 증거가 부족한 고소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서 두 당사자가 결투를 통하여 사건을 해결하는 재판의 일종.

2. 상세


원고와 피고, 혹은 그 대리인이 무기를 들고 싸워서 이기는 쪽이 무죄, 지는쪽이 유죄. 민법이나 사법 모두 사용할 수 있었으며, 게르만법에서 유래된 것이기 때문에 남유럽권에서는 잘 하지 않았다.
단순히 강한 자가 옳다는 야만적인 논리가 아니라 신께서 옳은 자에게 승리를 주실 것이라는 종교적인 믿음으로 하는 재판이다. 따라서 노약자나 불구, 여성이 건장한 성인 남성에게 지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므로 이런 경우에는 핸디캡을 받을 수 있었으며, 정 아니면 대신 싸워줄 사람을 고용할 수도 있었다. 이 대신 싸워주는 사람을 대전사라고 불렀으며, 영어로는 '''챔피언'''이라 한다. 대전사를 고용할 때에도 너무 건장한 전사가 힘으로 상대를 박살내는 것은 그다지 그림이 되지 않는다고 여겨졌기 때문인지, 신의 섭리를 더욱 잘 보이기 위해 일부러 노쇠한 챔피언을 선택하는 경우도 존재했다고 한다. 보통은 최상의 컨디션을 위해 몇주 정도의 시간을 뒀다 시행했는데, 무술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이 기간이 벼락치기로 검술 등을 배우거나 대전사를 물색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결투 대상은 성직자나 신분 차이가 극심할 때만을 제외한다면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결투 재판을 요청하는 게 가능했다. 따라서 여성과 여성의 결투, 혹은 여성과 남성의 결투 또한 가능했는데 여성과 남성의 경우 남자에게 핸디캡을 주기 위해 구덩이 안에 남자를 넣어서 상체만 드러내도록 하기도 했다. 서양검술에서 여기에 대해 다룬 기록이 있다. 특히 독일계열 검술에 많은데, 결투재판 자체가 게르만권에서 나온 관습이기 때문. 단 장원에 예속된 농노는 결투재판을 신청할 수 없었다. 때문에 가끔 결투에 휘말린 농노를 영주가 일시적으로 자유민으로 격상시켜 주는 경우도 있었다.

3. 금지령


말이 좋아 결투 재판이지, 본질적으론 부족정 시절의 게르만 풍습에서 내려온 "승인된 결투(sanctioned duel)"에 불과했으며, 여기에 기독교 색채를 입혀서 사적 재재를 정당화하는 일이었다. 당연히 교회가 좋게 볼리가 없었고, 교황 인노첸시오 3세[1]의 주도로 4차 1215년 라테란 공의회에서 이런류의 "하느님의 이름을 팔아 하는 재판"들이 적법하지 않다 선언되었으나, 이후에도 이런 문제는 딱히 해결되지 못하였다.
결국 1562년의 트리엔트 공의회에 와서야 이런 재판을 허용하거나 돕는 모든 행위, 즉 공증,방조하는 것은 [2] '''자동파문'''에 해당된다는 엄격한 규칙을 세웠으며, 영주가 자신의 사유지에서 결투를 허용/용인한 경우 주군(liege)이 해당 재산을 즉시 박탈하도록 하고[3], 심지어 결투를 하다 사망한 자의 교회 묘지 사용까지 금지되었다.[4]

<전반적인 개혁에 관한 교령> 제19장, '결투금지'

유혈이 낭자한 육신의 죽음을 부르는 혐오스러운 결투의 풍습은 악마의 선동에 의해 도입된 것으로서 그리스도교 세계에서는 완전히 금지되어야 한다. 자신의 영토에 그리스도인들이 결투를 할 수 있도록 일정 장소를 제공하는 황제, 왕들, 공작들, 영주들, 후작들, 백작들 그리고 세속의 모든 제후들은 그 자체로 즉시 파문을 받은 것이며, 교회로부터 부여받은 도시나 성 혹은 어느 장소에 결투를 용인했다면 그곳의 소유권과 재치권을 완전히 박탈당한다. 만일 그곳이 영주 소유의 재산이라면 즉시 직속 상관이 이를 취득한다. 결투자들과 소위 참관인이라 불리는 자들에게는 전 재산에 대한 김치산형과 영원한 오명과 함께 파문 제재가 가해질 것이다. 또한 거룩한 교회법에 의해 살인범으로 취급받아 처벌될 것이다. 만일 결투 중에 사망하면 교회 묘지 사용이 영원히 금지될 것이다. 결투에 관한 사안에 법적 혹은 실천적 조언을 한 자들이나 어떤 이를 결투하도록 설득한 자들, 그리고 관람한 자들은 파문과 영원한 저주를 면치 못할 것이다. 그 어떤 특전이나 악마적 관습도, 설령 그것이 그 기원을 알 수 없을 만큼 오래된 것이라 할지라도 이를 거스르지 못한다.

트리엔트 공의회 문헌 中

그렇게 유럽 대륙에서는 결투 재판이 사라져갔으나 영국은 종교개혁으로 가톨릭 측에서 하는 공의회의 권위에서 벗어난데다, 오래된 것을 굳이 폐지하지 않는 국민성이 있었기에 결투 재판에 대한 법조항이 19세기까지 남아 있었으며, 덕분에 1818년에 마지막 결투 재판이 벌어질 수 있었다. 한 여성을 강간 살해했다는 혐의로 기소된 용의자가 기소자인 피해자의 남동생에게 결투 재판을 요구한 것. 남동생은 결투를 포기했으며, 덕분에 용의자는 풀려났다. 막장스러운 결과에 깜짝 놀란 영국인들은 바로 결투재판을 폐지해 버렸다.

4. 관련 문서



[1] 가장 막강한 교황권을 가젔던 교황 중 하나였다.[2] 자동 파문대상에 포함되어 있는 참관인은 단순히 관람하는자가 아니라 해당 결투재판이 정의롭고 공정하게 치루어졌는지를 인증하는 공증인을 의미한다.[3] 즉, 합법적인 작위회수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세속 제후가 아닌 교회가 하사한 영지의 경우 즉시 교회에서 회수.[4] 이건 사실상 무덤을 만드는 것 조차 허용하지 않겠다는 것과 다름없다. 특히 결투한 자가 귀족이라면 가문의 치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