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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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1월 경교장 앞에서 열린 신탁통치 반대 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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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경교장
京橋莊 / Gyeonggyojang
1. 개요
서울특별시 종로구 평동 강북삼성병원 부지 안에 위치해 있는 문화재. 서대문역 근처에 있다.
1945년 해방 후 백범 김구가 생전에 사용했던 개인 사저(舍邸)이자 김구가 암살당하여 사망했던 장소로 잘 알려진 곳이며 현재 삼성그룹 계열인 강북삼성병원 본관으로 사용되었다가 2009년 경교장 전체 복원화가 결정되어서 2013년 3월 2일 일반에 개방되었다. 이승만의 이화장(梨花莊), 김규식의 삼청장(三淸莊) 등과 함께 건국활동 3대 장소 중 하나이기도 하였는데 특히 이승만과 김구의 관계가 해방 이후 상호간 대립관계에 있게 되면서 이화장과 쌍벽을 이루기도 했다.
2001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29호로 지정되었다가, 2005년 사적 제465호로 승격 지정되었다.
2. 역사
일제강점기 때인 1938년 금광(金鑛)을 통해 수익을 얻었다는 친일파 기업인 최창학이 관리했던 곳이자 그의 개인 소유 자택으로 본래는 '죽첨장(竹添莊)' 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곳이었으며 당시 최창학의 성격상 친일(親日) 성향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친일파 소유주 건물로 등록되었던 곳이었다.
그러나 해방 후인 1945년 백범 김구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중국 상하이에서 귀국하게 되면서 분위기를 파악한 최창학이 잽싸게 헌납을 하게 되고 김구와 임정요인들의 거처지로 지정됨에 따라 김구의 개인 사저로 바뀌게 되었다. 이름도 왜색(倭色)적인 분위기가 짙은 죽첨장[1] 에서 지금의 이름으로 변경하였다. 경교(京橋)는 '경구교(京口橋)' 라는 서대문 근처에 있었던 다리의 줄임 명칭이다.
특히 김구가 이승만과 정부수립 문제로 관계가 악화되면서 이승만에 맞설 민족 진영의 집결 장소로 부상하게 되었고, 이승만의 사저인 이화장과 사실상 쌍벽을 이루었다. 그와 뜻을 같이하였던 김규식의 삼청장(三淸莊)과는 상호 간 우호적인 관계를 맺은 것으로 알려졌다.
1949년 6월 26일 김구가 경교장에 찾아 온 안두희의 총에 맞아 숨진 후 소유권이 다시 최창학에게로 돌아왔다가 11월부터 주한(駐韓) 중화민국 대사관[2] 이 이 곳을 인수함에 따라 당시 주한 타이완 대사가 소유주로 있었다가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중화민국 대사관이 철수 및 폐쇄함에 따라 당시 서울에 상륙했던 미군 특수부대 및 임시의료진이 벙커로 2달간 쓴 바 있다. 1956년에는 주한 월남대사가 소유주로 있는 월남대사관으로 변경되는 등 여러 번이나 소유주가 바뀌었다. 김구의 사후 경교장을 외국 대사관저로 신속히 교체한 것은 김구에 대한 추모, 애도 여론을 정치적 부담으로 여긴 당시 이승만 정부의 의도가 반영되었다는 평을 받는다.
1967년 삼성그룹이 이 곳을 인수해 고려병원(現 강북삼성병원) 본관을 뒷면에 붙여 신축하고 병원 현관으로 사용하면서 삼성의료재단이 공식 소유주로 있었다. 복원 전 1층 임시정부 국무회의실(귀빈응접실)은 원무과로, 2층 집무실은 야간 당직의사 휴게실로 쓰여 원형을 잃었으며 경교장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증거로는 표지석밖에 없었다. (복원 전후 사진)
이렇게 오랫동안 병원으로 쓰이다가 1990년대 민주화의 연장선상에서 김구의 복권, 재조명이 이루어지면서 경교장의 복원에 관한 주장들도 높아졌다. 1996년 2월 병원측이 경교장을 철거 및 이전하고 17층짜리 새 건물을 지을 계획안을 서울시청에 냈다가 여론의 반발이 일어 서울시는 이를 유보시켰다.
사망 47주기를 맞던 동년 6월 26일에는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준비위원회가 백범 묘소에서 경교장 복원을 담은 성명서를 내고 김영삼 대통령과 조순 서울시장에게 복원 및 문화재 지정을,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에게 경교장을 국가로 쾌척하자고 요청서를 냈다. 이에 정부는 삼성 측에 현장보존을 요청하라고 했으나 서울시는 내/외부가 너무 변형이 돼서 문화재 지정이 어렵다고 했고, 삼성 측도 의료발전계획 및 문화재 복원을 동시에 충족하는 쪽으로 갔으면 한다고도 했다.
