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원(농업)
1. 개요
장원(莊園), Manor(영어), manoir(프랑스어)
부호나 영주 등이 땅을 소유하는 형태이다. 경제단위를 일컫는 개념으로 쓰이기도 한다. 장원은 농민과 영주의 거주지와 경작지인 밭은 물론 경작하지 않는 들이나 삼림 등의 임야도 포함한다. 봉건제도의 기본적인 행정구역이기도 했으며 중세 유럽에서는 크고 작은 영주들이 영지를 이루는 것이 장원이었다.
쉽게 설명하면 단순히 귀족이 사는 저택에서 집사와 하녀, 하인들이 숙식을 하면서 귀족 소유의 앞마당 뒷마당을 경작하며 관리하는 모습을 그대로 도시 크기로 확장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영주가 직접 경영하는 직영지, 영주에게 조공을 바치는 탁영지, 그외 자지잘한 다른 땅들인 호수, 산림, 들판 등의 공유지가 있다. 직영지는 귀족의 직속 집사가 관리하는 작은 텃밭이라고 보면 되고, 탁영지는 하인들이 저택을 위해 농사를 짓는 곳, 공유지는 그 외 저택 뒷뜰 공원이나 저택에 딸린 뒷동산 정도로 빗대어 보면 딱이다. 물론 아무리 저택이 크더라도 모든 것을 자급자족은 못하겠지만, 장원은 자급자족의 행정단위라는 점 만큼은 헷갈리면 안된다.
동양에도 있었으며 수호전을 읽어보면 종종 등장한다. 책에 나오는 '이가장', '송가장' 등의 표현은 이씨네 장원, 송씨네 장원이라는 뜻. 중국에서는 한나라 이후부터 근대까지 존재했다. 장원이란 본디 관리나 귀족의 사유지를 의미하는 단어였다.
한국에서도 지배계층 대다수는 장원을 운영하였으며 일본에서도 8세기경부터 장원이 있었다. 중국에서 부유한 장원은 자신들의 부를 지키기 위해 구성원들이 무술을 익히고 무력을 보유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쉽게 말해 지방 호족(豪族) 세력. 일반적인 장원보다 세력이 크지만 세가(世家)도 여기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2. 카르타고
포에니 전쟁 이후 카르타고가 멸망하면서 카르타고에서 운영하고 있었던 라티푼디움 경영이 로마에 들어오게 된다.
3. 로마
본래 도시국가에서 시작한 로마는 대부분의 농민이 자영농민이었다. 그러나 이때의 농업은 지력의 보존이 어려워 한 농지에서 경작을 하고 나면 2~3년 동안 그 농지는 묵혀두어야 했다. 이 시기를 휴한기라고 한다. 때문에 자영농민은 농사만으로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웠다. 포에니 전쟁을 겪기 전까지 로마에서는 2~3년간의 휴한기에는 주로 전쟁을 통해 생계 문제를 해결하였다. 그리고 자연히 전쟁을 하기 위한 병력은 휴한기에 농사를 짓지 않던 자영농민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주로 휴한기에 전쟁으로 물자와 식량을 확보하여 생계를 유지하고, 농번기가 되기 전에 전쟁을 마치고 돌아와 농사를 짓는 식이었다. 문제는 이게가까운 곳에서 전쟁을 벌일 수 있던 도시국가때는 수월했지만, 포에니 전쟁 이후 장거리 원정이 많아지면서 점점 힘들어져 갔다. 원정이 잦아지고, 그 때문에 시민병이 휴한기보다 더 오랜 기간 동안 농지를 떠난 뒤 돌아오게 되니, 관리가 안 된 농지는 잡목과 잡초가 무성하여 농사를 지으려면 개간을 새로 해야 할 수준이었다.
