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두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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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육군 포병장교이자 백범 김구를 저격하여 살해한 인물.
2. 생애
1917년 평안북도 용천군에서 대지주 안병서(安秉瑞)의 아들로 태어났다. 1934년 신의주상업학교를 졸업하고 메이지대학에 다니면서 기생과 결혼하는 등 방탕한 생활을 했다. 해방 후 1947년에 서북청년회에 가입 후 극단적 반공주의자로 변했다. 육사 8기 졸업 후 남조선국방경비대 장교로 임관하여 포병사령부 소속 포병소위가 되었다. 포병사령관 장은산과 김지웅, 홍종만의 사주를 받고 1949년 6월 26일 서울특별시 경교장 서재에서 백범 김구를 권총으로 암살하였다(백범 김구 암살사건). 이에 무기징역을 받았으나 3개월도 안되어 15년으로 감형되고 6.25 전쟁이 발발하자 풀려나서 군인으로 복무한다. 그리고 1953년 살인을 저지른지 4년도 채 되지않아 완전히 복권된다.
그 이후 군 납품업을 하면서 큰 돈을 벌기도 했으나, 4.19 혁명 이후 민족정기회복을 부르짖는 청년들에게 쫓겨 잠적생활과 납치 등을 겪었다. 예를 들어 1965년 곽태영[1] 에게 칼을 맞았고, 1987년 권중희[2] 에게 '정의봉'을 맞아 갈비뼈와 머리가 깨졌으며 같은 해에 노송구에게 각목으로 얻어맞기도 했다. 1992년에는 권중희가 안두희를 납치해 가평으로 끌고갔고 여기서 안두희는 이승만의 명령을 받아 김구를 암살했다고 얘기한 적이 있으나 이후 권중희의 납치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이었다고 부인하였다. 그외에도 본인 단독 범행이라고 하기도 하고, 언론사 인터뷰에서는 김창룡의 명령을 받았다고 하기도 하고, 미국이 시킨 일이라고 하기도 하는 등 말을 자주 바꿨다. 1996년 10월 23일 박기서[3] 의 '정의봉'에 맞아 피살당했다. 이 당시 80세.
3. 백범과의 관계
백범과는 살인범으로 암약하기 불과 몇 달 전 한국독립당에 입당하여 백범과 인연을 맺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 인연이 결국은 살인자와 피살자로 인한 '''악연'''으로 거듭나게 되었을 줄은 몰랐던 상황.
안두희는 경교장에 들어가기 전에도 이미 여러 번 백범을 암살하려고 했다. 그런데 한 번은 백범의 집에 기르고 있는 개가 사납게 짖어대는 바람에 안두희가 미처 들어가지 못해 암살에 실패했다. 이 개를 조용히 시키기 위해서 안두희는 당시 비싼 음식인 쇠고기를 구워서 개한테 갖다줬는데, 이 개가 훈련이 매우 잘 되어 있어서 계속 안두희한테 짖어대서 결국 집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물러갔다. 이유는 안두희가 개를 무서워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공주에서 열린 강연회에 참석하려던 백범이 탄 차를 따라가 죽이려고 했는데, 그 강연회가 취소되는 바람에 두 번째 암살도 실패했다.
그리고 마침내 1949년 6월 26일 백범 선생을 알현하겠다고 하면서 백범이 기거하던 경교장을 방문하여, 서재에서 붓글씨를 쓰고 있는 백범을 향해 권총으로 4발을 발포하여, 백범을 그 자리에서 즉사시키고 경교장을 빠져 나갔다. 이 때 총성을 들은 비서진들이 서재로 급히 올라가 보니 백범이 피를 쏟으며 쓰러져 있었고, 백범은 결국 그 자리에서 사망하였다.
그 이전에는 서북청년회 극우회원으로 활동하여 공산주의자 및 반동자 색출에 나섰고 특무대장이었던 김창룡과 인연을 맺게 되면서 국방경비대 포병 장교가 되었고 이승만과도 만난 적이 있었다.
