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좌수영
1. 개요
조선 시대 수영 중에서 북쪽을 지도의 위로 놓을 때 경상도의 오른쪽(동쪽)에 존재하던 수영이다. 왼쪽이라는 건 한양에서 봤을 때 왼쪽에 있다는 뜻.
2. 상세
본부에 해당하던 곳은 현재의 부산광역시 수영구 수영동 일대. 다만 처음부터 여기 있던 것은 아니다. 경상좌수영은 동래현 부산포[1] 에 있었다가, 부산에 왕래하던 일본인들에 의해 군사와 장수의 정보가 샐 수 있다하여 1459년에 울산 개운포로 이전한다. 하지만 울산에 병영과 수영이 같이 있어 백성들의 부담이 심하다는 문제가 제기되자, 1544년 동래 남촌 해운포(부산 수영구 수영동)로 돌아온다. 그리고 잠깐 감만이포(감만1동)로 이동 후 다시 1652년에 해운포로 돌아온다. 당시에는 해운포가 해운대부터 수영강 하구 일대를 통틀어 일컫는 말이었다. 그리고 1895년의 군제개혁 때까지 243년간 수영동에서 이동하지 않고 남아있게 된다.[2]
수영구와 수영동, 수영강 등 수영이라는 지명의 유래가 바로 이 경상 좌수영이다. 임진왜란 이전 왜구의 침입이 주로 섬이 많은 경상우도와 전라도 쪽에서 벌어졌기에 비교적 준비가 잘되어있었던 경상, 전라 우수영에 비해 전력이 약했다. 결정적으로 수영강은 모래톱이 많은 지역인데, 이 때문에 모래가 늘 퇴적되어 선박들의 입출항에 굉장한 장애가 있었다. 이 때문에 항구기능을 유지하는 데 항상 애를 먹었고, 이 때문에 다른 수영에 비해 규모가 크게하기에는 애로사항이 많았다. 경국대전에는 수영에는 대맹선2척, 중맹선 7척, 소맹선 6척 등 총 17척의 군선이 배치되었고[3] 수군은 760명이 배치되었다고 나와있다. 물론 시대에 따라서 군사 배치양은 달라졌을 것이다.
3. 임진왜란 발발
임진왜란 개전 당시 수사는 박홍이었다. 개전 직전 경주, 울산, 포항, 영덕, 기장 등 경상좌도 각지에 흩어져 있던 진포 7개[4] 를 남동해안 주 방어선인 동래부, 부산진 인근으로 재배치하며 왜구 침입에 대비하였다. 전력이 가장 막강하여 특별한 조치를 취하기보단 경상 감사가 예하 진포를 일제 점검하는 정도로 끝낸 경상 우수영, 거북선이란 신형 전선 건조한 것을 제외하면 특별한 강화 요소가 없었던 전라 좌수영에 비해 전쟁 준비를 두드러지게 한 군영이었지만 왜군의 상륙 지점이 되어 침공을 가장 먼저, 온 몸으로 받은 탓에 부산진, 다대포 등 예하 진포들이 함락되고 수영이 위치한 부산이 왜군 점령하에 놓여 7년 내내 실질적인 해상 전력으로 작용하지 못하였다. 수정 실록에 기록된 수군의 육군 전환론에 관한 논쟁에서 항상 거론되는 수영. 예하 장수들이 왜군을 상대로 수전을 시도한 사례가 한 건도 없고 모두 자침 후 농성으로 대응하였기에 적어도 경상 좌수영은 지상군으로 전환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4. 임진왜란 이후
임진왜란 이후에 1692년에 이르러서는 좌수사 이만하가 수영을 크게 개축하면서, 성곽의 규모를 갖추게 된다. 이 개축으로 경상좌수영에는 객사(영파당), 동헌(관운당, 제승당, 운주헌 등), 비장청, 수성청, 길청 등 수십 채의 건축물이 들어서게 된다. 하지만 1895년 군제개혁 이후로 관아 건물 상당수가 사라져 버린다.
좌수영이 성으로 개축한 뒤에 4개문[5] 이 있었으나, 현재는 남문 하나만 남아있다. 이 남문로 문루는 사라지고, 홍예문만 남아있다. 그나마 문을 지키라고 세워둔 석상인 박견은 그대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