카르타고 합병 후에는 수많은 정복전쟁으로 노예는 많아지고 땅은 넓어지자 다수의 노예를 이용하여 농장을 경영하는 ''' '라티푼디움(Latifundium)' ''' 이라는 장원제도가 카르타고로 부터 도입되었다. 전쟁이 계속될수록 장원주들의 부는 점점 늘어만 갔지만, 반대로 자영농민들은 잦은 전쟁으로 농지를 관리하지 못했으며 농사를 지어 봤자 장원에서 노예를 동원해 대규모로 생산한 곡물과 가격경쟁도 되지않아 생계가 점차 곤궁해져갔다. 결국 몰락한 자영농이 땅을 헐값에 장원에 넘기거나 심하면 그냥 바치고 고용인이 되어 장원의 세는 더욱 커져갔다. 그리하여 빈곤한 자영농민과 풍족한 장원영주로 로마사회가 양극화되어 큰 갈등거리가 되었다. 농지법 개혁을 중심으로한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이 대두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골자는 몰락한 무산자계급에게 다시 경작에 적합한 농지를 국유지 가운데서 골라 무상으로 나눠주자는 것. 문제는 원로원에 의석이 있는 대부분의 귀족이 라티푼디움을 형성하여 부를 쌓은 대농장주라서 입안에 차질을 빚었고[1] , 정작 농지법 실시전에도 법으로 땅의 소유를 125헥타르 이하로 제한하였지만 대리 신고등을 통하여 이를 공공연히 피해가거나 위반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로마시대 노예장원의 경제적 입지와 노예장원을 둔 농장주들의 사회적ㆍ정치적 입지는 매우 커 그라쿠스 형제는 개혁을 실시하기도 전에 둘 다 암살되었고, 마리우스는 군제개혁의 일환으로 퇴직장병에게 국유농토를 나누어주는 제도를 제기했다가 입안되기도 전에 기각되었다. 카이사르가 집권하면서 농지법을 통과시키지만, 그 역시 원로원 의원들에 의해 암살되었다.
그러다 노예농과 라티푼디움은 장기간 성행했고 농지법이 통과되었기 때문에 물론 자영농도 계속 존재하였지만, 대규모 곡창지대인 이집트와 아프리카가 로마로 병합되자 값싼 이집트/아프리카산 곡물의 유입에 이탈리아 본토의 자영농민과 라티푼디움은 경제적 타격을 받는다. 게다가 영토 확장도 한계에 다다르면서 로마 장원의 노동력인 노예의 공급도 힘들어졌다.
노예 대부분이 고된 노동에 대개 일찍 죽었고, 성비조차 남자가 훨씬 더 많았다. 게다가 노예제도는 인신을 구속하고 자유를 빼앗아 억압하는 것이기에 이에 대한 반발로 스파르타쿠스의 난처럼 노예반란 등이 종종 벌어졌다. 전쟁을 통하지 않는 이상 노예를 더 확보할 방법이 없었고, 그나마 있는 노예는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키거나 도망치거나 죽거나 하는 등의 이유로 감소추세에 다다라 숫자가 늘기는커녕 지속적인 감소로 숫자가 유지조차 되지 않았다.
중앙정부도 장원의 붕괴를 내심 바라고 있었다. 노예들이 해방되어 자유민이 증가한다면, 세수도 증가할뿐더러 군사적으로는 보병 모집에 도움이 되고 이는 국방력의 증진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로마 시대 노예장원이었던 라티푼디움은 노동력 수급의 문제로 크게 해체되거나 쇠퇴하게 되고 뒤이어 콜로나투스(콜로누스)제도가 들어선다.
4. 중세 유럽
4.1. 형성
서유럽에서는 강력한 통제력을 가진 서로마 제국의 붕괴 이후 각 마을 단위로 자기네 안전은 스스로 지켜야 하는 시대적 환경에 따라, 그리고 서로마 말기 부터 전쟁병력의 주력이 보병에서 기병으로 넘어가면서, 중앙정부가 각지에 기병을 비롯한 병력을 유지 및 관리할 책임과 권한을 땅과 함께 각지에 위탁 및 할당하는 봉건제도가 유행하였다. 동로마 제국 역시 대량의 중장기병을 유지하기 위해 병사들에게 땅을 나눠주고 그 땅에서 얻는 소득으로 스스로 무장하여 복무하도록 하는 일정 부분 봉건적 제도를 시행하였다.
봉건제도로 땅을 받은 영주들의 농토는 장원이 되었는데, 이러한 장원은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후 게르만족의 왕국이 세워지고 있던 7세기경의 오늘날의 프랑스 일대의 왕령과 교회령에서 점차 형성되었다고 추정된다. 9세기에는 이탈리아, 라인 강 유역, 스페인 동부해안 등지 그리고 노르만 정복 이후에는 영국에도 장원이 퍼졌다.
본래 게르만 사회와 서로마제국 멸망이후의 장원 역시 라티푼디움과 마찬가지로 노예에 의해 경작되었으나, 로마와 마찬가지로 노예의 숫자가 부족하여 노예만으로 경작을 맡길 수 없었으므로 인접한 농민에게 경작을 맡기게 되었다.