1949년 저격 당시 안두희의 나이는 33세, 백범은 74세로 안두희는 결국 젊은 시절에 '''백범이라는 일흔의 노인을 살해'''한 범죄자가 되었고 자신도 80살이 되어서야 당시 버스 기사였던 49세의 박기서에게 폭행당해 피살됐다.
4. 이승만과의 관계
당시 대통령이었던 이승만과는 육군 포병사령부 장교 신분이었기 때문에 국부 및 국군 최고통수권자와 육군 포병사령부 장교 관계로 있었고 국방장관 신성모, 참모총장 채병덕과 함께 경무대로 가서 이승만을 알현한 적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철저한 반공사상에 있어서 공통점을 갖고있기 때문에 서로 마음이 통하였으며 또한 이승만 정부 시절동안 많은 수익을 내면서 지내오며 살인범죄자임에도 불구하고 비호를 받아왔다는 점도 있다. 때문에 일부 세간에서는 백범 암살도 이승만이 은밀히 지시한 것이 아니냐는 음모론도 있다.
5. 백범 암살 그 이후
김구 암살의 배후는 이승만이나 미국 OSS 또는 김창룡이라는 설이 있다. 육군헌병사령관을 지낸 임시정부 출신 장흥 퇴역 육군 헌병대령은 신성모가 배후라고도 주장한다. 원래는 장흥 대령이 그를 수사하려고 했으나, 김구가 임시정부 출신이고 장흥도 임시정부 출신[4] 이라서 수사를 못하게 되었다.[5]
암살 이후 특무대에 연행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았다가 3달(!) 뒤 15년으로 감형되었고,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잔형 집행정지 처분[6] 을 받고 1950년 7월 10일 대한민국 육군 포병소위로 복직하고 9월 15일 중위로 진급하였다. 1951년 2월 15일 잔형 면제를 받고 12월 15일 대위로 진급, 그뒤 1953년 2월 15일에 완전 복권되었으며 1953년 12월 15일 육군 소령으로 예편하였다.[7] 1953년 완전 복권되었으나, 여러 차례 신변의 위협을 당했다. 출소 뒤 동향 친구 사단장 이기건 장군의 배려로 육군에 콩나물과 두부 납품을 시작했다. 1965년 곽태영에게 공격을 당해 언론에 안두희의 근황이 잠시 공개되었는데, 이 군납 사업으로 한 때 강원도 내 납세액 3위를 기록할만큼 잘 살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정의란 게 과연 있는 것이냐?"는 반응이 상당히 많았던 모양.[8] 그러나 1959년 일본에서 벌어진 니가타 일본 적십자 센터 폭파 미수 사건을 보면 이때에도 국군 소속의 특무 기관원[9] 으로 활동하고 있던 것으로 보아, 서류상으로는 전역했지만 실제로는 계속 육군 정보요원으로 활동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김구 선생 살해 진상조사위원회가 발족되자 잠적하였다가 1961년 해당 단체의 간사 김용희에게 붙잡혀 경찰에게 넘겨졌으나, '''공소시효 만료'''로 풀려났다. 이후 1965년 김구를 추종하던 곽태영에게 목을 찔린 다음에 가까스로 살아나서 이후 약 10년 동안 안영준이라는 가명으로 은거했다.[10] 곽태영은 구명운동 및 #과 안두희가 "나를 찌른 곽씨는 의분에서 한 일이니 무죄로 해 주고 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해달라"라고 해서 5년형만 선고받았다. 1987년 3월 민족 정기 구현회장 권중희에게 서울 마포구청 앞에서 발각되어 몽둥이를 맞으면서 다시 세인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1991년과 1993년에 권중희로부터 수차례에 걸친 폭행당했는데 본인은 권중희가 그를 쫓아와서 구타하면서 자백을 강요하는 일이 많았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권중희는 안두희를 납치 감금한 후 안두희가 이승만이 자신의 배후였다고 자백했다는 얘기를 하였으나 안두희는 이것이 당시 권중희의 고문에 의한 것이라고 부인하였다. 그 와중에 1992년 2월 28일에 김구 선생의 묘소를 참배하기도 하였다. 이 참배에서 그는 자신의 범행이 어디까지나 우발적인 단독 범행이었다고 거듭 강조하였다.
