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원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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桂苑筆耕
통일신라 말엽의 문인 최치원이 20대 시절에 저술했던 한시 문집. 한국에서 남아있는 것 중 가장 오래된 개인 문집이다.
후대에도 고려, 조선시대까지 계속 널리 읽혔고 중국에서도 유명한 문집이었다고 한다.
중국에서 고변의 문객으로 있을 때 쓴 것이라 그런지 최치원 본인의 느낌과 감상을 적은 글은 거의 없고 대부분 고변을 위하여 대작(代作)한 것이다. 우리나라와도 별 관련이 없는 중국 얘기가 대부분이다. 다만 그런 덕분에 중국 사학자들에게 있어서는 당말 번진(藩鎭)들의 동향이나 남중국 변경에서의 정세를 살피고 아울러 당대 관련 기록들과 교차검증하는데 귀중한 자료다. 구당서나 신당서의 당말 기사에서의 미흡함을 계원필경을 통해 보충할 수 있다고 할 정도.[1]
황소의 난으로 유명한 황소를 꾸짖은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도 여기에 들어있다.
여담으로 최치원의 글은 몹시 어렵다. 계원필경도 마찬가지다. 최치원은 열두살에 당나라로 조기유학을 가서 한문실력이 엄청났다. 한문은 알다시피 익히기 어려운 만큼 특권 있는 지식인의 전유물이었다. 당나라 시대에도 백거이 같이 글을 쉽게 써야 한다는 사람도 있었지만, 일부를 제외하면 글을 어렵게 짓는 것이 인정받는 길이었다. 단적으로 당나라 시대 과거를 준비하는 지식인들은 글을 지을 때 <문부>를 꼭 참고했다. <문부>를 보면 글은 은미하고 오묘할수록 좋다는 식의 내용이 주를 이룬다. 이러한 지적 풍토 속에서 필력으로는 당연히 신라에서 선두를 달리던 그가 얼마나 많은 은유와 고사를 썼을지는 알 만하다.
또한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이 쓰여진 시기는 당나라 유학시기였지만 계원필경 자체는 이제 막 신라에 돌아온 최치원이 헌강왕에게 바치기 위해 선별한 시들이 묶인 시문집임을 감안해야 한다. 현대로 치면 일종의 이력서나 마찬가지인데, 최치원으로써는 당연히 자신의 문학적 재능과 학식을 드러낼 수 있는 어려운 시들과 여러 중국 문인들과의 교우관계가 드러나는 시 위주로 선별하여 실었을 것이다.
중국 당나라 유학 시절부터 글을 쓰기 시작해 빈공과 급제 후에도 계속 1만 수 이상의. 글을 쓰다가 신라 귀국 후 간추려 20권의 책으로 만들어 당시 신라 제49대 왕 헌강왕에게 바친 것이다. 당시에 계원필경뿐만 아니라 사시금체부(私試今體賦) 1권과 오언칠언금체시(五言七言今體詩) 1권, 잡시부(雜詩賦) 1권, 중산복궤집(中山覆簣集) 5권을 함께 바쳤다고 하지만 현재까지 남아있는 것은 계원필경뿐이다. 비석에 새긴 사산비명과 함께 현존하는 최치원의 문체를 그대로 느낄 수 있는 대표적 작품이다.
총 2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2007년 중국 중화서국에서 계원필경집교주(桂苑筆耕集校注)라는 제목으로 상,하 2권으로 된 교주본이 나왔다.# 현대 중국에서 출판됐음에도 간체자가 아닌 번체자로 돼 있다.
한국에서는 2009~2010년에 걸쳐 한국고전번역원에서 2권으로 된 번역서를 출간했다.# 이 번역본은 2013년 올재 클래식스 다섯 번째 시리즈로도 발간됐다.#
한국고전종합DB 계원필경집
1. 개요
桂苑筆耕
통일신라 말엽의 문인 최치원이 20대 시절에 저술했던 한시 문집. 한국에서 남아있는 것 중 가장 오래된 개인 문집이다.
후대에도 고려, 조선시대까지 계속 널리 읽혔고 중국에서도 유명한 문집이었다고 한다.