당시에도 농지의 지력을 보존할 수 있는 기술이 없어 농민이 자기 농지를 경작하고 나면, 2~3년간 밭을 묵혀두어야 해서 특별히 할 것이 없고 생계를 유지하기 곤란하였는데, 영주의 장원을 경작해 줄 경우 수확 후 장원에서 씨앗인 이삭을 주울 수 있었고, 농사용 쟁기를 끌 가축의 방목을 한다거나, 부역 등으로 다른 일을 도와줄 경우 식량을 지원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2] 장원에 크게 의존하였다. 이들을 농노라고 한다.
4.2. 구조와 형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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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의 규모는 대체적으로 수백에서 수천 에이커까지 이르렀다. 1에이커는 약 4000제곱미터이다. 참고로 한국과 비교하면 쌀을 1000석 수확하려면 대략 160에이커, 10000석을 수확하려면 1600에이커정도의 농지가 필요하며 경복궁의 규모가 100에이커, 여의도가 1000에이커 정도이다.
하나의 마을에 하나의 장원이 딸려 있었을거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실제로는 정반대였다. 행정구역(즉 마을의 경계)와 장원이 일치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봉건시대 초기 서유럽의 분할상속 전통, 화폐경제의 미비로 인해 영주들도 자신의 가신에게 봉토를 분배하는 등 여러 사정 때문에 한 마을에도 각기 다른 장원에 속한 농민들이 섞여 살았다. 반대로 상속이 꼬여서 토지가 이어지지 않은, 즉 일종의 월경지로써 한 영주가 소유하는 장원도 있었다. 심지어 한 농민이 A 장원의 예속민이면서 B 장원의 예속민이고, A장원과 B장원이 한 영주의 소유여서, 사실 상 한 영주의 한 농민의 예속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두 영주에게 예속된 것처럼 일을 해야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복잡함은 파고들면 끝이 없는데, 마을의 조세권은 A영주, 사법권은 B영주, 소유권은 C영주 등등으로 나뉘기도 했다.
수도원이 관리하는 대장원은 여러 개의 장원이 매우 넓은 지역에 걸쳐 20∼30개씩 산재되어 빌리카치온제에 의하여 통관되는 경우도 있었다.
촌락과 농토 외에도 장원에는 들과 숲으로 이루어진 임야(林野)도 포함되었다.
장원의 중심에는 장관 또는 영주관이 있어 영주 또는 관리인이 살았고, 하인·직인 등의 오두막집·창고·작업장 등이 있었다.
그리고 농민의 취락이 있었으며, 각각 자신의 조그만 채소밭과 창고 등을 가지고 있었다. 이외에도 교회가 자리잡고 있었고, 제분소 등의 시설도 갖추어져 있었다.
경작지는 여러 개의 가늘고 긴 지목으로 분할되어 각각 영주 직영지와 교회 영지, 농민 보유지로 나뉘었으며 다시 추경지, 춘경지, 휴한지로 나뉘어졌다. 농지는 경작을 하고 난 뒤 일정 기간 묵혀두어야 했기 때문에 나눈 땅을 경작 시기에 따라 3년을 주기로 순서대로 바꾸어 경작하는 삼포제가 시행되었다. 그리고 삼림, 목초지, 황무지 등은 공동으로 사용하는 공유지로 두어 흉작으로 생계가 나빠지면 삼림의 야생작물인 도토리 등을 채집하며 생계에 보태거나 농업용 가축을 방목하는 용도로 사용하곤 했다.
장원에 예속된 농민은 농노라 불리며 영주의 보호를 받는 대신 거주 이전의 자유는 제한되었다.
표준 규모의 토지를 점유, 경작하여 1주일 중 6일간을 노동으로 가족의 생계를 유지함과 아울러 6일 중 3일간을[3] 영주 직영지에서 부역을 행하여 영주 경제를 지탱하였다. 이는 영주의 재산이 직영지로부터의 수입이었으며, 영주나 국왕의 대장원에서는 직영지와 농민 보유지의 비율이 반반에 가까운 곳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방앗간, 제분소와 같은 시설은 전부 영주의 소유물이기에 돈을 내고 사용해야 했으며[4] 각종 세금이 부과되기도 했다.
또한 직영지를 거의 또는 전혀 가지지 않은 장원도 많았는데, 그곳에서는 곡물·양모·마·유산물·포도주·가축 등 온갖 종류의 현물 공조 이외에도, 성제일의 음식물, 결혼할 때 부과되는 결혼세, 가장이 사망하여 보유 명의인을 변경할 때 납부되는 사망세, 영주의 필요에 따라 임시로 부과되는 여러 가지의 세금을 납부해야 했다.