이후 1992년 4월 13일자 동아일보 지면을 통하여 백범 암살의 배후가 전 육군 소장 김창룡이었다고 증언하여 큰 화제가 되었고 4월 15일엔 김창룡뿐만 아니라 장택상 등 4인의 지시였다고 세부적 진술을 하였으나 증언의 세부 내용이 번복되거나 내용의 진위가 의심되는 부분들이 있어 논란이 되었다. 미국이라고 증언한 부분도 있었는데, 그뒤 미국 대사관과 주한 미군의 항의가 들어왔다.
결국은 안두희 자신이 증언을 할 때마다 계속 말이 바뀌니까 문제이다.
2001년에 국사편찬위원회가 공개한 바에 따르면, 김구 피살 3일 뒤인 1949년 6월 29일 미국 육군 제1군 사령부 정보장교인 조지 실리 소령은 '김구 : 암살에 관한 배후 정보'라는 비밀문서를 작성했다. #1 #2 #3 이 문서는 “안두희는 한국주재 미정보부대(CIC) 정보원으로, 암살 명령을 내리면 누구든 죽이겠다는 피의 맹세를 했다”면서 “김구는 공산주의자들과 결탁했으며, 한국에서 명망높은 정치인이었다”고 기록했다. 이를 근거로 미국이 백범 암살에 간접적으로 개입한 것일 수 있다는 주장 또한 있다.
1994년 1월 4일에 그는 국회 법사위 백범 김구 선생 시해 진상규명 소위원회에 증인으로 출석했지만, 끝내 암살의 배후를 밝히지 않았다. 이 당시 건강이 좋지 않아서 출석했을 때도 침대에 누워 있었다.#
6. 재판기록
(김구) “이놈아, 이 고약한 놈아. 나에게 반동하느냐. 나에게 반동함은 국가에 반동이요, 민족에 반역이다.”라고 흥분하시며 붓을 나에게 던졌다. 이 말을 들을 때 나는 최고도로 흥분하여 순간적으로 머리가 혼란되었다. 틀림없이 김구 선생은 국가·민족에 반동하는 거요, 국가의 장애물이다, 이렇게 생각하였고 그 전에도 무의식적으로 김구 선생은 국가의 장애물이니 없어져야 할 것이 아닌가 라고 느낀 일이 있었다. 내 손으로 치워야 한다. 선생의 목숨과 내 목숨이 없어져서 국가에 행복을 줄 것이다. 국법으로써 제지할 수 없는 국가의 장애물을 없애는 것, 그것은 전쟁이다. 따라서 김구 선생을 없애는 것은 전쟁이다.
이리하여 김구 선생이 장애물이라는 것을 느꼈고 이러한 행동은 군인다운 것이 아니냐 옳으냐 반문한 끝에 장애물을 제거하자, 죽이자고 결심하였다. 이것은 불과 2, 3초 사이의 반문이었다. 그러나 또 한편 무거우신 선생님이니 아직 본심은 말씀 안 하실 지 모른다고 생각하여 마지막까지 규명하자 하여 大聲으로 언쟁했으나 그 말은 잘 기억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이 순간 또다시 김구 선생은 그의 본심이건 아니건 국가의 장애물이라는 것을 또다시 느꼈다. 본심이건 아니건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완전 결심한 다음 나는 선생을 반박하였다.
1. 여수사건은 왜 야기했습니까?
2. 강·표 양 소령은 왜 월북시켰으며 그럼으로써 무슨 이익이 있었느냐?
3. 雪山은 왜 죽였느냐?
4. 8·15의 의거를 야기하라는 말을 수차 들었다.
5. 왜 공산도배들과 손을 붙잡으려는가?