중국에서 고변의 문객으로 있을 때 쓴 것이라 그런지 최치원 본인의 느낌과 감상을 적은 글은 거의 없고 대부분 고변을 위하여 대작(代作)한 것이다. 우리나라와도 별 관련이 없는 중국 얘기가 대부분이다. 다만 그런 덕분에 중국 사학자들에게 있어서는 당말 번진(藩鎭)들의 동향이나 남중국 변경에서의 정세를 살피고 아울러 당대 관련 기록들과 교차검증하는데 귀중한 자료다. 구당서나 신당서의 당말 기사에서의 미흡함을 계원필경을 통해 보충할 수 있다고 할 정도.[1]
황소의 난으로 유명한 황소를 꾸짖은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도 여기에 들어있다.
여담으로 최치원의 글은 몹시 어렵다. 계원필경도 마찬가지다. 최치원은 열두살에 당나라로 조기유학을 가서 한문실력이 엄청났다. 한문은 알다시피 익히기 어려운 만큼 특권 있는 지식인의 전유물이었다. 당나라 시대에도 백거이 같이 글을 쉽게 써야 한다는 사람도 있었지만, 일부를 제외하면 글을 어렵게 짓는 것이 인정받는 길이었다. 단적으로 당나라 시대 과거를 준비하는 지식인들은 글을 지을 때 <문부>를 꼭 참고했다. <문부>를 보면 글은 은미하고 오묘할수록 좋다는 식의 내용이 주를 이룬다. 이러한 지적 풍토 속에서 필력으로는 당연히 신라에서 선두를 달리던 그가 얼마나 많은 은유와 고사를 썼을지는 알 만하다.
또한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이 쓰여진 시기는 당나라 유학시기였지만 계원필경 자체는 이제 막 신라에 돌아온 최치원이 헌강왕에게 바치기 위해 선별한 시들이 묶인 시문집임을 감안해야 한다. 현대로 치면 일종의 이력서나 마찬가지인데, 최치원으로써는 당연히 자신의 문학적 재능과 학식을 드러낼 수 있는 어려운 시들과 여러 중국 문인들과의 교우관계가 드러나는 시 위주로 선별하여 실었을 것이다.
2. 편찬 과정
중국 당나라 유학 시절부터 글을 쓰기 시작해 빈공과 급제 후에도 계속 1만 수 이상의. 글을 쓰다가 신라 귀국 후 간추려 20권의 책으로 만들어 당시 신라 제49대 왕 헌강왕에게 바친 것이다. 당시에 계원필경뿐만 아니라 사시금체부(私試今體賦) 1권과 오언칠언금체시(五言七言今體詩) 1권, 잡시부(雜詩賦) 1권, 중산복궤집(中山覆簣集) 5권을 함께 바쳤다고 하지만 현재까지 남아있는 것은 계원필경뿐이다. 비석에 새긴 사산비명과 함께 현존하는 최치원의 문체를 그대로 느낄 수 있는 대표적 작품이다.
3. 구성
총 2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 1~5권은 고변이 당 황제에게 올리는 표와 장을 최치원이 대필한 것을 실었다.
- 6~10권은 당나라 생활 당시 고관대작들에게 주었던 공문별지(公文別紙)다.
- 11권은 그의 작품으로 유명한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비롯해 여러 격문과 서(書)를 실었다.
- 12~13권은 위곡(委曲) 20수를 실었다.
- 14권은 거첩(擧牒) 50수를 실었다.
- 15권은 재사(齋詞) 15수를 실었는데 당대 도교 연구에 관한 귀한 자료다.
- 16권의 보안남록이도기는 당시 당나라의 지배를 받던 베트남 역사 연구에 필요한 사료이다.
- 17권은 고변을 장량 등에 비유해 칭송한 시 30수가 실려 있다.
- 20권은 고국 신라로 귀국하기 직전 작품으로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 당나라 생활의 추억, 안전한 뱃길 기도 등 자신의 정감을 30수의 시로 표현했다.
4. 출판
2007년 중국 중화서국에서 계원필경집교주(桂苑筆耕集校注)라는 제목으로 상,하 2권으로 된 교주본이 나왔다.# 현대 중국에서 출판됐음에도 간체자가 아닌 번체자로 돼 있다.
한국에서는 2009~2010년에 걸쳐 한국고전번역원에서 2권으로 된 번역서를 출간했다.# 이 번역본은 2013년 올재 클래식스 다섯 번째 시리즈로도 발간됐다.#
5. 링크
한국고전종합DB 계원필경집
[1] 출처: 심산 <중국의 최치원 연구>