하지만 영주가 농노들을 마구잡이로 수탈할 수는 없었다. 관습에 따라 농노들은 영주의 땅에 양을 방목해 기를 수 있고, 추수 후 이삭을 주워갈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러한 관습은 영주조차 함부로 무시할 수 없었고, 영주로서도 농노는 자신에게 이득을 주는 존재였기 때문에, 지나친 착취로 장원을 마비시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했다. 사실 중세에는 체계적인 행정 자체가 부실했기 때문에 영주의 통치도 교회에 많은 부분을 의지하면서 동시에 지방 관습에 따르는 경우가 많았고, 영주의 활동은 주로 치안, 사법 분야에 집중되었다.
만일 영주의 착취가 심할 경우 장원에 예속된 농민들은 장원에서 이탈해 도시로 도망치거나 아니면 영주에게 대항하기도 했다.
4.3. 쇠퇴
유럽의 분할세습 전통에 따라 장원은 시간이 지날수록 소유관계가 복잡하고 불분명해지며 세분되었다. 초기에는 영주의 직영지가 광대했으며, 장원에 종속된 토지들은 연결되고 연속되었다. 하지만 농민 계층에서도 분할 상속이 일어났을 뿐더러 영주층도 분할 상속이 되며, 영주 휘하의 가신 기사들 역시 토지를 분할해야했다. 영주는 행정력 강화를 위해 가신들을 더 고용해야했는데 그 과정에서 봉토를 가신들에게 더 나눠줘야했고, 영주의 직영지는 갈수록 줄어들었다.
영주 직영지의 감소와 농민 계층의 수 증가는 당연히 영주권의 약화와 농노들의 부역의 경감을 의미했다. 샤를마뉴 시대에는 1주일에 절반 가까이를 영주 직영지에서 일해야했던 지역에서, 11세기에는 영주 직영지에서 1년에 몇일 정도 밖에 일하지 않을 정도로 줄어들었다. 이 과정에서 대다수의 장원들은 영주 직영지를 해체하고, 부역보다는 현물이나 현금 조세 위주의 수취 구조로 바뀌어서 소작에 가까운 형태로 변해갔다. 프랑스에서는 11세기 말에, 영국 ·독일에서는 13세기경부터 이러한 변화가 나타났다.
5. 중국
5.1. 주나라
중국에선 일찍부터인 주나라#s-2.1 때부터 장원이 있었는데, 이때의 장원은 왕과 왕족들 혹은 제후들에게 토지를 주고 그들에게 조공을 받는 봉건제도로 부터 비롯되었다. 왕족과 귀족의 수입원이자 경제적 근간은 농업과 토지였다. 주로 밀과 기장을 재배하였으며, 농지의 분배는 왕을 중심으로 봉토가 하사되고, 하사받은 봉토가 귀족의 자식에게 상속되었다. 원칙적으로는 모든 토지의 공식적인 주인은 왕이었으나, 왕족이나 귀족 간에 토지와 노동력을 사사로이 거래했고 이를 왕실의 감독관들에게 확인 받고 토지의 소유여부를 확정하여 청동기에 세기었다. 더불어 귀족 간에 땅을 거래하면 거기서 농사를 짓는 농민도 딸려갔다. 서양의 장원과 달리 이시기 중국의 장원에서 일하는 농민들이 자기 땅이 있었는지는 불분명하다.
5.2. 춘추 전국 ~ 진, 한나라 초기
서주(西周)시대 말 견융의 침략으로 기존의 수도가 함락되고, 수도를 이전하면서 동주(東周)시대가 시작되었다. 외침으로 왕실의 권위가 떨어지고, 귀족의 농지의 크기 또한 자녀들에게 균등하게 분배하다보니 귀족과 왕족의 소유 농지는 점점 규모가 작아졌다. 그리하여 왕/귀족을 대신하여 제후와 함께 새로운 왕국들이 할거했으며, 또 사회적으로는 철제 농기구가 보급되고 전쟁터에서 보병이 주력이되었다. 각국간의 경쟁이 과열되고, 동시에 각국은 경쟁에서 우위를 얻기 위해서 병력과 식량 확보에 주력했다.