라는 등 순서없이 말하고 왼손으로 裝彈한 다음 반신을 일으키고 눈을 감은 채 제1탄을 발사하였다. 그리고 눈을 떠보니 선생의 두 눈은 나를 쏘아보고 선생은 손을 들고 무어라 말했다. 나는 이에 위협을 느꼈다. 그리하여 또 눈을 감고 2탄을 쏘았으며 그후 몇 방을 쏘았는지 모른다. 그리하여 ‘아! 선생을 죽였구나’라고 느끼고 돌아섰다. 군복을 입은 자로 누구나 그 자리에 있었다면 이러했을 것이다.
그리고 돌아서서 서쪽 마루 위에서 西天을 바라보며 죽으려고 방아쇠(引金)를 머리에 댔다. 이 때는 내 맘은 호수같이 가라앉았을 때다. 그래 방아쇠를 당기려니까 어디선가 “죽어서는 안 된다”라고 하는 말이 들려왔다.
“1. 내가 죽으면 애국자 김구를 죽인 반역자가 될 것이요 2. 내가 말 못하고 죽으면 군복 때문에 국군에 큰 누를 끼칠 것이요 3. 지금 자살하기보다 죽은 셈치고 살면 더 큰 것을 국가에 공헌할 것이다”라는 생각이 있어 총을 떼고 첫발을 내려떼려 할 때 모자와 계급장을 그냥 붙이면 더 큰 반역이 아닐까 생각되어 계급장을 떼어 다다미 위에 던지고 고개를 숙이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잡담을 하고 있는 비서들에게 어깨를 왼손으로 치며 “이 총으로 선생을 살해하고 왔다”, “이것으로 죽였다”고 말하며 소파의 등대 넓은 데다 권총을 놓았다.
그러한 후 현관에선 경관이 총을 겨누기에 나는 손을 들었다. 그랬더니 선우비서가 2, 3개 뺨을 때린 것을 시초로 나는 마루 위에 쓰러져 정신을 잃고 깨어보니까 헌병대에 가 있었다.” 경관들은 눈물을 머금고 콧소리로 한 시간에 걸쳐 진술하고 일단 휴정한 다음 11시 15분부터 속개, 증인 홍종만·김학규, 한독당 선전부장 엄도해 등에 대한 증인 심문이 있었다.
金九암살사건 제3회 고등군법회의에서 安斗熙가 저격 경위를 진술
경향신문 1949년 08월 06일
7. 평가
안두희가 백의사의 일원이라는 설도 있었으나, 이성렬(李聖烈)이라는 사람의 말에 의하면 백의사 요원이 아니라고 한다. 후에 미군과 구소련의 자료들에서 밝혀지길, 김구가 백의사의 실질적인 단장이라고 결론났으니 언급할 가치도 없는 설.
평소 침술을 공부했던 권중희는 생명에 지장이 없게 둔부에 대침을 몇번 놔줬다. 이건 언론에 잘 실려있지 않은데, 권중희가 말하지 말라고 했다.
게다가 1981년 미국으로 이민가기 위해 가족들과 재산들을 보냈다. 그리고 자기도 가려고 했으나, 이는 비난여론과 총대를 맨 권중희로 인해 여권을 발급받지 못해 좌절되었다. 그래서 1996년에 박기서에 의해 처참한 최후를 맞이할 때에도 인천 신흥동의 허름한 아파트에서 아내랑 살고 있었다고 한다. 한편 박기서는 여전히 뜨거운 국민여론을 감안, 3년을 선고받았으나 1년 3개월만을 살고 출소했다. 그 뒤 친일파로 변절해 독립운동가 조롱 등 막말을 일삼던 김완섭을 때렸는데, 이에 김완섭은 이걸로 안두희 살해범 박기서가 아니라, 김완섭 테러범 박기서로 역사에 남을 것이라고 개드립을 쳤다. CIC 요원과 백의사 요원이라고도 하는데, 백의사 조직원 이성렬에 의하면 아니라고도 하니 진실은 알 수 없다. 하지만 안두희가 자기가 모르는 현장요원일 수는 있다며 가능성은 남겼다.“제가 안씨를 몇 차례 때린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기자들에게 그 사실은 쓰지 말아달라고 부탁하기도 했습니다. 그 까닭은 내가 안씨를 때렸다는 사실이 알려질까 봐 두려워서가 아니라 값싼 동정심에 진실이 훼손될까 우려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59년 북송선 폭파미수 사건때 현장 에이전트로 있었다고 한다(니가타 일본 적십자 센터 폭파 미수 사건). 53년에 제대해서 군납 두부, 콩나물 장사를 하던 사람이 어떻게 폭파 사건에 관여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안두희는 포병장교 출신이었는데 말이다. 그런데 백의사 암살특공대라는 CIC 문서도 있으니, 그냥 넘길 수는 없다.