이에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은 그해 10월부터 서울 등 주요 도시를 돌며 서명운동을 해왔고, 언론에서도 경교장 복원문제 등을 수차례 심층 보도했다. 1997년 3월 17일에는 청원서를 국회에 냈으며 7월에는 국회 문화체육공보위원회가 현장답사 결과 문화재로 지정해야 한다고 했으나 청원심사소위의 심사조차 받지 못한 채 계류 상태로 갔다. 1998년에는 경교장 복원 및 국가지정문화재 촉구를 위해 '백범맞이 굿'을 벌이며 백범 사망 49년만에 암살 현장에서 처음으로 추도식을 열었다.
1999년 6월 25일에 삼성 측이 백범기념관건립추진위원회와 협의하여 경교장을 용산 효창공원으로 옮기려고 했으나 다음날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이 관련 청원서가 국회에 계류 상태에 있다고 하여 이전불가 성명을 냈다. 2000년 3월에는 15대 국회의 회기가 종료되어 가자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측이 김대중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냈고, 이를 넘겨받은 문화재청이 5월 23일에 '근대문화유산의 보존과 활용'이란 세미나를 열고 서울시로 하여금 지정조사를 하도록 했다.
2001년 4월 6일 서울시에 의해 유형문화재로 지정됐고, 8월 15일엔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5.18민중항쟁구속자회, <월간 말> 등 재야단체들과 함께 문화재 지정 기념식을 열었다.[3] 다른 한편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측은 5월 28일 국가보훈처에 원형 복원을 요청했으나 얼마 안 가 보훈처 측은 그들의 소관이 아니라며 거절했고, 8월 16일 김대중 대통령에게 경교장을 국가지정문화재로 바꾸고 '임정기념관' 용도로 복원하자고 공문을 냈으나 10월에 서울시 측은 복원이 어렵다고 했다.
그해 11월에는 각 시민사회단체들이 '경교장복원범민족추진위원회'를 결성해 정부와 삼성그룹 등을 상대로 원형복원을 열성적으로 촉구했고, 2003년에 <비운의 역사현장 아! 경교장>이란 책을 내기도 했다. 같은 해엔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이 2001년 본관 신축 당시 직무유기와 문화재관리법 위반 등의 혐의로 현명관 삼성의료재단 이사장과 이명박 서울시장, 김충용 종로구청장 등을 고발했으나 무혐의 처리됐다.
위와 같은 우여곡절을 거쳐 2005년에 문화재청으로부터 사적으로 지정받아 강북삼성병원이 경교장 일부 중 당시 백범 김구가 생전에 사용했던 집무실이자 암살당했던 장소를 복원함에 따라 김구 기념실로 별도 운영했다가, 2009년에 경교장 전체 복원이 결정되었다. 2013년 3월 2일 복원이 완료되어 무료개방 및 관람으로 일반입장을 확정하였고, 현재 입장이 가능하다. 그리고 현재까지 소유주는 삼성그룹이며 서울특별시가 운영만 하고 있다.(경교장 복원일지)
3. 시설
- 경교장 상영관
- 응접실
- 귀빈식당 (이상 1층)
- 백범 집무실(백범 암살현장. 2층)[4]
- 경교장 전시관 (지하 1층. 김구의 유품과 피살 당시에 입었던 혈흔 묻은 옷, 데드마스크 등을 전시하고 있다)[5]
[1] 단순히 분위기의 문제가 아니라 죽첨(竹添)은 갑신정변 당시 일본 공사였던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즉 죽첨을 일본식으로 발음하면 다케조에가 된다.[2] 1992년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하면서 단교하여 현재 양국간 주(駐) 일반대표부로 대체.[3] 개최 두달 전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측은 서울시에 공동행사를 제안했지만, 시 측은 전례가 없다며 거부했다.[4] 집무실의 창문에는 안두희가 쏜 두발의 총에 의한 탄흔을 복원해 놓았다.[5] 또한 김구의 피살을 보도한 미국 <라이프> 지의 당시 기사도 전시되어 있는데, 해당 기사는 김구를 '암살자'(assassin)라고 표현했다. 당시 김구와 임시정부가 실행한 항일 의열투쟁을 테러로 보았던 구미 언론들의 관점을 반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