이를 위해 각국은 농가의 인구 증가와 소득과 생산을 안정시킬 수 있는 그리고 세수를 확보하고 노역과 병역인원을 파악하기 쉬운 4~5명 소가족 단위의 농경을 장려하였고, 장원경영을 배제하였다. 상업과 유통도 농산품의 가격을 안정시키기 위해 부족하거나 많은 농작물을 재분배할 수 있는 방향으로 발전하였고, 나라에서도 이를 위해 힘썼다. 중국을 통일한 진(秦)은 전쟁의 공훈에 따라 병사와 백성들에게 농토를 할당하는 명전택(名田宅)제도를 실시해 땅을 나눠주었고 동시에 전국의 농업을 왕실의 농산물 및 생필품 재분배 유통망으로 통합하였으며, 이를 위해 화폐를 유통시켰으며, 농민에게 노역과 세금을 거두어 관리하였다. 직업이 없는 자에게는 땅을 주지 않고, 거주 이전의 자유도 제한되었으며, 이런 전제군주정 농업사회기조는 진나라가 망하고 한(漢)이 들어선 초반에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5.3. 전한 말기 ~ 수나라
전한(前漢) 문제(文帝) 때부터 북방의 국경지역에 병력과 식량을 조달하는 부담을 줄이고자 그 사이의 완충지역에 농민들을 이주시켜 농작을 하게하고 현물세를 면제시켜주었는데, 오히려 과도한 노역부담과 흉작이나 기아/파산으로 인해서 빚을 지고, 땅을 상인이나 호족에게 파는일이 잦아졌다. 반대로 이틈을 타 상인과 호족은 땅을 구해 장원을 형성하고 파산한 농민들을 받아들였다. 당시의 농업은 가축이 끄는 쟁기와 많은 인원을 투입하여 수확을 올리는 데 유리하게끔 발전하였는데, 이 때문에 호족의 장원에 농기구나 종자 등을 대여받거나, 식량을 공급받기 위해 의탁하는 자들이 많았다. 전한 때는 일찍부터 소작제도가 실시되어 호족이 농민에게 소작지를 내어주고, 수확량의 절반을 수취하는 대신 앞서 말한 대로 쟁기나, 소, 종자 등을 대여할 수 있었다. 농지를 직접 경작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게 호족은 소작내주는 것을 선호했다.
더불어 이미 전국시대부터 상인은 물류와 유통을 통해 부를 축적하였는데, 호족세력은 대규모 농지를 보유하면서 거둬들이는 농산품을 상인들 통해 팔면서 엄청난 부를 축적하였다. 무제(武帝) 때는 흉노와의 원정을 위해서 호족과 상인을 규제하고 잦은 노역과 세금을 백성들에게 부담시켰는데, 다시 경제적 부담을 느낀 농민들이 자신의 땅을 팔고 지방의 호족들에게 의탁하게 되면서 이런 경향이 더욱 심화되었고, 나라에서 농민에게 땅을 분배해주는 명전택제도는 사실상 사라지게 되었다.
도중에 한황실의 외척 왕망이 아예 신(新)나라를 새로 새우고 개혁제도로 장원으로 부를 축적한 호족들의 땅을 빼앗아 정전제의 이념에 따라 소농들에게 땅을 나눠주려고 하였으나, 오히려 호족들의 반발로 실패하고 처형되었다. 이후 한나라가 다시 세워지는 후한(後漢)때는 중앙재정의 영향력이 더욱 감소하고 호족과 장원이 더 성장하였다. 더욱이 중앙정부의 통제력과 치안이 나빠지자 장원을 지닌 호족들이 사병을 모집하고 방위시설을 세우기 시작하였고, 혼란한 와중에 신변을 보호받고 싶은 농민들이 호족과 장원에 의탁 및 의존하면서 더욱 기세를 부렸다. 황건적의 난 이후 후한황실이 사실상 와해되고, 조조(曺操)에 의해 둔전제도가 실시되어 잠시 진이나 한나라 때 처럼 국가적으로 농가와 농업을 직접 관리하였으나, 조조가 죽은 뒤 후계 군벌들이 둔전의 땅을 각각 나눠가짐에 따라 다시금 장원과 호족이 득세하였다. 이후 계속되는 전란으로 신변을 보호받고 싶은 농민이 지속적으로 장원에 몰려듬에 따라 오랫 동안 호족과 장원이 존속하게 된다.