사찰요람(1955)과 시역의 고민(1955)에서는 김학규의 부하였는데, 김구가 경무대에 포격을 해서 대통령을 암살하려고 했는데 거기에 대해 말다툼하고 화가 나서 총을 쐈다고 주장하고 있다. CIC 첩보를 했기 때문에, 김구의 조직이 아니라고도 하나 원래 김구와 미군정은 협력관계였다. 그래서 북한에서 테러리스트들이 내려올 때 미군정청에 신변보호를 강화해달라고 했다. 장덕수 암살 뒤에는 단절되지만...#
8. 처참한 말로
MBC 보도자료
사건당일 KBS 뉴스9 보도자료
1996년 10월 23일 오전 11시 30분경, 인천광역시 중구 신흥동 동영아파트 5층 자택[11] 에서 박기서에게 '''방망이로 두들겨 맞고''' 처참히 장살당했다. 당시 건강 상태가 안 좋아서 그런지 힘이 상당히 없어 저항도 못했다고 한다.[12] 당시 모습은 꽁꽁 묶인 채 두들겨 맞아 죽은 처참한 모습이었다고. 또한 그때 박기서가 사용한 몽둥이엔 '''정의봉(正義棒)'''이라는 글자가 쓰여저 있었는데, 덕택에 그 당시 교사들의 회초리에 이를 새기는 게 유행이 되기도 하였다.[13]
안두희를 때려 비명에 가게 한 박기서는 각계각층의 탄원으로 법정형이 최소 5년형인 살인죄를 감경받아 '''3년형을 선고'''받고 1998년 3월 13일 '''사면'''되어 최종적으로 '''1년 5개월 동안만 징역살이를 하고 풀려났다.''' 게다가 박기서의 변론을 자청하는 변호인들이 줄을 이었고 그 가족들을 돕겠다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판결을 내린 판사는 3년형이라는 매우 가벼운 형량의 판결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무죄'''를 선고하지 않았냐며 비난을 받기까지 했다. 안두희의 평판이 어느 정도로 나빴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다만 박기서의 사적제재 때문에 김구 암살의 배후가 영원히 묻혀 버렸다는 비판도 소수나마 존재한다. 물론 수십 년 동안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기 때문에 살해당하지 않았어도 죽을 때까지 입을 열 가능성은 매우 낮았을 것이다. 또한, 만약 박기서에게 타살당하지 않고 1990년대 말이나 2000년대까지 더 살아있었다 해도 이미 고령이었기에 곧 자연사했을 가능성도 다분한 편이었다.
허나 과거에 지은 죄값을 일생에 걸쳐 과중치 이상으로 치렀다고는 전혀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애초에 무기수였던 인물이 알 수 없는 이유로 차례로 감형되었고,[14] 이후에도 군에도 복귀하여 승진을 거듭, 장교로 예편할 수 있었고, 쫓기기 전까지는 잘 먹고 잘 살았다는 증언[15] 도 있다.[16] 후에 김구 암살의 진상을 밝히려는 이들의 추적을 받게 되자 가족들에게 재산을 맡겨 이민까지 보냈다. 다만 본인은 그의 정체를 알아본 이들의 방해로 나가지 못했다고 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민을 가지 않고 국내에서 버티며, 특별히 은거 생활을 하지 않은 것도 쉬이 이해하기 어렵다.[17] 그렇게 살았던 그이지만 자신이 했던 것을 그대로 돌려받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어찌 되었든 자업자득이다.