다른지역과 비교해볼 때 상당히 이른 전한 때부터 소작과 장원이 공존하였는데, 자기 농지를 직접 관리하는 호족도 있었지만 대게는 그러하질 않아 농업용 종자와 가축, 쟁기 등을 대여해주는 조건으로 소작지를 내주고 수확량의 절반을 가져갔다. 특히 장강 이북의 경우 기장과 밀을 주식으로 삼았는데, 밀과 기장을 가공하기 위한 물레방아는 보통 호족이 소유하였기 때문에, 이를 임대하기 위해서라도 호족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중국은 주변보다 농업발전속도가 빨라 기원 후 4~5세기 북위 때부터 토지의 지력을 회복하고 1년에 3작을 하는 연작농법이 개발되고 개간을 위한 가축의 수도 소2마리에서 한마리로 줄었지만, 오히려 가족단위의 농경보다 장원관리를 위한 농경노동력을 경감시켜주는 효과가 더 컸다. 한나라 때에는 그나마 농민에게 노역과 세금을 부과하였던 것으로 보이지만, 혼란기가 가중되면서 농민들이 호족에게 의탁하여 노비나 노예로 전락하게 됨에 따라 조정의 인구조사에서도 누락되고, 과세대상에서도 제외되면서 호족의 경제력은 강한 가운데 중앙 재정은 피폐해져만 갔다.
이후 5호16국, 남북조시대를 지나도 이런 경향이 지속되는데, 북위에서는 문성문명황후, 효문제 등이 균전제를 실시하였으나, 도리어 노동력을 기준으로 토지를 부여하다 보니, 노비를 많이 보유한 대토지 소유자가 더 땅을 많이 받게되어 사실상 호족들의 대토지소유 즉 토지 겸병을 오히려 조정에서 공인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남조에서도 중앙재정을 강화하고자 하였으나, 호족의 토지겸병은 매우 심각하여 땅과 농민을 많이 거느린 자는 그 수가 헤아려 수천 명에 이르는 자도 등장하였다.
중국을 통일한 수제국에서는 부병제와 함께 균전제를 실시하고, 후대에 이를수록 장원의 농민이 호족으로부터 점차적으로 해방되고, 노비의 수도 급격히 줄었지만, 그래도 토지소유량의 양극화 즉 땅을 많이 가진자와 적게 가진자의 차이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당나라 때에는 유량농민에게 정착용 농토를 주는 양세법도 실시하고, 호족을 해체해서 중앙에서 지방으로 절도사를 파견하지만, 반대로 이들 절도사가 그지방에서 새로이 장원을 만들고 사실상 지방 호족 및 군벌화가 되면서 토지겸병 및 양극화는 전혀 해소되지 않았다.
5.4. 당나라 이후
당나라에서는 중앙에서 지방관리인 절도사들을 파견하였는데, 특히 무역로 거점에 있는 절도사 안녹산이 강력한 군벌이 되어 안사의 난 등의 내란이 벌어졌고, 외부에서는 토번의 힘이 강성해진 탓에, 전국토가 전쟁에 시달리며 수 많은 농민들이 농촌을 이탈하여 유랑민이 되었다. 780년 당에서는 유랑농민에게 토지를 주어 세금을 거두게 하는 양세법이 실시되지만 그 이후에도 100년간 전란은 계속되었다. 마침내 당말과 5대10국의 혼란기를 거쳐 송나라가 전국을 통일하며 중요한 변혁을 맞는다.
우선 남북조시대부터 꾸준히 이루어졌던 일이지만, 안사의 난 이전에는 중국 인구의 2/3가량이 장강이북인 황하유역 즉 중원이나 관중/관서지역에 거주하였던 것이, 안사의 난 이후로는 강남으로의 인구 이전이 부쩍 늘어났다.
황하 인근은 토지의 침식이 많아 수분이 오래 머물지 않고 밭농사에 적합하여, 면적당 생산량은 그리 높지않고 인구밀도나 부양력도 높지 않아 대토지 경작이나 광작경영에 적합하였다. 그러나 장강이남은 양자강 하부 삼각지를 비롯해서 방조제나 관개시설을 정비하여 물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었고, 토양 또한 벼농사에 적합하였다. 논과 논에서 재배하는 벼는 단위면적당 생산량이 높았고, 그만큼 적은 면적의 땅에 제초나 파종 등에서 손이 많이갔다. 자연히 장강 이북과 달리 보다 적은 면적의 땅에서 5~6명에서 농사를 짓는 것이 효율이 좋았고 또 생산성 면에서도 확연히 차이가 났다. 같은 면적에서 밭보다 5배 가량 생산성이 높았고, 벼를 재배하지 못하는 계절에 겨울밀이나 다른 작물을 심으면서 지력을 보존 및 회복시키는 이모작이 실시됨에 따라 굳이 지주나 호족에게 의존하지 않더라도 자기 논에서 지속적으로 생계유지가 가능했고, 북부와 달리 호족의 경제적 영향력이나 농민의 의존도도 떨어졌고, 당송변혁기에 장강이남으로의 인구 이동이 심화됨에 따라 호족의 경제적 위세가 떨어지고 가족단위로 농사를 짓는 소농의 비중이 늘어나게 된다.
중국에서 성인 남성이 경작 가능한 토지를 60~70무(畝)로 보았는데, 13세기 절강성의 온주(溫州)에서 실시된 조사에 의하면 농지 400무 이상을 소유한 집은 전체의 1.5 %에 불과하고 전체가구의 85%가 30~150무의 농지를 가지고 있는 등[5] 당송변혁기를 거쳐 강남으로의 인구이동과 개간 및 정착이 증가하면서 장원경영이 쇠퇴하고 소농경영이 자리잡게 되었다.
한편, 하북에서는 요, 금, 원 등이 차례로 오가면서 농촌이 사실상 파괴되었고 원명교체기의 혼란으로 명나라가 들어선 이후 1세기 동안에도 생산성을 확보하지 못해 오히려 인구가 줄어들다가, 명나라 중흥기와 이후 청나라를 거치면서 이지역도 장원보다 소토지 경작자들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렇다고 대토지 소유자가 없던 것은 아니지만 80무 이상의 토지를 소유한 자가 전체의 5%, 10%미만인데다 이들의 보유토지도 전체 농토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수준에 불과하였다.
6. 한국
고대 삼국시대부터, 신라, 고려를 지나기 까지 한국의 농업은 꾸준하게 가축을 이용한 대토지 경작이 주류를 이어왔고, 조선초기에서 조차 5인 내외의 농가도 농장에 의존적인 존재였다. 이후 조선 중기에는 16~17세기 양란(왜란, 호란)이후 인구가 줄어들고 개간이 되지 않은 황무지가 많아졌으나 재지양반(내지는 향촌양반)에 의해 간척지와 황무지의 개간이 주도되면서 다시금 장원인 농장이 생겨났다.[6] 양반의 농장은 주로 전호(佃戶)인 노비나 양인들에 의해 경작되었는데, 그중 노비가 양인 못지않게 인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노비는 크게 솔거노비와 외거노비로 나뉘는데, 오희문이 <쇄미록>에 노비를 묘사한 바에 의하면, 자기 집과 논밭을 따로 가지고 양반지주의 농장을 경작하여 주는 외거노비가 가장 일반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7]
17세기 중엽까지 농장은 크게 흥했으나, 연작인 이모작과 물을 대어 논을 만드는 수도작(水稻作)법이 도입됨에 따라 큰 변화를 맞는다. 이모작이 시행되면서 더이상 전호가 자기 밭을 묵혀둘 필요가 없어졌고, 수도작법에서는 모를 심거나 모주변의 잡초를 제초하는 것이 중요하였는데 농지가 작을 수록 더 유리하였다.[8] 이 때문에 영세경작이 유행하자, 농장경영은 점차 쇠퇴하였고 농장이 유지되더라도 농장에서 일하는 농민이 종자만 빼돌려서 자기 논밭에 심는등 양반농장 보다 자기 논밭에 힘을 쓰는 경우가 많아 농장의 생산량은 점차 감소하였다. 농장이 유행하던 시절에도 오희문이 쇄미록(16세기 말)에서 자기 노비가 이런 짓을 한다고 욕을 하는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이에 양반지주는 농장을 포기하고 전호에게 소작을 내주고 그 대가로 수확의 절반을 소작료를 받는 병작반수제(竝作半收制)를 실시하면서 장원은 사라지게된다.
7. 일본
일본에서는 서기 8세기 무렵인 헤이안 시대에 본격적으로 장원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본래 국가의 법인 율령으로 모든 토지를 천황 소유로 규정했기 때문에[9] 백성이 토지를 사유하는 것이 원칙적으로 금지되었으나, 귀족만은 예외로 두어[10] 토지를 소유할 수 있게 하였다. 정계에 있는 귀족들은 재산을 늘리고 문화생활을 누리기 위해 재산을 증식하려했고, 식량생산이 경제의 주력이던 시대였기 때문에 주로 농토를 이용하였다. 당시 귀족들의 토지는 불윤조(不輪租)라고 하여 세금을 면제받았다.
귀족들이 지속적으로 재산을 늘려나가, 농토의 대부분이 장원화 되었으나 개개 장원의 크기는 같은 시기 다른 나라에 비해서는 꽤 작았다. 이는 영주가 장원을 직접 관리하지 않고 각각의 농지에 지토(地頭)라는 중간관리를 두어 대리경영을 맡겼기 때문인데, 귀족들은 지토에게 관리를 맡기고 매년 일정한 수확물을 받았는데, 이를 연공(年貢)이라고 한다. 장원의 규모가 작은 탓에 다른 나라에 비해 농민에 대한 인신예속은 적은 편이었다. 무로마치(室町) 막부시대에 이르면 지토의 역할을 슈고(守護)가 계승하였다. 이들은 나중에 스스로 영주가 되면서 슈고다이묘(守護大名)가 된다.