사망 이후 그의 빈소에는 조문객이 '''단 한 명도''' 찾아오지 않았으며, 심지어 친척은 물론 가족들조차 지키러 온 사람이 없었다. 옆 빈소에서 다른 고인의 장례를 챙기던 장의사가 아무도 안 나타난 채로 방치되는 빈소를 보다 못해 자신이 촛불을 켜주는 등 대신 돌보았을 정도. '이런 빈소는 처음 본다, 너무 딱하다'면서... 당시 기사 그의 빈소 풍경은 그가 살해한 뒤 국민장으로 장례가 치뤄졌던 김구 선생은 말할 것도 없고 일반적인 사람들의 장례식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썰렁하기만 했다. 영정조차 없이 이름 석자만 덩그러니 붙어있었다고 한다. 오죽하면 당시 뉴스에서도 대놓고 '암살범의 쓸쓸한 최후'라는 식으로 말했을 정도였다.
시신은 화장되어 한강에 뿌려졌다.
9. 기타
백범을 최초로 저격한 인물이 안두희인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조선혁명당 당원이었던 이운한이라는 인물도 있었다.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독립운동의 강화와 민족의 결집성을 위해 3당 합당을 논의하게 되었을 때 이에 불만을 표출하다 백범 김구를 비롯해 3당 요인들을 권총으로 난사했다. 이때 조선혁명당의 현익철은 현장에서 사망하고, 유동열은 중상, 이청천은 경상을 입었고 한국국민당 김구는 심장 부근에 총상을 입고 중태로 후송되었다.[18] 이운한은 장사 교외에서 체포되었으나 바로 감옥에서 탈출하였다. 당시 중국에서 밀정을 이용해 독립운동가에 대한 유괴 암살이 성행했는데 임시정부는 수사권이 없었고 중국현지정부는 무능부패해서 제대로 수사가 진행된 것이 별로 없다. 뉴라이트 추종자들이 이를 이용해 독립운동의 노선갈등이 동기로 오로지 백범만 피습당한 것으로 왜곡해서 설명하는 경우가 있다. 이운한이 독립운동의 노선갈등으로 이런 짓을 저질렀다면 그후에도 활동한 행적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것 없다. 아예 행적이 묘연하다. 밀정으로 독립운동가들을 염탐하고 분열을 조장하다 끝내는 한방 터뜨리고 날른 것이다. 이운한은 그 당시 백범이 기적적으로 회생을 하게되고 미수에 그치게 되어서 안두희에 비해서 묻혀지게 된 인물이 되었다.
백범의 입장에서 보면 일제의 지배를 받던 1938년에 이운한의 총격을 받았으니 하마터면 '''조국 해방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날 뻔 했던 아슬아슬한 순간'''을 넘겼다고도 할 수 있겠다. 그나마 저 때 백범이 회생을 했으니 그렇지 저 때 먼저 사망했다면 꿈에도 그리던 조국해방도 보지 못했거나 환국조차도 하지 못하고 이국 땅에서 죽었을지도 몰랐던 상황.
10. 대중매체에서
- 단독 작품으론 1998년에 극작가 오태석이 만든 연극 <천년의 수인>이 있는데, 배우 이호재가 연기했다.
- 1981년 MBC 드라마 <제1공화국>에선 배우 신국이 맡았다.
- 1989년작 MBC 특집드라마 <백범일지>에선 배우 정성모가 연기했다.
- 1994년 2월 27일자 KBS1 <다큐멘터리극장>에선 배우 장정국이 노년 시절 역을, 차기환이 청년 시절 역을 각각 맡았다.
- 1995년 광복 50주년 기념 KBS 대하드라마 <김구>에선 배우 정진각이 연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