전국시대가 되면서 각지에 퍼진 이들 다이묘들이 서로 싸움을 벌였는데, 무력을 경제적으로 뒷받침해줄 장원과 영지의 경영도 중시되었다. 또한, 장원은 농사를 지어주는 농민들에게 크게 의존하였고, 이들은 평소에 농사를 짓다가 전쟁이 일어나면 무기를 들고 나가 싸웠으므로, 장원경영은 경제활동인 동시에 병력을 양성하는 일이었다.
더불어 이 시대에는 토지의 지력이나 수확량 등이 좋지 않아 넓은 땅을 두고 많은 인력을 동원하여 농사를 짓는 광작(廣作)이 일반적이었고, 그 때문에 농촌의 가족은 20명~30명 정도의 대가족이 많았다. 가족은 묘슈(名主)라는 지도자격 농민을 두고, 그 밑에서 나고(名子), 게닌(下人) 등의 하층민을 포함하였다. 하층민인 나고나 게닌은 한국의 노비와 전호, 유럽의 농노, 중국의 전호 등과 달리 자기 농지를 가지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장원제는 15~16세기 기나이(畿內) 평원[11] 을 중심으로 큰 변화를 맞이한다. 세금인 연공을 수확물인 현물 대신 화폐(금전)로도 납부할 수 있게 하였는데, 이를 위해 농민이 스스로 농작물을 시장에다 내다 팔게 되는 일이 잦아지면서[12] , 시장을 이용해본 농민들이 더 높은 이윤을 얻기 위해 수확량을 더 늘리려 들었다.[13]
때마침 농지에 물을 대주는 수도작법이나 보리와 벼를 번갈아 심는 이모작법, 그리고 비료를 사용하여 지력을 높이는 시비법등이 도입되자, 적은 면적으로도 일가족이 생활할 만큼의 수확량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넓은 토지를 광작경영하는 것보다 보다 제초나 비료투입 등 보다 적은 면적에 많은 시간과 노동력을 투입하는게 생산성에 더 효과적이었고, 이미 시장을 통해 자기 땅을 경작하는 것이 자신의 이익과 직결됨을 알게 되면서 점차 장원이나 대가족에 의존하는 일이 줄어들었다. 이에 장원은 점진적으로 쇠퇴하였고, 종래 20~30명에 달하였던 대가족들은 4~5명의 소가족으로 분할되어 갔다. 그 과정에서 독자적인 경작지가 없던 나고와 게닌도 소작지를 얻기 시작하여 예속농민에서 소작농민으로서 지위가 상승하였다.
8. 관련 문서
[1] 무상으로 나눠주는 땅을 자기가 불하받아서 라티푼디움을 늘리고자 하는 이들이 많았다[2] 영주가 부역으로 농민들을 소집하여 일을 시킬 경우 이들의 밥과 잠자리를 책임져야 했다.[3] 사실 영주의 직영지에서 얼마나 부역하느냐는 시대와 지역, 상황에 따라 각기 달랐다. 본문에서 언급한 대로 이틀에 하루 꼴로 일해야 했던 경우도 있지만 1년 중 다 합쳐서 수주일만큼만 일해도 되는 경우도 있었다.[4] 농노가 영주 소유의 방앗간, 제분소를 거치지 않고 몰래 곡식을 탈곡하거나 제분하다가 걸리면 무거운 처벌을 받았다.[5] 리처드 폰 글란, <케임브리지 중국경제사>, 소와당, 2016, 404~405쪽[6] 미야지마 히로시, <양반>, 강, 1996[7] 노비의 성격에 관하여서는 노비참고[8] 그래서 중국으로 부터 들여오던 새로운 농기구도 소형농기구 위주였다.[9] "하늘 아래 땅 끝 바닷가에 이르기까지 왕의 땅이 아닌 곳이 없다"[10] 삼세일신법(三世一身法)과 간전영세사재법(墾田永世私財法)[11] 교토 근방의 야마시로, 야마토, 카와치, 이즈미, 셋츠 지방의 총칭하는 명칭이다.[12] 그전까지 시장은 귀족과 소수 상공업자들의 전유물이었다.[13] 물론 초기에는 기나이 지방에만 변화를 보이고, 다른 지역은 여전히 장원제가 보편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